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일의 영성
[364호 커버스토리]
하나님께서 음식에 신경이나 쓰실까?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요즘 저의 관심은 음식에 쏠려 있습니다. 먹는 일이 신앙의 핵심이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먹는 일에 관심을 쏟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신학자 노먼 워즈바(Norman Wirzba)가 쓴 《음식과 신앙》(Food and Faith)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어떻게 이 책을 알게 되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인 웬들 베리(Wendell Berry)를 통해서 노먼 워즈바를 알게 된 것은 확실합니다.
《음식과 신앙》을 읽은 뒤 복음서를 보니,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은 늘 죄인들과 어울리면서 먹고 마시는 일을 즐기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3대 별명이 ‘죄인들의 친구’ ‘술보’ ‘먹보’인 점도 이상할 것이 없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 일으키신 기적,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신 이야기, 최후의 만찬과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같이 음식을 드시는 장면 등, 복음서는 먹는 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여기에다 구약에 등장하는 수많은 먹는 이야기를 넣으면 성경은 하나의 음식 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음식은 상품으로, 먹는 일은 소비로 전락하다
요즘처럼 사람들이 음식에 큰 관심을 보이는 때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맛집을 찾아다니면서 자신이 먹었던 음식을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일을 인생의 낙으로 생각합니다. 텔레비전을 켜면 요리 프로그램과 먹방 일색입니다. 어느 때보다 음식과 먹는 일을 잘 아는 시대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노먼 워즈바는 우리 시대 사람들이 과거 어느 때보다 음식과 먹는 일에 무지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음식을 상품으로, 먹는 일을 소비로 인식하면서 음식은 마트에서 온다고 생각하는데, 역사상 음식과 먹는 일을 이렇게 생각한 시대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연을 대하는 근대적 태도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계몽주의 이후에 자연은 개발의 대상이자 부를 축적하기 위한 자원으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잘못된 신학이 자연을 향한 근대적 태도를 강화해왔습니다. 자연에 대한 신학적 오해를 세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오해 1: 자연은 지배의 대상이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말씀하셨기 때문에(창 1:28) 자연을 마음껏 사용하고 착취해도 좋다는 생각입니다. 역사학자 린 화이트 주니어(Lynn White Jr.)는 〈생태적 위기의 역사적 기원〉이라는 유명한 논문에서 이러한 신학적 입장이 현대의 생태 위기를 불러왔다며 기독교를 비난했고, 그의 주장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28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충분히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다른 피조물을 축복하시고(창 1:22),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창 1:27), 모든 생명에게 땅을 선물로 주신 후에(창 1:29-30) 내리신 명령이라는 더 큰 맥락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특히 창조를 다시 설명하는 창세기 2:15의 피조물을 돌보라는 명령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오해 2: 자연은 인간을 매개해서만 의미가 있다
둘째는 인간만이 하나님 형상이므로 다른 피조물은 인간을 매개해서만 의미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음식과 신앙》의 영향을 받고 2018년 10월부터 1년 동안 미국 동부에 있는 팜스쿨에서 안식년을 보낼 때, 신학자 데이비드 클러프(David L. Clough)가 제가 살던 곳 근처에 있는 대학교에 와서 강연한 적이 있었습니다. 강연 제목은 ‘동물에 관한 신학적 윤리학’이었는데, 저는 당시 팜스쿨에서 작물을 재배하면서 소·양·닭·돼지·말·칠면조 등 여러 동물을 키우고 있었기에 일부러 찾아가 강의도 듣고 저서도 사서 읽었습니다. 데이비드 클러프의 핵심 주장은 ‘인간 동물’뿐 아니라 다른 동물도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인간 모습으로 성육신하신 사건은 필연적이지 않고, 사자·코끼리와 같은 다른 동물 모습으로도 성육신하셨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인간 동물’과 다른 동물 사이에는 위계가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아직 데이비드 클러프가 펼치는 주장에 다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인간이 피조물 가운데 하나이며, 다른 피조물도 인간의 매개 없이 하나님께 의미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대표적 예로,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 이후에 사람하고만 언약을 맺으신 것이 아닙니다. 땅, 그리고 다른 피조물과도 약속하십니다. 그렇게 약속하시고, 무지개로 약속의 엄중함을 보이셨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활을 옆에 두고 언약을 맺는데, 이는 약속을 어기는 사람을 활로 죽여도 좋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피조물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비로 만든 큰 활’(rainbow)로 스스로 언약에 구속되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또한 시편을 비롯해 성경 곳곳에서 다른 피조물이 인간의 매개 없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과 의사소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세상에 나오기 전 다섯째 날까지 다른 피조물이 이미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있었다는 것과 창조의 정점은 인간이 창조된 여섯째 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일곱째 날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4세기 교부 바실리우스는 아래와 같이 기도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자연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시각을 바로잡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기도는 없어 보입니다.
