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을 이기는 사랑과 연대의 유토피아

[353호 커버스토리]

2020-03-19     정금교

 

봄비가 이틀에 걸쳐 내리고 있다. 땅속 깊이 촉촉해지면 봄꽃과 풀들이 죄다 피어날 것 같다. 깨어날 것들을 보면서 ‘흡족하다’는 말이 떠올라서 눈매가 슬쩍 젖었다. 나를 포함한 대구 시민들은 꼭 필요한 일들만 하면서 총체적인 결핍을 견디고 있기 때문이다. 

대구는 코로나19가 갑자기 확산되던 2월 18일부터 수주째 사회적 거리두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가족도 친구도 만나지 않고 모임이나 회의도 없다. 모든 스케줄이 취소되어 메모가 하나도 없는 수첩이 신기하다. 장례가 났는데 가지도 못한다. 무엇보다 사망한 확진자 가족은 임종도 시신도 보지 못한다. 어쩌다 외출을 하고, 아는 이를 만나면 마스크를 쓴 채 눈으로 표정을 주고받고, 버스나 지하철은 최대한 손을 대지 않고 비틀거리며 균형을 잡는다. 

인터넷 구매도 쉽지 않다. 많이 찾는 먹거리는 자주 품절이 된다. 식당이며 가게들은 문을 닫았다. 감염 우려에 겁도 나지만 무엇보다 손님이 없다. 3주가 지나니 이제야 도로에 차들이 좀 다닌다. 그래도 예배는 아직 모이지 않는다. 목사인 나로서는 살면서 이보다 더 외로울 수는 없을 거라 생각하며 주보를 만들어 SNS에 올린다. 우리는 이렇게 그냥 있기로 했다. 나를 위해, 남을 위해.
 

이웃을 위해 움직이는 대구 시민의 일상 
외부에서 더러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대구가 ‘좀비 도시’처럼 되었을 거라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갑작스런 확산으로 허둥대느라 며칠이 지나고 나자 사회 취약계층에 대한 걱정이 SNS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노숙자, 쪽방 거주민, 노인, 장애인, 이주노동자, 난민, 아동 등 돌봄이 필요한 이들에 대한 걱정이었다. 식사가 필요했고 마스크와 방역이 시급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옷을 만들던 공방 대표는 재봉틀로 마스크를 만들어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었다. 제공받은 이들도 마스크를 만들어 다른 곳에 또 나눴다. 쪽방 거주자들을 위해 김밥 도시락을 만들자는 제안이 나온 지 이틀 만에 후원금이 아름으로 모였다. 재료비로 쓰일 금액은 1차로 계획한 3월 말까지 충분했지만 후원금은 계속 들어왔다. 

전국 각지에서 농산물이 택배로 도착했다. 곳곳에서 시민들이 김밥을 말고 도시락을 만들어 필요한 곳으로 배달했다. 시장 상인들이 그랬고, 친구끼리 모여 그랬다. 시민과 상인의 중간 역할을 한 1인 미디어, 후원 활동 센터로 자처한 교회, 의료진의 숙소를 위해 시내 게스트하우스를 통째 무료로 내놓은 운영자, 폐쇄된 병동 의료진들에게 신선한 커피를 매일 전달하는 카페 사장, 후원 모금과 물품 전달을 맡은 목사들, 손 소독제며 약품을 보낸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등등. 시민들은 개인위생을 철저히 하면서도 이웃을 위해 움직였다. 

재난의 도시 한가운데서 나는 자주 세월호 참사 때를 떠올렸다. 안산시가 이랬겠구나, 진도 군민이 이랬고, 전국의 시민들이 이렇게 움직였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재난을 당한 이들이 현장에서 어떻게 대처했는지는 경험한 자들은 안다. 함께 울고, 서로 손 내밀어 위로하며, 같이 대처하는 경험이다.

   
▲ 코로나19 사태 속 취약 계층에게 보낼 김밥을 만드는 대구 시민들. (사진: 정금교 목사 제공)

사랑과 연대의 ‘재난 유토피아’ 
“재난은 개인적 차원에서도 일어나며, 운이 좋은 사람들은 작은 규모의 재난 유토피아와 재난 사회를 경험할 수 있다. 나는 운이 좋았다.”

