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만이 나이 듦의 외로움을 잊게 합니다”
[363호 커버스토리]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 저자·영화 〈칠곡 가시나들〉 김재환 감독 인터뷰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저자·영화 〈칠곡 가시나들〉 김재환 감독 ⓒ복음과상황 옥명호
다큐멘터리 영화 〈트루맛쇼〉 〈쿼바디스〉 등을 만든 김재환 감독이 영화 〈칠곡 가시나들〉을 만들며 느낀 것들을 책으로 냈다.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북하우스)은 경상북도 칠곡에서 문해학교에 다니며 한글 공부를 시작한 할머니들과 함께한 김재환 감독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할머니들은 가난하다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한글을 배우지 못했지만 문해학교 학생이 되면서 설레는 일상을 살아간다. 긴장된 마음으로 아들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쓰기도 하고, 자식들과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가 하면 동네 가게의 간판을 읽으며 즐거워한다.
김재환 감독은 나이가 들어도 재미있게 살아가는 할머니들의 일상을 바라보며 ‘나이 듦’에 대한 편견과 두려움이 조금씩 녹아내렸다고 했다. 그가 발견한 ‘재밌게 나이 듦’의 비법을 듣기 위해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코로나 상황이 엄중한 시기였기에 이메일을 통해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동안 사회성 짙은 영화를 만드셨는데, 〈칠곡 가시나들〉과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영화를 만들고 책을 쓰시게 된 계기가 있나요?
원래 재밌고 따뜻한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계속 사회성 짙은 작품들만 만들어왔어요. 〈트루맛쇼〉 〈MB의 추억〉 〈쿼바디스〉 〈미스 프레지던트〉 모두 개봉할 때마다 험난한 과정을 거쳤고, 그때마다 저희 어머니는 늘 조마조마해하셨어요. 어느 날 어머니가 처음으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내 친구들이랑 까르르 웃으며 볼 수 있는 거 딱 한 편만 만들어달라고. 여기서 친구들이란 ‘70대 중반 (교회)권사님’들을 말합니다. 어려운 주문이죠. 원로 코미디언이 주인공인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 하나, 무엇으로 어머니와 친구들을 웃게 할까 고민하던 어느 날 출근길에서 김사인 시인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방송을 듣게 됐어요. 문해학교에 다니는 칠곡 할머니가 출연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당신이 쓴 글을 담담하게 읽어주셨죠. 할머니 목소리를 듣자마자 확신했습니다. 이거다! 영화는 아무도 안 보러올지 모르겠지만 효도는 성공할 수 있겠구나. 무궁화호를 타고 칠곡이라는 데를 찾아가는 데 기분이 아주 좋았어요. 이제 효도할 일만 남았구나 싶었죠. 칠곡군 평생교육 담당자에게 여쭤봤더니 관내 문해학교가 28개나 있더군요.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문해학교란 게 전국에 이렇게 많구나, 모여서 재밌게 놀며 공부하는 할머니들이 이렇게 많구나, 처음 알았어요. 그렇게 할머니들을 만나 꿈 같은 3년을 보냈습니다.
3개월도 아니고 3년씩이나 함께 보내셨다니, 할머니들과 지낸 그 3년이 궁금합니다.
촬영 동의를 구하기 전에 옆방에서 문을 열어놓고 계속 문해교실 수업을 참관했어요. 할머니들의 성격과 관계부터 파악하고 조금씩 친해지기 위해서였죠. 처음에 할머니들은 먼저 다가오거나 말을 거는 것도 조심스러워하셨어요. 나중에야 털어놓으셨는데, 서울에서 온 젊은 남자가 옆방에서 웃고만 있으니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답니다. 어느 날 박금분 반장 할머니가 스윽 다가오시더니 제 입에 사탕을 하나 밀어 넣고는 씨익 웃으며 옆방으로 건너가셨어요. 흑설탕 맛 사탕이었습니다. 그렇게 할머니들이랑 친해져 그 일상으로 들어가니 많은 게 달리 보이더군요. 할머니들은 느려요. KTX에서 완행열차로 갈아탄 느낌이랄까요. 그냥 스쳐 지나갈 인생의 작은 역들에 멈춰 서자 새로운 것들이 보였습니다. 할머니들의 속도에 맞추니 비로소 보이는 아름다움, 시간의 오묘함, 느림의 즐거움, 나이 듦에 대한 편견과 두려움이 조금씩 녹아내렸어요.
나이 듦에 대한 편견과 두려움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뀌었나요?
영화 〈칠곡 가시나들〉 만들기 전에는 나이 든 제 모습을 상상하기 싫었어요. 늙는다는 것은 아예 생각을 안 하려고 했죠. 나이 든다는 건 아프고 외로워지는 부정적인 변화고, 나이 듦을 자주 생각하면 현재 거머쥘 수 있는 행복과 즐거움을 방해하게 될 거라 여겼어요.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이었죠. 그런데 칠곡에서 할머니들을 만나고 깜짝 놀랐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잘 살고 계신 거예요. 아니, ‘아프니까 노인’인데 이분들은 왜 이리 생기가 넘치고 즐겁지? 태어나 처음으로 나이 듦에 대해 강한 호기심이 일더군요. 아흔이 된다면 나는 어떤 즐거움을 추구하며 살고 있을까. 할머니들을 보며 상상 속에서 미래를 경험해볼 수 있었습니다.
