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과 혐오로 읽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357호 커버스토리]

2020-07-28     전성민

영생의 조건: “그대로 행하여라”

인종, 종교, 성, 나이, 직업, 지역. 이 모든 말 뒤에 붙일 수 있는 하나의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차별’입니다. 인종차별, 종교차별, 성차별, 나이차별, 직업차별, 지역차별. 어디에 붙여도 어색하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러운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세상이, 아니 어쩌면 우리가 차별에 너무 익숙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차별이 자라서 혐오를 낳습니다.

차별과 혐오가 단지 세속 사회의 문제이기만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은 차별과 혐오라는 이 껄끄러운 문제와 아주 구체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25-37절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통해 이를 살펴보려 합니다. 어떤 분들은 차별과 혐오의 문제가 복음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이 말씀은 제게 복음과 관련하여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이 본문에는 예수님과 율법교사가 주고받는 대화가 두 번 나옵니다. 첫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10:25) 이는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인간에게 영생을 얻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탕자 비유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문제를 잘 보여준다면, 이 본문은 회복된 관계 안에서 하나님 자녀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는, 영생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율법교사의 첫 질문은 “내가 무엇을 해야”로 시작합니다. 그 질문에 예수님은 직접 답하시지 않고 오히려 대답을 이끌어내는 반문을 던지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10:26).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신 셈입니다. 이에 율법교사는 자신이 아는 대로, 신명기 6:5과 레위기 19:18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그의 대답은 복음서의 다른 본문에 나오는 가장 큰 율법 계명에 대한 예수님 말씀과 일치합니다.(마 22:37-40; 막 12:29-31)

율법교사라는 신분에 걸맞게 그의 대답은 옳았지만, 말로 그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대답을 인정하시면서 한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10:28) 영생에 진정 관심이 있다면 말로 그치지 말고 아는 대로 행하라는 도전입니다. 첫 번째 대화가 이렇게 끝납니다. 율법교사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을 들었습니다. 그가 진정 영생을 얻는 데 관심이 있었다면 이 대답으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배제의 기준: 누가 이웃인가?

그런데 율법교사는 다시 질문을 던지고, 그와 예수님 사이에 두 번째 대화가 시작됩니다. 이 대화에서 차별과 혐오, 그리고 신앙이라는 주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이번에도 율법교사가 먼저 질문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10:29)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10:27)는 답을 주시고 그대로 행하라는 예수님 말씀에 율법교사는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다시 묻습니다.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그의 질문에 예수님이 대답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들려주신 뒤,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10:36)고 반문하십니다.

율법교사가 던진 두 번째 질문에 왜 예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을까요?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이웃이냐’는 질문은 뒤집어 말하면 ‘누가 이웃이 아니냐’는 질문과 같습니다. 누가 이웃인지 판단하는 순간, 누가 이웃이 아닌지가 결정됩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에 관한 질문이 누군가는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누가 이웃이냐는 질문에 이러저러한 사람이 이웃이라고 말하는 순간, 이웃이 아닌 사람이 생겨나고 맙니다. 사랑하라는 계명 앞에서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을 먼저 떠올리는 것입니다.

특히, 이웃이냐 아니냐의 판단 기준이 신앙과 관련되면 신앙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배제하게 됩니다. 배제는 선을 긋고 누군가를 밀쳐내는 것입니다. ‘그’와 ‘나/우리’를 다른 부류로 나누고 더 이상 함께하지 않습니다. 즉, 따돌리는 것입니다. 배제가 차별을 낳고 차별이 자라 혐오가 됩니다. 예수님은 누가 이웃이냐는 질문에 답하지 않으심으로써 선을 긋고 누군가를 밀쳐내는 신앙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이웃이냐는 질문은 배제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만들어내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단순히 강도 만난 사람, 곤경에 처한 사람을 있는 힘껏 도와주자는 교훈을 넘어섭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이 누군가를 배제하고 있지는 않은지, 누군가를 따돌리고 있지는 않은지, 누군가를 밀쳐내고 있지 않은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자연스레 신앙과 배제, 신앙과 차별에 관한 질문이 생깁니다. 신앙이 정말로 배제를 낳을 수 있을까요? 신앙이 차별과 혐오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배척하는 일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습니다. 조직신학자인 미로슬라브 볼프 예일대 교수는 《배제와 포용》(IVP)에서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타인에서 ‘죄인’은 이방인과 사마리아인, 사회에서 추방당한 사람, 천대받는 직업인, 특정 분파의 해석대로 율법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까지 아우르는 말이었다고 밝힙니다. 그는 이 책에서 죄를 누군가를 배제하는 행위로까지 확장하여 설명하는데, 흔히 종교계에서 덕(德)으로 여기거나 신앙적이라고 보는 행위일지라도 누군가를 배제하는 것이라면 죄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종교적·신앙적 헌신이 누군가를 배제하는 악을 낳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러한 볼프의 지적을 실감나게 확인시켜주는 본문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입니다.

