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인간이자 진정한 영웅이란? : 《인간폐지》읽기

[358호 팬데믹 시대의 신학서 읽기]

2020-08-18     이민희

2009년 1월 15일, 승무원과 승객 155명을 태운 뉴욕발 여객기에 갑자기 버드 스트라이크(운항 중인 항공기에 조류 등이 충돌하여 생기는 항공사고)가 발생했다. 양쪽 엔진은 동시에 고장 났고 동력을 상실한 여객기는 추락하기 시작했다. 당시 기장인 체슬리 설렌버거, 호출명 ‘설리’는 오랜 경험과 직관으로 재빠르게 비상 착수(着水)를 결정해 뉴욕 허드슨 강으로 진입했다. 강물이 충격을 흡수할 것이고, 주변 페리와 보트가 그들을 목격해 구조할 것이며, 착수에 실패해 화재가 나더라도 지상 착륙보다 그 피해가 현저히 작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고 직후 3분 28초 만에 여객기는 안전하게 활공해 착수했다. 그리고 이어 20분 동안 사망자 없이 전원 구조됐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이 ‘허드슨 강의 기적’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관제사와의 긴박한 교신 중 침착하게 대안을 세우는 노련한 기장의 목소리. “We are gonna be in the Hudson(우리는 허드슨 강으로 가겠다).” 활공한 여객기가 안착한 후 민간 선박들이 일제히 다가와 탑승객을 구조하는 장면, 뉴욕 시민들의 환호성은 여전히 큰 감동과 경탄을 불러일으킨다.

이쯤에서 질문을 던져보자. 여기에서 ‘큰 감동과 경탄’은 단지 어떤 사건에 대한 개인 감정에 불과할까? 주관적 가치이므로 사실보다 덜 중요하며, 때론 무시해도 되는 것일까?

C. S. 루이스, 그리스도교 낭만주의적 이성주의자
C. S. 루이스의 목소리를 빌려 대답 먼저 하자면, 아니다. 루이스는 모든 가치 판단에는 객관적인 원천이 있다고 주장했다. 편의상 ‘도’(道)라고 일컬은 이 원천은 자연법, 도덕률, 전통적 도덕, 실천이성의 제1원칙, 바른 행동 규범 등 다양하게 불린다.

지구상의 한 유기체인 인간이 다른 존재들과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법칙을 ‘자연법칙’이라고 한다면(중력, 유전, 화학 법칙 등), 인간 본성만 고유하게 갖는 옳고 그름에 대한 법칙을 자연법, ‘도덕법칙’이라고 한다. 이는 문명과 시대가 바뀌어도 도덕의 토대를 이루는 객관적인 가치이다. 인간이라면 이를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지향해야 하지만, 또 이를 거부할 수도 있다. 현상을 보며 규칙을 찾고 그 규칙들을 원리 아래 통일하는 능력을 따라, 즉 이성을 따라 인간은 자연법칙과 도덕법칙을 탐구한다. 자연법칙을 연구하고 분석해 세계를 이해하고, 도덕법칙을 숙고하며 스스로 반성한다. 루이스가 특히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도덕법칙에 대한 성찰을 강조했던 이유는 용서가 핵심인 그리스도교를 변증하려면 바로 인간의 ‘죄의식’에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20세기 중반 옥스퍼드를 중심으로 형성된 그리스도교 낭만주의자 중 한 명이다. 이들은 도덕이 “단일하고 완전하면서 초월적이고 형용 불가능한 존재이자 필연적으로 관심의 실재 대상”이신 하나님을 반영하므로, 도덕철학은 당연히 이런 특성들을 두루 갖추고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당시 유럽 전역에 팽배했던 사상은 17-18세기 이후 고착된 주관주의 또는 상대주의였다. 이 사상은 자연과 인간 사회에서 작용하는 보편타당하고 항구적인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확인 가능한 사실만을 참과 거짓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다 보니 이외 진술은 모두 가치 판단이며, 가치 판단 진술은 대상을 보고 느낀 개인의 감정, 심리상태에 의존한 진술일 뿐, 대상의 속성을 드러내지 못한다. 결국 예술, 신앙, 도덕에 관한 진술이 추구해야 할 객관성과 보편성은 사라진다. 게다가 주관주의를 따를 때 미적, 도덕적, 지적 가치는 자의적이고 개인적인 반응이므로, 결국 모든 것은 상대적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겉으로 확인 가능한 사실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더라도, 보고 느낀 감정의 표현이 진정으로 대상에게 합당한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다. 적절한 감정을 느끼고 싶어서든, 감정을 분별하기 위해서든, 절대 기준이 필요하다.

