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과 집을 향한 욕망
[360호 커버스토리]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 집의 추상적 가치를 구체적 가치와 혼동하다
‘집’이란 부동산이나 건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집’이란 거처를 가리키기에 물리적 장소라는 특성을 갖는다. 하지만 그것이 ‘집’의 전부는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집’이란 우리와 우리 가족의 평안한 안식처를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집에서 평안을 얻기 힘든 상황으로 달려가고 있고, 사람들은 얻기 불가능한 평안 대신 건물 혹은 부동산으로 집을 소유함으로 그 평안함을 대치하고자 한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건물과 비싼 부동산을 소유한다고 해도 가족의 행복과 평안이 주어지는 것은 아님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집이라는 부동산이 없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고 믿으며, 집을 향한 욕망을 멈추지 않는다.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란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서양철학의 근원적 오류를 지적한 말이다. 구체적인 것(the concrete)을 추상적인 것(the abstract)으로 혼동하는 오류. 화이트헤드의 관점에서 구체적인 것이란 가족의 행복과 평안이며, 추상이란 집의 ‘물질적 혹은 법률적 소유’를 의미한다. 삶에서 일어나는 구체성의 경험이란 늘 언어로 반듯하게 포착되진 않는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푸르른 하늘의 아름다움은 여전하다. 이를 우리의 추상적 언어로 얼마나 정확히 포착해 낼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가족의 행복과 평안은 추상적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다.
하지만 언어적 동물인 인간은 언어적 표현을 통하지 않고서는 구체적인 경험을 공유하며 살아갈 수 없기에 실재로부터 추상인 언어를 통해 구체성을 표현하며 삶을 일구어 나간다. 그리고 그 구체성의 경험을 법적인 정의나 물질적 소유를 통해 확보하려는 헛된 시도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이를테면 사랑이 결혼이라는 법적 계약으로 영원히 소유되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러한 법적 추상의 행위를 통해 심리적 안정을 얻으려는 노력이 그렇다.
우리가 집을 가짐으로써 얻고자 하는 것은 가족의 행복과 평안이지 재산의 증식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집의 소유를 통해 부족하나마 심리적 안정성을 얻기를 바라고 구한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집에 관한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를 극복하고 가족의 행복과 평안에 이를 수 있을까?
기호는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가리킨다
최근 집값이 많이 올랐다. 아니 엄청나게 올랐다. 도저히 내 입장에서는 소유할 수 없을 것 같은 수준으로. 그런데 참 신기하다. 우리나라 주택 보급률은 이미 노무현 정부 때 100%를 넘겼다는데, 여전히 집값이 올라간다. 나의 평범한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최근 늘어나고 있는 1인 가족이나 가족의 분리 현상 때문에 좀 더 많은 주택이 필요해져서일까? 아니면 그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집값을 계속 올리는 추동력 역할을 하는 것일까? 내 개인적 직감으로 보건대, 집값 상승은 일종의 주식효과와 같다. 가격이 내려가지 않는 거의 유일한 상품이기 때문에 모두가 집을 사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수요가 있기 때문에 집값은 계속 올라간다. 가상효과라고 해야 할까? 주식의 가격은 회사의 실물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 물론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가장 중요한 효과는 수요이다. 특정 주식을 사려는 수요가 있는 한 가격은 올라간다. 그렇게 가격이 올라가면, 더 수요가 몰린다. 가격이란 절대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요에 따라 가격이 올라간다.
팬데믹으로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커진 지금, 가장 안전한 자산보유와 증식 수단으로 집이 떠오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금의 집값은 그런 효과가 매우 많이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실재 혹은 구멍이다. 자본주의 체제란 자본이 성장해야만 한다. 그런데 어떻게 자본이 끝없이 증식하는 것이 가능할까? 어떻게 세계 경제는 멈추지 않고 성장할 수 있을까? 지구의 자연자원이 무한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자본의 계속된 성장은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데, 성장이 멈추면 국가 경제뿐 아니라 개인의 경제에도 심각한 일이 발생한다. 지금의 집값 급상승은 바로 그런 효과들이 공모하여 나타나는 것이리라. 은행 금리가 거의 ‘제로’에 가까운 상태에서 보유한 자산의 증식이 이루어지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대한민국에서 가격상승이 보장된 거의 유일한 자산상품이 부동산, 그중에서도 ‘집’일 것이다.
