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차별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나

[357호 커버스토리]

2020-07-28     장승익

성경 본문에서 찾아본 ‘차별’

성경 개역개정에서 ‘차별’을 검색하면 총 8회, 공동번역개정과 새번역은 각 12회 나온다. 이를 개역개정을 중심으로 본문별로 간단하게 살펴보자. 처음 등장하는 본문이 구약 신명기 1장 17절이다.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할 때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차별 없이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거든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 하였고”(이하 강조는 모두 필자가 표시)

신명기에서는 재판할 때에 ‘외모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맥락에서 이 문제를 언급한다. 오늘날 재판 과정에서 차별이 얼마나 흔한 일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두 번째로 나오는 본문은 신약의 사도행전 15장 9절이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이방인과 유대인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점에 대해 베드로가 예루살렘 공회 앞에 보고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차별하다’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재판하다, 분별하다, 구별하다 등의 의미인 ‘디아크리노’가 사용되었다.

세 번째 본문은 로마서 3장 22절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새번역과 공동번역개정도 ‘차별’로 번역한 이 구절에 쓰인 헬라어는 ‘차이’ ‘다름’을 의미하는 ‘디아스톨레’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이 없이 나타난다는 뜻이다. 네 번째 본문은 로마서 10장 12절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새번역과 공동번역개정에는 ‘구별’로 번역되었고 헬라어로는 로마서 3장 22절과 같은 ‘디아스톨레’이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유대인과 헬라인을 차별하시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주가 되신다는 의미이다.

다섯 번째 본문은 골로새서 3장 11절이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이 구절의 헬라어 원문에는 차별에 해당되는 단어가 없지만 개역개정에서는 ‘차별’로, 공동번역개정은 ‘구별’로 번역했고, 새번역은 원문 그대로를 유지하여 차별 혹은 구별이라는 단어가 안 나온다.

그런데 11절 첫 머리에 나오는 ‘거기에는’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앞 구절(“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에 근거해서 말하면 ‘새 사람’이다. 즉 누구나 새 사람이 될 수 있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떠한 차별도 있을 수 없음을 선언하는 것으로 당시로서는 정말 특별한 급진적 선언이라 할 수 있다.

여섯째부터 여덟째에 해당되는 마지막 세 개의 본문은 모두 야고보서 2장에 나타난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2:1)

여기에 ‘차별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명사 ‘프로소포렘프시아’인데 일반적으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의미로 주로 쓰였고 영어로는 ‘favoritism’(편애·편파)이다.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2:4)

여기에 쓰인 헬라어는 앞에서 언급한 ‘디아크리노’이다. 서로 차별하는 것을 ‘악한 생각으로 사람들을 판단’하는 일과 연결하고 있다.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2:9)

9절에 나오는 ‘차별하다’의 헬라어는 야고보서 2장 1절에서 사용된 명사의 동사형인 ‘프로소포렘프테오’로 역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다’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임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차별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신구약 본문을 간단히 살펴봤는데, 그 내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의도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임한다.

2. 구원받은 새 사람 안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

3. 외모로 차별하지 말라. 왜냐하면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4. 차별하지 말라. 왜냐하면 차별은 서로를 판단하는 악한 판단과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차별이란 무엇인가? 

최근 차별이라는 이슈가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차별에 대해 논할 때 최우선으로 짚어봐야 할 것들을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먼저, 물음을 던져 보자. 지금 차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과연 다른 사람을 차별할 권한을 갖고 있는가?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나를 만드시고 구속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그의 무한한 긍휼과 자비로 자녀 삼아 주셨다. 그분이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차별하지 말 것을 친히 명백하게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셨다. 이제 성경의 근거에 기대어 차별에 대해 정리해보자.

1. 차별은 무지요 어리석음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차별을 행한다.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어리석은 사람이요, 차별하는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이 거하지 않기에 차별한다. 그가 예수 안에 거하지 않기에 그는 사랑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안다. 그러므로 차별하는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지 않다. 나아가 실제로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차별하는 사람이 갖고 있는 무지요 어리석음이다.

