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한국교회의 새롭고 오래된 미래

[362호 커버스토리]

2020-12-29     전성민

2020년 가을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은 세계관 및 평화학 목회학 과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한 학기 동안 그것을 기념하는 콜로키움(토론회)을 열었다. 그 강연자 중 한 명이었던 도심 속 기독교영성나눔 공간 레 미제라블대표 김효경 목사는 다음 찬양을 소개했다.

 

눈 감으면 내 안에 하나님 바라보고

눈 뜨면 세상 속에 하나님 바라봅니다.

내 안에 계신 주 날 사랑한다 하시고

세상 속에 하나님은 서로 사랑하라 하시네

(<바라봅니다>, 이강학 작사/김효경 작곡)

 

이 찬양은 두 가지 사랑, 나를 향한 하나님 사랑세상 속에서 서로를 향한 사랑을 노래한다. 이 글의 첫 번째 목적은 한국교회와 복음주의의 현재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다. 나는 현재 한국교회와 복음주의가 이 찬양이 노래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잊었다고 말하고 싶다. 사실 이런 평가는 너무 흔하고 근본적이라 별 의미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근본적인 이야기는 이 글의 두 번째 목적인 한국교회와 복음주의의 미래상에 대한 냉정한 조망을 위해 필요하다. 한국교회와 복음주의의 미래를 생각할 때 그것이 누구의 미래인가라는 질문을 놓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맨 처음 준비할 때 무심코 생각했던 미래, 예를 들어 지금부터 20년 후의 미래는, 70세가 된 내가 경험할 복음주의의 미래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고민해야 할 미래는 지금의 20, 심지어 10대가 30-40대가 되어 경험하게 될 미래여야 한다. 그런데 나는 솔직히 이 세대를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각각의 세대가 익숙한 실용적인 주제들보다 모든 세대가 고민해야 하는 좀 더 근본적인 주제를 이야기하기로 했다.

 

사랑을 상실한 한국교회와 복음주의의 ‘4가지 안티

지금 한국교회와 복음주의가 실패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사랑을 잃었기 때문이다. 가장 뚜렷한 증거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모습에서 알 수 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고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는다(요일 4:18). 사랑을 잃어버린 한국교회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

복음주의를 규정하는 방식들 중 베빙톤의 4가지 특징, 곧 회심주의, 성서주의, 십자가주의, 행동주의는 18-19세기 영미 복음주의를 관찰한 결과이다. 만일 지금 한국 복음주의를 관찰한다면 어떤 특징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것은 -진화’(anti-evolution), ‘-이슬람’(anti-Islam),‘-공산주의’(anti-communism),‘-동성애’(anti-homosexuality)일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 표현들은 모두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대인데, 이런 반대는 사람에 대한 혐오로 구체화된다. 특히 호모포비아이슬람포비아가 그것이다.) 어찌 보면 서로 상관 없는 이 4가지 안티가 어떻게 함께 한국 복음주의의 특징이 되었을까? 4가지 안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두려움이다.

4가지 이슈/주제에 대한 반대를 부추기는 글이나 말들은 무엇보다 두려움에 호소한다.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신앙을 잃어버리고 교회는 쇠퇴할 것이다.” “무슬림 난민을 받아들이면 한국은 급속도로 이슬람화가 될 것이며, 이슬람 교리는 극단적이고 폭력적이어서 사회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 “공산화가 되면 교회는 탄압을 받고 대한민국은 가난해질 것이다.” “동성애는 가정을 해체하고 인류를 멸망의 길로 이끈다.”

