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채식 지향의 나날

[359호 커버스토리]

2020-09-22     이차희

존재만으로 축복받았던 삶

자본주의적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모두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냉혹한 계산대 위에 올라야 한다. 우리도 언젠가 쓸모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혀 공동체 밖으로 내동댕이쳐질지 모른다. 그러나 진정한 가치는 저울에 달 수도 없고 바코드를 찍어 계산할 수도 없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너나없이 동등하고 귀하기에 값어치를 따져서는 안 된다. 정말 그래서는 안 된다. (장노아, 미싱애니멀, 이야기나무, 27)

편집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한 지 몇 년 안됐을 때, 멸종위기동물을 그리는 작가의 책을 작업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어떻게 하면 일을 더 잘할 수 있을지에 온통 신경을 쏟아서 책이 전하려는 메시지에는 관심을 갖지 못했다. 정해진 근무 시간을 넘겨서 일하는 분위기가 당연하던 시기. 집단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개인을 희생해야 하는 사이클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이 바로 그 생산성을 꼬집고 있음에도 읽어내지 못했다. 그간 내 가치를 증명해야 했던 수많은 과정들 역시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살 만한 사람이에요!”나는 쓸 만한 사람이에요!”가 동의어라고 생각하며 달려온 시간들. 내 가치는 생산성이란 이름이 붙은 거대한 저울 위에서 계산되고 있었다.

성경을 펴보니 창세기에 묘사된 사람의 일과는 아주 단순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돌보고,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기. 하나님은 사람에게 땅을 돌보며 거기서 얻은 열매로 양식을 삼으라 하시고(1:29; 2:15), 다른 존재들에게 이름을 붙이게 하심으로써 혼자가 아닌 공동체로 모든 생명과 함께 살아가게 하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다는 게 무언가를 이뤄내기 위해 끊임없이 달려 나가는 게 아니라, 그저 창조된 세상을 함께 누리는 일뿐이라니. 큰 해방감이 들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는 지음받은 대로 살아가기엔 스스로를 죄된 존재로 훼손했다. 이제는 창조된 그대로가 아닌 거룩한 백성으로 가는 길을 따라야 한다. 그 길목에서 우리는 훼손된 세상을 마주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주한 세상은 갈 곳 없는 이들을 착취한 애굽이었다. 출애굽기에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얼마나 과중하고도 불가능한 노역을 요구당하면서 생명 아닌 존재로 착취당했는지, 스스로 착취 구조에 매여 출애굽 이후에도 자기 해방을 이루기 어려웠는지 묘사한다.

이스라엘 자손을 부리는 공사 감독관을 두어서, 강제노동으로 그들을 억압하였다. 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일이나 밭일과 같은 온갖 고된 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괴롭히므로, 그들의 일은 매우 힘들었다.”(1:11, 14, 새번역)

이스라엘 백성의 인구가 늘어나자 위협을 느낀 애굽왕은 벽돌이나 회반죽 만드는 일과 같은 고된 노역을 시켰는데, 심지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내려 할 때엔 벽돌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짚마저 제공하지 않았고 스스로 마련해서 생산량을 맞추라고 명령했다. 쉼을 주면 저들이 예배할 것이라며 휴일도 주지 않는다. 강제노역을 통해 억압하려 했을 뿐 아니라 예배하지도 못하게 한 것이다. 이 성경 본문과 지금의 세상이 겹쳐졌다. 애굽이 그러했듯 힘을 가진 자는 약자를 착취의 대상으로 다루며 그 존재를 지워버린다. 이는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태초의 세상과는 매우 달랐다. 하나님은 그때도 지금도 그분의 질서로 창조된 세상을 우리가 돌보기는커녕 왜곡해 왔음을, 그 왜곡의 결과를 매번 마주하고 있음을 말하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들으시고 애굽의 착취로부터 이들을 구해내시어 새로운 주인이 통치하시는 새 땅으로 초청하셨다. 그 땅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는데 그중 하나가 안식일 명령이다. 내일의 것을 미리 준비하지 않고도 매일 그날만을 위해 양식을 거둬들이게 하셨고, 안식일을 위해선 미리 준비할 수 있게 하셨다. 그날엔 노동하지 않을 수 있었다. 쉴 새 없이 노역을 해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갑작스레 주어지는 이 은 아주 낯선 명령이었을 테다. 창조된 정체성을 깨달은 후, 쫓기듯 달려왔던 걸음을 멈추는 건 나 역시, 낯설고 두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식을 통해 착취로 훼손된 존재를 회복하시려 했고, 창조된 삶을 풍성히 누리길 원하셨다. 이는 촘촘히 계급화된 이 시대의 착취를 멈추시며 피조세계를 안식으로 초대하시려는 손길로 확장할 수 있다. 나를 포함해 안식이 필요한 많은 이들이 떠올랐다.
 

