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주를 없애거나, 건강하거나

[354호 커버스토리]

2020-04-17     민대홍

이단은 어디서 나오는가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바이러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바이러스는 세균과는 달리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반드시 숙주가 있어야 한다. 숙주가 없으면 바이러스도 전파될 수 없을 터. 기독교와 이단의 관계를 이와 같이 보자면, 어떤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기독교형 이단이 배태되고 전파되는 숙주라고 할 수 있다.

고 탁명환 종교문제연구소 소장은 이단 발생의 원인을 일곱 가지로 정리한 바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성경 자체의 예언 내용에 이단 출현에 대한 언급이 있음
2. 기성 교회의 제도적인 부패와 타락
3. 세속화된 신학과 사상으로 인해 기존 신자들의 믿음이 표준에서 이탈하였기 때문
4. 극단적이고 폐쇄적인 성향을 가진 기성 교회의 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에 대한 반작용
5. 기성 교회가 교인들의 감정, 심리,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함
6. 사회적 위기가 발생할 때 이단은 자신들만이 ‘피난처’라는 희망을 안겨줌
7. 지금까지 아무도 풀지 못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계시를 통해 풀게 되었다고 설명함으로 기존 교회와 다르다는 이미지 제공

이단 발생 원인의 일곱 중 넷이 기존 교회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으며, 나머지 셋도 무관하지 않다. 복음주의 진영의 대표적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 역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이단은 초대교회 내부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즉 이단이란 진공상태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기독교 내부 신앙공동체 안에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교회도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했다. 그중 치명적인 것이 사회적 신뢰도 하락이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이 실시한 2020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한국교회에 대한 전반적인 신뢰도에서 약 64%가 부정적이었다. 목사의 말과 행동에 대한 부정적인 응답은 68%, 또한 기독교가 현재 사회문제 해결이나 사회통합에 기여하고 있느냐에 대한 물음에는 64.7%가 부정적으로 응답했다. 기독교가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에서는 목회자의 윤리적 회복이 가장 높게 나타나기도 했다.

이단은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하락, 지도자들의 윤리적인 문제, 폐쇄적이고 극단적인 교회의 어두운 면에 기생하며 세상에 나오고 자란다.

4세기 교회의 교부이자 신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 종교개혁가 칼뱅이나 루터는 교회를 ‘신자들의 어머니’로 규정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전수하고, 그 신앙이 잘 보전될 수 있도록 돌보는 역할을 하는 곳이 교회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단종파는 자신들의 공간과 영향력 확장의 대상을 기존 교회로 삼았다. 신천지는 ‘추수꾼’을 한국교회라는 ‘추수밭’으로 파송한다.

이때 교회는 어머니로서 기능해야 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흔들리며 떠나가는 신자들을 돌보는 일보다 다른 일을 우선시하자 신천지 추수꾼들의 활동은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 다른 일이란 바로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신(내부)은 배제하고 이단(외부)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교회가 이단을 대하는 방식

기독교계 이단은 일반적인 교회처럼 성경을 자신들의 경전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그 해석에서는 기존 교회들과는 다른 방향을 제시하고, 이에 맞서 교회는 교리적 역사적 정통성을 내세워 이를 ‘이단’으로 규정한다.

대표적으로, 이사야 56장 10-11절은 목사(또는 교회 지도자들)와 갈등하고 있는 기존 신자들에게 신천지가 제시하는 성경 구절이다.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사 56:10-11, 개역한글)

그들에게 신천지는 주류 기독교 지도자들이 바로 ‘소경’ ‘벙어리개’ ‘게으르고 탐욕으로 가득한 몰각한 목자’라는 알레고리(어떤 추상적 관념을 드러내기 위해 구체적인 사물에 비유하여 표현하는 방법)를 적용하여 해석해준다. 교회 안에서 갈등을 겪는 신자에게는 깨우침을 주는 해설인 셈이다. 이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과 문제의 주체가 자신이 아닌 ‘교회 지도자’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교회로서는 발끈할 만한 이러한 해석에 대해, 교회는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으로 대응한다. 그 해석의 주체를 ‘이단’으로 지목해버리는 것이다. 우리 교회 역사 속에서 이러한 일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때가 일제강점기다.

