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답말고 바르게 행하기
[353호 커버스토리]
엉뚱한 질문, 어긋난 대답
글로벌 위험사회라는 말이 이제는 피부에 와 닿는다. 세계 어느 한 나라에서 전염병이 일어나, 지구촌 곳곳으로 급속도로 퍼져 나간다. 코로나19 사태가 바로 그런 예이다. 사람들은 이로 인해 예전에 보았던 영화 <컨테이젼>을 다시 찾아보기도 한다. 영화가 묘사하는 내용이 현실로 느껴져, 두려움과 걱정이 급속도로 퍼져가는 질병만큼이나 피부에 와 닿는다.
이럴 때 사람들은 질문을 던진다. “이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올바른 질문은 언제나 바람직하다. 그러나 엉뚱한 질문을 던지고, 어설프거나 어긋난 답을 내놓는 사람들 또한 어김없이 나타난다. 어떤 이는 코로나19를 가리켜 ‘이는 어떤 공산국가의 혹독한 기독교 핍박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라고 힘주어 설파하기도 하고, 다른 이는 ‘현대 사회의 성적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로 풀이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대답이 너무나 어설프게 느껴진다. 심지어 대구에 코로나19가 순식간에 퍼지던 시기에, 전국의 방역체계를 한순간에 혼란에 빠뜨린 신천지 집단의 교주가 추종자들에게 보낸 편지는 이상하고 괴기하기 이를 데가 없다.
요한복음 9장 1-7절 말씀에 비추어 보면, 엉뚱한 질문과 어설프거나 어긋난 답변이 왜 문제인지 알게 된다.
예수께서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온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뒤에,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 그에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갔다. (새번역)
나면서부터 보지 못하는 이를 제자들이 보고는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다.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제자들은 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일까?
엉뚱한 질문이 생겨나는 이유
고통의 현실 한가운데서 그 고통이 자신을 비껴갈 수 없는 인생 문제라는 점을 인식하고 나면, 누구라도 비껴가고 싶어 한다. 그래서 고통을 공식적인 범주 안에 집어넣고 언제나 조종할 수 있거나 피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싶어 한다. 질병이나 장애 같은 많은 고통이 엄습하는 것은 바로 죄 때문이라는 해석이 당대에 팽배해 있었던 이유이다. 그러면 고통은 죄인들의 몫이 되고, 율법을 충실히 따르는 자신들은 안전한 사람이 된다. 그래서 제자들도 그렇게 묻는다.
욥기에서도 이러한 어설픈 시도가 생동적으로 드러나 있다. 욥이 당한 고난과 어려움을 듣고 세 친구가 그를 찾아온다. 먼 곳에서 한 달음에 달려온다. 그러나 욥을 보는 순간, 그들은 얼어 버린다. 너무나 혹독한 일들이 욥에게 닥친 것을 본 것이다. 그들은 흙을 날려 자신들의 머리에 뿌리고, 옷을 찢고 그 자리에 앉아 몇 날을 함께 운다. 이보다 더한 사랑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욥기에서 묘사하는 친구들의 우정은 딱 거기까지이다.
이후로 친구들은 욥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욥, 네가 이렇게 된 것은 죄 때문이야!” 그러면서 엘리바스는 자신이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욥을 정죄하고, 빌닷은 자신의 풍부한 지식으로, 그리고 소발은 욥이 죄를 지어 혹독한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고 가장 고집스럽게 욥을 들쑤신다. 위로하기는커녕 괴롭힌다. 욥으로 하여금 삶의 의욕이 꺾이게 하고,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도록 일조하는 사람으로 드러난다. 욥은 자신의 무죄함을, 그들의 말이 틀렸음을 항변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집요하게 욥의 죄를 묻는다.
욥기의 마지막엔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자신의 창조주 되심과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섭리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신다. 그리고 욥의 세 친구가 한 말이 그릇되었노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틀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욥기의 내용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다가온다. 인간의 좁은 이해로 세상의 모든 고난을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요한복음 9장 1-7절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제자들의 질문이 꼭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질문과 유사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코로나19 사태가 일어난 이유를 사람들은 궁금해하고, 그래서 그 궁금해하는 이들에게 무엇인가 말해줌으로 명쾌하게 이 일을 이해시키려 한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질문은 엉뚱하고 대답은 어설프다.
