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박하고 메마른 시대, 용서는 가능한가? : 볼프의 《베풂과 용서》 읽기
[357호 코로나 시대의 신학서 읽기]
최근 겪는 가장 현저한 변화는 아무래도 비대면 환경이다. 살갗에 와 닿을 만큼 몸소 경험하는 현상이 비대면이라니 이보다 모순은 없어 뵌다. 전염병 창궐 전부터 무인화 사회에 진입했음에도 이를 유독 크게 인식하는 이유는 소통 방식이 빠르게 바뀐 탓이다. 게다가, 그동안의 많은 활동은 직접 소통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비대면 환경이 새삼 더 당황스럽다. 비언어적 요소까지 담기에는 기술적으로 벅찬 영상 속 이미지, 참 메시지는 감춰진 텍스트의 대화에서 묘한 단절감과 어색함을 매일 느낀다.
우리는 다양한 의미를 아무리 부여해도 채워지지 않는 메마른 인간성에 실망하고 무얼 바라야 할지 조급해하다가, 결국 이런 분위기에서는 나를 감추고 거리를 두어야 안전할 것이라 결론 내린다. 이미 영혼의 비대면 시대, 관대함을 상실한 야박한 문화에 도달한 이런 때에, 미로슬라브 볼프가 그리스도인에게 제안하는 ‘베풂과 용서’라는 삶의 기술은 얼마나 유효할까.
소수자로서 사유해온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
볼프는 미국의 예일 대학교에서 신학과 윤리학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부설기관인 ‘신앙과 문화 연구소’의 소장이다. 그는 후기 그리스도교 사회인 세속화된 다원주의 사회에서 그리스도교가 여전히 개인의 자아실현과 공동체의 번영을 위해 바른 원동력이 될 수 있을지 다각도로 질문하며, 그 구체적 방식을 꾸준히 탐구해왔다. 특히 지구화와 그리스도교의 역동이 인류에 기여할 부분을 그리면서, 교회가 이기심, 교만, 게으름을 극복하고 공공성을 회복하길 촉구한다. 이와 관련해 볼프는 몇몇 신선한 행보로 시선을 끌었는데, 2008-2011년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와 진행한 ‘신앙과 세계화’라는 학제 간 연구, ‘세계경제포럼의 신앙과 가치에 관한 글로벌 어젠다 협의회’ 활동 등이다.
이런 그의 관심을 비춰, 지구화가 한몫 톡톡히 했을 팬데믹, 나아가 인종, 성, 연령의 차이로 서로에게 차별과 혐오를 스스럼없이 드러낸 여러 사태를 살피고, 그의 차분한 제안을 한 번 더 진중히 톺을 필요가 있다.
사실 볼프의 언어들은 화려하거나 시원시원하지 않다. 글이 감치거나 경탄을 자아낼 만큼 신비롭지도 않다. 평이한 단어들로 익숙한 내용을 단조롭게 논증한다. 그런데도 그의 신학에는 강한 힘이 있다. 이유는 그가 선택한 표현마다 한 개인, 가정, 민족의 굴곡이 농축돼 있어서다. 1956년생인 볼프는 구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나 세르비아로 이주해 자랐으며, 그의 아버지는 소수 종파인 오순절 계통의 목사였다. 그의 부모는 나치의 괴뢰정권, 공산주의 지배와 붕괴, 이후 내전으로 번진 수많은 민족·종교·정치 갈등을 직접 겪었다. 심지어 그들은 어린 아들마저 일찍 잃는다.
볼프는 이런 자신의 부모가 고통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반하여 베풂과 용서로 생존했음을 증언한다. 본인 역시 문화, 종교의 경계에서 소수자로 사유해야 했고, 두 자녀를 입양해 하나님의 선물을 경험하기까지 불임으로 깊은 좌절 속에 있었음을 고백한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베풂과 용서는 특별한 덕행이 아니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묵상할 때 반드시 다다르는 귀결점,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생활방식이다.
