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에 관하여 2
[358호 박용희의 독서일기]
모르고 고르면 생기는 일들
얼마 전 SNS에 글을 쓰며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을 인용해서 넣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몇몇은 공감되는 문장이라고 댓글을 달았지만, 또 다른 댓글은 그 문장이 유명한 ‘오역’이라고 알려주었다. 다들 익숙하게 사용하지만, 사실 원문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잘못된’ 문장이었다.
더 오래전, 군 복무 시절에 요양원으로 위문 공연을 간 적이 있었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는데, 공연의 피날레를 장식할 곡으로 ‘무시로’를 골랐다. 기타 전주가 흐르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앞자리에 앉은 어르신 몇 분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감동의 눈물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할머니 한 분이 “다 필요 없으니 내 아들 데려와라!” 하시며 울부짖으셨고 공연은 그렇게 중단되었다. 무시로는 이런 가사로 시작한다. “이미 와버린 이별인데, 슬퍼도 울지 말아요. 이미 때늦은 이별인데 미련은 두지 말아요.”
용서점은 큐레이팅 책방을 표방하다 보니, 거의 매일 손님들에게 책 추천해달라는 말을 듣는다. 듣자마자 바로 책을 권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처음 온 손님이라면 최소한의 관심사와 키워드 몇 개라도 들은 후에 조심스럽게 ‘이런 책은 읽어볼 만하다’며 한번 살펴보시라고 권해드리는 정도가 전부다. 자신에게 필요한 책을 스스로 고르고, 읽고, 심지어 실패해보는 것까지 독자로서 중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설프게 권했다가 ‘무시로’ 같은 상황이 생길까 몸을 사리는 때도 있다. 실제로 어설프게 책을 권했다가 민망한 상황이 생긴 적도 많다. 해당 분야 박사과정을 밟는 손님에게 어설프게 입문서를 추천한다던가 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에 관한 이야기를 멈출 수는 없다. 기왕 해야 할 책 추천이라면 더 잘하고 싶다.
고군분투 중인 리뷰어들에게 권한다
리뷰는 본질적으로 누군가에게 책을 추천하는 행위다. 아주 가끔은 ‘이 책은 읽지 말라’는 취지로 쓰기도 하지만, 대체로 내가 읽은 책을 다른 독자들에게도 읽어보라고 추천하는 취지로 쓴다. 매일 쏟아지는 신간과 이미 쏟아졌던 구간 사이에서 대다수 독자는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정신이 없다.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고르지 못하는 상황이다. 선택지가 많아도 너무 많다. 그럴 때 리뷰어의 추천은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아 특정한 책과 저자에게 머물게 하는 효과가 있다. 지난 회차(355호)의 글에서 말한 것처럼, 출판 생태계의 건전한 성장을 위해 이런 ‘리뷰어’의 존재는 소중하다. 더 많아져야 하고, 더 다양해져야 한다. 책방 주인이 아니더라도,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각자의 독서를 반영한 추천이 가능하다. 더욱이 기왕 하는 추천이라면 나처럼 민망한 오독이나 실수를 하지 않고 ‘잘’하면 좋겠다. 최근 출간된 김진혁 교수의 《순전한 그리스도인》처럼 말이다.
엉뚱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고군분투 중인 리뷰어들이 떠올랐다. 다들 대가도 없이 참 열심히 책을 소개하고, 권하는 이들이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순전한 독자로서 책을 읽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말하고 쓰는 사람들. 이 책은 그들에게 하나의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는 책이다.
리뷰 너머의 리뷰를 위하여
우선, 저자의 전공은 조직신학으로 C. S. 루이스를 다루기 유리한 전공은 아니다. 저자가 루이스에 대해 관심 갖고, 이렇게 책까지 낸 것은 사적인 관심과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다. 책에도 나오는 것처럼 유학 시절 우연히 그가 묵게 된 집이 루이스의 생가였던 것이다. 전문가여서가 아니라, 별도로 시간을 내어 따로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한 결과물로 이 책이 나왔다는 점은 ‘아마추어’로서 책을 소개하고 권하는 이들에게는 조금 희망이 될까.
책을 권하는 일이, 리뷰를 쓰는 일이 단순히 ‘요약’에 그치는 건 아쉬운 일이다. 이 책은 루이스의 회심이 담긴 전기 《예기치 않은 기쁨》을 뼈대로 하고 있지만, 내용 요약에 그치지 않는다. 아예 책 서두에 루이스의 자서전이 신뢰할 수 없는 내용이 있으며, 그래서 ‘자서전의 수수께끼’라 불린다는 점을 밝히고 시작한다. 이런 이유로 독자는 이 얇은 책을 읽으며 루이스의 실체에 다가가는 일종의 추리 게임이나 퀴즈를 푸는 것 같은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기존에 알려진 익숙한 내용만이 아니라, 중요하지만 번역되지 않았던 다양한 자료들을 사용해서 그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루이스에 관한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준다. 모든 리뷰어가 모든 책을 이런 방식으로 소개할 수는 없겠지만, 종종 기존에 알려진 내용을 나열하는 너머로 도전해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작업을 통해 독자들은 납작했던 저자나 저서에 대한 시각을 입체적으로 바꿀 수 있게 되기도 한다. 리뷰를 통해 이룰 수 있는 최상의 결과가 아닐까. 당장 루이스만 해도 대다수 기독교인이 그 이름을 알고, 《순전한 기독교》의 경우는 완독은 아니더라도 한 번쯤 읽어보거나 들어봤을 것이다. 그리고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라는 타이틀로 루이스를 떠올린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다시 보게 되는 루이스는 ‘변증가’라는 단어로 설명하기에는 한참 부족한, 훨씬 흥미로운 인물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상상력’ ‘신화’라는 단어를 곱씹다 보면 우리가 그동안 대체 이 흥미로운 저자를 어떻게 소비하고 있었는지, 전반을 돌아보게 되기까지 한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아니 무슨 리뷰가 그리 대단한 거라고!’ 하는 독자들의 반응이 예상된다. 맞다. 모든 리뷰가 대단하지 않고, 큰 반향 없이 조용히 사라진다. 하지만 몇몇 리뷰는 한 작가를, 그 작가의 책들을 다시 읽게 하는 힘이 있다. 《순전한 그리스도인》이 나에겐 그렇게 읽혔다. 부디 이 책과 같은 웰메이드 리뷰가 독자들에게 기쁨을 제공하게 되기를!
박용희
부천시 역곡에서 동네책방 ‘용서점’을 운영한다. 동네에서 이웃들과 온갖 작당을 하며 산다. 《낮 12시, 책방 문을 엽니다》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