이런 식으로 두려움에 호소하는 레토릭은 전혀 낯설지 않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 4가지 주제는 선과 악을 가르는 가장 강력한 기준이 된다. 이 주제들을 조금이라도 성찰해 보려는 사람은 가정을, 교회를,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는 데 동조하는 악마가 되어버린다.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두려움에 호소하는 이 4가지 안티는 사랑의 실패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사랑의 실패이자, 사람을 기쁨과 고통의 기억과 희망을 가진 사귐의 존재가 아닌 자신의 어젠다(의제)를 효과적으로 이루게 해줄 도구로만 취급하는 사랑의 실패다. 기독교 신앙이 사랑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김에도 불구하고 이런 실패가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2016년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45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과정을 통해 미국 복음주의는 이분화하는 경향을 뚜렷이 보여준다. 문제는 이러한 분리가 교리나 신학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 예수, 성경, 회심, 죽음 이후의 삶과 같은 신학적 주제들과 관련해 이들의 차이를 설명하기가 꽤나 어렵다.1 같은 교리와 신학 성향을 공유하면서도 어떤 복음주의자들은 트럼프를 지지하고, 어떤 복음주의자들은 트럼프를 반대하는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에 대해 2018년 출판된 Still Evangelical?(여전히 복음주의자인가?)이라는 책에서 풀러신학대학원 총장 마크 래버튼(Mark Labberton), 복음주의자들을 분리한 것은 신학이 아니라 신학보다 더 심층에 있는 사회적 프레임이라고 분석한다.2 그는 복음주의자들의 신앙이 성경과 결부되어 있기는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사고방식에 의해 구체화된 신학화된 이념”(theologized ideology)이 되었다고 지적한다.3

 

내면화된 분단 트라우마

이러한 분석은 앞서 제기한 한국 복음주의의 현상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데 거의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이 사랑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김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와 복음주의가 사랑에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국교회가 신학 자체보다 한국 근현대사의 경험 속에 만들어진 세계관에 더 근본적인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근본주의 선교사들의 신학과 부흥 운동의 경험에 이은 한국전쟁의 트라우마에서 자라난 반공주의는 한국교회와 복음주의의 주된 정서를 형성했다. 이를 분단 트라우마라고 부를 수 있을 텐데, 이 트라우마는 한국 사회의 가장 깊은 세계관이 되어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4

분단 트라우마는 한국 사회와 사람들에게 경계에 대한 긴장, 두려움, 강박을 일상화했으며 그런 경계에 대한 강박은 어떤 문제들을 판단할 때 선과 악, 아군과 적군, 정통과 이단이라는 극단적 분리와 판단을 하는 흑백적 사고를 내면화했다. (단적인 예로, 세계에서 감리교를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장로교인은 한국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경계에 대한 공포와 강박이 한국 사회와 한국인들에게 어떻게 내면화되어 있는지는, 설치미술가 이웅배의 부드러운 장벽()에 대한 김기석 목사의 감상에서 잘 드러난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관람자들은 2.7m 높이의 부드러운 장벽앞에 서게 된다. 철제골조를 지지대로 삼아 설치된 장벽은 사람들을 압도하지 않는다. 투명한 연질의 비닐이 커튼처럼 내걸려 있기 때문이다. 철조망 모양의 빗금들이 그려진 그 장벽 앞에 설 때 사람들은 대개 잠깐 망설인다. 건너편으로 넘어갈 문이나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입장을 거절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장벽 앞에서 발걸음을 돌리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비닐 커튼을 열어젖힐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즐겁게 월경을 감행한다. 긴 세월 분단의 장벽 앞에서 살아온 이들에게 장벽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다. 그러나 발랄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아이들에게 그 장벽은 언제든 넘나들 수 있는 장치일 뿐이다.5

명색이 복음주의라면 복음이 그것을 규명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렇게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분단 트라우마로 인해 경계에 대한 두려움과 강박이 내면화된 한국 사회와 사람들의 경우 복음이 복음주의를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분단 트라우마가 형성한 현실 복음주의가 거꾸로 복음을 왜곡하게 된다. 그 결과 한국교회와 복음주의의 복음 이해는 경계를 넘는 포용과 환대보다는 경계를 강화하는 배제와 혐오와 쉽게 결합한다. 그리고 두려움에 휩싸인 채 사랑에 실패하고 만다.

 

복음을 회복하는 평화의 세계관

사랑의 실패가 신학보다 더 근원적인 층위의 세계관이나 프레임 문제라면, 사랑을 회복하기 위한 방법도 세계관적 층위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더구나 지금 한국 기독교에는 혐오와 차별의 근본주의 신학이 기독교 세계관 이름으로 퍼지고 있다. 특히 세계관이라는 표현이 좀 더 포괄적이고 일상적인 주제들을 담을 수 있기에 삶의 다양한 문제들이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다루어진다. 그런데 막상 그 내용들을 들여다보면, 적지 않은 경우 보수 혹은 근본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하며 세계관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혐오와 차별을 부추기고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고백이 가장 중요한 기독교 세계관은 포용과 환대를 추구하는 평화의 세계관이어야만 한다.

