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성교육’이 가르치지 않는 것

[356호 오수경의 편애하는 리뷰]

2020-06-18     오수경

 

성교육을 제대로 받은 기억이 없다. 조그만 식당을 운영하던 부모는 성에 관해 솟구치는 내 질문을 감당하기엔 너무 바빴고, 보수적이었다. 가정 바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에서 받은 성교육이라곤 낙태 당하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태아(로 추정되는)의 동영상이 전부였을 정도로 부실했다. 또래들끼리 은밀하게 교환하는 성 지식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다. 미용실 구석에 앉아 보았던 여성 잡지 뒷부분에 나오는 섹스 칼럼이나 한껏 미화된 할리퀸 소설 속 묘사처럼 ‘책으로 배운’ 내용이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성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그렇게 성에 관한 ‘공적 교육’이 부재한 내 머릿속에는 성은 어쩐지 부끄럽고 부정한 것이라는, 부정확하고 위험한 편견이 내장지방처럼 쌓여만 갔다.

‘성경적 성교육’이 가르치는 것과 가르치지 않는 것
거기에 더해 교회에서는 ‘순결’ ‘죄’라는 말로 우리(특히 자매)를 단속했다. 그 단속은 타자를 향한 무례로 쉽게 번지곤 했다. 혼전순결을 지키지 않은(못한) 지인을 이해하기보다는 뒤에서 정죄하며 수군거렸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임신 중지를 할 수밖에 없던 친구를 위로하기보다는 설익고 피상적인 신앙의 언어를 내리꽂았다.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성경적’ 교육을 받을수록 성에 관한 무지와 편견과 무례가 단짝을 이루었다.

난데없이 ‘성경적 성교육’이라는 말이 회자하고 있다. 반동성애 진영에서 활동하는 한국가족보건협회 김지연 대표의 책과 기독교 성윤리 연구소가 감수한 ‘성경적 성교육’ 시리즈가 인기를 끌고 있다. 책뿐 아니라 ‘성경적 성교육’을 앞세운 강의가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대중을 만나고 있고, 한국성과학연구협회와 카도쉬아카데미 등은 수년 전부터 성교육 강사 양성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성경적 성교육’이란 뭘까?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비정상적인 젠더 이데올로기, 음란한 문화를 조장하는 미디어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을 회복하도록 도와 성에 관한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이루게 하는 교육 활동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그들이 선택하는 방식은 통제와 차별이다. 아이들이 미디어를 접할 기회를 차단하고, 성교육 받을 시기를 늦춰 음란한 문화로부터 보호할 것을 권면한다. 동성애와 페미니즘에 관한 차별적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교육이 ‘성경적’이라는 이름을 걸고 유통되어도 괜찮을까? 자극적인 미디어를 멀리하고, 옷차림을 단속하고, 차별해야 할 대상을 늘리는 것이 ‘성경적’인가? 이런 교육은 결국 타자에게 죄책감을 심어주며 차별하고 혐오할 근거를 만들어 실천하는 협소한 그리스도인을 양산할 뿐이다. ‘성경적 성교육’에는 왜곡된 성경 해석, ‘하나님의 목적’으로 포장한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에 부합하는) 목적, 성에 관한 납작하고 편협한 지식만 있을 뿐 주님이 사랑하신 인간, 즉 자신과 타자를 향한 존중과 사랑이 담겨 있지 않다.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에 없는 것과 있는 것
‘성경적 성교육’을 말하는 이들과 함께 보고 싶은 드라마가 있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다. 영국의 고등학생 오티스와 그의 친구 메이브, 에릭, 애덤 등이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얼핏 보면 흔한 고등학생들 이야기 같지만,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는 특별하다. ‘섹스 에듀케이션’(Sex Education)이라는 정직한 원제목처럼 오티스가 성 상담사인 엄마의 어깨 너머 배운 성 지식으로 친구들을 위한 성 상담소를 운영하기 때문이다.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에는 다양한 고민이 모인다. 교장 선생님의 아들로 어딜 가나 주목을 받는 백인 남학생 애덤은 ‘성 불능’ 장애 때문에 남모르게 고민한다. 오티스의 단짝이며 명랑한 흑인 남학생 에릭은 게이이며 애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똑똑하고 셈이 밝아 오티스의 재능(?)을 가장 먼저 발견해 ‘상담소’ 사업을 제안한 메이브는 낙태할 때 필요한 ‘보호자’를 구할 수 없어 전전긍긍한다. 이밖에도 자신의 뚱뚱한 몸을 파트너가 싫어하리라 생각하는 자존감 낮은 여학생, 섹스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레즈비언 커플, 한 번도 섹스해본 적이 없는 게 고민인 여학생 등 성에 관한 다양한 고민이 등장한다. 여기에 몸, 낙태, 왕따, 성폭력 등의 문제도 등장하여 성에 관해 더 입체적으로 고민하게 한다.

