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에서 출발하는 연대의 자세
[357호 김다혜의 독서일기]
“긴 침묵의 시간, 홀로 많이 힘들고 아팠습니다. 더 좋은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꿉니다.”
지난 7월 13일, 한 여성단체 사무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추행 피해자가 쓴 글이 대독되었다. 서울시장의 자살과 성폭력 피해 고소 및 피해자에 대한 언급이 없는 유서 내용이 보도되자 시민들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한쪽에서는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다른 쪽에서는 애도와 추모를 정치적 입장에서 거부했다. 세상에는 흠결 없는 사람은 없고, 따라서 누군가를 평가할 때 공과를 모두 살펴야 한다는 ‘원론’도 펼쳐졌다. 옹호와 반박이 오가며 토론과 공박이 뜨겁게 이어졌다.
피해자 김지은, 노동자 김지은, 연대자 김지은
지난 한 주 젠더 폭력, 위계에 의한 성폭력 사건들은 ‘촘촘히’ 보도되었다. 팀내 폭언과 (성)폭력에 시달리다 목숨을 끊은 고 최숙현 선수, 8테라바이트에 가까운 양의 아동 성착취물을 보유한 사이트 운영자에게 내린 사법부의 인도송환 거부, 한 여성 연예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범죄자에게 판결된 불법촬영 무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끝나지 않은 정치적 야욕과 이를 도운 힘 있는 정치인들. 울분이 터진 시민들의 대응은 신속했다. 《김지은입니다》가 ‘역주행’을 하며 인문사회 분야의 1위를 달리게 한 것이다.
안희정 전 지사의 비서였던 김지은 씨가 미투 이후 554일간 쓴 글을 엮은 이 책은 김지은 씨가 미투를 하기까지와 미투의 과정, 그리고 세 차례의 재판 끝에 유죄가 확정된 후의 일상을 담았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게 다가온 것은 위계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 김지은’과 함께 ‘노동자 김지은’ ‘연대자 김지은’으로서의 목소리까지 간절하게 담긴 데 있다.
전자의 경우,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비서라는 특수 직업군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차기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힘 있는 정치인’의 비서라는 직업, 무엇보다 평판이 중요하고 ‘꼬리표’가 달려서 그만두어도 다른 직장을 구하기 어렵다는 것, 모든 것이 선거에서 이기고 지는 문제로 환원되어 다른 문제는 지워지기 쉬운 정치‘판’에 노동자로 들어간다는 것의 의미를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특히 비서로 일하는 다른 연대자가 쓴 “비서 업무의 특수성과 권력 관계”라는 글에서 업무의 종속성과 위계가 직관적으로 다가왔다.
한편 ‘연대자 김지은’에서는 성폭력 상담소에서 자원봉사를 하다가 성폭력전문상담원 교육을 받게 되는 김지은 씨의 모습이 나온다. 여기서 그녀는 지난 기억을 끄집어내 기록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피해와 고통을 말하면서 사건을 객관화할 수 있었다고 덧붙이는데, 다시금 피해자의 ‘말하기’에 대한 중요성을 느낄 수 있었다.
책 중간중간, 그리고 후반부에는 연대자들의 응원 메시지 및 김지은 씨와 연대하는 이유들이 실려 있다. 그중 SNS에서 화제가 된 것은 김지은 씨의 첫 조력자이자 안희정 대선캠프에서 함께 일했던 문 선배의 말이다. 그는 친밀하고 오랜 관계였던 안희정이 아닌 잘 모르는 김지은 씨를 도왔다. 이유를 묻자 그는 군대 경험을 이야기하며, 친밀도와 별개로 “계급과 권력의 차이가 확실한 둘을 동일 선상에 놓고 사실 관계를 물어본다는 것은 공정하지도 않고, 피해자에게도 가혹한 처사라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박원순 시장의 죽음의 원인을 성폭력 피해자에게 돌리며 비난하는 여론과 ‘꽃뱀’ 몰이, 그리고 그 신상을 캐내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서두의 한 ‘원론’에 대해 생각한다. ‘공과를 둘 다 평가해야 한다’는 것은 문장만 놓고 봐서는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존재하고 그 사이에 위계질서가 있음을 간과하여, 옳되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결과를 낳는다.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힘의 차이가 있는 피해자를 끝내 외면하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듣기’에서 시작하는 공감의 정치
그렇다면 어떤 태도가, 어떤 일들이 우선 되어야 할까? 사법체계 혹은 공동체 안에서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고, 가해자가 사라져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경우 적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공동체 안에서 진실을 밝히고,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시스템을 만드는 일, 동시에 입을 막거나 비난하는 세력들에 맞서 피해자를 보호하며 그의 회복을 돕는 데 힘쓰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일들이 당연하지도, 쉽지도 않다. 유명인이나 정치인 같은 사람이 아니면 피해자의 호소가 공론화되기 어려운 현실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미국의 법철학자 누스바움은 우리 시대의 혐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평등이 아닌 인류애의 ‘정치’를 제안한 바 있다. 인류애의 정치란 ‘한 사람’으로서의 상대방을 ‘존중’하는 일이다. 그런데 누스바움이 말하는 존중은 반드시 타인에 대한 ‘상상력’을 담보로 할 때 이뤄진다. 여기서 상상력은 무엇을 의미할까? 상대를 나와 똑같이 감정을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한 사람’으로 대하는 공감의 능력이다. 이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 법과 정치라는 시스템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상상력의 부재는 곧 도덕적 둔감성, 즉 상대방을 존중할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고 누스바움은 지적했다.
다시 생각한다. 상상력과 공감만이 고통을 호소하는 누군가의 곁에 서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면, 그 길에 이르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것은 피해자의 ‘말하기’에 대한 ‘경청’에서 출발한다. 이 책은 그 첫걸음이 되어주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