1920-1930년대는 일제가 한국을 지배하면서 소위 ‘문화통치’를 앞세운 때다. 교회는 이전보다 약화된 탄압을 받으며, 일제가 관리·감독 할 수 있는 ‘법인체’가 되어 양적 성장은 물론 물적 토대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법인화에 발목이 잡혀 체제에 종속된 형태로 생존하게 된 교회는 1930년대 후반부터 불어 닥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뿐 아니라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제국주의 야욕을 확장해가는 일제에 부역하는 집단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 시기 한국 사회 안에서는 ‘신비주의 운동’을 비롯한 여러 이단이 발흥했는데, 교회는 그들이 나오게 된 사회적 원인을 먼저 파악하기보다는 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일에만 열을 올렸다. 결국 본질적인 문제인 일제의 식민통치라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교회의 영적 무능을 자성하지 못하고, 새로운 종파 운동을 이단으로 규정, 사탄화함으로써 자신들의 권위를 세워나가는 대응방식을 취한 것이다. 이 모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

교회가 이단을 대하는 이러한 방식은 매우 뿌리 깊은 것이다. 원시 기독교 공동체, 그러니까 아직 기독교 교리가 체계화되지 않았을 때는 이단 사상의 도전과 기독교 공동체의 반응이 통합된 기독교 교리를 세우는 데 순기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체제화된 기독교는 그들에게 부여된 힘으로 이단적 사상과 운동을 악마화하고 짓밟기도 했는데, 이것이 매우 부정적인 결과로 나타나게 된 예가 중세의 마녀사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오늘날 이단종파 운동으로 인해 일어나는 사회적 병리 현상들을 결코 긍정할 수는 없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확산된 슈퍼 감염의 중심에 신천지가 있었음이 적절한 보기다. 그뿐 아니라 신자들은 삶을 갈아 넣는 착취를 당하고 교주와 소수의 지도자만 배를 불리는 등 이단종파 운동이 사회적으로 끼치는 해악은 그냥 둘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태를 대하는 주류 교회의 태도와 결정들은 중세 기독교, 가깝게는 일제강점기의 한국교회와 다를 바가 없다. 자기성찰이 빠진 ‘남(이단) 탓’은 교회를 한 걸음도 진보하게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이단종파 운동이 더욱 기승을 부리는 토대를 제공하게 된다.

이럴 때 교회 밖 일반 사회의 시각은 주류 교단 교회와 이단종파의 공집합보다 교집합에 더 주목한다. 교주가 죽어 자식에게 대물림된 이단종파와, 종교 권력과 부를 대물림하는 한국의 세습교회를 세상이 어떻게 바라볼까? 비윤리적인 교회 지도자들과 자신을 신격화하는 이단종파 교주를 각각 어떻게 평가할까? 신천지 때문에 코로나가 급격하게 확산되었다며 열을 올리면서도, 정작 공공의 건강을 위해 온라인 예배 전환 및 사회적 거리두기에 협조해 달라는 시민사회와 정부의 요청에 예배는 결코 중단된 적이 없다면서 ‘종교탄압’ 운운하는 교회를 세상은 과연 신천지와 다르게 볼까? 기존 교회가 이단종파를 교리상으로 비판하는 동안 우리 사회는 자가당착에 빠진 교회를 냉소적으로 바라볼 뿐이다.

한편, 교회가 간과하고 있는,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사실은, 교회가 이단으로 타자화하는 사람들이 본래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이었다는 점이다.

마땅히 했어야 할 일들

최근 한국 사회의 주목을 받게 된 신천지는 신도 수를 2020년 2월 기준으로 239,335명이라고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월간 〈현대종교〉는 신천지뿐 아니라 한국 주요 기독교 교단들이 총회를 통해 이단 또는 이단성이 있다고 결의한 종파 110여 개를 공지한 바 있는데, 신도들의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최근 기독교 인구는 감소세인데, 이단종파는 계속 증가하고 있으니 교회는 자기 살을 깎는 중이다. 더불어 우리 주위의 누구라도 교회에 염증을, 이단종파에 대해서는 매력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는 위험신호다.