그렇게 집은 더 이상 우리가 가정을 꾸리는 시공간을 의미하는 기표가 아니게 되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해진 세상에서, 집을 소유하는 것은 이제 가정을 꾸리는 일이 아니라, 가장 안전한 자산 증식 수단을 갖게 된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우리가 노동을 통해 벌 수 있는 수입이 한정된 상황에서 아무리 저축을 한다 해도 물가 상승률을 쫓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근로소득 이외의 다른 수입원을 찾지 않을까? 더구나 우리 시대는 평생 고용을 보장하는 시대가 아니다. 언제라도 경제 상황에 따라 명예퇴직을 강요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 그만큼 삶의 경제적 불안정성이 높다는 뜻이다. 더구나 65세 은퇴를 보장받는 교육공무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이 40대 말에서 50대 초에 퇴직해야 하는 현실과 달리, 평균수명이 늘어나 누구나 80대 이상의 삶을 대비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은퇴 후 살아갈 시간이 거의 직장생활을 했던 기간만큼이나 길어진 것이다. 하지만 연금시스템은 인구의 소수를 제외한다면 노후를 보장할 만큼 안정적이지 않다. 바로 이러한 상황들이 ‘집’을 통해 재산을 증식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집값 상승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삶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여러 사람의 공모 작용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그중 어떤 이들은 투기 목적으로 다량의 주택을 구매해 기업식으로 운영하여 수익을 보려던 이들도 있겠지만, 단지 그들 때문에 집값 상승이 이루어진다고 결론짓기는 어렵다. 집값 상승은 단지 몇몇 개인들의 이기심 때문에 야기되는 현상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불확실성이 증폭되는 상황을 드러내는 지표로 보아야 한다. 그 불안정성의 지표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읽어야 할까?
기호(sign)란 언제나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즉 ‘대상’을 가리키는 신호이다. 우리의 문제 진단은 대부분 ‘현상’과 ‘증상’을 원인과 혼동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보이지 않는 원인에 의해 야기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집값 상승이라는 현상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 현상을 배태하는 원인 혹은 동력은 현상 이면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현상의 기호가 가리키는 대상은 무엇인가? 집값 상승이라는 기호는 그 자체로 문제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이면에 그런 현상을 야기하는 근원적 원인이 있고, 현상은 바로 그 원인을 가리키는 것이다. 집값 상승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아마도 그 현상이 가리키는 대상은 우리 시대의 불안정성일 것이다. 불안정한 세계에서 집값 상승으로 인한 자산 증식을 통해서라도 붙잡고 싶은 삶의 안정성. 그런데 그 붙잡고 싶은 삶의 안정성이 도리어 집값 상승으로 불안정해지고, 더욱더 집을 갖고 싶은 욕망의 악순환이 작동한다.
나는 불가능한 것을 욕망한다
성실한 노동의 대가로 수입을 모아서 집을 장만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시대, 사람들에게 ‘집’은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곧 집의 소유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불가능하므로 욕망한다. 그것은 욕망의 본질이다.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을 욕망하지는 않는다. 내가 그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내가 그것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끊임없이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곧 그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이 근원적으로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우리가 건물이나 건축물 일부로서 집을 욕망한다는 것은 그것을 소유함이 불가능함을 뜻한다. 구매해서 소유하는 것이 법적으로 가능한데, 어째서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집 소유의 불가능성은 ‘불/가능성’1을 의미한다. 가능해 보이지만 불가능한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불가능성에는 두 가지 차원이 동반된다. 물질적 차원에서 집 소유는 점차 우리 사회 특정 소수에게만 허락된 일이 되어가고 있다. 집값 상승이 워낙 가팔라서, 평범한 사람들의 능력으로는 평생 노력해도 집을 구매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집을 욕망의 대상으로 만드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 평범한 직장인이 성실히 월급을 모아서 집을 장만하는 일이 계산상 불가할 정도로 집값은 이미 상승했다. 