미국에서 참여적 지식인으로 소개되는 레베카 솔닛은 《이 폐허를 응시하라》(펜타그램)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세계적 재난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록했다. 그는 재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란 연대를 갈망하는 사회적 동물임을 말하고자 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작하면서 나 역시 느꼈던 바다. 접촉하지 않으려고 긴장하고 애쓸수록 우리는 얼마나 관계를 맺고 살고 있는지를 증명할 뿐이었다. 손을 잡고 어깨를 끌어안으며 포옹하고 얼굴을 마주한 채 웃고 떠들지 않았던가. 신나게 하이파이브를 하고, 손을 잡고 길을 걷고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싶었다. 모두가 보고 싶었다. 

재난은 우리 안에 있는 이타주의를 드러내 주었다. 두려움을 걷어내고 서로 팔꿈치를 들이대는 인사로 웃으며 만났고, 연대를 이루어냈다. 연대의 목적은 이웃사랑이었다. 돈과 물품을 보내고, 격려 메시지와 응원의 해시태그를 붙이고, 처음 만난 사람들과 어울려 노동을 했다. 재난 속에서 사랑과 우정으로 행동하고, 오직 현재의 삶에 집중하며, 비본질적인 것들은 작아지는 경험을 했다. 솔닛은 이를 ‘유토피아’라고 표현했다. 그 반대는 공권력이 시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상정하고 통제하는 상황이다. 대구에 사는 나도 운이 좋았다. 재난 가운데 형성되는 유토피아를 경험하고 있으니까. 

사회마다 공포의 상상은 다르다. 그것이 청결이든 감염이든 범죄든, 어디까지나 일어나지 않은 일에 관한 상상이다. 언론은 상상을 형성하고 사회화한다. 한국 언론은 유독 정치적 계산으로 공포를 조직한다. 코로나19의 공포로 일본인들은 화장지를 더 사 놓았고, 미국인들은 총알을 더 구입했다. 그리고 한국인은 마스크에 집착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이 와중에도 마스크를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 나를 가리는 도구로 활용했다. 더 나아가 마스크를 양보했다. 마스크 구매가 5부제로 통제되자 “앞으로 4주간(3.9~4.4) 제게 할당된 마스크를 구매하지 않겠습니다”는 공개 약속을 이어갔다. ‘나는 오케이, 당신 먼저’ 캠페인은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마스크가 먼저 공급될 수 있게 하자는 움직임이었다. 이 또한 재난 속에서 유토피아를 경험하는 순간 중 하나였다.
 

예배는 제사가 아닌 ‘기억’ 
공포를 조장하는 언론과 시민들이 만들어내는 유토피아 사이에서 놓칠 수 없었던 것은, 세월호 참사를 겪은 우리 사회가 재난에 대응하는 태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살펴보는 일이었다. 한 달 남짓 지나면 참사 6주기를 맞는다. 나는 대구에서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예배를 4년간 진행했다. 참사가 있었던 날은 예수의 수난주간 한가운데였다. 나는 부활절 메시지를 작성하지 못했다. 교인들에게도 솔직하게 말했다. 세월호 참사에서 나는 기존 교회의 언어로는 부활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다시 고백해야 했다. 

두 달을 허둥대다가 6월 셋째 주부터 주일 예배를 ‘세월호 참사를 잊지 못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예배’로 전환하고 사람들에게 알렸다. 예배 장소도 우리 교회에서 대구 시내 ‘바보주막’으로 옮겼다. 이는 누구든지 예배에 참여하고 싶어하는 이들을 향해 교회의 담을 허무는 일이었다. 4년 동안 많은 이들이 참여했다. 종교도 상관없었다. 전국 곳곳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긍휼로 연대한 이들의 예배였다. 

예배는 제사가 아니라 ‘기억’이다. 기독교는 2천 년을 이어 예수를 기억해왔다. 예수는 권력자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죽음은 은폐되었으며, 추모는 금지되었다. 이러한 예수를 기억하는 시공간이 예배였다. 예배에는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담았다. 안타깝게도 교회가 제도화되고 권력을 가지면서 예수의 죽음은 왜곡된 채 종교행위 안에 갇혀 버렸다. 하지만 예수 죽음의 증인과 목격자들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해왔으며, 예배는 이러한 증인들의 자리로 회복되어야 한다. 

