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차별을 지지할까요?
[357호 동교동 삼거리에서]
요사이 한국교회를 보면 ‘성(性)이 기독교 윤리의 알파와 오메가요 고갱이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성도덕’ 수호가 진리 수호인 양 결사항전을 외치며 단결하는 모습을 보면 말이지요. 그런데 궁금합니다. 성도덕이 진리 수호의 핵심일진대,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숱한 목회자들의 ‘성범죄’ 사건 당시 진리 수호의 십자군들은 다 어디로 갔던 걸까요? 성도덕이 기독교 윤리와 한국교회 존폐에 결정적 요소라면, 교회의 명예를 짓밟고 기독교 윤리를 배덕한 목회자들의 숱한 성추행·성폭행·행음 등 성적 타락에는 왜 결사항전의 태세로 대응하지 않았던 걸까요? 지금 한국교회는 진리를 위협하고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적(혹은 적그리스도)을 제대로 포착하여 겨냥한 걸까요?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성도덕’에 한 장을 할애했는데, 성이 기독교 윤리의 중심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순결하지 않은 것을 최고의 악으로 여긴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입니다. 육체의 죄는 악하지만, 다른 죄에 비하면 가장 미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볼 때는 잘못을 남에게 미루거나 사람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 험담과 권력과 증오를 즐기는 것이 훨씬 악한 죄입니다. 잔인함이 정욕보다는 악한 법이니까요. 루이스는 동성애에 대한 광분이 기독교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않다고 보았으며, ‘동물적 자아’와 ‘악마적 자아’라는 내면의 적 가운데 더 나쁜 것은 악마적 자아임을 강조합니다. “교회에 꼬박꼬박 출석하는 냉정하고 독선적인 도덕가가 거리의 매춘부보다 훨씬 더 지옥에 가까울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편견(prejudice)은 라틴어 어원상 ‘미리 내린 판단’이라는 뜻으로, 모든 차별에는 편견이 내재되기 마련입니다. 또한 이러한 차별은 우월감을 자양분으로 삼습니다. “혐오와 차별의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는 바로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도덕적 또는 사회적 지위에서 오는 우월감이다. 마치 바리새인이 율법의 잣대로 죄인들을 멸시하고 문벌 없는 예수의 배경을 업신여긴 것처럼, 많은 개신교인도 그들의 율법적 행위가 훈장이 되어 자신들의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들을 증오하거나 혐오의 대상으로 바라볼 때가 많다.”(신숙구, 《혐오와 한국교회》, 68쪽)
성경이 차별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이에 관해 예수의 말씀과 삶은 어떤 본보기가 되는지 톺아보고자 한 뜻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차별의 문제를 상고(詳考)할 때, 정치적 견해나 관점에 앞서 우리의 출발점이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새로 시작되는 연재 두 편, 김혜령 이화여대 교수의 ‘새로 쓰는 나눔 윤리학’과 번역가인 이민희 목사의 ‘팬데믹 시대의 신학서 읽기’를 눈여겨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분의 선하심을 바라며, 끝날 것 같지 않은 코로나 시대의 하루하루를 오늘도 견결히 보내시기를 빕니다.
옥명호 편집장 lewisist@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