이제 집을 장만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여러 가지 재태크 전략이 발휘된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재태크 전략이란 것도 역시 소수의 몇몇 성공한 사람 이야기일 뿐, 모두가 그 전략을 따라 할 때는 이미 불가능한 전략이 되고 만다. 그렇게 집은 물질적 욕망의 대상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불/가능성의 기표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집 소유의 불/가능성은 실물경제의 차원보다 심리적인 차원에서 훨씬 더 심각해지고 있다. ‘집’이라는 말은 영어의 home이라는 뜻과 house라는 뜻을 동시에 함축한다. 즉 건물로서의 집(house)과 가족 구성원이 모인 집합으로서 가정(home)을 동시에 가리킨다. 가정의 물리적 근거가 건물로서의 집이라면, 역으로 건물로서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의 정신적 실체는 가정이다. 영토 본능을 소유한 포유류는 자신의 공간으로서 집에 대한 집착이 생물학적으로 내장되어 있다. ‘집’은 자신의 ‘최적 환경’ 즉 적소(the right place) 구성의 핵심이다. 안전한 상태에서 휴식이 보장되어야만 인간 유기체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기체가 주변 환경을 자신의 적소로 구성한다는 것을 야콥 폰 윅스컬(Jacob von Uexküll)은 ‘주변세계’(Umwelt)로 개념화하여 제시한다. 각 유기체는 자신의 생존과 번식에 중요한 것을 인지하고 대비하고 활동할 수 있도록 환경을 자신의 주변 세계로 파악한다. 그것은 주위 환경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활동이 전혀 아니다. 환경으로부터 유입되는 무수한 기호 중에서 자신의 삶에 중요한 정보들을 중심으로 주변 세계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주변 세계는 물리적인 동시에 정신적인 개념이다. 이 주변 세계 인식에 유기체 자신의 거처가 중심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집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이와 같다. 집은 물리적 공간인 동시에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개념 공간이다.
집을 갖는다는 것은 유기체가 생존과 번식의 단위로서 가족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내용처럼, 유기체는 유전자의 복제와 전달을 위해 자신의 생존과 번식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생물학적 알고리즘을 갖고 있다면, 그 생물학적 알고리즘의 문화적 표현은 바로 가정 형성일 것이다. 가족을 갖지 못한다면 생존과 번식은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인간 유기체의 생물학적 무의식은 가족을 형성하면서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도록 알고리즘화되어 있다. 여기서 필자의 이야기를 생물학적 본질화로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우리의 생물학적 알고리즘이 그렇게 작동하게 되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올바르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은 생물학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집을 향한 욕망 이면에 단순히 부동산으로서의 집을 재산 증식의 안전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결혼해서 가족을 이루지 못해도, 물리적으로 집이라는 부동산을 소유하게 되면 심리적 안정감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나만의 집을 가졌다는 심리적 안정감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집을 갖는다는 것이 가정을 갖는다는 것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행복한 가정’이라는 근대적 이상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혼율이 증가하고, 1인 가족이라는 말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시대가 되어간다. 거기에 더해 ‘혼인율’도 해마다 줄고 있다. 즉 혼인은 줄고, 이혼은 늘고, 그러니 1인 가족이 늘고 있다. 사회 구조적으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일이 이제는 흔한 일이 아니라 흔치 않은 일이 되어가는 요즘,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이나 장소를 구매할 수는 있어도 가정의 가장 본질적인 요인인 식구를 구성할 수 없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집을 가질 수는 있지만, 가정을 이룰 수 없는 시대, 그래서 집과 가정이 분리되는 시대에, 우리의 ‘안정성’은 분열을 겪는다. 그래서 ‘집을 갖는다’는 것은 점점 더 ‘욕망’의 대상이 되어간다. 부동산으로서 집을 소유한다 해도, 그것이 나의 심리적 평안과 안정의 거처인 가정을 갖는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집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욕망하고, 그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바꾸기 위해 불가능한 것의 소유를 가능케 하는 대치물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랑은 억지로 소유할 수 없지만, 물리적 소유가 가능한 부동산으로서 집에 대한 집착과 욕망은 배가된다.
