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완성되는’ 나이 듦에 대하여
[363호 커버스토리] 영화 〈마지막 4중주〉(2012)를 중심으로
‘늙음’과 ‘나이 듦’은 같지 않다
작년 12월 마지막 날, 건강검진을 했다. 문진표를 작성하는 내내 오만상을 다 찌푸렸던 것 같다. 특별히 몸이 아파서가 아니라 급하게 신체검사서를 요청한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같으면 이렇게 연말 사람들로 북적이는 검진센터에 절대 내 의지로 들어올 리 없지만, 프리랜서로 살다보니 매년 자비로 나의 건강함을 증명해야 하는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검사서는 나에게 항상 ‘이 정도면 일 할 만해, 죽지 않을 만큼은 일할 수 있겠어’라며 비꼬는 느낌을 준다고 할까.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 물론 기본검진을 매년 한다는 것은 건강을 위해 중요한 일이겠지만, 매년 그러하듯 이 검사서는 스트레스로 인해 몇 달째 떨어지지 않는 편두통이나, 반나절 이상 모니터를 바라보느라 굽어버린 내 허리, 거북목에 대해서는 멀뚱멀뚱 모르는 체할 테고, 아무렇지 않게 날 노동시장에 밀어놓고 증명할 것이다. ‘나름 쓸 만하다’고.
이 따위 결과 때문에 어제 저녁부터 밥도 굶고 이렇게 앉아있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런 정답 없는 우울의 끝자락에 도달할 때마다 항상 생각나는 엄마에게 사진 한 장을 찍어 메신저로 보냈다.
― 마스크 때문에 눈만 보이네. 그런데 왜 죽을 표정으로 그러고 있어.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표정을 읽는다. 엄마는 참 신통방통한 존재가 맞다.
― 나 건강검진 왔는데 짜증나 죽겠어.
― 왜? 배고파서?
오, 역시 엄마는 놀라운 존재다. 굶는 것은 괴롭다. 배고픔은 한없이 처연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아무리 슬프고 힘들어도 어느 순간 배는 고프고 어김없이 졸음이 쏟아지는 내 원초적인 몸뚱이가 그날따라 하염없이 하찮게 느껴졌다.
― 엄마, 나 요즘 들어 배고프면 그렇게 짜증이 난다. 나이 들어서 그런가?
사실 배고픔만이 짜증의 이유는 아닐 것이다. 요즘 들어 이상하리만치 화가 난다거나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미는 빈도수가 급격하게 늘어난 건 사실이다. 작은 사건에도 온몸을 파르르 떨며 알고 있는 온갖 세상 욕을 퍼 붓다가도, 막상 죄의식이 느껴지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펑펑 울기까지 한다. 정서적으로도 우울해지다보니 몸이라도 움직일라치면 급격하게 둔탁해진 신체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느낌이다. “나이 먹어서 그래.” 이제 불혹을 넘긴 나와 친구들은 비슷한 증상을 서로 공유하며 위로하는 요즘을 보내고 있다.
― 그건 늙어서 그런 거야, 받아들여 아무도 못 피해.
― 늙은 거나 나이든 거나 그게 그거지.
― 그게 왜 같어, 세 살 애기도 나이 먹으면 네 살이야. 그걸 늙었다고 하진 않지. 늙은 거랑 나이 먹은 거랑 같다고 생각하면 놓치는 게 많아져.
마치 길 가다 주운 것처럼 아무렇게나 툭 던지는 70세 노년 여성의 통찰력이 이 정도라니. 물리적인 시간과 상대적인 시간으로 비유한 것일까. 이 말대로라면, 그녀의 지혜로움은 과연 늙었기에 가능한 것일까, 아니면 나이가 들었기에 가능한 것일까? 너무 꽉 찬 것도, 그렇다고 여유로운 것도 아닌 불혹의 나는 여전히 심연의 눈으로 삶의 저변을 바라보는 것이 미숙하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럼 나는 나이 값 못하는 노쇠한 신체만 남은 건가?’
아마도 그때 나는 배가 고팠던 것 같다. 이렇게 정답 없는 생각 속에, 혹은 좀 더 깊은 상념에 빠졌던 걸 보면.
