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하는 선량한 그리스도인

[357호 커버스토리]

2020-07-28     전남식

포괄적 차별금지법 입안을 앞두고 성소수자들에 대한 혐오 발언이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발언들이 대부분 교회에서 흘러나온다는 점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곧 동성애 독재자 법안이니 동성애자들을 이 법안에서 제외하라, 아직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나중으로 연기하라, 차별금지법 통과되면 기독교는 망한다.’ 한마디로 교회가 혐오의 온상이 되고 말았다. 사랑으로 시작하는 성령의 열매와 성령충만은 사라지고 혐오충만, 차별의 열매만 풍성하다.

​교회는 본래 ‘복음’을 선포하고, 그 복음을 실천하기로 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구원이다.(롬1:16) 믿음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예수님처럼 죄인들을 사랑하고, 이해하며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실현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복음’은 전하지 않고 ‘혐오와 차별’을 전파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이 글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찬성하는 입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를 살펴보고, 기독교 성서는 이 사회가 요구하는 수준 이상을 보여주는 ‘산 위의 도시’가 되어야 하며(능가의 윤리), ‘선량한 차별주의자’로 전락한 한국교회를 비판하고 진정한 회심을 제안하는 데 목적을 둔다.

혐오의 땅, 사마리아

호모 카테고리쿠스. 인간은 사물/사람을 분류하고 범주화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성별, 국적, 피부색, 고용 상태, 학벌, 성적지향… 이러한 분류는 인간이 사고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임은 부정할 수 없겠지만, 분류 과정을 통해 대상의 개별성은 지워지고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리고 개별성이 사라진 존재는 각종 폭력의 대상이 되고, 그 폭력은 쉽게 정당화된다.  

요한복음 4장은 사마리아에 대한 범주화를 고발한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남성과 여성, 예루살렘과 그리심산, 유대 땅과 사마리아 땅이 대조된다. 그리고 3장까지 비교 범위를 확장하면 밤과 낮,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이 대조된다.

예수께서는 밤의 손님이자 바리새인이요 유대 지도자인 니고데모와의 만남을 뒤로하고, 유대 땅을 떠나 사마리아 땅에서, 대낮에 한 여인을 만나신다. 그런데 사마리아를 우회하지 않고 통과하게 된 것에 대해 요한복음 저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사마리아를 거쳐서 가실 수밖에 없었다.”(4:4, 이하 새번역) 개역개정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로 번역했는데, 이 표현은 강력한 하나님의 뜻(신적 의지)을 내포한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곳을 장사하는 집으로 전락시킨 유대인들을 강하게 비판하셨다.(요 2:16)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어느 순간 특정 부류의 사람들만을 위한 공간, 배제와 혐오의 장소로 전락했고, 따라서 그곳에서는 쉼을 얻지 못하셨다. “그들(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몸을 맡기지 않으셨다.”(2:24) 그리고 니고데모와 대화를 나누시고 사마리아 지역에 들어오셔서 한 우물가에서 쉬셨다. 혐오와 배제의 땅에서 찾은 안식!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피로하셔서 우물가에 앉으셨다.”(4:6)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간의 반목은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주전 722년 앗시리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제국 전역으로 강제 이주시켰고(왕하 17장), 사마리아 지역에 다른 피정복 민족들을 강제 이주시킴으로 북왕국 주민들이 이방인과 결혼하게 되었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남왕국 유다 엘리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종교를 비롯해 그들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갈등은 훗날 사마리아 성전 파괴와 사마리아인들의 예루살렘 성전 모독으로 폭발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를 더럽다고 여겼고, 서로가 그렇게 더럽혀졌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성전을 오염시킨 장본인들은 다름 아닌 유대 지도자들이라 말씀하시며, 따라서 그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셨다.(요 2장) 그리고 유대 땅을 떠나 사마리아에 도착하셨고, 대낮에 아무도 없는 우물가에서 그 여인과 만나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나타나듯 우물은 종종 사랑이 맺어지는 장소였다. 대표적인 예가 우물에서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만났고, 야곱이 라헬을 만났으며, 모세가 십보라를 만났다. 그리고 요한복음 3장 후반부에는 세례요한이 유대인들과 정결 예법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자신은 메시아가 아닌 메시아를 증언하는 자이며, 예수께서 신부를 차지하는 신랑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에서 예수께서 우물에서 유대인의 관점에서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여인을 만나신 것이다.

예수는 당시 정결 예법을 무시하고 당당하게 사마리아 땅으로 향하셨고, 대낮에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다. 예수의 행보는 자신의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이었다. 성경 저자는 당시의 차별을 기술했다. “유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기 때문이다.”(4:9) 여인 또한 그러한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4:9) 예수의 부정한 땅 방문과 머묾, 부정한 여인과의 대화는 당시 정결 예법을 거스르고 고정관념이나 사회적 편견을 폭로하는 행위였다. 예수께서는 회피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으셨다. 공공장소에서 당당하게 그 여인을 만나셨고, 그 여인에게 하나님의 선물인 생수에 대해, 예배에 대해 대화하셨다. 그 후 여인은 자신이 만난 자가 메시아임을 알렸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행동과 말씀은 그에게 복음이었다. 그는 사마리아 성 주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주민들은 예수님을 초대하였으며, 예수님은 그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셨다.’