나이 듦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 지금, 어떻게 나이 들고 싶으신가요?
아직 나이가 그리 많진 않지만 50대가 되어보니 ‘인생이란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구나’ 라는 생각이 점점 확실해져요. 산책하다 한 번씩 깜짝 놀라요. 내가 지금 어쩌다 이런 일을 하고 있지? 예전에 MBC PD로 있을 때 50대 선배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50이라니 세상에, 저 선배는 무슨 낙으로 살까. 그런데 제가 그 나이가 되어보니 아직은 사는 게 재미있어요. 제가 할머니들 연세에 이른다면, 글쎄요, 재미를 찾아서, ‘일용할 설렘’을 찾아서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을 것 같아요. 나이를 거꾸로 세면 좋겠어요. 100세 시대니까 태어나면서 백 살로 시작해서 1년에 한 살씩 줄여가는 거죠. 100세가 넘어가면 새로 태어난 기분으로 0에서 다시 한 살씩 더해가고요. 늘 죽음을 떠올리는 삶, 자기 나이로 남은 날을 헤아리며 살아가는 인생이라면 시간을 아껴 더 재미있게 살지 않을까요? 할머니들을 지켜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이 듦과 죽음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행복한 노년을 상상할 수 있겠구나. ‘재밌게 나이 듦’의 완성은 죽음을 준비하고 환영하는 것이로구나. 오지게 재밌게 나이 들다가 담백하게 가고 싶어요.
작품에서 할머니들의 설렘, 즐거움이 느껴졌습니다. 일상에서 설렘과 재미를 느끼며 살아가는 특별한 방법이 있을까요?
나이가 아주 많아지면 무욕의 존재로 변해갈 줄 알았는데요, 아흔 할머니도 재밌게 살고픈 욕망이 넘실대더라고요. 그런 설렘의 욕망이 나이 든 이에게 생기를 줘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외로움이 설렘을 방해하지요. 나이 든다는 건 계속 외로워지는 일이더군요. 할머니들은 ‘그냥 죽을 때까지 외로움과 함께 산다 생각해야 속 편하다’고 말씀하셨어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사라지지 않는 그림자 같은 거요. 오직 설렘만이 나이 든 자에게 외로움을 잊게 하는 마음의 해독제입니다. 젊을 때는 일과 삶의 균형, 워라밸이 중요하다면 나이 들수록 설렘과 외로움의 밸런스, ‘설외밸’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근데 문제는 방법이 아니라 실행 아닐까요. 일상에서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설렘의 루틴을 찾아 그냥 재밌게 사는 거지, 유튜브에 ‘재밌게 나이 드는 방법’을 검색만 하고 앉아있으면 점점 더 외로워지지 않을까요?
칠곡에서 만난 분들이 특별한 케이스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이 설렘의 루틴을 찾고 즐겁게 사는 일을 시도할 수 있을까요?
칠곡처럼 문화 자원이 떨어지는 곳에서 재밌게 나이 듦에 대한 상상과 실행을 할 수 있다면, 훨씬 좋은 환경에서 사는 서울 어르신들이라면 더 쉽지 않을까요?
칠곡에서 할머니들과 지내면서 교회 다니는 어머니 친구분들이나 교회 어르신들 생각도 많이 났을 것 같습니다. 혹시 교회에 기대하는 역할도 있나요?
오랫동안 칠곡 할머니들을 지켜보니 설렘의 모멘텀이 필요해요. 설렘의 시작은 배움입니다. 나이 들수록 새로운 무언가를 배워야 하고요, 친구도 정말 중요해요. 또 세대가 다른 젊은 친구를 사귀는 것도 노년의 재미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칠곡 할머니들에겐 문해학교 선생님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었어요. 할머니들 봄 소풍에 따라간 적이 있는데요. 선생님이 할머니들에게 그네 타실래요? 물어보는 거예요. 그네와 할머니.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생각했는데, 웬걸요. 안 태워드렸으면 큰일 날 뻔했겠다 싶었어요. 낼모레 아흔인데도 일어선 채로 그네를 타겠다고 우기시더군요. 그제야 알았어요. 나이가 많다고 그네 타고 싶은 욕망이 사라져버리는 게 아니구나. 할머니들에게도 그네는 여전히 즐거움인데 아무도 권하는 사람이 없었던 거구나. 할머니들 곁에 문해학교 선생님 같은 젊은 사람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자녀들은 나이 든 부모님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절대 그네 못 타시게 하죠. 그러다 넘어지시면 큰일 난다고. 늙은 부모는 설레고 싶은데 자녀는 너무 사랑해서 그 설렘에 찬물을 확 끼얹어버리곤 하죠. 할머니들을 세상과 이어주고, 언제나 설레게 하는 사람. 자녀들이 할 수 없는 소중한 역할을 문해학교 선생님이 대신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배움, 또래 친구, 젊은 친구… 이건 다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공급할 수 있는 거잖아요.
