논리도, 설득력도 없는 ‘반미’ 딱지 붙이기

[352호 미디어 솎아보기]

2020-02-19     김성원

 

북미 대화가 없어졌다. 남북관계도 막혔다. 예전 같았으면 김정은이 센 걸 한 방 터뜨려서 트럼프의 관심을 돌렸을 법도 하다. 그런데 그것도 쉽지 않다. 트럼프는 대선에 올인하고 있다. 자칫 큰 것 한 방이 더 큰 것 몇 방으로 북한에 되돌아갈 수도 있다. 트럼프가 마음만 먹으면 그럴듯한 명분으로 북한을 얼마든지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미 대화를 통해 한반도 평화를 바랐던 남한으로서는 이제 플랜B를 가동할 때가 됐다. 북미에 내줬던 길을 이제 남북으로 트고, 그 길이 대선 이후 북미 대화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사실, 그동안 국내외 민간 통일 단체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남북관계를 먼저 트고, 그 길 위에 북미 대화가 이어지게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었다. 문재인 정부가 너무 미국 눈치를 보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문 대통령도 TV 인터뷰나 신년 기자회견 등에서 이걸 인정한 바 있다. 또다시 2017년 이전의 한반도 위기 상황으로 시계를 돌려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관건은 남북 대화 추진과정에서 미국과의 협력을 어떻게 유지해 가는가이다.

이걸 염두에 두고 올해 문 대통령 신년기자회견, 그리고 연이어 나온 주한 미국대사의 발언과 그를 둘러싼 국내 언론들의 보도를 따라가 봤다.

“남북관계 발전” 발언에 딴지 건 주한 미국대사 
문재인 대통령은 1월 7일 신년사에서 “북미 대화의 교착 속에서 남북관계의 후퇴까지 염려되는 지금, 북미 대화의 성공을 위해 노력해 나가는 것과 함께 남북 협력을 더욱 증진시켜 나갈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할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다”고 밝혔다. 북미 대화 교착 국면 속에서 남북 협력을 더욱 증진시켜 나가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다. 

그로부터 1주일 후 문 대통령은 청와대 기자회견에서 “남북관계를 최대한 발전시켜 나간다면, 그 자체로도 좋은 일일 뿐 아니라 북미 대화에 좋은 효과 미치는, 선순환적인 관계를 맺게 될 것”이라면서 국제 제재 속에서도 할 수 있는 일, 즉 접경지역 협력, 개별관광, 도쿄올림픽 공동 입장, 단일팀 구성, 2032년 올림픽 남북공동 개최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와 관련해 “모멘텀을 되살리는 한편 남북 간에도 북미 대화만 쳐다볼 것이 아니라 남북 간에도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해야 한다”며 “그에 대해 한미 사이에 이견이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틀 후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외신 기자간담회에서 “북한과 관여하는 모든 계획은 ‘제재’ 조치를 야기할 수 있고, 따라서 미국과 긴밀히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재 촉발’이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는 한미 워킹그룹을 통해 남북 대화를 실행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이는 사실상 문대통령의 기자회견에 대한 경고 내지 반대 신호를 보낸 것으로 해석됐다.

그러자 여당 인사들이 해리스 대사를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의견 표명은 좋지만 우리가 대사가 한 말대로 따라 한다면 대사가 무슨 조선 총독인가”(송영길 의원), “내정간섭 같은 발언은 동맹 관계에도 도움이 안 된다”(설훈 최고위원). 반면, 야당 의원들은 문재인 정부와 여당에 화살을 날렸다. “국내에서 하고 싶은 거 다 하듯 국제사회에서도 눈치 보지 않고 똑같이 행동하면 왕따·외톨이가 된다”(자유한국당 윤상현 의원), “‘총선은 반일’이라던 민주당, 프레임이 무산되자 ‘반미’로 궤도 수정했나?”(새로운보수당 하태경 의원)

정치인은 그렇다 치더라도 언론은 이 사안을 어떻게 다뤘을까? 먼저 〈한국일보〉는 1월 16일 사설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전기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북미 대화 중단 상태가 길어질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 관계 개선을 통해 꺼져가는 북미 대화의 불씨를 되살려내고 후퇴 조짐마저 보이던 남북 협력에 온풍을 불어넣겠다는 정부의 의지는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문 대통령이 신년사와 기자회견에서 잇따라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밝힌 대목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그러면서 “다만 이 과정에서 대북 제재 문제를 두고 미국 등 우방은 물론 국제사회와 갈등할 여지가 없지 않다”며 “정부가 우선 염두에 두는 접경지 협력이나 스포츠 교류, 개별관광 등은 대북 제재와 무관해 보이지만 남북 간 철도·도로 연결, 개성공단 재개 등은 유엔 제재에 저촉될 수 있는 사업”이라고 적시했다. 그러면서 “남북 관계 개선은 힘있게 추진하되 미국과의 갈등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외교적 소통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꽉 막힌 남북·북미 관계의 돌파구를 남북 관계 개선으로 뚫되, 이 과정에서 미국과의 긴밀한 협조를 당부하고 있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주장이다.