오 하나님, 당신은
우리의 형제인 동물들,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
이 땅을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집으로 주셨으니
우리 안에 그들과의 연대감이 커질 수 있게 해주소서.
우리가 과거에 했던 부끄러운 일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고압적인 지배를 행사해서
당신에게 노래로 올라갔어야 할 땅의 목소리가
고통의 신음소리가 되었나이다.
그들이 단지 우리만을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 그리고 당신을 위해 사는 존재라는 것과
그들도 삶의 달콤함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소서
오해 3: 자연은 결국 사라질 것이다
자연을 개발의 대상이자 부를 축적하기 위한 자원으로 환원하는 이유는 천국이나 구원을 협소하게 생각하는 신학적 태도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흔히 죽어서 영혼이 좋은 곳에 가는 것을 구원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자연은 궁극적으로 의미가 없고 사라질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회복의 관점에서 총체적인 구원을 생각해야 합니다. 바로 창조신학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뿐 아니라 인간의 몸과 다른 피조물도 만드시고, 그것을 선하고 아름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죄와 타락으로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문제를 고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구원은 인간의 영혼뿐 아니라 몸 그리고 다른 피조물까지도 대상으로 하며, 그 모양은 대체(代替)가 아닌 회복(回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로마서 8장에서 다른 피조물들도 신음하면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천국(하나님 나라)은 다른 곳이 아니라 처음 창조하신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연을 대하는 근대적 세계관과 이를 정당화한 신학적 오해의 영향 아래 우리는 음식을 상품으로, 먹는 일을 소비로 인식하면서 음식은 마트에서 온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음식이 마트에서 왔다는 말은 우리가 음식에 관련한 모든 맥락과 절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음식의 맥락은 기껏해야 재료의 원산지 정도입니다. 중국산인지 아닌지만 보는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음식에는 많은 존재의 수고와 다양한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자유무역협정의 불공정성과 이주노동자의 착취와 화학첨가물의 해악과 화학농약의 위험도 들어가 있습니다.
음식의 맥락 1: 이 생선 어디서 왔지?
저는 공익법센터 어필에서 일하면서 음식이 우리 식탁에 오기까지 맥락을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어필에서 하는 일 중 하나는 한국 어선에서 일어나는 이주노동자 인권침해에 대응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하면서 배우게 된 것은 지금처럼 물고기를 남획하면 2050년에는 바다에 있는 대부분의 물고기가 멸종한다는 사실입니다. 물고기에 대한 이러한 착취는 물고기를 잡는 사람에 대한 착취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국 원양어선 선원의 80%, 연근해어선 선원의 50%가 이주노동자입니다. 이들은 가히 노예노동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장시간 일을 하는데, 낮은 임금에 차별 대우를 받습니다. 제주도 갈치잡이 배에서 일하는 인도네시아 국적의 한 선원은 매일 커피 20잔으로 자신을 각성해가며 두 달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20~21시간 일했습니다. 베트남 국적의 한 선원은 한국 원양어선에서 매일 18시간 일하면서 40만 원에 불과한 월급을 받았습니다. 배에서 욕설은 일상이고 폭행도 예외 없이 일어납니다. 한국인 선원들은 생수를 마시고 심지어 담수로 목욕하지만, 이주노동자들은 욕실도 없이 배 위에서 바닷물로 몸을 씻고 조수(造水)와 정수도 제대로 되지 않아 짠맛이 나는 바닷물을 마십니다.
하지만 이렇게 착취와 학대와 차별을 당해도 배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거의 모든 이주어선원이 배에 타자마자 여권을 압수당하고, 계약을 다 마치지 못한 채 하선할 경우 고액을 배상한다는 약정을 합니다. 한번 배를 타면 1년 반 동안 육지 구경을 못 하고 망망대해에서 일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1
우리는 생선을 먹을 때 이런 일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선은 상품이고, 마트에서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음식의 맥락 2: 이 기름 어디서 왔지?
저는 2016년, 인도네시아에 있는 한국 기업들이 운영하는 야자수 농장에서 한 달을 보냈습니다.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한국의 대기업들이 운영하는 야자수 농장의 규모를 합치면 서울시 면적보다 큽니다. 대기업이 야자수 농장에 대규모로 투자하는 것은 편의점에서 파는 상품의 반 정도에 쓰일 정도로 팜유(야자유)의 수요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팜유는 엄청난 자연 착취와 노동 착취로 생산됩니다. 제가 조사한 한국 기업이 운영하는 야자수 농장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만성적인 물 부족과 오염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땅을 강제로 빼앗긴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야자수 농장이 들어선 곳은 생물다양성이 무척이나 풍부했던 열대우림 지대였습니다. 그 넓은 열대우림을 싹 밀어내고 단일 작물로 야자수를 심은 것입니다. 조사하면서 놀란 점은 ‘그라목손’이라는 맹독성 농약을 버젓이 사용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라목손은 유럽과 미국, 한국에서 사용뿐 아니라 소지까지 금지된 농약입니다. 해독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제대로 된 안전 장비도 없이 그라목손을 뿌리고 있었습니다.2
우리는 팜유가 들어간 초콜릿·과자·라면을 먹을 때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기름은 상품이고, 마트에서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음식의 맥락 3: 이 치킨 어디서 왔지?