기독교 세계관의 토대가 되는 성경 이야기는 흔히 창조-타락-구속이라는 주제어로 요약한다. 그러나 송인규 교수의 경우 창조-보존-화목을 제안한다.6 이 방식의 차이를 논하기 전에 이 두 가지 방식 모두 창조로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타락이 성경 이야기의 시작이 아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전에 하나님의 형상이다!) 온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선언은 너무 당연하게 여겨져 그 중요성을 간과하기 쉽지만, 이 고백이 현실 세계에 주는 의미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 고백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영역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위 영적인 것뿐 아니라 육체적인 것 또한 하나님의 선한 창조다. ‘주일의 교회라는 시공간뿐 아니라 주중의 세상이라는 시공간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이어지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라는 고백도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이다. 여자건 남자건,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이 어떠하든, 인종이나 종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형상이다. 요컨대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하신 주중의 세상 가운데서 타락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인(9:6; 3:9)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

이런 상황에서 창조를 타락-구속으로 연결하여 이야기하는 것만 아니라 보존-화목으로 이야기하는 일 역시 매우 도움이 된다.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주목하고 더욱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타락은 이 세상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기지 못한다. 이 세상이 타락하고 다 망가져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 세계관이 아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인간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여전히 보존하시는 이 세상이 하나님께 의미가 있으며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이라고 알려주는 세계관이 되어야 한다. 이런 세계관을 가질 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자기 경계 너머 타인과 진정으로 대화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할 수 있다.

이러한 토대 위에 한국 기독교와 복음주의가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추구해야 하는 기독교 세계관의 자리와 방향이 바로 평화의 세계관이라는 사실을 살펴보고자 한다.

 

세계관이 억압적 이데올로기로 변형될 위험7

고민은 이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기독교 세계관이 성경에 뿌리를 두었다고 말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억압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리지는 않는가? 기독교 세계관을 말하지만 그것이 성경의 역동성을 담아내지 못하고 그저 억압적인 이데올로기로 환원되는 위험을 브라이언 왈쉬는 아주 면밀하게 지적한다. 왈쉬는 다음의 5가지 상황이 벌어질 때 성경의 역동적 세계관이 억압적 이데올로기로 변형된다고 설명한다.
 

세계관이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는 폐쇄적 공동체의 보호적 에토스가 되어

주변 문화와 상관 없어지는 것은

성경의 역동성을 잃어버린 채

세계관이 보편적 최종성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며

그것의 완전무결함과 전체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8

왈쉬가 지적한 문제들을 한 가지씩 살펴보자. 세계관이 1)그 완전무결함을 강조해도 될 만큼 2)보편적 최종성에 도달했다고 생각할 때(, 자기 세계관이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에 이미 도달했다고 생각할 때), 더 이상 다른 세계관들이나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필요를 못 느끼게 되며 결국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는 자기 방식으로 이해한 기독교를 절대 진리라고 여기며 다른 세계관을 무찔러서 이겨야 하는 대결의 대상으로만 삼는 태도에 경종을 울린다.

다음으로 3)더 이상 성경 읽기를 씨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때 세계관은 이데올로기가 된다. 성경을 읽으며 필요한 원리들은 이미 다 추출했다고 생각할 경우, 성경 읽기는 추출한 원리나 교리들을 재확인하는 것에 그치게 된다. 이 경우, 아무리 성경을 읽는다 해도세계관은 변화되지 않고 오히려 강화만 될 뿐이다. 성경을 읽을수록 더욱 고집스러워지기만 한다면 나의 성경 읽기가 역동성을 잃어버리지 않았는지 심각하게 성찰해야 한다. 이렇게 역동성을 잃어버린 성경 읽기에 토대한 세계관은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된다.

결국 억압적 이데올로기로 변형된 세계관은 4)주변 문화와 상관 없어지고 영향도 끼치지 못하게 된다. 온전한 세계관은 문화 변혁적 실천을 만들어내는 반면 역동성을 잃어버린 세계관은 실천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국적 상황과 관련하여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실천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어야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주변을 공격하는 것이 되지는 않아야 한다. 그런 경우, 실천은 기독교를 그 문화에서 의미 있게 만들지 않고 주변으로부터 고립시킨다. 이 때, 5)세계관은 공동체를 세상으로부터 격리하거나 보호하려는 에토스가 된다. 공동체의 안전과 정결을 세상의 오염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두려움 가운데 세계관은 억압적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게 된다.

