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 끝날 것 같지 않은 괴로운 질문들

[363호 팬데믹 시대의 신학서 읽기]

2021-01-29     이민희

작년 한 해 초조한 마음으로 나 자신에게 수차례 던진 질문들이 있다. ‘나는 뭐하는 사람이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린 날부터 끝없이 지속된 질문들이다. 다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얽히고설키는 온갖 상황과 관계 속에서, 사회적이든 개인적이든 생생하게 직면하는 문제 앞에서 훨씬 구체적이고 복잡해졌다.

이를테면 30대 후반 여성으로서 나는 뭐하는 사람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제도교회와 기관에 소속된 목회자로서, 단순 교육 콘텐츠 제작자 및 제공자가 아니라면 나는 뭐하는 사람이며 앞으로 어떤 목회자가 될 수 있을까(이 자리에 있는 게 맞긴 할까), 정치적 의사를 가진 시민으로서, 일을 하고 돈을 버는 노동자로서, 지역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여러 사적 관계들 틈바구니에서.

사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사고가 진행되는 매개의 차이일 뿐, 결국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자유를 획득하고 싶어서,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질문들이다. 이는 타인을 향해서도 가차 없이 제기된다. 감정의 결, 가치의 폭, 위치의 종류는 다양할 수 있으나, 우리가 괴로워하면서 던지는 질문들은 모두 한 곳으로 수렴한다. 투르나이젠은 이런 수많은 질문들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기원과 지향을 묻고 있다고 정리했다. 그리고 이런 물음의 결과를 탁월한 심리묘사와 다채로운 인간 군상으로 드러낸 도스토옙스키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문학비평/평론이 아니다. 목회자이자 신학자의 눈에서 읽어낸 인간과 하나님의 이야기다. 투르나이젠은 이 책을 1921, 그의 신학 여정 초기에 출간했다.
 

바르트의 친구, 에두아르트 트루나이젠
신학자 칼 바르트의 친구로 잘 알려진 에두아르트 트루나이젠(Eduard Thurneysen, 1888-1974)은 스위스의 목회자이자 신학자이다. 실천신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장본인으로 영혼 돌봄이란 용어와 개념을 창안하기도 했다. 투르나이젠이 바르트와 나눈 평생의 우정은 여러 설교와 신학 연구, 성서 주석 등으로 남아있어 우리도 그들의 사랑과 우정에 동참하고 감동할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배운 자유주의 신학이 인간의 이성과 양심의 능력을 곧추세웠음에도, 그리스도교 국가들끼리 총칼을 겨눈 1차 세계대전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던 참상을 목격했다. 이후 다른 가능성을 찾아 나섰고, 마침내 이편의 깨진 인간의 이성이 아닌, 저편의 하나님의 은혜에서 구원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이런 그들의 탐구에 러시아 소설가인 도스토옙스키의 솔직한 천재성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 그의 소설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화와 상황의 역전은 인간은 무엇인지, 인간이 그토록 붙잡으려는 자유가 무엇인지를 거칠고 투박하게, 날것 그대로 드러내준다. 투르나이젠은 말한다. 도스토옙스키가 우리에게 야생의 세계를 보여준다고, (츠바이크의 말을 빌려) “원시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게 한다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지 질문한다. 근원을 알아내려는 열망에서 한두 개씩 던지는 질문은 안타깝게도 곧 정주한 지금의 평온을 의심하게 만든다. 마치 정교하고 예쁜 모양으로 촘촘히 세워둔 도미노가 작은 손짓 하나에 연쇄적으로 쓰러져 버리듯이, 질문을 품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불안한지 연달아 마주해야 한다. 한 치 앞도 장담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내 생명이 맡겨져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가끔 우리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기도 한다. 이런 괴로움은 정확한 단어들로 엄밀히 표현하기도 어려워 기승전결을 가진 논리적 연구로 파악할 수도 없다. 그저 물안개 피어있는 흙길을 걷듯이 희뿌옇고 막연하게 우리를 감싸고 있어 그 불안은 더 가중된다.

이럴 때 인간은 금세 자신을 구원해줄 무언가를 좇는다. 자유의 본거지를 속단해 붙잡는다. 거짓일지언정 잠시라도 마음에 평안을 선사해준다면 붙잡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나의 기원과 지향을, 인생의 흐름을 집요하고 정직하게 보기가 부담되고, 인내를 가지고 톺기에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걱정스러워 그럴싸한 껍데기를 급히 낚아챈다. 그게 돈일 수도 있고, 명예와 권력일 수도 있겠다. 사람과 성에 집착을 하기도 하고, 지식과 학벌에 목을 매기도 한다. 정치체제나 이념에서 구원을 찾고 윤리적인 최종 대안을 갈구한다. 이따금 종교에 빠져들기도 한다.