해리스 비판을 ‘한미 갈등’으로 몰아간 〈중앙〉 
그런데 〈중앙일보〉는 “한미갈등 불사” “한미 파열음” 등의 표현을 써가며 문재인 정부 비판에 나섰다. 먼저 “문 대통령의 ‘北 개별관광’ 신년사…한미 파열음 커졌다” 제목의 1월 17일 자 기사에서 〈중앙〉은 “한국이 자국 주재 미국대사와의 마찰까지 감수하면서 남북협력 사업을 강행하려는 배경에는 올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 남북관계가 크게 후퇴할 것이라는 조바심이 작용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고 보도했다. 또한 익명의 정치학 교수의 말을 내세워 “청와대가 남북관계를 개선하지 못하면 집권 후반기 국정 동력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보고, 미국과 어느 정도 마찰은 감수하더라도 대북 접근에 속도를 내겠다는 생각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문 대통령의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조바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같은 ‘조바심’을 뒷받침하기 위해 ‘익명의 정치학 교수’를 내세웠다. 〈중앙〉은 같은 날 인터넷판에 기사 2건을 더 게재했다. “‘대단히 부적절’…민주당 통일부에 이어 청와대도 해리스 때렸다” 제목의 기사는 “일각에선 당·정·청이 해리스 대사 발언을 일제히 비판하고 나섬에 따라 현 정부가 남북 협력 독자 추진을 위해 미국과의 갈등도 불사하기로 가닥을 잡은 거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고 지적했다.

또 “문 대통령의 ‘北 개별관광’ 신년사…한미 파열음 커졌다” 기사는 “정부가 미·북 어디에서도 호응을 얻지 못한 개별관광 이슈를 갑자기 꺼내 혼란을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고 했다. 칼럼에서나 나올 법한 ‘갑자기’ ‘혼란’이란 단어를 스트레이트 기사에 써넣었다.

1월 17일 〈국민일보〉 사설 역시 미국과의 갈등을 우려하고 있다. 신문은 “미국과 엇박자를 감수하면서 협력 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위험성이 너무 크고 사상누각이라는 건 익히 경험한 바 있다”며 “북미 관계 개선의 물꼬를 트겠다는 목적은 이루지 못하고 한미 갈등만 증폭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경향〉과 〈한겨레〉는 같은 날 ‘주권’을 언급하며 해리스 대사의 언급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경향〉은 “(해리스 대사가 고압적 언행을) 자성하지 않고, 문제 발언을 되풀이하는 것은 한미동맹마저 해칠 우려가 있다”며 “통일부 관계자가 밝힌 대로 대북정책은 한국의 주권 행위라는 점을 해리스 대사는 명심하고 자중하기 바란다”고 지적했다.

〈한겨레〉는 “개별관광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미국에 설명하고 이해를 구할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미국이 이래라저래라할 사안은 아니다”라며 “미국 정부도 아니고 주재국 대사가 ‘제재’라는 민감한 단어까지 사용하며 이 문제에 끼어드는 것은 내정간섭이라는 비판을 자초하는 일이다. 해리스 대사는 월권적이고 오만한 발언에 대해 한국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했다.