창조의 모습을 회복하는 채식 지향의 삶
그러다 미싱 애니멀을 새로운 작업으로 다시 만나게 됐다. 그림을 하나하나 다시 살피고 멸종위기동물에 대해 써내려간 글을 읽으면서, 외면하고 싶었던 세상이 폭로된 기분이 들었다. 동물들이 멸종된 이유는 대부분 서식지 파괴, 사냥과 채집, 학살 등 사람들의 이익 때문이었다.

서식지 파괴는 기후변화, 무분별한 팜유 소비, 아보카도의 유행 등으로 여전히 진행되고 있고, 가죽의 상품화와 화장품 공정에 들어가는 동물실험은 우리의 이익만을 위해 당연시되고 있다. 이들을 멸종시킨 일에 내가 동참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나 역시 나보다 약한 누군가의 삶을 계속해서 지워버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내가 누군가를 착취하는 구조를 외면한다면 나 또한 약자의 위치에 있을 때 누군가로부터 외면받지 않을까 두렵기도 했다. 내가 착취당하고 싶지 않은 만큼만이라도 내가 가하고 있는 폭력을 멈추고 싶었다.

책 작업의 영향이 컸는지 자연스레 동물들이 인간의 폭력에 어느 정도로 희생당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공장식 축산에 대한 강의를 듣기도 하고, 비건 관련 서적을 읽으며 산업화된 구조와 폭력의 크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한 생명이 상품이 되기 위해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고, 알을 낳고 젖을 짜는 기계로 취급당하는 시스템은 인간의 삶이 상품으로 취급되어 존중받지 못하는 방식과 유사했다. 태어남만으로 축복받았던 인생이 사회 시스템에 맞춰 희생되고 재생산을 위한 도구로 여겨지는 방식은 동물들에게도 동일하게 가해지고 있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아주 작게라도 끊어낼 수 있다면, 나와 내 옆 사람의 고리 역시 끊어지는 일로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 존재만으로 충분한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창조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고기를 먹지 않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였다. 우유를 두유로 바꾸고 가죽 제품과 오리털 패딩을 사지 않았다. 공장식 축산의 실상을 고발하고 동물들의 살 권리를 위해 대신 목소리를 내주는 단체들에 후원을 하고, 가능한 채식 식당을 이용했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이 유행했을 때는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애통함과 죄책감에 한동안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변화된 삶의 방식과 마음으로 비건을 하다가 지금은 채식을 지향하는 쪽으로 이어가고 있다. 나를 포함해 육식을 하는 모두가 이 시스템을 유지시키는 가해자라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시스템에 속할 수밖에 없는 피해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함께 식사를 하는 이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차려 준 음식은 감사히 먹되 주체적으로는 육식을 소비하지 않는 채식 지향을 하고 있다.
 

공동체와 함께하는 하나님 나라
요즘엔 일상에서 또 다른 고민들을 마주하고 있다. 채식을 하기 위해선 생각보다 삶이 여유로워야 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삶의 피로도가 높은 직업일수록 아직 보편화되지 않은 채식 위주의 식사를 주체적으로 하기엔 버거울 수 있다. 나 역시 고된 하루를 보내고 나면 자극적인 식사를 하고 싶고, 쉬는 날에 미리 들르지 못할 경우 퇴근 후 거리가 있는 생협까지 갈 에너지가 없다. 개인의 노력과 더불어 채식을 선택할 수 있는 건강한 환경이 절실하다는 걸 느꼈다. 육식 위주의 음식을 대체할 수 있는 상품들이 개발되는 게 반가우면서도 딸려 나오는 쓰레기 역시 또 다른 악순환의 고리를 만든다는 생각도 들었다. 1인 가구가 채소 하나를 사려면 스티로폼과 비닐을 같이 구매하게 되는데 매번 시장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처럼 상품화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생태계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 채식과 연결되어 있는 노동과 환경 문제만 하더라도 결코 나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혼자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다가도 거대한 구조에 눌려 나 자신마저 잃어버리기 쉽다. 그럴 때마다 함께 성도의 삶을 소망하며 일구려는 사람들이 있어 힘을 얻는다.

지금의 나는 혼자가 아닌 여러 공동체와 함께 즐겁게 저항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배제된 타자와 함께 살아가고자 같이 관련 도서를 읽고, 현실을 보여주는 기사나 정보를 나누고, 그럼에도 쾌활함을 잃지 않도록 힘이 되는 이야기를 공유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을 통해 세상에 지지 않는 삶을 배운다. 상품화된 세상 속에서 저항하는 성도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연대하고 공부하며 서로에게 가족이 되어주려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소망을 본다.