세월호 예배 역시 시대의 아픔을 그대로 담았다. 어떤 날은 분노가 담겼고, 어떤 날은 길이 보였다. 연민을 배제하고 냉철하게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며 이것이 무슨 일인가 알고 싶어 했다. 하나님에게 항의하는 자리였는지도 모르겠다. ‘세월호에 탔던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왜 참사를 겪어야 했나’ 질문을 기억하고 전승해야 했다. 기억과 전승으로서의 예배는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의지의 다짐이었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내야 했다. 솔닛이 표현한 유토피아는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수많은 이들과의 연대에서 확인되었다. 그 다짐이 6년간 어떻게 축적되었는지, 어떻게 열매 맺었는지 대구에서 보고 싶었다. 분명한 것은 재난을 맞은 시민들은 또다시 유토피아를 경험했다는 점이다. 섬광처럼 번쩍이는 그 순간들을 포착한 이들은 감동했다.
 

당사자로서 재난을 경험하는 대구 
대구는 어지간한 재해도 죄다 피해가는 도시다. 태풍도 홍수도 대구에는 없다. 조선시대 기록에도 대구는 ‘재해가 없는 편안한 도시’라고 되어 있다고 한다. 대구는 세월호 참사를 먼 경기도 안산 사람들 일이라고 여겼다. 대구에서 보기에는 남쪽 땅끝 팽목에서 일어난 먼 이야기였다. 

이번에는 달랐다. 대구가 재난의 당사자였다. 당사자로서 재난을 경험하며 어리둥절하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낯설다. 전국과 전 세계가 대구를 주목하고 모든 방송에서 종일 대구 이야기를 듣는다. 전국에서 물품을 보내오고, 대구가 완악하게 대했던 전남·광주 사람들도 자꾸 선의를 베푼다. 확진 환자를 받아 치료하겠다 하고, 후원 물품을 잔뜩 실은 트럭을 몰고 광주 사람들이 왔다. ‘#힘내라대구’ 해시태그는 또 어떻게 받아들일까. 내가 볼 때 6년 전보다 시민들의 반응과 움직임은 빨랐다. 2-3일 정도 멈칫했을 뿐 곧바로 지원 활동을 시작했다. 누가 강요하지 않는데도 각 분야에서 자신들의 일을 했다. 그간 시민은 성장했다. 

그렇다면 제도와 법, 관공서와 공권력은 어떨까? 매뉴얼은 있었을까? 시민의 개별 선행을 체계화하고 배치할 준비는 되어 있나? 코로나19처럼 감염병 재난에 대해서는 기존 대응과 달라야 한다.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은 체계화 되어 있나? 민관 합동 대처 방안은? 
 

공동 약속이자 숙제, 안전 사회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며 희생된 아이들을 잊지 않겠다는 것은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내겠다는 약속이다. 꼭 해내야 하는 숙제로 우리 앞에 있다. 6년이 되도록 세월호 참사는 여전히 그대로다.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안전 사회 건설, 평화공원 등 모든 과제가 더디기만 하다. 하지만 시간은 우리 편이다. 천천히 가더라도 잊지 않는 시민이 있고,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려는 의지가 있으니 우리는 해낼 것이다. 참사로 아이를 잃은 부모님들과 형제와 생존자들이 부디 강건하시기를 바랄 뿐이다. 염치없는 부탁이다. 그래도 힘내서 계셔 주시길 바란다. 

지난 달 말, 제주에서 ‘제주세월호생존자와그들을지지하는모임’이 생겼다. 이들의 삶이 열악하다는 방증이다. 미안하고 부끄럽다. 김동수님도 잠수사 분들도 내내 기억은 하면서 실제 도움이 되지 못한 채 6주기를 맞이하니 그저 미안하다. 부디 같이 이겨내자고 다시 전하고 싶다. 

다시 솔닛의 말을 빌려 글을 마무리하겠다. “사람들은 재난이 닥쳤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그랬다. 대구 시민도 그랬다. 아무도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일을 했고 역할을 해냈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이들 또한, 그렇게 해낼 것이다. 

 

 


정금교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교단 1세대 여성 목사로 대구누가교회 담임목사이다.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목정평) 상임의장을 지냈으며, 지금은 대구NCC 교회와사회위원장, 노무현재단 대구경북지역위원회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교회와 사회 간 벽을 허물고 싶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