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하지 않고 생환하는 책이 있다 《담》

[356호 에디터가 고른 책]

2020-06-18     옥명호
   

▲ 글로리아 제이 에번스 글·그림 / 이은진 옮김
비아토르 펴냄 / 12,000원


“언제 담을 쌓기 시작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 담장을 하나 만들면 사람들이 내 인생에 들어오는 걸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담은 일종의 경계이자 보호막이었다.”

일러스트가 인상적인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방어·보호를 위해 크고 작은 담을 쌓으며 살아간다. 인간관계에 경계를 짓는 담은 때로 만나고 상대하는 사람에 따라 높이와 두께가 가변적이 되기도 한다.

1987년 한국어판이 처음 나온 이래, 이미 명맥이 끊겼으려니 잊고 지낸 책을 다시 만나는 건 반가움을 넘어 신기한 일이다. 오래전 대학생 시절 그림우화로 읽은 이 책을 수십 년이 지나 다시 읽게 될 줄이야. 그러고 보면 좋은 책은 사라지지 않고 돌고 돌아 다시 독자를 찾아오는 모양이다. 기억의 담장 너머로 잊혀간 책과 재회하게 되는 건 순전히 출판계 종사자들의 열의와 애정 덕분일 것이다.  

“나는 밖으로 나가 손을 내밀었다. 가끔은 담장 옆에서 가만히 기다렸고, 가끔은 담장 안으로 꽃을 던졌고, 가끔은 열린 틈새로 손을 꼭 잡았다.”

이른 바 ‘초연결 사회’(hyper-connected society)로 불리는 시대에 사람들 사이 관계의 담은 얼마나 낮아졌을까? 담 너머로 교류와 소통은 얼마나 활발해졌을까? 그 연결과 소통으로 저마다 내면의 흉한 담(자기 연민, 교만, 시기, 두려움, 불신, 무관심…)은 조금이나마 허물어졌을까?

이 책의 부제는 ‘내가 만든 나만의 세상’이다. ‘나만의 세상’은 책 속 인물처럼 자기 담장 너머의 타자(이웃)를 향해 손 내밀고, 그 곁에서 가만히 기다리기도 하고, 더러 손을 꼭 잡아줌으로써  ‘우리들의 세상’으로 확장된다. 인간과 인간의 초연결은 그렇게 디지털 테크놀로지 너머에서 일어난다. 

2020년판 《담》 말미에 나오는 지은이가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띄우는 글이 흥미롭다. 이 책의 운명에 얽힌 사연과 함께 한국어판이 다시 나오기까지 지은이가 직접 경험한 일화와 한국어판 출간에 얽힌 뒷이야기가 놀랍기까지 하다.

출간된 지 43년, 사라지지 않고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 이 책의 귀환이 거듭 반갑다.

 

 

옥명호 편집장 lewisist@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