신앙과 배제: 정체불명의 어떤 사람,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이 이야기에는 세 부류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첫째,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그저 “어떤 사람”(a man)이라고만 소개되어 있을 뿐, 이스라엘 사람인지 이방인인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을 빌리자면,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이웃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정보가 전혀 없습니다. 그는 그저 ‘어떤 사람’일 뿐입니다. 한 주석가는 ‘이 강도 만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뿐’이라고 강조합니다.

누가 이웃이냐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이 ‘어떤 사람’으로 말씀을 시작하는 것 자체가 율법교사의 질문이 잘못되었음을 드러냅니다. 율법교사는 그 무엇보다 ‘판단 기준’이 궁금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야기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이웃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아무런 기준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랑을 행할 때 누가 이웃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웅변해줍니다. 인간은 그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랑과 돌봄을 받아야 합니다. 이 이야기 말미에서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다시 말해 ‘그가 누구인지 구별할 수 없더라도 사랑을 베풀라’고 도전하십니다.(10:37) 영생을 얻는 삶은 아무도 배제하지 않고 그저 누군가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을 베푸는 삶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 종교성과 신앙이 이웃사랑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종교성이 배제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아니 어쩌면 그 종교성이 배제를 잉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듭니다. 30절 후반부를 보면, 강도 당한 사람의 상태는 매우 심각합니다. 발가벗겨졌고 심하게 맞았으며 거의 죽은 상태로 버려졌습니다. 한마디로 산송장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31절은 ‘마침’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뭔가 새로운 가능성이 생길 것 같다는 기대를 불러일으킵니다. 누군가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마침’ 나타난 사람이 있는데 바로 제사장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한 그 제사장은 그를 보고도 피해서 지나가버립니다. 그런데 다행히 다른 사람이 나타납니다. 이번엔 당시 종교의식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던 레위인입니다. 32절에 보면 “그곳에 이르러”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제사장보다는 레위인이 한걸음 더 다가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국 레위인도 피하여 지나가버립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당시 사람들이 볼 때 누구보다 신앙이 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버려둔 채 지나가버린 걸까요? 거기서 우물쭈물하다가는 강도를 만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을까요?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게 되면 안 된다는 신앙적 두려움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그들이 원래 동정심이 없는 사람들이었을까요?

본문이 명확한 답을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거의 죽게 된 사람에게 종교지도자라는 신분은, 그들이 가진 종교성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종교성과 신앙이 배제를 더 키웠을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신앙과 배제: ‘선한’(?) 사마리아인

마지막 세 번째로 등장하는 인물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기대에 못 미치는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예수님께서 성직자들의 위선을 비판하시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그랬다면 마지막 등장인물은 평범한 유대인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등장시킨 인물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하지 않았던 자비를 베풉니다. 너무나 세밀하게, 너무나 자비롭게, 너무나 관대하게, 정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죽어가는 ‘어떤 사람’을 살려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의 구체적인 행동과 더불어 본문에서 가장 충격적인 대목은 ‘그(강도 만난 자)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는 표현입니다. 그 이유는 ‘불쌍히 여기다’(스프랑크-니조마이)라는 동사가 복음서의 여덟 구절에 걸쳐서 열두 번 나오는데, 이 구절만 제외하고 모두 예수님과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막 1:41)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눅 7:13)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

여기 나오는 ‘불쌍히 여기다’ ‘측은히 여기다’가 모두 같은 동사이며, 바로 강도 만난 사람에 대해 사마리아인의 마음을 표현한 동사와 같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하게 할 뿐 아니라, 초대교회 교부들은 그가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틀린 해석은 아니지만, 이 본문을 읽을 때 ‘사마리아인’이라는 그의 정체성을 간과하면 본문이 주는 메시지를 매우 약화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흔히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고 부르지만, 유대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사마리아인 앞에 ‘선하다’는 말을 붙이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사마리아인들과 같이 식사하는 건 마치 돼지를 먹는 것처럼 부정한 일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우상숭배자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이었으며,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들을 죽여도 괜찮다고 하나님이 허락하셨다고까지 여겼습니다. 그 정도로 사마리아인을 경멸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자비를 베풀었다? 사마리아인이 선한 일을 했다? 유대인이 볼 때 이것은 말이 안 되고 비상식적이며 상상할 수 없는 그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을 들은 율법교사가 어느 정도의 충격을 받았을지 사실상 헤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이야기를 마치시면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시자(10:36) 율법교사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을 입에 담기조차 싫어서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돌려 말합니다(10:37). 사마리아 사람을 향한 유대인의 혐오는 그 정도로 극단적이었습니다.

