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밥상’이 평화롭고 평등하고 정의로우려면

[360호 편애하는 리뷰]

2020-10-30     오수경

자신에게 관심이 없고 밥도 차려주지 않는다며, 자고 있던 아내를 나무 빗자루로 때려 숨지게 한 90대 남성이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재판부는 남성이 고령에 치매를 앓는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범행했고, 진지하게 뉘우치고 있으며, 자녀들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여 집행유예를 선고했다고 한다. 이 기사를 읽으며 분노를 넘어 슬픔이 몰려왔다. 88세에 세상을 떠난 피해자는 살면서 몇 번의 밥을 짓고, 상을 차려야 했을까?

누군가는 이 사건을 두고 참 별일도 다 있다고 여길 수도 있겠으나, 사실 밥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죽는 사건은 허다하다. 무려 21세기에 굶어서죽는 게 아니라 차려주지 않아서누군가는 자신의 가족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생각보다 많다. 궁금하다면 인터넷 검색 창에 왜 밥 안 차려줘라는 문장을 입력해보라. 밥을 차려주지 않는다고 85세 고모할머니를 살해한 50대 남성, 딸을 살해한 60대 남성, 아내에게 둔기를 휘두른 60대 남성 등에 관한 기사가 와르르 쏟아진다. 심지어 어느 유명 연예인은 만삭 상태에서도 남편의 삼시세끼를 차려야 했다고 한다.

이런 소식을 접하면 한국인, 특히 한국 남성에게 밥이란 무엇일까에 관해 질문하게 된다. 또 이런 생각도 한다. 어째서 한국 남성들은 자신이 먹을 밥상조차 스스로 차리는 교육과 훈련을 받지 못했을까? 누구의 잘못을 탓하거나 열등하게 여기려는 게 아니다. 우리가 매일 누리는 평범한 밥상이 누군가에게는 가부장의 권력을 휘두르는 칼이 되고, 폭력의 이유가 되고, 일방적인 책임을 지우는 일이 된다면 그 밥상이 어찌 평화롭고 평등하고 정의로울 수 있겠는가?

 

백파더가 알려주는 생존법
MBC 예능 백파더 : 요리를 멈추지 마!(이하 백파더’)언택트 시대에 맞게 쌍방향 소통 요리쇼를 표방한 생방송 요리 프로그램이다. 미리 선정된 49명의 요린이’(요리와 어린이를 조합한 단어로 요리에 서툰 사람을 일컫는다. 이 단어는 미숙하고 불완전한 존재를 의미함으로 부적절하다는 비판도 있다)들이 백파더’(백종원)가 알려주는 방법을 실시간으로 따라 하여 요리를 완성한다.

MBC 예능 〈백파더〉 화면 갈무리

이 정도 설명만 보면 흔하디 흔한 요리 프로그램이라 여길 수 있겠으나, 이 프로그램의 특징은 참가자들이 요리를 정말 못한다는 데 있다. 태어나서 처음 쌀을 씻어보는 사람, 두부를 처음 사봤다는 사람, 집에 불을 낼 뻔한 이후 집에서 아무것도 해 먹지 않는다는 사람 등 자타가 인정하는 요리 똥손이거나 비교적 요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요리를 배워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래서 백파더에서는 어려운 요리를 하지 않는다.

1회 주제는 무려 밥 짓기와 달걀 프라이였고, 2회는 두부김치와 두부 부침이었으며 김치볶음밥, 라면, 카레 등 일상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요리를 한다. “세상에! 그건 기본 아닌가요? 그게 어떻게 요리가 될 수 있죠?”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기본도 못 해서 멘붕에 빠진 참가자들이 속출한다. 달걀 프라이를 할 때 먼저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러야 하는 걸 모르고 참기름을 두르기도 하고, 라볶이를 해야 하는데 컵라면을 들고 온 이도 있었다.

요리를 멈추지 마!’라는 부제가 드러내듯 백파더는 요리와는 거리가 먼 이들을 부엌으로 초대하여 생존요리법을 찬찬히 알려주는 프로그램이다. 그래서 요리와는 별 상관없어 보이는 남성의 얼굴이 많이 보인다. 특히 1회부터 참여한 구미에 사는 60대 남성이 주목을 받았다. 태어나서 처음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어본다는 이 남성은 요르신으로 불리며 서툴지만, 차근차근 요리를 배우고 있다. 할 수 있는 요리라곤 청양고추 듬뿍 넣은 라면밖에 없던 요르신이 아내에게 밥을 지어 대접하게 되고, ‘백파더의 시범을 보고 따라해야 하는 쌍방향요리 프로그램임에도 제 멋대로 고집을 피우다가 차츰 소통하며 요리를 완성하는 걸 보면 한 인간의 갱생과정을 보는 것 같다. 이 프로그램이 가진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어떤 면에서는 참 큰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여성운동은 여성이 공적 영역에 진출하는 것을 넘어, 남성이 사적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백파더를 보다가 여성학자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속 문장을 떠올렸다.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백파더는 요리라는 매개를 통해 남성이 사적 영역으로 들어오는운동을 하는 프로그램이 아닐까? 나아가 쌍방향이라는 형식의 변화뿐 아니라 성별로 구분되고 분업화된 역할도 서로 교통하게 하는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백파더는 참가자들에게 높은 수준의 요리 실력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끼니를 해결할 정도의 능력을 갖추길 원한다. 나도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적어도 밥을 차려주지 않아서죽는 사회는 만들지 말 것과 우리가 매일 누리는 밥상이 조금이라도 더 평화롭고, 평등하고, 정의로롭기를 바란다. 그러니 당장 부엌으로 달려가 혼자서도 생존할 수 있는 생존 요리법을 배우고, 사랑하는 가족을 먹이는 보람을 누려보자. ‘유튜브백파더든 접속하기만 하면 요리법을 알 수 있는 시대 아닌가.

 

 

오수경
낮에는 청어람ARMC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드라마를 보거나 글을 쓴다.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이웃들의 희로애락에 참견하고 싶은 오지라퍼다. 함께 쓴 책으로 을들의 당나귀 귀》 《불편할 준비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