이상하게 들리는 답변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바로 예수님이 답하시는 음성을 제대로 들을 때에야 가능하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3절)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이 틀렸다는 것을 아주 간략하면서도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그러한 질문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다음에 이어 나오는 주님의 답변 속에 명확히 드러난다. 자, 그런데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까지는 예수님의 답변이 우리를 몹시 당혹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이렇게 살아 온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란다’는 식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잘못 읽히기 시작하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게 된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이나 자비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충만하신 영광의 하나님께서 고작 또 한 번의 영광을 드러내시려 이 가련한 사람을 나면서부터 비참함 속에 두었단 말인가? 이같은 심각한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아주 믿음이 좋아서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아멘! 그래도 괜찮지 않나요. 하나님이 온 우주의 주인이신데 말이죠. 그분의 뜻대로 하실 수 있는 자유가 하나님께는 있으시니까요!” 그러면서 예레미야서의 ‘토기장이 비유’(렘 18:1-6,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18:4])와 신앙의 주요 주제인 예정론 같은 것을 죄 끌어다 붙이며 믿음이 있노라 대답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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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에서 잠시 멈추어 생각해보자. 정말 그런가? ‘토기장이 비유’가 나면서부터 고통받은 사람에 대한 변증적 본문으로 대치해도 좋은 그런 말씀인가? ‘예정론’이 기계적으로 가져다 붙일 수 있는 공식과 같은 것인가? 에베소서를 들어 설명하자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예정론은 그런 생각과 멀어도 한참 멀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엡 1:4-5a, 개역개정)
이를 원문으로 읽으면 예정은 기계적 작동 프로그램이 아니라 인격적인 사랑의 행위임을 알 수 있다. “그 기쁘신 뜻으로 사랑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사!” 즉, 모든 것이 하나님 사랑의 자발적 품으심이다!(엡 1:4-5) 바울은 이어지는 문맥 속에서 십자가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내시는 예수님의 구원 사건을 묘사함으로써 하나님의 예정과 구원이 기계적인 작동이 아니라, 자발적인 사랑의 행위였음을 강조한다.(엡 1:7-12) 그뿐 아니라 이어진 성령의 사역도 우리와 함께하심을 통해 영원한 돌보심과 지키심이라는 지극히 인격적인 사랑임을 강조한다.(엡 1:13-14)
이렇게 볼 때,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하나님이 가련한 이를 오랫동안 고통 속에 두셨다’라는 것은 올바른 예정론 이해와 너무 다르다. 사도 바울의 이해를 통해 알 수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예정은, 십자가 희생과 인격적 사랑으로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묘사이다!
예수님 말씀의 진정한 의미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오해는 번역의 차이에서 기인하는데, 이는 영어성경을 찾아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but this happened, NIV) “이것은”(but it was, NASB) “그가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he was born blind, NRSV) 등 이러한 번역 차이는 원문에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말들이 없다는 것이다. 구두점이 없었던 초기 사본을 통해 헬라어 원문을 조금 더 살펴보면, 3절과 4절을 연결해서 읽을 수 있다. 그러면 주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나타난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일을 위하여 낮인 동안에 우리가 일을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주님은 더 이상 원인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고통당하는 이를 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고통 속으로 뛰어 들어가 그를 치유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생각이자 자신이 온 이유임을 밝히실 뿐이다. 이러한 성경읽기는 문맥의 내용적으로도 이를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주님은 제자들을 당신의 일에 동참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4절, 개역개정) 제자들 또한 예수님의 사랑의 사역에 동참해야 함을 요청받는다.
인간의 고통에 뛰어드시는 주님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별 관심이 없으며, 그보다는 고통당하는 당사자의 삶에 깊이 관여하신다. 성경이 말하는 일관된 메시지는, 하나님은 인간의 절규에 무관심한 분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출애굽기 3장 7-8절에 아주 중요한 대목이 나온다. 먼저 7절을 보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출 3:7).