배제·차별을 정당화하는 ‘비인간화’에 맞서 경계 허물기 혐오와 배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정체성을 왜곡하고 낙인찍는 일에 관해 볼프는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우리는 타자를 차별하거나 지배하거나 추방하거나 파괴하기 위해 그들을 비인간화한다. …그들이 소수자라면, 그들은 ‘기생충’ ‘해충’ ‘치명적인 세균’이다. …〔이런〕 어법은 … 배제하지 않는 것을 도덕적으로 나쁘게 보이게 하여 배제를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필수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남들도 그렇게 행하도록 도덕적 의무를 부과한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돼지’라고 부르면, 그들을 혐오하는 게 정당화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우상숭배자라고 낙인찍으면, 그들을 혐오하는 것이 오히려 신앙적이고 종교적이고 덕스러운 일이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기생충이라고 부른다면, 그를 기생충 취급하는 행동이 용인됩니다. 그뿐 아니라 그런 사람을 기생충으로 대해야 내가 더 도덕적인 사람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혐오의 대상이었던 사마리아 사람을 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키십니다. 심지어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을 제치고 말입니다.

앞서 율법교사가 받은 충격을 헤아리기가 어렵다고 했는데, 간접적이나마 체험을 해보겠습니다. 우리가 낙인찍어서 부르는 사람들을 이 이야기에 대입하여 읽어보면, 율법교사의 충격을 조금이나마 경험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선한 무슬림’으로 번안한 글입니다.

한 사람이 워싱턴DC에서 필라델피아로 내려가는데 납치를 당하고 옷을 뺏기고 갈비뼈가 부러지고 머리가 깨져서 의식이 없는 채로 길가에 버려졌다. 그런데 그 옆에 큰 수련회가 열리고 있었고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이 사람을 보았을 때 그냥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인도에서 막 돌아온 선교사님들이 똑같은 장소를 지나갔는데, 역시 그들도 이 사람을 놔두고 지나쳐버렸다. 그런데 한 명의 무슬림이 일하러 가다가 이 사람이 길에 버려진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서 응급조치를 취하고 앰뷸런스에 태워 병원으로 갔다. 입원 수속을 거쳐 중환자실에서 하룻밤을 같이 지새고 다음날 귀가하면서 원무과에 들러 비용이 더 들면 자신의 신용카드로 계산해달라고 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당혹감이나 불편함이 느껴지진 않았는지요? 예수님은 당시 철저하게 배제되었던 사마리아인을 자비를 베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이야기를 통해 이웃의 기준을 따지고 경계를 긋는 유대인의 사고방식에 가장 강력하게 도전하셨습니다. 볼프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고하고 죄가 없으시며 온전히 하나님께 속한 예수님께서 ‘추방자들을 배제하는 사회적 경계를 위반’하신 것입니다. 그 위반을 통해 ‘경계 자체가 악하고 죄이며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것임을 보이시고 추방자를 포용하심으로써 그들을 추방한 사람들과 제도가 죄로 물들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영생이 모든 죄로부터 자유한 생명의 삶이라면 이웃사랑은 모든 경계를 넘어야 합니다. 아니, 경계가 없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43-48절 말씀이 또한 그러한 말씀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입니다. 그 온전하신 하나님은 해와 비를 악인과 선인을 차별하여 내리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말씀은, 이웃이 누구인지 질문하면서 끊임없이 배제의 경계를 확인하려는 우리의 타락한 사랑에 대한 도전이자 책망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웃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님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누군가를 혐오하고 배제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누가 이웃이냐는 질문을 통해 그 혐오와 배제를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웃의 경계를 묻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너는 이웃인가? 이웃이 되어주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배제의 경계를 허무는 이웃이 되라고 도전하십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어떤 사람에게 다가가 이웃이 되어라, 신앙의 이름으로 차별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웃이 되어라, 참 이웃이 되어 배제의 경계를 허물어라. 이것이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전성민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원장으로 세계관 및 구약학을 가르친다.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캐나다 리젠트 칼리지에서 성서언어(M.C.S.)와 구약학(Th.M.)을 공부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구약 내러티브의 윤리적 읽기’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D.Phil.)를 받았으며, 2014년 한국인 신학자로는 최초로 학위논문이 옥스퍼드 신학 및 종교학 단행본 총서로 출판되었다(Ethics and Biblical Narrative).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창립 연구위원으로 현재는 초빙연구위원으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세계관적 설교》 《사사기 어떻게 읽을 것인가》 등이 있으며, 전문영역인 구약 윤리 외에 평신도 신학, 세계관적 성경읽기와 설교, 미션얼 운동의 구약적 토대, 성서학과 과학의 관계 등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