왈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환대를 개발하고, 2)열정적이고 예언자적인 상상력을 가진 3)성경을 역동적으로 이해하는 4)해석 공동체가 필요하며 5)어떤 전체적 시스템이 아닌 이야기로서의 세계관을 생각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21세기 한국교회와 복음주의가 추구할 기독교 세계관의 자리와 방향

나는 한국교회와 복음주의를 생각하며 왈쉬의 5가지 문제 제기와는 조금 다른 제안을 해보려 한다. 첫째, 지금까지 기독교 세계관은 지성의 제자도를 주로 이야기해왔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도 바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과 삶은 사실 욕망의 결과물들이다. 왈쉬가 말하고 있는 완전무결성을 강조하는 위험은 욕망에 대한 성찰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 완전무결성에 대한 과도한 확신은 지적 체계에 대한 과도한 신뢰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을 변화시키는 동력으로서 지적 체계뿐 아니라 욕망의 방향을 고민하는 일이 필요하다.

둘째, 근대에 발흥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마치 세계 전체를 세계 바깥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설령 기독교 세계관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취하는 주관적 자리가 있음을 안다. 그렇기에 기독교 신앙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자리가 어떤 곳인지에 대한 성찰은 필수적이다. 한국 기독교는 소위 고지론에 입각하여 중심의 자리를 추구해왔다. 고지에 오르거나 중심을 차지했을 때,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말이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기독교 세계관은 권력을 가진 중심이 아니라 경계에 대한 두려움과 강박을 이겨낸 변두리를 자기 자리로 삼아야 한다. 그럴 때, 세계관은 성경의 역동성을 담아내며 주변 문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셋째, 자신이 알고 있는 방식대로의 기독교 세계관이 최종적이고 보편적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진리에 대한 존재론과 인식론을 구별해야 한다.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 또는 믿음(진리의 존재론), 그것을 내가 완벽하게 알 수 있고 또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진리의 인식론)은 별개의 문제다. 그럼에도 자신의 세계관이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불린다는 이유만으로 최종성을 확보했다고 잘못 생각할 때 우리는 타인과 대결 구도만 고집하게 된다. 그러나 창조-보존-화목을 토대로 하는 기독교 세계관은 다른 세계관들과 의미 있는 대화를 가능케 한다. 완벽한 지적 체계를 구축한 세계관이 아니라 그 세계관을 아는 사람이 더 감사하고 더 사랑하고 더 겸손하게 될 때, 그 세계관이 더 발전한 세계관이며9 그런 겸손하고 사랑하고 감사하는 세계관은 대화하는 세계관이다. 따라서 우리의 기독교 세계관은 대화를 가능하게 하고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세계관이 되어야 한다.

넷째로, 우리의 세계관은 혐오와 배제의 카톡교세계관이 아니라 환대와 포용의 복음을 꽃피우는 세계관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왈쉬가 이야기하는 폐쇄적 보호를 위한 배타성을 극복할 수 있다. 우리의 신앙이 자기를 지키기 위해 타인을 향한 혐오와 배제를 일삼았다면 이제 기독교 정신은 환대와 포용임을 확인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세계관은 좁은 의미의 교회 부흥을 넘어 사회의 공공선과 인류의 번영을 추구해야 한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라는 아서 홈즈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진술이, 모든 선함은 하나님의 선함이며 모든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는 진술로 확장될 수 있다면 기독교 세계관은 분명 사회의 공공선과 인류의 번영에 기여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세계관을 추구해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주변 문화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부족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정리해보자. 앞으로 한국교회와 복음주의는 1)지성의 제자도와 더불어 욕망의 제자도를 성찰하며 2)권력의 중심이 아닌 경계를 넘나드는 변두리에서 3)대결이 아닌 대화하는 사랑·겸손·감사의 덕을 구비한 세계관과 4)혐오와 배제의 카톡교가 아닌 환대와 포용의 복음을 통해 5)교회 부흥을 넘어 인간 사회의 번영을 추구해야 한다. 이런 세계관을 평화의 세계관이라 부를 수 있으며, 실로 기독교 세계관은 평화의 세계관이다.