그리스도교 낭만주의자들은 이런 완전하고 초월적인 절대 가치가 이성과 더불어 창의력을 통해 전해진다고 믿었다. 여기서 이들에게 낭만주의란 호칭을 붙인 이유를 알 수 있다. 기능적인 이성이 과하게 각광받는 차가운 풍조에 반발해 18세기 후반부터 대두한 낭만주의가 직관, 기억, 창의력, 경험을 중시하는 경향을 띤 것처럼, 그리스도교 낭만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정신을 반영한 자연법을 강조하되, 단지 이성만으로 이를 파악하기는 어렵고 창의력이란 도구도 함께 사용해야 함을 인정했다.

루이스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갔다. 무신론자였던 그는 회심하는 과정에서 이성과 상상력 사이의 긴장이 허물어져 조화를 이루는 신비한 체험을 했고, 그리스도교와 성서 안에는 진리를 비추는 상상력이 이미 충만히 펼쳐지고 있었음을 발견했다. 우리가 지금 읽는 그의 수많은 글들, 치밀한 변증, 진솔한 삶의 고백과 묵상, 광활한 세계관이 깊이 깃든 소설은 합리적 논증부터 신화적 상상력까지 자유로이 넘나든다.
 

자연법과 상상력을 심어주는 교육
루이스가 보기에 참된 인간이 되려면 자연법과 상상력은 필수다. 반면 주관주의 또는 상대주의는 절대 가치와 이를 이해하고 실행할 건강한 정서를 무시한다. ‘객관적인 절대 가치란 없다’는 논리만을 ‘절대적으로 허용’하는 모순을 보이면서 말이다. 루이스가 책 전체에서 씨름하는 문제가 바로 이것, 가이우스와 티티우스의 《녹색책》과 오르빌리우스로 대표된 주관주의, 구체적으로 반실재론과 자연주의다.

앞서 설명했듯이, 반실재론은 가치가 독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한다. 단지 심리적 상태에 대한 개인적인 반응, 선호나 감정에 불과하다고 치부한다. 예를 들면, 반실재론자가 보기에 허드슨 강의 기적을 보고 느낀 ‘큰 감동과 경탄’은 그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드러내질 못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큰 감동과 경탄은, 위험한 상황에서 대안을 세우는 인간의 직관, 오랜 경험에서 나온 통찰, 목숨을 건 인간의 협력 등 인간이라면 모두가 인정할 만한 가치를 드러낸 표현이다. 감동과 경탄을 느낄 인간이라면 위기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요소로 이런 가치들을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연법을 인정하지 않고 정당한 감정을 고양할 줄 모르는 반실재론적 교육은 가슴(관대함, 도량) 없는 인간, 뇌(지성)와 장(본능)만 있는 인간을 키워낼 만큼 위험하다.

이어 루이스는 자연주의를 비판한다. 이 견해에서는 모든 대상을 자연법칙을 따라 인과적으로 설명하려 든다. 자연을 합리적으로 설명해내면서 이룬 기술의 진보로 자연을 통제하려 들지만, 사실 이 군림이 목격되는 것은 힘을 가진 인간이 그렇지 않은 인간을 지배하는 장면이다. 자연주의에 몰두하면 인간을 기술 아래 두기 바쁘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허드슨 강의 기적은 이후 여러 다큐멘터리와 영화로 재구성됐다. 그중 2016년 개봉한 〈설리〉란 제목의 영화는 한국에서도 꽤 흥행을 거뒀는데, 이야기 중 매우 인상 깊은 장면이 하나 나온다. 사고 조사를 위한 청문회에서 미연방교통안전국이 공항으로 회항하지 않고 비상 착수한 설리의 판단이 무모했다고 몰아세운다. 그 근거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와 매뉴얼이었다. 이에 설리가 묻는다.

“무사고 수십 년 베테랑 조종사인 기장의 판단보다, 어떻게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더 믿을 수 있습니까?”

자연주의, 합리주의, 계량주의에 물든 문화가 기계는 신뢰하면서, 인간의 직관과 통찰은 무시하는 모순과 어리석음이 고스란히 비친다. 자연주의에 빠진 인간에게 다른 생명, 동료 인간, 심지어 다가올 미래 세대도 정복과 조종의 대상일 뿐이다. 루이스는 이런 교육이 궁극에는 인간을 폐지시킬 것이라 말한다.