   
▲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 화면 갈무리

이처럼 온갖 고민이 모여드는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에도 없는 게 세 가지 있다. 판단, 정죄, 정답이 그것이다. 오티스는 친구들이 어렵게 털어놓는 고민의 옳고 그름을 섣불리 판단하거나 ‘죄인’이라 정죄하지 않는다. ‘답정너’처럼 쉽게 답을 주기보다는 친구가 안전하게 고민을 이야기하도록 귀를 열고, 스스로 답을 구하도록 대화를 이어갈 뿐이다. 대신 다른 세 가지가 그의 비밀 상담소에 존재한다. 존중, 다양성, 성장이다. 친구들의 고민을 존중하니 보다 다양한 존재가 드러난다. 자신만만한 애덤은 사실 억압적인 아버지로 인해 성적 지향조차 모른 상태로 살고, ‘걸레’라는 악의적 평판에도 굴하지 않는 당찬 메이브는 사실 마약중독자 가족을 둔 소녀 가장에 가까운 위태로운 삶을 산다. 에릭은 게이이며 여장을 즐기는 자신의 취향을 무시하는 보수적인 기독교인 부모에게 정죄를 당하고, 학생회장이자 촉망받는 수영선수인 잭슨은 수영선수 출신 어머니의 혹독한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방황한다. 이들은 서로를 미워하기도, 좋아하기도 하며 관계를 쌓아가고, 위기에 처한 친구를 서로 도우며 차츰 성장한다. 그러니까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에는 ‘성’만 있는 게 아니라 성을 풍성하게 누리는 ‘다양한 인간’이 있는 것이다.

문을 두드리고 싶은 상담소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메이브가 임신 중지를 결심하고 병원에 갔을 때 벌어진 일이다. 문 앞에는 ‘낙태’를 반대하는 종교 단체 회원들이 메이브를 정죄하는 말들을 쏟아내며 달려든다. 반면 오티스는 마트에서 산 샌드위치와 꽃을 수술실에 들어갔다가 외롭게 병원을 나서는 메이브에게 건네고, 그녀가 사는 허름한 컨테이너 주택까지 바래다준다.

무엇이 ‘성경적 성교육’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성교육 혹은 성 상담을 받는다면 성경적 성교육을 전면에 내세우는 그리스도인들보다는 어쩐지 어설픈 구석이 있더라도 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집까지 바래다주는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 문을 두드릴 것 같다. 성경을 들먹이기 전에 오티스가 처음 상담하는 날 그의 엄마가 했던 말을 새겨보자. “좋은 상담사는 그 책임의 무게를 아는 사람이겠지.”

   
 

 


오수경
낮에는 청어람ARMC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드라마를 보거나 글을 쓴다.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이웃들의 희노애락에 참견하고 싶은 오지라퍼다. 함께 쓴 책으로 《을들의 당나귀 귀》 《불편할 준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