실패한 세상에서 집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
집을 향한 불/가능한 욕망의 추동은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와 팬데믹 시대에 궁극적으로 실패할 운명에 처해 있다. 집들이 자리 잡을 지구가 인간 문명으로 인해 이제 더 이상 인간이 거주할 수 없는 공간으로 변모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어로 ‘oikos’(오이코스)는 ‘사는 곳’과 ‘집안 살림’을 의미하며, 가족, 집, 가족의 귀속물 등을 가리키는 말로, ‘eco-’의 어원이 된다. ‘집’과 연관된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두 학문 분야인 생태학(ecology)과 경제학(economics)이 동일한 말에서 기원하지만, 서로 대립적인 영역을 의미한다는 것은 매우 기묘한 역설이다.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는 산업혁명 이래로 문명을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해주었지만, 그러한 과정을 통해 지구의 기후체계와 생태계를 인간 문명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는 거의 악순환이다. 지구온난화와 팬데믹 같은 재난들을 극복하기 위해 자본주의적 문명의 삶을 극복해야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자본주의 이외의 경제체제를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는 자본주의적 구조 바깥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는 근대 산업자본주의의 융기와 더불어 형성되었으며, 대안적인 문명의 삶을 찾기 위해서 세계 개념을 넘어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것은 곧 우리 세계가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기후변화와 팬데믹을 초래하는 지구온난화와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제적인 노력이 없지는 않았으나, 수십 년 전부터 제시된 여러 가지 노력은 한결같이 결실을 보지 못했다. 우리는 여전히 마치 지구온난화와 생태계 위기가 우리와 무관할 것 같은 태도로 삶의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사실 현 시대의 집을 향한 욕망은 지구온난화와 생태계 위기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동일한 궤를 달려가고 있다. 감당할 수 없이 치솟는 집값은 결국 경제의 발목을 잡을 뿐 아니라, 국민 각자의 삶에 족쇄가 되리라는 경고의 목소리들이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반복적으로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노력과는 별개로 집의 소유를 통해 삶의 안정성을 희구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면서 정부의 부동산 시장 안정화 정책에는 각자의 처지와 상황에 따라 매우 이기적인 반응들이 분출될 뿐이다. 우리는 국제정치와 국내정치가 지구온난화와 생태계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데 실패했던 역사를 반복하고 있는 듯하다. 집이 거할 지구가 실패한다면, 우리가 집의 소유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결국 실패할 운명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교회
우리는 이 지구에 살아가는 모두가 하나님의 한 가족이라는 기독교적 이상을 믿는 기독교인이다. 이를 기독교 제국주의적 발상으로 오해하지는 마시라. 이 글을 읽을 대다수 독자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으로서 우리 믿음이 그렇다는 것이지, 비기독교인을 비존재로 간주하거나 그들을 신앙으로 정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독교인에게 ‘세상’은 계몽기로부터 물려받은 세계가 아니라, 창세기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근간을 두고 있으며, 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각자 자기 삶의 주권을 주장할 주체로서, 모두가 하나님의 한 가족으로서 살아갈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를 가리킨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로마제국 치하에서 초대교회는 심각한 박해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 박해는 유대인들이 로마 당국에 로비를 한 결과 초래된 수준의 박해가 아니었다. 황제를 정점으로 사회의 모든 질서가 신분적으로 위계화된 제국하에서 초대교회는 그 모든 신분적 차이를 넘어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한 형제요 한 자매로서 서로를 부르며,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믿음을 실천하고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고, 도래할 성령님을 고대한다는 것은 곧 이 예배 공동체가 단지 폐쇄적 공동체가 아니라, 앞으로 이 땅 위에 실현될 하나님 나라의 원형임을 믿는 신앙을 뜻했다.