이런 반실재론과 자연주의에 빠지지 않을 대안은 가치, 감정의 판단이 개인적이지 않으며, 절대적 실재 자체에 근원을 둔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이는 우리가 현실에서 자연법이 아닌 실정법의 영향 아래 산다는 사실에서도 우선순위를 갖는다. 실정법도, 이데올로기도 자연법의 단편이긴 하지만, 특정 시기와 집단, 문화에 적합한 국가 정책, 사회 법률, 공동체 규율 등이 자연법과 정면으로 충돌한다면 해당 실정법의 당위성을 재고해야 한다. 그렇다면 참된 교육이란 인간에게 자연법의 우선순위를 알아볼 수 있는 시각과, 부조리한 실정법에 문제를 제기해 제자리를 찾는 기술을 심어주는 일일 것이다.
 

자연법과 그리스도교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도 자연법, 도덕률 자체를 중요하게 다룬 흔적은 여럿 눈에 띈다. 우선은 십계명이다. 마르틴 루터는 계명에 대해 종교와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마땅히 행해야 하고 삶의 표면에서 드러나야” 한다고 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지키려면 “성령의 도움과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는 산상수훈에서 구약의 십계명을 더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확장한다. 바울의 편지들 속에도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지 옳은 것과, 무엇이든지 순결한 것과, 무엇이든지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지 명예로운 것과, 또 덕이 되고 칭찬할 만한 것”(빌 4:8, 새번역)을 권하고 장려하는 대목이 많이 나온다.

도덕률을 얼마나 지켜내는지 여부로 구원 자체를 논의하려 한다면 어느 누구도 이런 논의에서 혜택을 입지 못할 것이다. 도덕률을 의식할수록 우리는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 선과 악을 구별하는 예민함으로 죄책감을 느낀다. 자연법은 “자기 힘으로 이 죄책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변증적으로 밝힌다. 자연법을 고민한다는 것은 삶의 실제에서 구체적인 악을 겪고 이런 죄악을 행동으로 옮기기도 한다는 반증일 것이다. 우리는 도덕률을 지키기 위해 도덕의 한계에 다다르고,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참된 인간이자 진정한 영웅
허드슨 강의 기적은 음악가에게도 영감을 줬다. 한 밴드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의지와 도리로 궁지와 역경에 맞서 … 세상의 암울한 말들에 맞서 … 강물보다 차가운 당신의 머리로 … 참된 인간이자 진정한 영웅임을 드러냈어요.
- College and Electric Youth의 〈A Real Hero〉



플라톤이 《공화국》에서 극찬하며 말했던 도량을 통해 지성이 본능을 다스리도록 잘 양육받은 인간, 루이스가 추구했던 덕과 모험적 기상을 갖추고 창조적 감정을 고귀하게 발휘하는 인간이 곧 참된 인간이자 진정한 영웅이라고 말한다.

팬데믹이란 낯선 단어가 어느덧 일상용어가 된 요즘, 우리는 참된 인간이자 진정한 영웅을 매일 접한다. 최전선에서 헌신하는 의료진과 방역노동자, 익명으로 소외계층을 챙기는 관대한 이들이 그렇다. 어디 이뿐인가. 피조세계의 파괴를 안타까워한 이들이 평화의 걷기를 한다. 성범죄, 혐오와 차별에 그대로 노출돼 도움의 손길을 갈구하던 이들과 연대를 맺고 지지의 목소리를 내는 고마운 이들도 있다.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무비자로 대거 입국한 예멘 난민을 기꺼이 포용한 마을도 있었다. 난민들이 잘 정착해 삶을 꾸려간다는 기사는 볼 때마다 기쁨을 준다. 더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이런 참된 인간이자 진정한 영웅은 우리 주변에 멈추지 않고 나타난다.

이들에게서 기쁨을 느끼고 소망을 발견할 수 있는 이유는, 모두를 아우르는 궁극적 가치가 실재함을, 물질 아래 인간이 있지 않음을 몸소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몸담은 악한 현실에서도 눈을 들어 옳고 선한 것들을 사랑할 수 있다고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슴을 활짝 편 고귀한 인간들 덕분에 인간은 폐지될 리 없다.

■ 함께 읽을 책
·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홍성사, 2011)
·요람 하조니, 《구약성서로 철학하기》(홍성사, 2016)
·아이리스 머독, 《선의 군림》(이숲, 2020)
·김진혁, 《순전한 그리스도인》(IVP, 2020)

 


이민희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대학원에서 토목공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에라스무스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청소년 목회를 한다. 옮긴 책으로 《사막의 지혜》(공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