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중독된 병사들에게
[356호 중독과 열정 사이]
니코틴에 중독된 사람에게 “중독됐다” 말하면 화를 냅니다. 알코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 중독은 더 심각한 듯합니다. 2020년 대한민국의 많은 이들이 정치에 중독됐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쩌면 저도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글을 써야 화를 돋우지 않고 대화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이렇게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이 시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중에서
음, 굳이 뜨거운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까만 연탄이 하얗게 재가 되도록 불 지른 사람은 누굽니까? 방바닥은 골고루 데워졌습니까? 하얀 연탄재는 잘게 부숴야 합니다. 빙판길에 깔아 미끄럼을 막거나 흙과 섞어 재활용해야 하니까요. 연탄보일러는 가스 중독의 위험이 있습니다. 이 불안한 보온 수단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고 연탄재 발로 찬다고만 야단치면 시(詩)가 아니라 신경질에 가깝습니다.
요즘 아침마다 연탄에 불을 붙이려고 불쏘시개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봅니다. 첫째, 사실보다 색깔과 혐오를 덧씌운 기사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나쁜 사람이고 손가락질 받아야 하는지 결론을 정해놓고 부분적인 사실을 이어 붙입니다. 둘째, 온라인 커뮤니티마다 뉴스를 퍼오며 저마다의 판결문을 덧붙이는 사람들입니다. 불편한 사실은 ‘기레기’의 왜곡 보도 내지 가짜뉴스라고 쉽게 딱지를 붙이고, 맘에 드는 소식은 왜 기자들이 대서특필하지 않는지 화를 냅니다. 그리고 땅땅땅 판결을 내립니다.
“오늘도 기레기가 기레기짓 했네.” “이게 다 친일 토착왜구 청산 실패 때문입니다.” “이러려고 탄핵했나.” “빨갱이 주사파 썩은 진보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
분노의 손가락질로 대한민국이 타오릅니다, 활활. 모두들 하얀 재가 되기로 결단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행동이 민주화 투쟁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혹은 자신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벌이는 사이버 전쟁의 병사라고 스스로 다짐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모두 일리가 없지는 않지만, 정치권력과 관련된 얘기에 열중하느라 놓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산업재해로 생명을 잃는 청소년 실습생의 사연이나 파괴되는 환경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목소리처럼 ‘작은’ 이야기들은 관심 밖으로 밀려납니다. 권력을 제대로 써야 할 곳이 어디인지 찾기보다 권력을 지키거나 빼앗아 오는 일만 이야깃거리가 됩니다. 연탄보일러가 방바닥을 골고루 데우는지, 혹시 가스가 새는지 살피지 않고 무조건 불만 활활 붙이면 불도 곧 꺼지고, 불이 오래 가더라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매일 똑같은 노래를 부르고 똑같은 판결문을 쓰면서도 지겨운 줄 모르고 불타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종교와 똑같습니다. 자신들의 지도자는 정의롭고 인자하고 아름다우며, 반대편은 지옥의 문을 여는 사탄입니다. 혹 자기들 편에서 회계 부정이 드러나도 “잘하려다 생긴 일”이라며 옹호하고 비리가 나와도 덮어버리려 합니다. 자기편이면 진실인지 거짓인지 상관 않고 열심히 헌금하고, 모임하고, 전도합니다. 반대편의 허물은 애초 교리와 사상이 잘못돼 생긴 일이므로 이참에 발본색원해 싹을 잘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편과의 대화는커녕 이단, 사이비, 역사의 죄인으로 낙인찍고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만의 천국을 만들기 위해 이 땅에서 아귀다툼을 벌이면서도, 그게 신실하고 충성된 종의 도리라고 여깁니다. 혹 자기 편의 행동과 교리에 의문을 제기하면 성령 충만하지 않다며 질책합니다. 매일 뉴스를 보고 판결문을 학습하며 스스로에게 불을 붙여 재가 되도록 타오르라고 다그칩니다.