살아가는 방식, 베풂과 용서
볼프가 판단하길, 베풂과 용서는 신앙의 다른 표현이다. 창조주인 하나님께서 호흡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무조건 베푸셨고 구원자인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셨기에, 새 자아를 입은 우리는 성령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품고 산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온 선물이다. 선물은 우리에게 이를 믿고 감사하는 삶,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으로 흘러 들어가게끔 도관(導管)의 역할을 하는 삶, 그리하여 하나님의 베풂과 용서의 현장에서 사랑과 화해로 참여하는 삶을 요구한다. 끊임없는 죽음과 부활의 과정에서 하나님을 본받길, 하나님의 베풂과 용서가 우리를 통해 메아리로 퍼지길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합법적인 판매와 교환, 최적의 이윤이 정당한 도리고, 사랑의 통로 대신 직접 영향을 끼치는 자기중심적 삶이 성공인 줄 착각한다. 이런 관습이 정의 내린 손상된 의미를 사랑, 선물, 베풂, 용서, 화해의 뜻이라고 잘못 배워, 은혜가 벗겨진 문화에 살면서도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
볼프는 바울 사도의 편지들을 빌려와 우리를 일깨운다. 신앙의 요소마다 더께로 앉은 세속 가치를 걷어내고, 퇴색된 성경 속 교훈을 다시 밝힌다. 또 위대한 종교개혁가인 마르틴 루터가 어떻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새롭게 발견했는지 그 과정을 촘촘히 더듬으며, 루터의 글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감수성을 보여주고 숙고하는 정신을 알려준다. 나아가 니체, 마르크스 등 세속주의 사상가는 물론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세네카와의 비판적인 대화로 그리스도교 속 참 의미 세계를 면밀히 찾고 신앙을 다시 정의한다.
그는 이렇게 성경과 전통을 토대로 자신이 경험한 참 베풂의 사건, 하나님의 베풂, 베풂의 방법과 실제 과정을, 이와 동일하게 참 용서의 사건, 하나님의 용서, 용서의 방법과 실제 과정을 자세하고 친절히 설명하면서, 결국 베풂과 용서는 일상이란 주장을 전개한다.
삼위일체 신학
이 책 곳곳에는 볼프의 여러 신학적 고민도 고스란히 스몄다. 예를 들어, 우리가 벌이와 소유를 하나님의 선물로 여긴다면, 경쟁이 아닌 협력을 도모하고 개인의 축적에서 벗어나 모두의 평형을 이루는 목표를 세울 것이라고 말한다. 이어 에리히 프롬의 언어를 사용해 존재가 부요하지 못해 생긴 결핍 증세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소외시키는지, 또 부요한 존재는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미래를 바라보는지 설명한다. 이는 성령 안에서 노동으로 종말론적 삶을 구현할 수 있다고 밝힌 《일과 성령》을 떠올리게 한다.
또 다른 예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용서는 피해자가 치유를 위해 기억하되 정직하게 기억하고 궁극에는 망각할 때 완성된다는 주장을(《기억의 종말》), 피해자는 가해자를 향해 배제와 포용의 척도 안에서 겸손하고 현명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제안을(《배제와 포용》) 조심히 건네기도 한다. 나아가 타종교인과 무신론자 안에서 용서하시고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밀한 활동도 언급하며, 인류의 번영을 모색한다(《알라》, 《인간의 번영》).
베풂과 용서의 삶을 설득하는 전체 논의에서 백미는 글의 전반에 깔린 그의 삼위일체 신학이다. 존재론·구원론·종말론을 아우르며 창조주인 하나님과 구원자인 그리스도, 우리를 좨쳐 영원으로 이끄는 성령을 말할 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친밀한 사귐 안으로 우리를 초대해 선물로 주신 믿음·소망·사랑을 향유하자고 격려할 때, 삼위일체 안에서만 탄생하는 베풂과 용서의 공동체와 사회적 관계 사이에 다리를 놓을 때, 감탄이 절로 나온다.
내용을창조주는 존재와 확고한 신뢰를 주시고, 구세주는 구원과 적극적인 사랑을 베푸시고, 완성자는 영원한 생명과 생생한 희망을 주신다. …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받았고, 죄에서 해방되었으며, 또한 장차 영예롭게 될 것이다. (115, 133쪽)
그러나 볼프의 논의를 따르는 한편에서는, 용서와 화해에 대한 그의 전망이 너무 낙관적이란 의심도 든다. 또한 피해자들에게 베풂과 용서를 성급하게 요구하는 등 조심성 없이 무례한 태도를 야기하리란 염려도 생긴다. 더군다나 그는 가해자의 뉘우치는 자세와 반응이 용서의 조건이 아닌 필연적 결과라고 말한다. 피해자의 용서 자체는 가해자를 향한 책망이기도 하므로, 용서가 먼저 베풀어지면 가해자는 뉘우치고 변상함으로써 용서받을 뿐이다. 피해자는 이와 무관하게 용서해야 하며 더는 가해자의 죄를 헤아리지 않아야 한다. 이 가혹하고 처절한 용서를 해야만 할까? 분노하거나 정신승리 정도에 머물면 안 될까?