사실 성경에는 평화라는 말이 매우 많이 나오는데, 개역 성경이 평강” “화평” “평안으로 번역한 탓에 성경에 평화가 많이 나온다는 사실을 종종 놓치게 한다. 그렇기에 무엇보다 성경은 평화의 책이라 부를 수 있다. 이제 이 평화의 책인 성경에서 우리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질문들, 곧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이 세상은 어떤 곳인지에 대한 답을 찾아보자.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하나님, 복음, 십자가, 세상과 세상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 모두 평화가 본질이다.

무엇보다 우리의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이시다.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하는 이사야 9:6-7은 그 메시아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리며 그의 나라의 평화가 끝없이 이어질 것이라 말한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은 평화의 복음이다. 복음이 어떤 것인지를 가장 잘 설명하는 구절은 이사야 52:7이다.

놀랍고도 반가워라!

희소식을 전하려고 산을 넘어 달려오는 저 발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복된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면서,

시온을 보고 이르기를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하는구나. (새번역)

이 구절에는 복음을 의미하는 희소식이라는 표현이 명시적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복된 희소식의 내용은 평화가 왔다!”이다. 또한 그런 평화의 복된 희소식을 전하는 일이 구원의 선포와 나란히 등장한다. 복음의 가장 핵심은 하나님의 통치 소식인데 통치하시는 그 하나님이 평화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유대 사람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을 로마군인 고넬료에게 복음이 전해져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이 무너지는 사건 가운데 나오는 사도행전 10:36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내신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평화라고 말한다.

그런 예수의 제자인 우리는 평화의 제자다. 예수님은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는 복이 있다라고 하신다.(5:9) 주기도문처럼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자녀는 무엇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다. 평화를 만드는 평화의 제자가 우리의 정체성이다.

십자가의 피가 평화를 이루었다. 골로새서 1:16-20은 기독교 세계관을 창조-보존-화목이라고 요약하는 토대가 된다. 16절과 17절은 각각 하나님의 창조와 보존을 말한다. 이어지는 20절은 그분의 십자가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켰습니다라고 말한다. 평화를 이루는 피가 흘려진 십자가는 평화의 십자가이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은 평화를 누려야 하는 세상이다. 예레미야 19:7은 바빌론 포로로 잡혀 갔던 사람들에게 예레미야가 보낸 편지이다. “그곳을 고향 삼아 지내고 그 나라를 위해 일하여라. 그리고 바빌론의 번창을 위해 기도하여라 바빌론이 잘 되는 것이 너희에게도 좋은 일로 여겨라.”(메시지 성경) 바빌론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아니다. 세속 사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그곳의 번창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여기 번창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흔히 평화라고 번역하는 샬롬이다.

메시지 성경을 펴낸 유진 피터슨은 샬롬을 이렇게 설명한다. “샬롬은 온전함, 곧 한 사회의 역동적이고 생동감 있는 건강을 뜻하는 것으로서 그런 사회는 신의 목적에 합당한 방향으로 고동치고 삶을 변혁시키는 사랑으로 물결치는 사회다.” 10하나님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가 세속 사회 속에서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을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그 사회가 역동적이고 건강한 사회, 하나님의 뜻에 어울리는 세상으로 만드는 시민의 목소리를 감당해야 했다. 평화는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다.

 

희생으로 완성되는 사랑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가지게 되었고 왜 그 안에 머무는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신학적 설명을 잠시 유보하고 인간의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첫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개인적 경험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감동하고, 그 사랑에 붙잡힌다. 두 번째로는 기독교 신앙 안에 있는 이웃과 사회를 향한 넉넉한 품이 우리를 신앙 안에 머물게 한다. 개인의 슬픔과 고통, 무력함과 절망, 그리고 이 문제들의 사회적 함의와 결과에 기독교가 사랑으로 응답할 때, 우리는 신앙 안에 머무른다. 그 응답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자기 희생을 통해 완성된 십자가 사랑이다. 하나님의 자기 희생을 보여주는 십자가를 중심에 두는 기독교는 여전히 사람을 매료시키고 삶에 의미를 준다. 이 희생으로 완성되는 사랑이 기독교의 비밀이자 힘이다.