제가 지냈던 팜스쿨에 있는 가축들은 동물복지승인기준에 따라 사육되어 목초지에서 풀을 먹고 자라고, 항생제나 성장촉진제를 맞지 않고, GMO 사료를 먹을 일도 없었습니다. 닭의 경우 자연광을 포함해 빛에 노출되는 시간을 하루 16시간 이하로 제한하는 동물복지승인기준을 더 엄격하게 지켜 밤에는 전깃불을 켜두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식탁에 오르기까지 이런 대우를 받은 닭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얼마 전 신문에 끼어있는 광고 전단에서 달걀 한 줄을 1,500원에 파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전 같으면 ‘야 진짜 싸다’라고만 반응했을 텐데, 팜스쿨에서 1년 동안 닭을 길러봤기 때문에 ‘이 닭들은 정말 고문을 당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닭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고문을 당한 후 우리 식탁에 올라옵니다. 부리가 절단된 상태로 바깥 공기와 햇빛을 차단당한 채, 몸조차 돌릴 수 없는 좁은 사육장에서 항생제와 성장촉진제를 맞으며 자랍니다. 밤새도록 전깃불을 켜두어 강제로 알을 낳게 합니다. 병을 막기 위해 엄청난 양의 항생제도 투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기를 먹으면서 ‘얼마나 싼가’ ‘얼마나 양이 많은가’ ‘얼마나 쉽게 먹을 수 있는가’만 생각합니다. 어떻게 동물이 길러지는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음식의 맥락과 완전히 절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맥락이 절연된 상태에서 음식을 먹기 때문에 먹으면 먹을수록 우리 자신도 해치고 다른 피조물도 해치는 것입니다.
식사 기도는 음식의 맥락 속으로 들어가는 일
기도를 잘 안 하는 저는 제 영성이 식사 기도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자책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식사 기도라도 제대로 하자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은 밥을 먹기 전 “잘 먹겠습니다” 혹은 ‘보나쁘띠’(Bon appétit, 맛있게 드세요)라는 주문을 짧게 외치고는 바로 음식으로 뛰어드는데, 우리 식사 기도도 이런 ‘보나쁘띠’의 대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음식이 주님께서 주시는 일용할 양식이자 선물이 되기 위해서는 식사 기도를 할 때 우리가 먹는 음식의 ‘맥락’을 생각해야 합니다. 식사 기도는 식탁 위에 올라온 음식을 맥락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식이 우리 식탁에 올라오기 위해서는 여러 맥락을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는 흙도 있고 지렁이도 있고 미생물도 있습니다. 햇빛도 있고 비도 있고 꿀벌도 있고(곤충이 농작물의 3분의 1을 수분하는데, 꿀벌이 그중 80%를 담당한다고 합니다), 농부도 있고(그중 이주노동자도 있겠지요), 요리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피조물을 통해서 베풀어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음식의 맥락과 절연되어 있기 때문에 음식을 상품으로만, 먹는 일을 소비로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생각에 저항력이 없습니다. 음식을 상품으로만 생각한다면 어떻게 하면 싸게 많이 소비할 수 있을지만 중요해집니다. 우리는 이 음식이라는 선물에 대해서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음식은 상품이 아니라 피조물 공동체, 생명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피조물 공동체의 지체인 동식물이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준 것이 음식입니다. 여기서 한 번 더 깊게 생각해보면, 먹는 일은 죽음과 깊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먹지 않으면 우리가 죽고, 누군가 죽어야 우리는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존재의 죽음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생명 공동체 일원의 죽음이 없으면 먹는 일, 즉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먹는 일은 일상에서의 성찬식
먹는 일이 ‘누군가의 죽음으로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게 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예수님과 깊게 사귀고 교제하면서 그분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살 때 그렇게 사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분이 내 배 속에 들어와 나의 에너지가 되고 나를 바꾸는 소스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먹는 것이 곧 ‘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찬의 핵심입니다. 그렇게 성찬에 참여하여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서 내가 변화하면, 주님이 나의 음식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존재를 위한 음식이 됩니다.