신체의 ‘늙어 감’과 태도로서의 ‘나이 듦’
잠시 지나간 엄마의 문자는 실로 많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 우리는 늙음과 나이 듦에 대해 단순하면서도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지만, 이 두 단어가 비슷한 말이면서도 다른 해석의 결 또한 포괄하고 있다는 것을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벤다이어그램으로 비유하자면 교집합의 부분은 기본 속성으로 인정하되, 각 단어만이 품고 있는 다른 의미들에 좀 더 집중해보자는 이야기이다. (앞으로 할 이야기들은 철저하게 필자의 생각임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정답은 없다.)
우선 이 두 단어는 어떠한 존재가 시간의 흐름 속에 변화되고, 죽음 앞에 놓이고 사라지는 메커니즘을 칭한다. 그렇게 보면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가 던진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두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라는 말은 두 단어에 모두 적용되는 듯하다. 아마도 이 두 단어가 미묘하게 갈라지는 지점은 ‘유기적 속성’과 ‘시간을 통과하는 방식’의 차이일 것이다. 즉, ‘일방향적인 시간 속에 퇴화하는 유기물로서의 육체’가 늙음에 좀 더 가까운 의미라면, 나이 듦은 ‘상대적인 시간 속에 변화하는 문명사회의 지표’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더 궁금해지는 쪽은 늙음보다는 당연히 나이 듦이다.
우리는 적정 연령이 되었을 때 그 시기에 걸맞게 요구되는 생각과 행동, 덕목 같은 지표를 통해 그 사람의 나이 든 정도를 파악한다. 그리고 누군가 나이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할 경우 지탄 혹은 칭찬의 대상으로 삼는다. ‘나잇값도 못 한다’ ‘철이 덜 들었다’ ‘나이에 비해 성숙하다’ 같은 말들이 그렇다. 만약 ‘늙은 값도 못한다’라고 한다면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나이 듦의 시간은 물리적 시간의 템포에 맞춰 앞으로만 가지 않고, 속도를 내거나 줄일 수 있고 점프하거나 혹은 퇴화할 수도 있는 유동적인 속성을 지닌다. 또한 그 지표의 기준이 대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상대적 속성도 띤다. 어린 나이에 성숙함의 나이를 먹은 이들이 있고 죽을 때까지도 철없다 소리 듣는 이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나이 듦이라는 것은 거부할 수 없이 노쇠해 가는 늙음의 시간과는 달리, 각 개인차가 존재하며, 이는 내 의지와 각오에 따라 올바른 방식의 나이 듦에 대한 태도, 더 크게는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태도 또한 언제든지 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유한한 인간의 삶 속에 이런 풍요로운 선택이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렇게 보면 엄마가 그냥 조용히 받아들이라고 한 늙음은 내가 어쩔 수 없는 영역이니 접어 놓더라도 과연 이 시대 올바른 나이 듦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한 혼돈의 시기를 통과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고민해야 할 나이 듦과 인생의 방법론에는 무엇이 있는지는 지금도, 또 앞으로도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일 듯싶다. 그리하여 새해를 맞아, 멋지게 나이 먹는 이들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영화 한 편을 편하게 톺아볼까 한다.
‘함께 완성되는’ 공동체의 나이 듦
야론 질버맨 감독의 2012년 개봉작 〈마지막 4중주〉는 엄밀하게 ‘나이 듦에 대한 영화’라곤 할 수 없다. 어떤 이들은 이 영화를 예술이 주는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의 이야기로 볼 테고, 또 다른 이들은 음악 영화가 주는 섬세한 감정선 그 자체에 무게를 둘지 모른다. 실상 영화도 위에서 말한 부분이 거의 핵심이긴 하다. 그러나 나는 등장인물들이 오랜 시간 함께 같은 방향성을 바라보며 지내왔다는 점과, 또한 점차 노년으로 달려가는 인물들과 함께 완성되어가는 그들 공동체의 나이 듦에 무게를 두고 이야기하고자 한다.