혐오와 배제의 땅에서 환대의 땅으로

요한복음에서 ‘머물다’라는 동사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중 몇 가지를 살펴보자. 성령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그 위에 머무셨고(1:33), 두 제자가 예수께 어디에 ‘머물고’ 계시는지를 물었으며(1:38, 39), 가나 혼인잔치 기적 이후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가버나움에서 머무셨다.(2:12) 바리새인들에게 예수께서는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머물다)”(9:41) 하셨고, 체포되기 전날 제자들에게 자신이 떠나는 이유를 ‘머물 곳’을 마련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14:2) 15장에서는 ‘머물다’라는 동사가 반복해서 사용된다.

정리하자면 예수는 성령이 머무는 자이며, 제자는 예수와 함께 머물러야 한다. 반면 예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죄가 머물러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께서 자기들과 함께 머물기를 요청했고,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머무심으로 더 이상 그 땅이 혐오와 배제의 땅이 아니라, 성령이 머무는 곳, 거룩한 장소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을 요한복음 서두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장막을 펼쳤다’(tabernacle)라는 의미다.

요한복음은 수백 년간 이어진 당시 유대인들의 사마리아인에 대한 차별적 시각 혹은 혐오를 예수께서 극복하셨음을 보여준다. 사마리아로 향하신 것은 강력한 뜻이었고, 사마리아 여인의 남편 숫자는 그의 부정함을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남성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행동이었다. 당시 여성은 남편이나 아버지를 통해 특정 계층에 속했다. 특히 하위 계층 여성들의 경우 남편의 죽음이나 이혼은 여성의 상황을 급격히 악화시켰다. 따라서 모든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이 여인은 어떠한 사회 계층에도 속할 수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이 본문은 자신들의 편리에 따라 이혼 증서를 써주고 집에서 쫓아내고 다른 여인을 아내로 삼았던 당시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혐오와 배제의 땅에서 환대의 땅으로의 변화! 얼마나 멋진 상상력인가.

능가의 윤리

최근 강남순 교수가 차별금지법을 이웃사랑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기독교 성서의 이웃사랑을 정의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 법안은 최소한의 법이기 때문이다. 성서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명령은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주어진 것이다. 한 율법학자가 예수께 율법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예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마 22:37) 하셨고, 둘째 계명인 이웃사랑도 이와 같다고 하셨다. 이중 계명은 단순히 이웃을 차별하지 않는 선에서 머물지 않는다, 이웃사랑은 오히려 세상의 상식을 능가한다. 이를 존 하워드 요더는 《예수의 정치학》에서 ‘능가의 윤리’라고 표현했다. 다시 말해 기독교는 사회 윤리를 능가하는 기독교 윤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 5:20)

세상은 살인하지 말라고 가르치지만 제자들은 형제에게 화내지도 말고, 욕하지도 말고 오히려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세상은 간음하지 말라고 하지만 예수의 제자들은 음욕조차 품지 말아야 한다. 자신에게 손해를 입힌 자에게 보복하지 말고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요더가 제시한 능가의 윤리의 전형이다. 성서는 우리에게 이웃을 차별하지 말라는 선에서 만족하지 않는다.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하되, 하나님을 사랑하는 수준만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교회 안의 선량한 차별주의자

 

나는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착각이고 신화일 뿐이었다.(10쪽) -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창비)  

 

한 사람이 예수께 찾아와 영생을 얻기 위해 어떤 선한 일을 해야 하는지 물었다. 예수께서는 선함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고 오직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다. 평행본문인 마가복음 10장이나 누가복음 18장은 예수를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반면, 마태복음은 선한 행위를 언급했다. 마태복음의 의도는 영생을 얻는 데 선한 행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말처럼 들린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한 분은 한 분이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기를 원하면, 계명들을 지켜라.”(마 19:17)

생명에 들어가려면, 신적 소명에 따라 살아가려면 계명을 지켜야 한다. 충분히 지키며 살고 있는데… 어떤 계명?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증언하지 마라, 부모를 공경하라. 여기까지는 다른 평행본문과 동일하나 마태는 한 가지를 추가한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19절) ​

하지만 그(여기서는 젊은이라고 언급)는 어려서부터 다 지키며 살았는데 뭐가 부족하냐고 되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당당함이 묻어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젊은이이면서 곧 밝혀질 부자인 그에게 밀리지 않고 한 가지를 더 요구하신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21절)

영화 〈기생충〉에는 이런 대화가 나온다.

“부자인데 착하기까지 해.” “부자니까 착한 거야.”

​부자는 성질이 못됐고, 가난한 사람은 착하다는 상식을 뒤집는 대사다. 부자로 태어났기에 작고 사소한 일에 화낼 이유가 없고, 다른 사람에게 너그럽다. 이 부자 청년도 그러지 않았을까? ​아직 젊은데 부자다. 재산이 많았다.(22절) 그러니 미래에 대한 두려움, 걱정거리가 없다. 인심은 곳간에서 난다는 말처럼, 그는 평소 사람들이나 회당에 기부도 많이 했을 테고 따라서 존경을 받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위의 계명들을 지키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에게는 계명 지키는 일은 당연하고, 그것을 넘어서 완전해지라고,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예수를 따르라고 하셨다.