요약하자면, 〈중앙〉과 〈국민〉이 문재인 정부의 북한 개별관광 추진과 해리스 대사의 제동을 ‘한미갈등’으로 보고 있는 반면, 〈경향〉과 〈한겨레〉는 미국보다는 해리스 대사의 오만함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1월 20일 〈중앙〉 사설은 한발 더 나아갔다. 아예 해리스 대사의 입장에 서서 문재인 정부 비판에 나선 것이다. 신문은 “이처럼 적잖은 문제로 해리스 대사가 ‘금강산 등 북한 개별관광을 하려면 한미 워킹그룹을 거쳐야 한다’고 밝힌 것은 전체 맥락으로 볼 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군인 출신인 그가 좀 더 세련된 외교적 화법으로 우리 감정을 덜 자극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정간섭’ ‘조선총독’ 운운하며 해리스 대사를 몰아세우는 건 동맹국 외교사절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反美’ 들고 나온 〈조선〉 
그러자 이제까지 잠잠하던 〈조선일보〉가 느닷없이 ‘반미’(反美)를 들고 나왔다. 1월 22일 ‘선우정 칼럼’은 조선을 약탈했던 조선총독과 달리 “미국은 일제로부터 한국을 구한 해방자다. 전쟁에서 한국을 구했다. 한국이 원해서 미군을 한국에 뒀다. 한국 발전의 최대 조력자”라고 미국을 치켜세우며 “문재인 정권이 들어섰을 때 사람들은 이 정권이 최종 국면에서 ‘반미’(反美)를 내세울 것이라고 걱정했다. 해리스 대사를 둘러싼 ‘조선총독’ 소동은 걱정이 현실로 변해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들이 총선에서 승리하면 현실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월 28일 〈조선〉의 ‘김대중 칼럼’ 역시 반미 문제를 짚고 있다. 칼럼은 “근자에 대북 제재를 우회하려는 문 정부의 노력이 이어지면서 범정부적인 반미 움직임이 조장되고 있다”며 “미국이 ‘문 정권의 북한 가는 길’을 막는다면 반미의 길이라도 가겠다는 의사 표시”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앞선 ‘선우정 칼럼’처럼 총선을 언급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오는 4월 15일 한국의 총선거에서 문재인 정권이 재신임받고 11월 미국 선거에서 트럼프가 재선되면 좀 더 근거리로 다가올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현 정치 상황의 연장선상에서 주한 미군 숫자는 점차 줄어들다가 끝내는 철수로 이어질 것이고 한미 동맹은 재조정될 것이다. 미군이 떠나고 미국이 나간 자리에서 한국 경제는 크게 흔들릴 것이고, 한국은 100년 전으로 돌아가 또다시 중·일·러의 각축장이 될 것이다. 한국을 거저먹으려는 북한이라는 존재가 가세하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암담할 뿐이다.”

‘선우정 칼럼’과 ‘김대중 칼럼’을 합하면 이런 논리가 성립된다. ①문재인 정부의 ‘반미’ 시동 → ②여당의 4·15총선 승리 → ③주한미군 감소 및 철수 → ④한미동맹 철회 → ⑤대한민국 파탄. 미국의 비정상적인 주한미군 주둔비 인상 요구와 맞물려 해리스 대사의 부적절한 언행에 대한 정부·여당의 비판을 ‘반미’라고 규정한 것도 이해가 안 되지만, 4·15총선에서 여당이 승리하면 주한미군 감소 및 철수로 이어질 거라는 주장은 황당하기까지 하다. 지금의 한미동맹 기조는 아마 문재인 정부가 두세 번 더 들어서더라도 떼어놓기는 힘들 것이다. 그것은 2022년으로 예정된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이 이뤄지더라도, 북미 협상이 잘 되어서 한반도에 평화가 오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김정일 정권 당시에도 북한은 주한미군을 ‘동북아 평화유지군’으로 (그 존재를) 인정한 바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제① 그리고 그 결과로 이어지는 ③, ④, ⑤는 무시해도 좋을 만큼 아무런 합리적 근거가 없다.   

“친북좌파와 반미 딱지는 한 세트”
문재인 정부 초대 주일대사를 역임한 이수훈 경남대 교수는 2월 6일 〈국제신문〉 칼럼에서 이렇게 짚고 있다. “친북좌파라는 딱지와 한 세트를 이루는 또 하나의 주장이 바로 반미주의자라는 것이다. 반미라는 딱지 역시 우리 사회에서 막강한 위력을 지녀왔다. 동북아의 변화된 지정학적 환경 속에서 더는 통할 것 같지 않은 ‘반미’나 ‘친중’ 같은 말이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념의 지체 현상이라고나 불러도 마땅할 일이라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북미 관계를 중시해왔던 문재인 정부는 이제 남북 관계에 집중하는 모양새다. 아직 북의 위협이 가시지 않았고 유엔 등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도 여전한 상황에서 문 정부의 ‘모드 전환’이 자칫 북한에 이용당하거나 한미 공조에 균열을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는 상식적인 문제 제기다. 남북 관계 회복 못지않게 이에 대한 우려 불식 역시 오롯이 문 정부의 책임이다. 

마찬가지로 해리스 대사의 과도해 보이는 발언을 정부와 여당이 비판하는 것은 주권 국가로서 당연한 것이다. 그걸 ‘반미’로 몰아가고 주한미군 철수, 한미동맹 파탄으로 몰아가는 것은 상식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 더군다나 그런 논리로 문 정부를 4·15총선에서 심판해야 한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 그럼에도 문제는 이런 주장이 우리 사회, 특히 교회에서 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성원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뉴미디어학(석사)을 공부했다. CCC 간사, 〈국민일보〉 기자, 통일코리아협동조합 상임이사로 일했다. 지금은 평화통일연대 사무총장으로 일하면서 〈유코리아뉴스〉 편집장을 맡고 있다. 통일은 장밋빛 환상이 아닌 분단의 아픔과 죄악을 회개하고 고치는 데서부터, 나 자신과 일상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 믿고 있다.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담은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를 썼고, 《독일 통일, 자유와 화합의 기적》을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