혹시 당신도 우리가 친일 군사독재 기득권 세력과 민주화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아니면 빨갱이 동성애자 네오막시스트들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키는 영적 전쟁에 참전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까?
전쟁에 중독된 병사처럼
영화 〈허트 로커〉(The Hurt Locker, 2008)가 생각납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폭발물 제거가 주특기인 미군 중사 제임스입니다. 폭탄 테러가 난무하는 이라크에서 제임스 중사는 미군을 겨냥해 설치된 폭탄을 제거하는 스릴 넘치는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손가락 하나만 잘못 놀리면 펑 하면서 모두가 죽을 수 있는 순간에도, 제임스는 숨 막히는 긴장을 이겨내고 독단적이지만 과감한 결정으로 매번 임무를 완수합니다. 물론, 가끔 폭탄을 온몸에 두르고 달려오는 아이와 함께 동료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참혹한 순간도 마주합니다. 제임스 중사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긴박한 하루하루를 보내며 현장 복무가 끝나기만을 기다립니다. 마침내 복무 기간을 채우고 미국으로 돌아옵니다. 아내와 쇼핑을 갑니다. 먹을거리 가득한 대형마트, 적도 없고 폭탄도 없는 평온한 일상입니다. 진열장 사이 텅 빈 공간에서 제임스는 뭔가를 잃어버린 듯 서성거립니다. 관객들도 지루해집니다.
장면이 바뀝니다. 이라크입니다. 제임스는 자청해서 전쟁터로 돌아왔습니다. 다시 목숨을 걸고 폭발물을 제거하기 위해 헬멧을 씁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전쟁터로 돌아간 제임스를 보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 자신도 영화를 보는 동안 전쟁이 주는 긴장과 그 속에서 분비되는 도파민에 취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인들은 그동안 도파민 없이는 살 수 없을 만큼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독립을 위한 투쟁, 북한과의 전쟁, 경제 발전을 위한 질주, 독재 권력을 향한 항쟁…. 이 모든 일을 온몸으로 겪어온 우리에게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지 않는 시대는 너무 시시하게 느껴집니다. 진보든 보수든 터무니없는 사명감을 내세우며 지나치게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사람들을 보면, 시시한 삶을 거부하고 시대의 부름을 좇아 스스로를 불태우는 사람들을 보면 제임스 중사가 생각납니다. 이 영화는 한 문장을 인용하면서 시작합니다.
“전투의 격렬함은 종종 잠재적이고 치명적인 중독을 일으킨다. 전쟁은 마약이기 때문이다(The rush of battle is often a potent and lethal addiction, for war is a drug).”
하버드 신학대 출신의 종군기자 크리스 헤지스의 책 《War Is a Force That Gives Us Meaning》(전쟁은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힘이다)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문장도, 책 제목도 의미심장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연탄이 되어 타오르는 이유도 어쩌면 평온한 일상을 견디지 못하고 전쟁터로 돌아간 제임스 중사와 비슷하지 않은가 저는 의심합니다.
대한민국의 정치는 전쟁과 같습니다. 가장 최근에 치러진 격렬하고 극적인 전투는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한 2016-2017년의 촛불혁명이었습니다. 시민의 참여로 정치의 물줄기를 바꿀 때 우리의 뇌에선 도파민이 마구 분비되었습니다. 더 거슬러 가면 평화적인 집회의 신기원을 이룬 2008년의 촛불집회, ‘참여’정부를 탄생시킨 2002년의 대통령 선거도 있었습니다. 1987년의 민주화 대투쟁, 1960년의 4.19혁명까지도 꼽을 수 있습니다. 주요한 전투가 벌어졌을 때마다 언론도 정당도 제 역할을 못 했습니다. 시민의 자발적인 대규모 참여가 승리를 이끌어냈습니다. 고통스러웠지만, 그래서 더 감격스러웠습니다.