한국교회와 이단의 관계에 숙주와 바이러스라는 개념을 대입해보면, 이단이 생기지 않으려면 교회가 면역이 강한 건강한 몸이 되거나 아니면 교회가 없어져야 한다. 이단이 생길까 봐 교회를 없앨 수는 없는 일이니, 면역력이 강력한 건강한 몸을 이루어야 함은 물론이다.

여기서 교회의 건강성은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때 담보된다. 우리 역사 속에서 교회가 감당했던 순기능들은 사회 구성원들이 교회로 초청되고, 교회는 그들에게 자유와 해방의 통로가 되어줄 때 일어났다. 배제와 소외, 타자화로 무장한 교회는 새로운 사람, 떠났던 사람이 다시 찾을 수 없는 곳이다. 교회가 이래서야 되겠는가. 지금은 이단종파의 민낯을 보고 염증을 느낀 우리의 옛 형제자매들이 돌아올 자리를 만들어야 할 때다.

종교학자 방영미는 교회에서 소외당하던 계층이 왜 신천지에 빠져들게 되는지 유의미한 이야기를 전한다.

적어도 신천지 안에서는 재산과 학력, 세상 지위에 상관없이 누구나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래서 전업주부로 남편 눈치만 보던 아줌마가 신천지 안에서는 교리 교사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자식이 전부인 줄 알았던 부부가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소명 아래 함께 성경공부하고 전도하기도 한다. 남 밑에서 눈치만 보던 사회적 약자들이 전도라는 사명 아래 당당해지고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런 놀라운 변화를 겪어본 사람에게 신천지는 은인이고 구세주다. 살면서 처음으로 희망과 긍지를 갖게 되는 경험, 이건 참 놀랍고도 소중한 일이다.

이것은 원래 교회가 했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 역사 속에서 오래도록 교회가 해온 일이기도 하다. 유교적 신분 질서와 체제가 지배하던 구한말 조선 사회에 기독교가 들어오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만드셨다는 믿음으로 당시 사회에 뿌리내리고 싹을 틔운 기독교는 가장 천하게 여겨졌던 백정을 장로와 목사로, 사회의 주변부 끝자리에 있었던 여성들을 교육의 주체로 세웠다. 한양 중심의 세상 속에서 차별당하던 서북지방 청년들이 기독교를 수용하고 권서, 매서인으로 활동하며 복음 전도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 약자들이 들어오면 든든한 자기 자리가 생기고 삶의 주체, 신앙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교회. 한국형 초대교회는 그렇게 시작되었었다.

오늘날 교회도 복음이 재산, 학력 따위와는 전혀 관계가 없음을 선포해야 하며, 사회의 가장 소외된 계층이 제사장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해야 한다. 한 번 나갔던 사람들, 그러니까 이단에 빠져 삶을 잃고 신앙적 위기에 있는 사람들을 수용하고 그들이 딛고 다시 설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단종파에 발 들였던 우리의 자매와 형제에게 필요한 것은 교리 교정만이 아니다. 소위 개종 교육이라는 것을 통해 신앙을 회복시키려 해봐야 남는 것은 상처와 죄책감이다. 사랑으로 감싸 안음이 먼저, 교정은 나중이다.

이를 위해 교회의 집단적 생각 전환, 즉 회개(μετνοια, 메타노이아)가 요구된다. 우리의 자매와 형제들이 이단에 빠진 것은 교회의 어두운 면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자기성찰이 회개다. 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제함으로 길 잃은 양이 돌아올 집이 되어주지 못했던 역사를 돌이키는 것이 오늘날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이렇게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차곡차곡 수행하는 교회를 통해 서두에 언급했던 한국교회의 떨어진 신뢰도 회복될 것이며, 이기적이고 미신적이며 사회적으로 병리현상을 일으키는 이단종파의 발현을 저지하는 강한 면역력을 갖게 될 것이다.

민대홍
서로교회 담임목사로 파주 출판단지에서 문서사역과 목회를 하고 있으며, 숭실대학교에서 ‘한국기독교 역사관’을 주제로 연구(박사과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