2. 차별은 혐오와 배제를 동반하는 불의요 악이다

하나님은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속성인 공평과 정의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데서 나타난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고 하신다. 공평하게 치우치지 않게 재판을 하라고 명하신다. 하나님은 고아, 과부 그리고 나그네 같은 사회적 약자의 대변자요 그들의 부모이다. 차별은 강자가 약자를 우습게 여기고 무시하는 일이며, 약자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강자인 하나님은 어떻게 행동하셨는가? 하나님은 철저하게 약자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신다. 그들의 한과 아픔에 동감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제대로 아는 신앙인이라면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을 것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성경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차별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명령하신다.

3. 차별은 우상숭배로서 영적 간음이다

차별은 하나님보다 자신의 판단과 이 세상의 가치를 더 우위에 두는 행위이다. 이런 측면에서 차별은 곧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숭배로 이어지는 것이다. 가난하다고 사람을 차별하는 신앙인이 있다면 그에게는 돈이 우상이다.(골 3:5; 딤전 6:10 참조) 배우지 못했다고, 성별 정체성이 다르다고, 지역이 다르다고 사람을 차별한다면 그에게 차별의 기준이 되는 그것이 곧 우상이다. 하나님보다 그 기준을 더 존중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서까지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다. 그러나 차별은 우상숭배인 동시에 영적간음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4. 차별은 평화에 반하는 전쟁이다

정의가 없는 평화는 참된 평화가 아니다. 공평과 정의의 씨앗을 뿌려 거두는 열매가 바로 평화이다. 그러므로 불평등과 불의는 평화와 함께 갈 수 없다. 불평등과 불의를 자행하면서 평화를 말한다면 그것은 악이요 위선이다. 차별 역시 이와 같다. 사람을 차별하면서 평화의 나라를 꿈꾼다면 그것은 언감생심이다. 차별은 위장 평화요 거짓 평화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차별은 결코 평등과 정의와 함께 갈 수 없다. 평등과 동일한 권리를 말하지 않는 평화는 평화가 아니다.

차별을 넘어서는 환대: 보아스와 예수 그리스도

그러면 어떻게 이 차별의 벽을 넘어 설 수 있을 것인가? 그 예로 구약에서 룻과 보아스의 경우와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제시하면서 생각해보려 한다.

먼저 구약 룻기에 나오는 룻과 보아스의 예를 생각해보자. 여기서 우리가 긍정적으로 끄집어 낼 수 있는 가치가 있다면 적극적인 포용과 환대일 것이다. 많은 경우 포용과 환대가 아닌 혐오와 배제로 사람을 대하기 쉽다. 적극적인 포용·환대와 관련하여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가치는 친절과 배려이다.

룻은 익히 알려진 대로 모압 사람 곧 이방 여인으로서 과부이며 아직 어린 여성으로 가난하기까지 하다. 이런 여인이 유대인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까지 왔다. 전혀 다른 낯선 땅에서 그야말로 룻은 어떻게 보면 차별받을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룻이 보아스를 만나 따뜻한 대접을 받는다. 보아스는 이방 여인 룻에게 친절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자기 밭에 들어와 편하게 이삭을 줍게 할 뿐 아니라 목이 마를 때는 편하게 물을 마시게 한다. 젊은 남자 일꾼들에게 말해 룻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미리 배려한다. 심지어 다른 일꾼들에게는 곡식 다발에서 이삭을 조금씩 뽑아 버리게 일러, 룻이 좀 더 많은 곡식을 주울 수 있게 배려한다.

보아스가 보인 환대의 절정은 일꾼들과 함께 먹는 식탁에 룻을 초대하여 함께 식사하는 장면에 있다. 실상 식탁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긴밀하게 밥을 먹고 대화하는 장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식사 시간은 타인을 배제하고 아는 사람들끼리 함께하는 은밀한 친교의 자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아스는 이런 의미 있는 공간 속으로 룻을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했던 것이다.