창세기 1장은 각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고, 땅을 정복하고 지배할 주권을 부여받은 주체임을 분명히 선포하고 있다. 이러한 창세기의 선포는 매우 위험하고 정치적이었다. 왜냐하면 고대 제국의 통치하에서 그러한 주권을 소유한 이는 황제 이외의 다른 사람일 수 없기 때문이다. 고대 제국 종교의 신화를 담고 있는 《에누마 엘리쉬》는 신이 인간을 창조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예로 부리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한다. 제국이라는 세계 속에서 그 신은 황제였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황제의 노예가 될 운명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제국의 신화는 주입하고 있었다. 그런 세계에 창세기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다스리고 정복할 주권을 부여받았다고 선포하고 있으니 얼마나 도발적인가. 이것은 세계의 종말을 선포하는 말씀이다. 당대의 사람들이 실재라고 믿었던 세계의 종말 말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신앙은 (비록 요즘에는 신천지라는 이단 집단이 이름을 도용하고 있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믿으며, 이는 곧 기존 세계의 종말을 선포하는 믿음이다. 우리는 세계를 믿지 않는다. 이 세계는 당대 사람들이 신의 노예가 되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우리를 세뇌하지만, 창세기의 저자는 성서 독자들에게 그러한 세계는 우리가 살아갈 세계가 아니라고 분명히 선포하고 있다.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피정복민을 노예로 삼던 고대 제국의 관행을 반복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동등한 주체로서 가족 공동체를 이루라는 명령이다. 그래서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명령 다음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먹을 것으로 과일과 채소를 주신다. 단백질을 섭취해야 하는 잡식성 포유류인 인간에게 채식을 명령하신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아 주권을 세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전쟁과 살육으로 다른 사람들과 존재들을 정복하고 제압하는 나라가 아님을 명확히 한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각 동물과 새들에게 이름을 지어준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단지 ‘성명’을 알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와 한 가족이 되어, 서로의 존재를 승인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름을 짓는 권위가 ‘가부장’에게 있고, 이름이 지어진다는 것은 이제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된다는 뜻이다. 예배 가운데 서로가 형제요 자매로 부른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한 가족이 된다는 뜻이다. 노예에게는 이름이 주어지지 않는다. 물론 다른 노예들과 구별하여 부르기에 편한 호칭은 존재하지만 ‘이름’은 주어지지 않는다. 이름이 주어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시민권을 갖는다는 것이고, 곧 그가 주권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담은 하나님이 데려온 짐승들과 새들에게 이름을 붙인다. 그렇게 아담은 만물과 더불어 가족이 된다.
우리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가정을 이룰 소망이 있을까? 아니면 집을 소유해서 남보다 더 나은 재산 증식의 수단을 갖기 원할까?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우리는 ‘세계의 종말’을 보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체제가 구축한 세계가 뿌리째 흔들리면서, 세계정치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다. 모두가 자기가 믿는 진실이 진리라고 믿으며, 역설적으로 가짜뉴스가 온 세계를 연결하는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 무한정 복제되어 재생산되는 ‘진리 없는 진리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 혼돈의 땅 위에 하나님의 가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예배 가운데 모든 이가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부르며, 서로의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며,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경쟁체제가 야기하는 살육의 문화를 넘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존재를 용납하고 인정하는 하나님의 가족 말이다. 우리는 집을 부동산으로 소유하는 것보다 가정의 회복이 이루어질 때, 집을 통해 확보하려 했던 행복과 평안이 도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몰라서 이 근대적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를 계속 반복하는 것일까?
1 ‘불가능성'을 ‘불/가능성’으로 표현한 것은 철학자 자끄 데리다가 하이데거의 표기법을 모방해서 널리 유행시킨 표기법이다. (‘-’(하이픈)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불가능성'이라고 하면, 그냥 ‘불가능’한 것이지만 라캉의 욕망 이 론에 따르면, 욕망은 ‘불가능한 것’을 욕망하는 습성이 있어서, ‘불가능하므로’ 욕망 되고, 욕망 되기 때문에 ‘가능 한 것'보다 더 ‘실재적인’ 존재의 효과가 있게 된다고 한다. - 필자
박일준
감리교신학대학교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보스턴 대학(S.T.M.)과 드류 대학(Ph.D.)에서 학위를 마쳤다. 특별히 인지과학과 진화생물학의 연구 결과들을 신학적으로 그리고 종교철학적으로 성찰하면서 ‘인-간’ 즉 ‘삶-사이’를 ‘인간-이후’ 시대에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지를 궁리해왔다. 현재 감리교신학대학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소속으로 ‘트랜스휴머니즘 시대의 혼종적 인간론 연구’에 이어 ‘공생의 기호학’이라는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정의의 신학: 둘의 신학》 《인공지능 시대, 인간을 묻다: 포스트휴먼 시대에 대한 종교철학적 신학적 성찰》 등이 있으며, 《자연주의적 성서 해석학과 기호학: 해석사들의 공동체》를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