질버맨 감독은 영화의 기획의도를 묻는 한 인터뷰에서, 비록 서로 다르지만 우리 앞에 놓인 관계를 이어감으로써 새롭게 완성되는 삶을 담고자 했다고 밝힌 바 있다. 특히 음악을 쓴 이유에 대해서는 ‘음악이 가진 러닝타임과 그 서사는 마치 잘 짜인 우리 인생과도 같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엄청난 클래식 마니아이다. 더불어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한창 잘 나가던 월가의 명성을 포기한 독특한 이력도 있는 감독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질버맨 감독의 작품 중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품은 그리 많지 않지만, 이전 작품만 보더라도 감독이 노년 인물의 삶에 주목하고 있음은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그의 2006년 작 〈워터마크〉는 노년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전설적인 이스라엘 여자 수영 선수들이 80세가 되어 다시 만나는 과정을 섬세하게 담은 작품으로, 노년을 향해 다가가는 인물들과 그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친밀한 관계형성에 주목한다.
이에 비해 〈마지막 4중주〉에는 결성 25주년 기념공연을 앞둔 세계적인 현악4중주단 ‘푸가’ 일원들이 나온다. 첼리스트이자 오랜 시간 콰르텟을 이끈 정신적 지주 피터(크리스토프 월켄)가 공연을 앞둔 어느 날, 파킨슨병 진단을 받게 되자 오랜 시간 평온했던 그들 공동체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사실 피터의 병은 일각이었을 뿐, 실상 관계의 내면은 오래전부터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아오던 상황이었다. 동료로 보낸 25년의 시간 속에는 질투와 분노, 아쉬움 같은 보이지 않는 균열이 항상 존재했고, 이는 피터의 병을 시작으로 하나둘 수면위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한 번도 정상을 놓쳐본 적 없이 최고만을 추구하는 완벽주의자 다니엘(마크 이바니어)은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사유를 바탕으로 연주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이런 1인자가 있다면, 또 만년 2인자 로버트(필립 세이모어 호프만)가 있다. 25년간 제2바이올린을 맡고 있는 로버트는 다니엘에게 깊은 열등감을 느끼는 캐릭터이다. 실력으로도, 또 사랑으로도 그를 이기지 못한다는 생각에 결국 엉뚱한 일을 저지르고 만다. 한편, 마음 깊은 곳에 다니엘에 대한 연모를 감춘 비올리스트 줄리엣(캐서린 키너)은 로버트를 남편으로도 또 제1바이올리니스트로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이 보여주는 미세한 균열은 영화의 엔딩을 맞이하기 전까지 결코 합일되지 않는다. 각자 서로 다른 삶의 방식만 존재할 뿐이다. 자신의 틀 안에서 결코 벗어날 생각이 없는 그들은 20대였을 때도, 50대인 지금도 여전히 철없는 마음을 챙기기에 급급하다.
클래식을 소재로 한 영화이니 만큼 이와 관련된 작은 재미를 꼽자면 극 중 인물들의 성격과 그들이 다루는 악기의 느낌이 매우 비슷하다는 점이다. 열정적이고 자신만만한 다니엘은 가장 강렬하게 파고드는 제1바이올린을 맡고 있다. 예술가로서 또 남편과 아빠로서 자신의 모든 것이 다니엘의 그늘 밑에 있다고 믿는 로버트는, 제1바이올린의 화려함을 부각시켜주고 안정적으로 받쳐주는 제2바이올린의 중요한 역할을 오히려 폄하하며 자신의 상태를 투영하는 오류를 범한다. 이 두 바이올린의 균형을 맞추는 비올라로서 줄리엣과, 뒤에서 무게감 있게 음색을 지탱해주는 첼로는 이 콰르텟을 안정적으로 돌보는 피터의 모습과 매우 흡사한 느낌이다. 어쨌든 영화는 이렇게나 서로 다른 결을 지닌 이들이 하나의 곡을 함께 완성하는 ‘팀’임을 부각시키는데 그 방법으로 등장하는 것이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4번 곡이다. 피터는 콰르텟 멤버들에게 함께하는 마지막 연주로 이 곡을 제안한다.
함께 나이 드는 어울림에 대하여
현악 4중주 14번은 1846년에 완성한 베토벤의 15번째 곡으로 그가 청력을 잃어갈 무렵 만든 곡으로도 유명하다. 놀랍게도 베토벤이 살아있을 당시 단 한 번도 연주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 ‘내가 지금까지 만든 현악 4중주 중에 가장 완벽한 곡’이라고 할 만큼 강한 자부심을 비쳤다. 이 곡의 초연 당시 앉아 있던 슈베르트는 ‘우리가 과연 이 곡 다음으로는 무슨 곡을 더 쓸 수 있을까’라며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이슈로도 유명한 곡이지만, 실상 14번 곡이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형태적인 특징 때문이다. 대부분의 곡들은 거의 4악장 형식인데 반해 이 곡은 무려 3악장이 더 많은 총 7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게다가 악장마다 템포와 분위기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중간에 쉼이 없는 독특한 형태이다. 쉼이 없다는 것은 40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연주자들이 끊김 없이 연주해야 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이 곡은 분명 연주를 하면 할수록, 즉 곡의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불협화음이 생길 확률이 높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베토벤은 어째서 이렇게 쉼 없이 내달리는 곡을 쓴 것일까. 그리고 감독은 이 곡의 어떤 점을 부각시키고자 했을까.