이 모임에서는 일상에서 실천하기 어려운 것들을 우리가 함께할 때만큼은 실천하려 한다. 과일을 사더라도 보자기를 이용하고, 디저트를 사오더라도 비건 디저트나 이웃을 통해 선물 받은 것들을 함께 나눈다. 차가 있는 사람 덕분에 일회용품 없이 외부활동을 하고, 각자가 가져온 음식들로 만찬을 즐기기도 한다. 한번은 텃밭을 운영하시는 분에게 그분이 직접 수확한 가지를 선물 받은 적이 있다. 그래서 아무런 쓰레기를 배출하지 않고도 맛있는 채식 요리를 해 먹을 수 있었다. 혼자서만 육식 소비를 줄였을 때는 하지 못했던 상상들이 사람들과 함께할 때는 가능해 졌다.

꼭 신앙으로 모이지 않아도 같은 마음으로 대안을 공유하고 나누는 사람들도 있다. 가끔 만나서 삶을 나누기만 하다가 몇 달 전부터는 한 집에 모여 재활용 쓰레기로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만든다. 안 쓰는 종이들을 실로 엮어 노트를 만들고, 안 입는 우비로 장우산집을 만들기도 했다. 환경과 관련된 정보를 공유하고 맛있는 채식 식단으로 식사를 하고 근처 제로웨이스트 가게를 방문해보는 등 즐겁고 풍성한 일상을 시도하는 중이다. 이 모임 덕분에 채식 지향의 삶에 지칠 때마다 힘을 얻고 다시 도전하게 된다.

교회 공동체에서도 혼자서는 묵상하기 어려운 성경을 정기적으로 함께 읽으면서 성도의 삶을 더 깊게 배웠다. 최근에는 함께 고린도전서를 읽고 있다. 고린도 교회에는 여러 무리들이 있었는데, 그중 육신을 자유롭게 방임했던 무리들과 극단적으로 금욕했던 무리들이 있었다. 전자는 쾌락에만 빠졌다면 후자는 메마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이 무리들을 향해 바울은 마음을 다하여 자유롭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의 자유를 지각없이 행사하지는 마십시오.”(고전 10:32, 메시지성경)라고 말한다. 나의 자유를 쾌락만을 위해 행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얻은 자유를 마음을 다해 누림으로 삶의 풍성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모습은 누군가에 해를 가하는 일 없이 살아가는 것일 뿐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무해한 삶일 것이다.

나아가 바울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에 해가 되는 일이라면 기꺼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는 내 옆에 있는 지체이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속 모든 타자일 것이다. 공동체로 창조된 이 세상 속 누군가가 해를 당하고 있다면, 성도로서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누군가는 저 멀리 있는 멸종위기의 동물일 뿐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지체이다.

바울의 편지를 읽다보면 함께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일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과 닮아있다는 걸 느낀다. 그는 모든 이들과 복음을 함께 누리고자 스스로 모든 이의 종이 되어 타자의 세계로 들어가려 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된 세상을 회복하고 새 생명을 주고자 자신을 희생함으로 우리와 연합하신 방식과 일치한다. 자신을 기꺼이 내어줌으로 우리의 세계로 들어오신 예수처럼, 신음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들을 새로운 삶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우리를 기꺼이 내어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구식 우주선'을 쏘아올린 우주비행사처럼

최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이 책에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슬렌포니아행 우주선을 오랫동안 기다린 한 우주비행사가 등장한다. 그러나 더 효율적으로 우주를 여행할 수 있는 방법이 등장하면서 비효율적인 방식으로만 갈 수 있는 행성으로의 운항편이 폐쇄되어 그곳으로 갈 수 없게 되었다. 긴 기다림 끝에 결국 그는 이 말을 남기고 자신의 구식 우주선을 스스로 우주에 쏘아 올린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어.” 문학평론가 인아영의 말을 빌리면 그녀는 실패가 예견된 항해를 떠나면서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 이야기가 한동안 내 마음을 맴돌았다. 코로나 이후로 거대한 힘들 앞에 나의 작은 저항이 쓸모없어 보여 한동안 무력감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올 여름 쏟아졌던 비의 이름이 장마가 아니라 기후위기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큰 허무감에 빠져있었다. 피부로 실감하고 있는 기후변화와 이미 지구는 망했다는 말들 앞에 내 일상의 작은 영역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변화를 바라며 지금까지 걸어왔던 걸까. 나 한 사람이 채식을 하고 쓰레기를 줄이는 게 성과가 없으니 방식을 바꿔야 하는 걸까?

이 시기를 기점으로 더 급진적인 활동을 찾아볼 수도 있었겠지만 먼저 내 마음의 동기를 다시 살피게 되었다. 내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란 자만, 하나님에 대한 불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눈에 보이는 성과만이 그분의 일하심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성과가 있어야만 성도의 삶이 가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바꿀 거란 열의로 막연한 승리를 외치기보다, 계속되는 실패와 좌절에도 성도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묵묵히 이 길을 걷고 싶다. 눈에 보이는 실패에도 그저 가야 할 곳을 알고, 자신의 구식 우주선을 스스로 쏘아올린 소설 속 우주비행사처럼.

 

 

이차희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지만 이제야 차근차근 참된 성도의 삶을 공부하며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 아주 보통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