그중에서도 2017년의 정권 교체는 대한민국 시민에게 최고의 ‘정치효능감’을 주었습니다. 2019년의 조국 사태, 2020년의 윤미향 사건에 시민들이 쉽게 달아오르는 이유도 ‘우리가 나서야 한다’는 의무감 내지 ‘우리가 나서면 바뀐다’는 자신감의 경험치가 높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효능감, 자신감, 의무감. 다 좋습니다만 거의 모든 정치 뉴스에 피아식별하듯 달려드는 모습이 왠지 ‘허트 로커’의 제임스 중사를 닮았습니다. 지난 4월의 국회의원 선거 때 ‘총선은 한일전이다’라는 문구를 만들어 사용하던 시민들에게서 저는 적이 없으면 적을 만들어서라도 전쟁을 이어가고 싶은 격렬한 마음을 읽었습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와도 하얗게 재를 남기고 타오르는 연탄이 되고 싶은 그런 마음 말입니다.
대한민국은 점점 정치에 중독돼 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정치 중독이라면 누가 봐도 당선 가능성 없는 사람이 선거철마다 출마하거나, 권력을 놓고 내려와야 할 사람이 끝까지 집착하는 모습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권력의 맛은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다고들 했습니다. 지금은 정치 중독이란 말의 적용 범위가 더 넓어졌습니다. 모든 이슈를 정치화하려는 이른바 정치깔대기가 정치 중독입니다. 남녀 간 갈등, 과거 청산은 물론이고 역사바로잡기, 청년 취업률 높이기, 심지어 시인과 소설가의 생계 문제까지 정치권력이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 믿고 대책을 요구하는 모습도 정치 중독입니다. 민간과 시민의 영역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까지도 모두 해결하겠노라 스스로 나서는 권력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평범한 시민들까지 모든 이슈에 정치적인 프레임을 적용하고 편을 가르는 현상입니다. 과거 참여정부 때 보수적인 신문들이 여러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라고 후렴을 불렀던 일을 기억할 겁니다. 오죽하면 축구 한일전에서 한국팀이 져도 대통령 탓할 거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거쳐 문재인 정부까지 오면서 이런 현상이 더 심각해졌습니다. 요즘 같으면 지하철이 늦게 와도 ‘이게 나라냐’고 할 분들과 게임 대회에서 한국팀이 이겨도 대통령 덕분이라고 할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에베소교회 같은 대한민국
뜨거운 연탄보일러가 돼버린 대한민국에서 요한계시록 2장 1-7절(표준새번역)을 읽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천사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한 일과 네 수고와 인내를 알고 있다. 또 나는, 네가 악한 자들을 참고 내버려 둘 수 없던 것과,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 낸 것도, 알고 있다. 너는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견디어 내고, 낙심한 적이 없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 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 그런데 네게는 잘 하는 일이 있다. 너는 니골라 당이 하는 일을 미워한다. 나도 그것을 미워한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열매를 주어서 먹게 하겠다.’
이 구절을 21세기 대한민국 버전으로 고쳐 써봅니다.
대한민국의 네티즌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오른손에 G7을 움켜쥐시고, 촛불집회와 강남집회와 태극기 집회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이룬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과 그를 위해 겪은 고통과 희생과 인내를 알고 있다. 또 나는, 네가 악한 지도자들을 참고 내버려 둘 수 없던 것과, 국민의 대통령도 아니면서 대통령이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 낸 것도, 알고 있다. 너는 정의와 진리와 억울한 죽음과 굶주리는 식구들을 위하여 전쟁과 가난과 철야노동과 물고문과 왜곡보도와 침몰 붕괴 살인과 온갖 조롱과 멸시, 역겨운 일들을 참으며 견디어 냈다. 낙심한 적이 없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 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촛불을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 그런데 네게는 잘 하는 일이 있다. 너는 미워한다, 자기들만 선택받은 사람인 양 몰려다니는 저 무리가 하는 일을. 나도 그것을 미워한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광장과 커뮤니티와 인터넷카페에 모인 시민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분노를 사랑으로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열매를 주어서 먹게 하겠다.’