세상에서는 이런 껍데기에 몰두하고, 껍데기의 가시적인 효과를 성취한 모습이 성공으로 비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잘 속는다. 양손으로 뭔가를 움켜쥔 상태가 구원받은 인간성, 꽉 찬 인생이라고 오해한다. 하지만 분명 이는 얼마 안 있어 다시 큰 구멍을 남길 뿐이다. 그 구멍을 매우기 위해 인간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그 질문을 괴롭게 마주해야만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사람들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소설들에서 인간성과 자유, 구원에 대한 질문을 곳곳에 숨겨둔다. 그리고 이 물음을 회피하기 위해 껍데기를 붙잡다가 와르르 무너지는 사건과 사고를 전면에 내세운다. 죄와 벌에서 가난한 대학생인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신의 수치와 굴욕을 가려줄 짧은 구원으로 선택한 것은 그의 자존심과 의, “이념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아버지와 아들들이 필사적으로 붙잡은 것은, 한편에서는 성, 에로스였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세상과 질문에 대한 냉소이다. 백치역시 성, 권력, 명예, 지식 등을 구원의 거짓 대안으로 붙잡은 인물들이 계속 등장한다. 투르나이젠이 지적했듯, 종교와 교회가 앞장 서 교묘하게 모든 문제 상황을 탈피하도록 돕기도 한다. 이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대심문관 이야기와 이반이 경험한 악마의 환상에서 훌륭하게 묘사된다. 이편에서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속마음과 처세가 그리 낯설지 않다.

투르나이젠은 도스토옙스키가 그의 소설 속에서 어떤 이념이나 사상체계, 종교기관과 제도에 기대지 않고 주변 환경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은 채 이런 인간의 열망을 찾아낸 것, 고집스럽고 끈질기게 파고든 것이 그의 독보적인 독특성이라고 극찬한다.

 

질문의 의미
그렇다면 이런 모든 사건과 사고, 이편의 결정과 결과는 전부 무의미한가? 우리는 불안과 불확실성 위에 맥없이 부유한 채, 절대 답이 돌아오지 않을 질문만 메아리로 듣고 사는 걸까? 인간과 자유에 대한 궁금증과 의심은 거짓뉴스일까? 쉽지 않지만, 우리가 이런 지루하고 신산한 질문을 끝까지 해야 할 이유와 가치에 대해 투르나이젠은 그곳에서부터 하나님의 빛이 비추기 시작하기 때문이라고 이른다.

이 땅 위의 모든 사물은 인간이 기원(‘어디에서?’)과 지향(‘어디로?’)을 묻는 순간, 인간을 향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때 비로소 사물은 가치와 무가치, 빛과 그림자를 획득한다. (19)

이편의 땅에서 시간을 사는 육신을 가진 죄인이 제기한 한계에 갇힌 질문의 답은 절대 이곳에서 얻어질 수 없다. 우리가 계산해 옳다고 판단한 무언가가 구원과 자유를 주지 못한다. 이는 철저히 저편의 하늘,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영이신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
 

모든 인간적인 것이 멈춰 선 자리에서 신적인 것이 시작된다. 그것은 인간적인 것의 위기이며 종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신적인 것이 아니다.(101)

 

그래서 투르나이젠은 우리를 해방시킬 자유,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일 힘, 고통의 한가운데를 뚫고 나갈 맷집은 곧 하나님을 선택하는 일이라고 강조해 말한다. 우리의 이성과 경험, 감정과 논리로 매끈하고 깔끔하게 그려놓은 삶의 그림이라도, 그림에 의미가 부여되고 가능성의 해석이 시작되는 곳은 그림 바깥의 소실점으로 계시는 하나님이다. 그림 안에 이리저리 놓인 다양한 선들이라도 통일성과 조화를 감히 꿈꿔보고, 하나의 완전한 인간성을 상상하며 낙원을 향할 수 있는 이유가 역설적이게도 이 안으로 끌어올 수 없는 하나님인 것이다. 저쪽에서 주어지는 인생의 의미를 이쪽에서 겸허히 따르는 것이 자유를 바라는 인간이 걸어가야 할 구원의 길이 된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참된 확실성을 얻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확실성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98)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필요하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끝날 것 같지 않은 질문들을 언제까지 해야 할까? 과연 편한 가슴으로 살 수 있을까? 유형의 답이 보이지 않는 질문들이 극도의 우울감과 끝없는 환희 사이를 오가게 만들고, 불안함과 불확실성 속에서 거짓을 잡았다 놨다 반복하게 만들 때, 우리 안에서 스물스물 올라오는 정주하고자 하는 갈망들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말 그대로 현타만 세게 오는 질문들 속에서, 묘하게 안도의 숨을 쉬고 가슴이 뜨거워질 때가 있다. 구원이 찾아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암시들이 이 땅에도 있기 때문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찾아 간 매춘부 소냐처럼, 형 이반을 만나고 심란해진 알료샤를 다독이는 조시마 장로처럼, 어수룩하나 상처받지 않고 수치스러움을 느끼지 않는 미쉬낀 공작처럼, 줄기차게 연서를 썼던 가난한 사람처럼. 그리고 누구나 인정하겠지만, 나의 답이 주어져서가 아니라, 나처럼 고군분투하는 누군가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기꺼이 자신을 극복한다. 삶의 폭풍을 정면으로 맞으면서 구부정한 허리로 옷섶을 추스르는 이를 볼 때 그렇다. 저편에서 미미하게 구원이 찾아오는 동안 우리는 죄의 연대를 맺어 자유를 누릴 힘을 고통 가운데 얻는다.

이 땅에 숨겨진 저 편의 암시들이, 서로를 묶는 죄의 연대가 우리로 인간적인 확실함을 거부하고 거짓 평온을 박차고 나가 어두움으로 들어가게 한다. 우리는 기꺼이 지옥으로 추락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139:9)

 

 

이민희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대학원에서 토목공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에라스무스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청소년 목회를 한다. 옮긴 책으로 사막의 지혜(공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