그럼에도, 베풂과 용서
《베풂과 용서》를 다시 읽고 글을 쓰는 중 두 가지 일을 겪었다. 지인과의 대화에서 어떤 오해로 잠시 냉기류가 흘렀는데, 곧 상대방은 오해의 이유를 설명하며 사과했다. 나는 진솔한 사과의 말을 들으며 내가 던진 말이 얼마나 경솔했는지 바로 알아 뉘우쳤고, 그렇게 소상히 알려줘 죄송하면서 감사했다. 표면적으로 먼저 용서를 구한 이는 상대방이었지만, 사실 이는 내게 용서를 베풀어준 것과 같았다.
또 다른 일은 막역지간인 어느 부부의 다툼이었다. 사소한 실수로 시작된 논쟁에서 몇 단어가 누적된 감정의 올에 걸렸고, 이는 다툼으로 번졌다. 중간에서 양쪽 말을 듣다가,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들며, 심지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해의 정도에 따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무 조건도 없어야 함을, 다시 말해 손 내미는 이는 불편과 괴로움의 몫을 오로지 혼자 감수할 각오까지 해야 함을 느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 젊은 부부가 갈등을 전환할 새로운 베풂과 용서의 계기들을 그들의 삶 가운데 숨겨두셨음을 믿는다.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에는 이렇게 크고 작은 용서가 발생해야만 한다. 인식하지 못할 뿐, 우리는 이미 깊고 풍성한 베풂을 주고받으며 다채로이 움직인다. 따라서 삶을 지속한다는 것은 베풂과 용서에 기대 숨 쉰다는 의미일 것이다.
야박한 세상에서 어쩌면 볼프의 낙관, 베풂과 용서가 정말 방안일 수 있겠다. 볼프의 부모는 아들을 죽인 주범을 어떻게 용서했는지 묻자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보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라고 하더구나. 그래서 우리도 용서하기로 결심했단다.”(191쪽)라는 단출하지만 정확한 대답을 내놓는다. 그는 이런 부모의 고통스러운 용서를 근거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용서를 근거로 우리가 베풀고, 각별히 용서하길 재촉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값없이 주신 은혜인 베풀고 용서하는 능력과 권한으로 살라고 말한다.
우리 삶에 세상의 폭력과 억압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기댈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서로를 받아들여 얽히고설킨 단단한 관계를 맺고, 이들이 안심하며 들어와 진정으로 숨 쉴 수 있게 곁을 내주어야 한다. 우리의 언어와 행실, 생각과 움직임에서 희망을 포착하고, 그리스도께서 고난 중에 함께 계신다는 진실을 놓치지 않으며, 이들 스스로 베풂과 용서란 지난한 과정을 겪어내 마침내 망각으로 자유로워지기까지, 머물 장소를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오래 걸리고 어렵겠지만, 당연한 우리의 역할이다.
관대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무조건적인 관대함의 공동체 외에 숨찬 사회보다 더 가쁘게 서로를 지탱해줄 버팀목이 떠오르지 않는다. 볼프는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세상, 온갖 악행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세상,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의 세상”(347쪽)이 하나님을 본받는 우리의 삶을 통해 이뤄질 것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리하셨으니 말이다.
■ 함께 읽을 볼프의 책
· 《일과 성령-새 창조와 성령론적 일 신학》(2019)
· 《인간의 번영-지구화 시대, 진정한 번영을 위한 종교의 역할을 묻다》(2017)
· 《기억의 종말-잊히지 않는 상처와 포옹하다》(2016)
· 《알라-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같은가》(2016)
· 《배제와 포용》(이상 IVP, 2012)
· 《삼위일체와 교회-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교회에 대한 가톨릭, 동방 정교회, 개신교적 이해를 찾아서》(새물결플러스, 2012)
* 기타: 최경환, 〈미로슬라브 볼프: 자기 내어 줌과 받아들임의 공공신학〉,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철학과 신학의 경계에서》(도서출판100, 2020)
이민희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대학원에서 토목공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에라스무스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청소년 목회를 한다. 옮긴 책으로 《사막의 지혜》(공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