위 대화를 기독교식으로 바꿔보자.

“부자인데 교회까지 다녀.” “부자는 다 교회 다녀.”

요즘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착하다.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은 어느덧 교회에서 찾아보기 어렵고, 부유하고 많이 배운 사람들이 무대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얼굴은 광채가 나고 목소리는 교양이 철철 넘친다. 교회 일을 맡으면 성실하게, 탁월하게, 인상 한번 구기지 않고 해낸다. 그런 사람에게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증거하지 마라,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다. 최고급 요양원에 부모를 모시고, 개인 요양보호사까지 고용해 돌보고 있으니까. 거짓증거? 법정에 갈 일이 없고, 간다 해도 변호사가 다 알아서 해준다. 거짓 증거할 기회가 없다. 도둑질? 그걸 왜 하지, 가만있어도 건물 임대료가 은행 계좌에 차곡차곡 들어오는데. 간음? 원하는 사람을 아내로, 남편으로 맞이하기 쉬운데 그런 짓을? 살인? 모두가 자신에게 굽실거리고 있고, 설령 죽여야 할 상황이면 아랫사람 시키면 될 일이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일을 한다. 착하기만 해서는 결코 가난은 고사하고 일용할 양식도 구하기 어렵다. 죽어라 일을 해서 돈을 벌어도 임대료 내면 남는 게 없다. 교회 가서 예배를 드려도 봉사할 시간이 많지 않다. 배우지 못했으니 가르칠 수 없고, 가끔 주중에 아무도 없는 교회에 와서 조용히, 짧게 기도하고, 교회 의자를 닦고 갈 뿐이다.

결국, 교회 안에는 선량한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시간과 돈, 교양이 넘쳐나는 사람들…. 그들은 모두 선량하지만 차별주의자일 뿐이다. 그런 부자 청년에게 예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명하셨다. 가난한 사람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고, 부자를 더욱 부자가 되게 만드는 구조로부터 벗어나야 하며, 그러한 ‘출애굽’(엑소더스)을 위해서는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라는 말씀이었다. ​

지금의 한국교회 안에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이 가득 차고 넘쳐난다. 부자 교회 유명 목사들은 대놓고 차별금지법을 반대하고, 선량한 교인들은 착하기 짝이 없어서 무비판적으로 ‘아멘’으로 화답한다. 야고보는 차별 행위를 죄로 단정했다. “그러나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요, 여러분은 율법을 따라 범법자로 판정을 받게 됩니다.”(약 2:9)

나가는 말

피에르 부르디외는 《구별짓기》에서 아비투스(Habitus)라는 용어를 통해 실존주의와 구조주의를 극복하려고 시도했다. 오랜 세월 나를 형성해온 습관인 아비투스와 이 아비투스를 공유하는 준거집단은 그곳에 속한 개인의 사고나 신념·태도·가치 및 행동 방향을 결정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어느 집단에 속해 있느냐, 혹은 어떤 집단에 소속되길 희망하느냐에 따라 관점이 형성되고 행동 방향이 결정된다. 타자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말을 공공연하게 퍼붓는 교회에 다닌다면 그에게 그 교회는 준거집단이 되고, 차별이나 혐오 발언에 아무런 불편함도 느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

하지만 이런 준거집단 및 그에 속해 살아오면서 체득한 아비투스는 개선 및 극복할 수 있다. 비록 쉽지 않지만 그것이 운명이 아닌, 제도적 모순이기 때문이다. 변화 또는 극복을 희망한다면 차별을 조장하고 설교하는 교회를 벗어나야 한다. 그 교회가 가치 판단의 기준, 즉 준거집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어야 한다. 차별의 아비투스나 그것을 공유하는 준거집단을 벗어나 새로운 아비투스를 형성하는 준거집단에 속하는 재사회화, 이것이 회심이기 때문이다.

​차별은 누군가가 존재하지만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행위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아닌 것들”(the things that are not)을 택하사 잘났다고 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말하였다.(고전 1:27) ‘아무것도 아닌 것들’은, 존재하지만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 자들을 뜻한다. 한마디로 투명인간 취급받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들(‘사람’이 아니라 ‘것들’이다)을 택하셔서 잘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우리 주변에 차별을 받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들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행위는 그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들,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투명인간 취급하는 행위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인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선택하시고 “있는 자”(존재)로 인정해주셨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변의 투명인간 취급받는 사람들, 차별받는 사람들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품고 사랑해야 마땅하다. 세상이 그들을 차별하지 말자고 외칠 때,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그들을 적극적으로 사랑하자고 몸으로 외쳐야 할 것이다.

 

 

전남식

대전 노은동에 있는 꿈이있는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침례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영국 런던신학대학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지은 책으로 《나답게 산다는 것》(공저)이 있고, 《영광의 회복》 《성령과 은사》(공역)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