극 중 인물들이 함께해 온 콰르텟의 이름은 다름 아닌 ‘푸가’이다. 푸가란 악곡의 형태로서 하나의 중심 선율을 각 악기들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모방하기도 하고, 변형하기도 하면서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는 기법이다. 생각해보면 이 기법은 이들이 만들어 온 콰르텟의 모습 그 자체임을 알 수 있다. 2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음악에 대한 하나의 열정을 가지고 서로의 악기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함께 나이 들어 온 콰르텟 말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나이 먹는 듯해도 가만히 보면 함께하는 이들은 언제나 비슷하게 나이를 먹는다. 콰르텟의 멤버들이 나이를 먹는 동안 이들이 만든 푸가 역시 같은 모양새의 나이를 먹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 앞에는 쉼 없이 달려야 하는 14번 곡이 놓여 있다. 영화 초반, 피터는 학생들에게 14번을 소개하며 이렇게 묻는다. “이 곡은 매우 긴 곡이야. 그런데 중간에 쉼이 없기 때문에 어차피 끝나면 다 불협화음으로 끝나. 우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공동체의 불협화음, 그것은 삶
이 물음은 크게 영화를 경유해 최종적으로 우리 앞에 놓인다. 쉼 없는 연주는 커다란 레이스이자 멈출 수 없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우리의 인생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우리 또한 수많은 콰르텟을 이루고 살아간다. 분명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엉망이 된 화음을 마주하는 순간을 대면한다. 그러나 거기서 멈출 것인가?
몇 년 전 가족들과 갔던 겨울여행이 생각난다. 다들 자연이 멋진 곳에서 연말을 보낸다며 즐거워할 때 나는 호텔 구석에서 눈에 불을 켜고 맛집 리스트를 만들고 있었다. 특별히 우리 가족 모두 좋아하는 딱새우를 산지에서 먹일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설렘도 잠시, 다음 날 우리는 문 닫은 횟집 문을 쓸쓸하게 몇 번 두드리다가 돌아왔다. 운전하던 동생이 말했다. “뭐 잘됐네. 사실 나 딱새우 별로 안 좋아해.”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뭐? 너가?” “응. 먹으면 목구멍이 좀 가렵거든.” 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동생 말에 의하면 어릴 적부터 갑각류를 먹으면 목이 까슬까슬했는데 다행히 증상이 심각하진 않았고, 또 우리가 다 새우나 조개류를 좋아하다보니 자기도 즐겁게 먹었다는 것이다. 알러지 반응을 참고 여태 우리랑 함께 먹어주었다는 건가. 이건 생각보다 큰 충격이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을 외치며 그동안 가족들에게 사사로운 것조차 당연시 요구했던 나의 철없음을 생각하니 눈물마저 났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아까 나는 누나가 우리한테 산해진미를 먹여주겠다며 맛집 찾는 모습 보니까 가슴 찡하더라.” 훈훈한 오누이의 대화를 들은 건지, 아니면 애써 못들은 체한 건지, 엄마는 뒷자리에서 어제 오늘 찍은 사진을 넘겨보며 환하게 웃고만 있었다. 그 날 우리가 딱새우 대신 먹은 복국은 정말이지 눈물 나게 맛있었다.
어쩌면 나이 듦의 가장 큰 미덕은 끊임없이 상대방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맞춰가는 과정을 두려워하지 않는 배려와 용기일지 모른다. 그러할 때 삶은 하나의 음악처럼, 따뜻함 속에서 완성될 것이다. 비록 겉보기에는 불협화음일지라도.
장다나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영상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객원교수, 부산 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다. 올해의 목표는 분신 같은 고양이 고다르에게 15년지기 집사직을 인정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