이 식탁의 자리는 차별과 배제가 없는 동등한 원탁의 자리였을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나누신 성만찬의 식사 공동체와 유사한 점이 있다. 누구라도 편하게 와서 함께 떡을 뗄 수 있는 자리로, 한 상에 둘러 앉아 한 솥밥을 먹는다는 것은 한 가족이요 공동체임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한 식탁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곧 지극한 환대이자 친절과 배려를 의미한다. 우리 시대에도 보아스가 룻을 초대한 그러한 식탁이 많이 생겨나기를 바란다.

룻에게 보인 보아스의 행동은 적극적인 친절과 환대 그리고 포용과 정의로 요약할 수 있겠다. 적극적 환대는 어느 누구라도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 넣어준다. ‘살림’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적극적 환대와 긍휼과 친절이다.

반면, 차별은 이와는 완전 대척점에 있는 가치의 종합이다. 즉 차별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것, 사랑의 결핍, 사랑이 아닌 혐오, 포용이 아닌 배척과 폭력, 평등과 공의가 아닌 불평등과 불의이다. 이렇게 보면 차별은 반성경적인 개념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인간의 파렴치한 악의 총화요 교만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누가 차별할 수 있는가? 인간이 대체 무슨 권한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을 차별할 수 있단 말인가?

이제 예수의 삶으로 눈을 돌려 보자. 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의 길을 가야만 한다. 예수의 삶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삶 그 자체였다. 예수는 당시 공회원이자 바리새파 사람인 니고데모나 세리장 삭개오 같은 동족을 괴롭히는 부자도 환대하시고 대화하셨다. 수로보니게 이방 여인과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예수께 나아오는 각종 질병 걸린 자들을 고쳐주셨고 소외받고 사는 세리와 죄인, 어린아이와 여인들을 포용하시고 함께 식사하셨다. 유대인들이 상종도 하지 않는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셔서 사마리아 여인과 환담하셨고 그 여인 안에 있는 내적인 병을 고쳐 주셨다.

예수는 이렇게 상처로 고통당하며 사는 주변인들과 가난한 사회적 약자들을 보듬어 주셨고 온전히 환대하신 분이셨다. 차별은 고통을 가하지만 친절과 배려를 동반한 진정한 환대와 포용은 치유, 위로와 소망의 힘이 있다.

누가 하나님 위치에 서고자 하는가?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차별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기독교인들이 왜 사람을 차별하는가?

첫째,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둘째, 자신이 차별하는 대상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든지 간에 ‘있음’ 그 자체만으로 존중받아야만 하는 소중한 인격체다. 그뿐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내재해 있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한다.

셋째, 차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을 차별한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차별하는 것이다. 차별은 창조주요 구속주가 되시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팽개치고 문전박대하는 행위이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께 한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차별한다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 위치에 서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적으로 보자면, 그 자신이 입법자와 재판관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약 4:11-12 참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성령께서 둘을 하나 되게 하셨다. 하여 그의 이름과 삶이 평화다. 하지만 차별은 예수께서 허무신 담을 다시 쌓는 행위이다. 결국 차별은 성령의 사역을 훼방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악한 행동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성령에 이끌려 어느 누구도 차별하거나 차별당하지 않는 아름답고 건강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장승익

함께하는교회 예수마을 담임목사로, 세계밀알연합 이사와 ISF 이사, 학원복음화협의회 중앙위원이다. 장신대 신대원을 나와(M.Div.) 독일 튀빙엔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Dr. Theol.)를 받았다. 독일 남부지방한인교회 담임목사, 기독교재독한인교회협의회 회장 등을 지냈다. 2015년 10월, 신학도들과 목회자들, 가나안 성도들을 섬기는 ‘예수 희년과 하나님 나라(예희하) 연구소’를 열었으며, 장신대 겸임교수로도 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