예수님이 자신 안에 우리를 위한 공간을 내어주고 거기서 우리가 꽃피게 하는 방식으로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주님과 같이 다른 존재가 꽃피울 수 있도록 우리를 내어 줘야 합니다. 생명의 빵이 되신 주님을 먹고 우리도 다른 존재에게 빵이 되어야 합니다. 성찬에 참여하여 예수님을 모신 우리는 먹을 때 단순히 피조물인 지체로부터 무엇을 취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을 다른 피조물에 선물로 내어주고 그들을 돌보고 보호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심으로 새 삶을 얻은 우리는 ‘나는 어떻게 타인을 포함한 피조세계의 다른 존재를 보호하고 기르고 돌볼 것인가’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가수 홍순관이 부른 〈벽 없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3
자연은 때를 따라 옷을 입네
소녀 같은 나물 냄새
초록의 춤과 바람과 태양
흙보다도 더욱 붉은 산하
봄 여름 가을 겨울 따로 사는 건 아니지
벽 없이 금 없이 오가며
서로에게 생명을 내어주고 살지
님을 따라 부르는 노래
서로에게 생명을 내어주고 사는 자연의 모습이, 생명을 내어주신 주님을 따라 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음식을 먹는 일은 일상에서 성찬식을 여는 것입니다. 먹는 일은 ‘내가 누군가의 죽음 때문에 살고 있구나’ ‘나는 누구를 살리기 위해서 죽어야 할까’ 묻는 의식(ritual)에 일상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성찬의 의미를 상기하는 식사 기도
우리의 식사 기도는 음식이 우리에게 온 맥락을 기억하고 음식을 생명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성찬의 의미를 상기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식사 기도는 너무 빈약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보나쁘띠’의 다른 버전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식사 기도를 한 다음에 ‘아멘’(그렇게 이루어지리다)이라고 말합니다. 식사 기도를 할 때 음식이 우리에게 온 맥락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로 ‘아멘’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동물학대, 노예노동, 환경침해로 만들어진 음식을 먹으면서 ‘그렇게 이루어지리다’라고 한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맥락을 알지 못하면 우리가 말하는 내용이 전혀 다른 뜻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식사 기도문이 있습니다. 강원도 화천 시골교회에서 드린 식사 기도인데, 단순하지만 음식과 먹는 것에 관한 굉장한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식사 기도는 이렇게 깊어져야 합니다.
이 밥이 우리에게 먹혀 생명을 살리듯
우리도 세상의 밥이 되어 세상을 살리게 하소서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조화가 스며 있고
한 톨의 곡식에도 만인의 땀이 담겨 있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먹게 하시고 식탐 말게 하소서
천천히 꼭꼭 씹어서 공손히 삼키겠습니다.
우리의 밥이 되어 우리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먹는 일의 영성을 위한 작은 실천
웬들 베리는 “먹는 일은 농업적인 행위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는 ‘무엇을 어떻게 농사짓는지’를 결정합니다. 먹는 일은 농업적인 행위일 뿐 아니라 생태적이고 영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먹는 일이 조금 더 영적이고 생태적이고 농업적인 것이 되도록 아주 작은 것부터 실천해보면 좋겠습니다. 음식이 우리에게 온 맥락을 살펴보고 의심스러운 음식을 피하기를 바랍니다. 화석연료를 많이 쓰지 않고, 푸드 마일리지4가 긴 음식은 피하면서, 가능하면 ‘한살림’이나 ‘네니아’와 같이 믿을 수 있는 곳에서 노동·동물·환경 착취 없이 길러진 음식을 사는 습관을 들이는 것입니다.
특히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몸에도 나쁘고 환경도 해치는 인스턴트식품을 간식으로 주는 교회가 적지 않습니다. 인스턴트식품 대신 건강한 먹거리를 주면서 먹는 일에 담긴 농업적·생태학적·영적 의미를 가르치면 좋겠습니다.
1 공익법센터 어필은 다른 단체들과 함께 이주어선원 인권 개선을 위한 캠페인 ‘누가 내 생선을 잡았을까?’를 진 행하고 있습니다. 캠페인 웹페이지(apil.or.kr)에서 더 많은 자료를 보실 수 있습니다.
2 공익법센터 어필과 환경운동연합이 함께 펴낸 보고서 〈빼앗긴 숲에도 봄은 오는가〉(2019)를 보시면 팜오일 산업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문제를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apil.or.kr/?p=11948
3 공익법센터 어필 3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홍순관님이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www.youtube.com/watch?v=TGGxySrZ0iw
4 식품상품이 생산된 후 최종 소비자에게 도달할 때까지 이동거리. 식품의 수송량에 실제 수송 거리를 곱한 값이다.
김종철
한국라브리 간사, 기독법률가회(CLF) 사무국장으로 일한 바 있으며, 2011년 공익법센터 어필을 설립한 이후 지금까지 상근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2015년 대한변호사협회로부터 변호사공익대상을, 2018년 미 국무부로부터 인신매매 척결 영웅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