그러나 이것의 반대 또한 가능하다. 하나님 사랑은 되뇌지만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기독교는 버림 받는다. 사랑을 잃어버리고 두려움에 휩싸여 혐오와 배제를 통해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한 기독교에서는 어떠한 미래도 찾아 볼 수 없다. 이것이 2020년 한국교회와 복음주의의 모습이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사랑을 잃어버리고 두려움에 싸여 있었다. 그 두려움은 타인을 향한 공격으로 드러나 ‘4가지 안티가 한국 복음주의의 특징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한국교회와 복음주의를 형성한 것은 무엇보다 나와 남, 아군과 적군, 절대선과 절대악을 나누는 경계에 대한 강박을 내면화한 분단 트라우마이다. 따라서 한국교회와 복음주의가 잃었던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경계에 대한 강박을 해소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이 평화의 세계관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하고 평화의 세계관에 뿌리를 둔 복음이 복음주의를 다시 형성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자면 새로운 이름이 요청될 수도 있다.

과연 한국교회와 복음주의는, 아니 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회복하고, 사랑을 어떻게 실현하며, 그 사랑의 실현을 위해 어떤 희생을 할 것인가. 꽤나 막막하고 추상적인 이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은 각 사람, 각 공동체, 각 세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든 희생으로 완성되는 사랑을 회복하는 일은 꼭 필요하다. 나의 방식은 평화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것이 나의 개인 신앙의 힘과 기둥이 되고, 그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는 구체적인 모습을 평화라는 화두에서 찾아보려 한다. 우리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이고, 우리의 복음은 평화의 복음이고, 십자가는 평화를 만든 십자가이며, 우리는 평화의 제자로서 교회와 세상에서 평화를 세워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평화를 이루기 위해 치러야 하는 희생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가운데 우리의 미래는 비로소 싹을 틔우기 시작할 것이다.

 

1   Mark Labberton, “Introduction”, in Mark Labbernton ed. Still Evangelical? Insiders Reconsider Political, Social and Theological Meaning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18), 5.
2   Labberton, 5.
3   Labberton, 6.
4    김상덕, “사람과 일상의 평화,” 2020년 10월 23일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세계관 및 평화학 M.Div. 개설 기념 콜로키움 “평화의 세계관, 목회를 만나다”의 발표 내용.
5 김기석, “부드러운 장벽,” 국민일보 2019년 8월 7일. 김기석 목사가 쓴 글은 앞서 언급한 김상덕의 발표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6  송인규, 《새로 쓴 기독교, 세계, 관》(IVP, 2008)
7   여기 이야기하는 것은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고전인 《그리스도인의 비전: 기독교 세계관과 문화 변혁》(IVP, 1987)과 1995년에 출판되고 2020년에 한글로 번역된 《여전히 — 우리는 진리를 말할 수 있는가: 포스트모던 시 대 그리스도인의 비전》(IVP, 2020)의 공저자인 브라이언 왈쉬의 글 “변혁: 역동적 세계관인가 억압적 이데올로기 인가? (Brian J. Walsh, “Transformation: Dynamic Worldview or Repressive Ideology?” International Journal of Christianity & Education 4.2 (2000): 101-114.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8 “1)Total systems of 2)Unconditional/Universal finality that have 3)Lost their biblical dynamism, thereby becoming 4)Irrelevant or Inconsequential to changing cultural contexts, because they are preoccupied with the 5)Protective ethos of an enclosed community.” 이 영어 표현에서 각 요소의 첫 글자를 모으면 TULIP이 된다. 이 것은 ‘칼빈주의 5대 교리’ 약자의 패러디이다.
9  스티브 윌킨스, 마크 샌드포드, 《은밀한 세계관》(IVP, 2013), 280쪽.
10  유진 피터슨,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IVP, 2003), 179쪽.

전성민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 원장으로 세계관 및 구약학을 가르친다.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캐나다 리젠트 칼리지에서 성서언어(M.C.S.)와 구약학(Th.M.)을 공부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구약 내러티브의 윤리적 읽기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D.Phil.)를 받았으며, 2014년 한국인 신학자로는 최초로 학위논문이 옥스퍼드 신학 및 종교학 단행본 총서로 출판되었다(Ethics and Biblical Narrative).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창립 연구위원이며, 현재는 초빙연구위원으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세계관적 설교》 《사사기 어떻게 읽을 것인가등이 있으며, 전문영역인 구약 윤리 외에 평신도 신학, 세계관적 성경읽기와 설교, 미션얼 운동의 구약적 토대, 성서학과 과학의 관계 등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