한국교회 성도들의 연령층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둘 때, 교회에 필요한 건 무엇일까요?
국가의 복지 시스템은 시니어들의 정서적 돌봄까지 커버하진 못하지만, 교회는 일정 부분 가능해요. 교회가 시니어 성도들의 재밌게 나이 듦에 더 관심을 가지면 어떨까요? 그게 오랫동안 교회의 숱한 행사에서 굳건히 앞자리를 지켜주셨던 시니어 성도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이분들을 엄숙한 믿음의 전사라는 이미지로 가두리 양식장에 가둬놓고 언제든 동원 가능한 자원으로 보는 목사님들은 없으시겠죠?
감독님의 영화 〈미스 프레지던트〉에 보면 현시대에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제사를 지내는 인물의 모습이 나옵니다. 박정희 유신 체제를 겪었고 지금도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박근혜 정부의 탄생과 몰락을 바라보는 이야기죠. 이 영화에서도 주인공은 대다수 어르신이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미스 프레지던트〉는 〈칠곡 가시나들〉과 동시에 촬영한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칠곡에서 할머니들과 수다 떨다가 바로 구미로 넘어가 박정희 대통령 동상 앞에서 새마을 노래를 부르는 군복 입은 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식이었죠. 두 영화의 주인공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모두 설렘이 있었어요. 〈칠곡 가시나들〉의 주인공들은 오늘의 새로운 설렘을 찾아 모험을 시작합니다. 〈미스 프레지던트〉의 주인공들은 젊은 시절 자신을 설레게 했던 그분들의 딸을 살리기 위해 과거로의 모험을 감행합니다. 모든 모험은 짜릿하죠. 두 영화의 주인공들 모두 노년이고 각자의 설렘을 찾아 떠났지만, 방향이 달랐습니다.
아, 이건 처음 말하는 건데 〈미스 프레지던트〉는 오르페우스 이야기예요. 뒤돌아보다가 더 큰 고통에 빠져들죠. 사실 뒤를 돌아보다가 비극으로 끝나는 건 성경, 신화, 중국 설화에 여러 번 등장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회고적 인간이 되어간다는 게 나이 듦의 슬픔이에요. 과거를 붙들고 있으면 오늘의 설렘을 놓쳐버려요. 그렇게 뒤돌아보며 시간을 흘려보내면 오늘은 또 과거가 되어 내일의 후회로 남겠지요. 김혜자 씨의 드라마 대사 기억나시나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재밌게 나이 들어가고 싶은, 설렘을 찾아 떠나는 모든 이들이 붙들어야 하는 지혜입니다.
할머니들과 종종 연락하시나요?
영화 개봉 후에도 매달 한 번씩 칠곡에 밥 사드리러 갔었는데요. 코로나 때문에 몇 달째 못 뵙고 있습니다. 평생 대면의 즐거움으로 살아온 분들인데 마을회관도 문 닫고 친구들도 못 만나니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젊은 사람들은 넷플릭스와 유튜브라도 있지 어르신들이 큰일이에요. 할머니들은 가만 있으면 아프거든요. 움직임이 줄어들면 사는 재미도 줄어들어요. 코로나 때문에 걱정입니다. 이런 아픔은 어떤 통계로도 잡히지 않을 거고 SNS에서도 조용하겠지만, 코로나가 시니어들에게 준 비대면의 정신적 충격은 엄청납니다.
그중에 지금 생각나는 분이 있나요?
〈칠곡 가시나들〉에 나온 분 중 두 분이 노치원이라 불리는 주간보호센터로 옮기셨습니다. 더는 문해학교에 못 나오게 된 거죠. 글자를 아니까 사는 게 더 재밌어졌다며 웃으셨는데, 그렇게 좋아하시던 문해학교를 떠나게 됐습니다. 인생이란 게 이런 거겠죠.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은 오래 머물러주지 않나 봅니다.
영화를 제작하며 수익은 어떻게 예상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어머니 말씀을 들으며 영화 소재를 찾아갔다는 사실도 흥미로웠고요. 원래 그런 식으로 진행이 되나요?
제작 단계에 투자자가 없으니 그냥 자유롭게 만듭니다. 이 장르는 돈이 그리 많이 들지 않습니다.
영화와 책이 나온 시점에서 ‘나이 듦’을 정의해주실 수 있을까요? 신앙의 관점으로요.
나이 듦은 그냥 나이 듦이지 신앙적 관점을 따로 떼어내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 어떤 활동을 계획하고 계신지요?
특별한 계획은 없지만 늘 뭔가에 꽂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재밌는 걸 상상하고 그냥 실행해버리며 살겠죠. 나이가 많이 들면 할머니들처럼 살려고요.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어떻게 재밌게 보낼까 생각하고요, 일용할 설렘을 찾아서 아픈 무릎을 짚고 열심히 다니고 싶습니다.
진행 정민호 기자 pushingho@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