여기서 ‘부르짖음’이라는 단어는 ‘짜아카’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굉장히 의미심장한 단어로, 날카로운 칼과 채찍에 찔리고 상하여 내지르는 비명 같은 것이다. 애굽의 강포한 자들의 폭력에 시달려 힘없이 당해야만 하는 약자들의 신음 소리, 고통의 소리이다. 그리고 이 ‘짜아카’는 고통에 처한 이들이 자신들을 도와줄 이가 없음에 대해 부르짖는 절규의 외침이기도 하다. “여기 나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까?” 토하듯 내뱉는 소리인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외침에도 아무런 도움이 없을 때 ‘짜아카’는 더 깊은 의미를 지닌다. “그러면 하나님은요?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부르짖는, 하나님을 향한 절규의 외침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짜아카’라는 단어는 절망의 언어요, 폭력에 속절없이 당하는 영구한 고통 속에 갇혀 사는 이들의 외침이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7절에서 그들이 부르짖는 상황과 소리를 보고, 듣고, 아시는 하나님은 8절에서 당신의 활동을 열거하신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데려가려 하노라”(출 3:8). 하나님이 움직이신다. 하나님이 내려오신다, 이스라엘을 고통에서 건져내신다, 인도하신다,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가신다!
여기에 나타나는 동사들을 살펴보면 모두 사역동사이다. 연약하고 고통스러워 외치는 이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고, 인간의 역사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시며, 그들의 눈물을 씻기고자 하신다. 이는 곧 언약의 백성들을 잊은 적이 없다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말씀이기도 하다. ‘짜아카’의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신다.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을 단 한 번도 잊으신 적이 없다.
이제 메시지는 자명해졌다. 고통과 불행, 재난을 당한 이들 앞에서 던지는 엉뚱한 질문이나 어설픈 답변은 설 자리가 없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그 고통과 재난의 현장에 오셨고, 그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며 구원하기를 원하신다. 엉뚱한 질문을 던지지 말라. 어설픈 답변을 하지 말라. 가서 그들을 위로하고 도우라!
올바른 질문은 올바른 행동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의 동참을 요청하신 사실에 대해 조금만 더 숙고해보자. 교회는 이제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빛이어야 한다. 예수님이 하신 방식대로, 예수님의 정신으로 세상을 섬기며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일에 교회가 나서야 한다. 그래서 세상에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끼쳐야 한다. 교회란 ‘세상을 향해 하나님이 세우신 공적인 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교회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하신 약속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신다.(창 12:1)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복을 약속하신다. 이 약속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놀라운 특징이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케 하며 후손이 별과 같이 되리라고 하시지만 이것은 정작 먼 장래의 일이요 아브라함 당대에 일어날 일이 아니다. 또한 땅의 모든 민족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약속하시는데, 이 또한 엄밀히 말하자면 자신보다는 이웃을 윤택하게 함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이렇게 하겠노라 하신 약속은 오직 아브라함과 그의 번영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모든 하나님의 가족들(모든 족속들)을 포함할 때에만 그 목적에 다다른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이 세상을 복되게 하는 것, 세상을 복음으로 밝히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 빛과 소금이라고 정의하신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의 충만한 복은 반드시 이웃에게로 넘쳐흘러야 한다. 바로 이 과정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는 의미를 올곧게 이해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누구의 죄입니까?”라고 묻기보다, 예수님처럼 힘겨운 이들을 만지고 위로하고 치유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현재, 정부와 보건당국, 의료진들은 최선을 경주해 이 재난에 맞서고 있다. 정부는 정부대로, 의료계는 의료계대로 맡은 소임을 최선을 다해 경주하듯이 이제 지역교회와 성도들도 나름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교회는 교회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과 정신으로 세상을 섬기는 일이다. 교회는 사랑의 정신과 실천을 보여주어야 한다.
개인적 차원의 위생 관리와 감염 예방 수칙 준수 외에도, 마스크를 더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양보하는 작은 일부터, 온 교회가 기도하는 가운데 재난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웃과 분투하는 의료진 및 관계자들을 위해 작은 물품을 후원하는 일까지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가 주님의 정신과 세계관을 간직하고 이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공적 기관으로서 교회의 직무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세상의 경쟁과 자의적 가치관이 아닌 사랑과 섬김의 가치관을 구현하는 윤리적 삶을 보여주어야 한다. 재난과 위기의 순간이 우리 삶에 닥쳐왔을 때 엉뚱한 질문을 던지고 어설픈 답변을 내놓는 대신, 힘겨움을 겪는 이들을 위로하고 섬기기 위해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박창운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목회학(M.div)과 신약학(Th.M)을 공부했으며, 풀러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기독교 세계관으로 영화읽기”로 논문을 썼다(D.Min). 한국기독학생회(IVF) 전임간사와 아나톨레 간사, 서울 영락교회 청년부 목사로 사역했으며, 지금은 대구제일교회 위임목사로 섬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