에베소교회가 거짓 가르침과 거짓 지도자를 분별한 행동은 촛불로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한 대한민국 시민의 행동과 비슷해 보입니다. 언론은 진실을 밝혀냈고, 시민은 고난을 참아냈고, 재판관들은 옳은 결정을 했습니다. 에베소교회도 인내와 수고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성취감과 행복감을 만끽했을 듯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에베소교회가 심각한 후유증을 겪고 있다고 전합니다. 다툼 와중에 사랑을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아예 진리의 촛불을 꺼트릴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교회사가들은 당시 에베소교회 안에 서로 파벌을 나눠 상대를 비판하고 배척하는 분열이 심각했다고 전합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진리의 불을 밝혀 교회 공동체를 지켜낸 일에 짜릿한 성취감을 맛본 뒤에 교회 안의 숨겨진 잘못을 밝혀내고 상대를 쫓아내는 일에 계속 몰두했나 봅니다. 어쩌면 ‘아직도 교회 안에서 적폐가 남아있다’거나 ‘교회를 지켜야 한다’며 구석구석 불을 밝히고 다닌 것은 아니었을까요? 성경은 말합니다. “네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 어디다 버렸는지 생각해 내어라.”
도파민 금식
미국 〈뉴욕타임스〉는 지난해 11월 7일 자에 도파민 금식(Dopamine fasting)을 소개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잘나가는 20대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몰려드는 즐거움과 흥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자극의 삶을 시도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도파민 금식을 하는 날은 먼저 스크린을 보지 않습니다. 텔레비전, 스마트폰, 태블릿은 물론이고 길거리 전광판에도 눈길을 두지 않습니다. 음악도 듣지 않습니다.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음식도 가능한 먹지 않고, 운전도 안 합니다. 카페인 적은 차를 마시고, 책을 읽거나 집 주변을 슬금슬금 산책합니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도 간단히 인사만 나눕니다. 도파민이 분비되지 않도록 최대한 자극을 줄이는 것이 핵심입니다. 마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려 애쓰는 유태인들이 연상됩니다. 안식일과 도파민 금식이 다른 점은, 안식일은 그 자체가 목적인 율법인 반면 도파민 금식은 더 큰 즐거움 혹은 더 명료한 판단력을 얻기 위한 일종의 고행이라는 점입니다.
한국에서 정치 중독을 끊으려면 미디어 금식부터 해야겠지요. 뉴스는 물론이고 유튜브 영상이나 온라인 커뮤니티의 수많은 글을 좀 멀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호주머니에서 빼 서랍 속에 넣으면 아마 뇌가 강력한 저항 신호를 보낼 겁니다. 그냥 정치 뉴스에 뭐가 올라왔는지만 살짝 확인하고 댓글만 살펴보면 안 되겠냐고, 대통령을 누가 지키는지 누가 공격하는지 살짝 확인만 하자고, 진정 투쟁의 대열에서 이탈하는 역사의 죄인이 되려 하느냐고. 도파민을 달라는 아우성입니다.
분노해야 할 때는 분노해야 합니다. 정치해야 할 때는 정치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노에 취하고 정치에 취해서는 안 됩니다. 해가 질 때까지도 마음에 분노를 품으면 우리의 영혼과 몸이 상합니다. 더구나 분노에 취하기 위해 상대를 악마화하거나 스스로를 연탄처럼 불태운다면 그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도파민 금식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저는 주기도문을 조용히 외워봅니다.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옵소서.
분노에서 빠져나와 용서의 기도를 올려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정치 중독 탓에 보지 못했던 이웃들의 이야기를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들리지 않았던 낮은 목소리를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분노의 함성보다는 신음하는 작은 목소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노의 불덩이를 가슴에 안고 방황하면 여기저기 불이 옮겨붙고 독가스를 뿜는 연탄이 되지만, 우리가 36.5도의 체온을 나누며 용서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비로소 하나님이 보시고 심히 좋아하셨던 인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김지방
〈국민일보〉 정치부, 경제부, 종교부 기자 등을 거쳐 지금은 쿠키미디어 대표이사다. 〈국민일보〉 노조위원장, 한국기자협회 50년사 편찬위원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정치교회》《적과 함께 사는 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