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받는 자’의 언어

[364호 새로 쓰는 나눔 윤리학]

2021-02-26     김혜령

소외당하기 쉬운 고통받는 자의 언어

지난 글에서 주는 이의 선한 의도와 달리 선물은 본질적으로 받는 이에 의해 잘 받아지지 않거나 심지어 거절되기 쉽다고 했다. 그래서 ‘선물의 실패가능성’을 언제나 전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글에서는 이 실패가능성을 ‘언어적 측면’에서 조금 더 설명하고, 나아가 실패가능성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더라도 어떻게 조금이나마 줄여나갈 수 있는지 함께 성찰하고자 한다.

우리가 선물이나 나눔, 봉사를 더 이상 진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가장 많이 느끼는 때는 언제일까? 요즘 대학에는 저소득층 아동이나 청소년 대상의 교육 봉사를 학점으로 인정해주는 교과목이 있다. 심지어 사회공헌프로그램이라는 이름 아래 대학생 교육 봉사에 대규모 장학금을 후원하는 대기업도 있다. 학점도 따고, 장학금도 받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을 도우면서 자기효능감과 스펙을 쌓을 수 있기에 많은 학생이 도전한다. 그러나 봉사의 경험이 모두에게 보람되고 유쾌하게 끝나진 않는다. 저소득층 아동이나 청소년들이 학업에 매우 불성실할 때, 혹은 멀리서 애써 시간을 내어 온 봉사자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는커녕 말버릇 없이 대꾸하거나 거친 욕을 섞어 답할 때 ‘모범생 대학생들’은 쉽게 좌절감을 느끼고 봉사를 중단한다. 그래서 교육 봉사는 봉사 학생에게 오히려 저소득층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인식을 확증하고 내면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교육자 입장에서 볼 때 대학생들이 좌절감에 덜 빠지면서도 봉사를 지속하려면 ‘도움받는 자’의 언어 특성을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상대방 언어의 구조적 특성을 파악하면 상대방에 대해 조금은 더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나는 불어학자 정우향이 쓴 《소통의 외로움》(한국문화사, 2013)을 교재로 사용해왔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을 만큼 이 책은 ‘도움이 필요한 자’의 언어 특성을 따뜻한 시선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청각장애나 언어장애가 없어도 개인적 혹은 사회적 고통 때문에 의사소통 기능 자체에 손상을 입은 사람들을 ‘언어적 약자’라고 호칭한다. 나아가 왜 ‘언어적 문제’가 이들을 사회적 관계에서 소외하는 데 크게 작동하는지 세세하게 설명한다.

말을 앗아가는 고통과 자학의 언어

그에 따르면, 고통이란 그것이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본질적으로 타자가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엄청난 고통을 경험하는 개인은 사회적 관계망으로부터 고립되기 쉽다. 문제는 이 고립이 안타깝게도 타자와의 의사소통 기능을 점차적으로 저하시킨다는 사실이다. 의사소통 기능이 한번 저하되면 사회적 관계를 재건하는 일도 매우 어려워진다. 삶의 고통으로 인간관계가 깨지니 언어가 약해지고, 언어가 약해지니 관계를 다시 만들기 어려운 악순환이 반복된다.

더 큰 문제는 언어가 사유의 집이라는 점에서 발생한다. 의사소통 기능이 파괴되면 자신이 당하는 고통의 원인과 해결 방법을 사유할 능력도 함께 저하되기 쉽다. 자신이 겪는 고통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적절한 말로 설명할 수 있어야 제대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데, 애당초 말을 꺼내는 일 자체가 어렵다 보니 쉽게 분노하거나 자포자기해버린다. 심지어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들을 둘러대며 듣는 이의 인내력을 테스트하기도 한다. 자기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 관점이 아니라 고통을 부여한 소위 ‘강자의 언어’(저자는 이것을 ‘타자 담론’이라 불렀다.)로 자기 고통을 설명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여있을 때도 많다. 강자의 언어는 언어적 약자를 ‘내가 가난한 이유는 내가 게을러서’ ‘내가 폭력을 당한 이유는 내가 약해서’ ‘내가 장애로 불편한 이유는 내가 그렇게 태어나서’ ‘내가 공부를 못하는 이유는 내 머리가 나빠서’라는 식으로 자기 고통의 원인을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자학’의 언어에 가둔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물질이나 재능을 나누는 일 자체는 사실 그리 어렵지 않다. 심지어 마음을 나누는 것도 감정을 본능으로 지닌 동물인 인간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작 어려운 점은 자기 고통에 빠져 있는 이들의 빈약하거나 서투른 의사소통 능력과 관련이 있다. 물질과 마음을 제대로 나누기 위해서는 먼저 대화를 통해 서로 가까워져야 하는데, 이들의 저하된 의사소통 능력은 대화의 장에서 상대방과 말을 이어가고픈 흥미를 반감시킨다. 수동적이고 무기력하다 못해 생명력 자체가 훼손된 언어적 약자들과 대화할 때 대화 상대자인 많은 봉사자는 쉬이 지루해지거나 답답해진다. 분노나 우울을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을 대할 경우 봉사자는 감정노동에 지쳐 떨어져 나가기 쉽다.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기 자신의 냉정한 이기심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지루함이나 답답함을 끝내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정우향, 158쪽) 상대가 처한 어려운 상황에 불쌍함을 느끼기는 하지만, 서로 교감하지 못하는 대화는 상호 연대의 우정을 키워내기 힘들다. 필요한 것을 주고 빠지는 식의 나눔은 가능하지만, 나눔을 통해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되고, 한 교회 교인이 되는 관계의 기적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고통받는 자의 의사소통 능력을 회복시키려면

이러한 문제를 깊이 성찰하는 정우향은 고통받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물질적 기반으로서의 자선이나 재능기부, 나아가 감정적 동정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물질과 감정이 제대로 전달되기 위해서라도,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의 의사소통 능력이 성장하거나 다시 회복될 수 있도록 돕는 데 더 초점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고통을 제대로 이해하고 서술할 수 없는 언어적 약자들 곁에서 그들의 침묵과 탄식, 신음이나 분노 섞인 울부짖음에 섣부르게 자포자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기다리며 고통에 함께 공감하고 연대하는 대화 상대자의 존재를 강조한다. 끈기 있는 기다림이 선사하는 신뢰 위에 고통받는 자가 스스로 조금씩 발화하기 시작할 때 대화 상대자는 설익은 말들을 대화 속에서 이해 가능한 말로 정리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가 던지는 좋은 질문들이 발화자 스스로 다른 관점에서 자기 문제를 조망하고 풀어갈 수 있는 방법과 힘을 찾게 해줄 수도 있다. 정우향의 말대로 ‘타자 중심의 의사소통 태도’야말로 고통 속에 놓인 이들을 돕는 데 매우 결정적일 수 있다.

고통받는 이들 곁에서 겸손하고 낮은 자세를 유지하는 대화 상대자가 되라고 제안하는 저자의 주장은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새로운 이야기는 아닐 테다. 저자가 말하는 대화 상대자의 바른 모습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형식상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죄의 고통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초월적 절대자로서의 하나님의 자리를 버리고 스스로 ‘하강하여’ 십자가에 매달리는 대속양이 되었다. 그래서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겸손히 다가가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모범적인’ 봉사자의 모습에는 그리스도교의 독특한 기독론이 겹쳐 보인다. 그래서일까?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이 ‘참된 봉사자가 되려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만 한다’고 확신하고 있다.

남을 ‘위’하기보다 남을 ‘대’하는 게 더 중요해진 시대

안타깝게도 혹은 다행스럽게도 이제 우리는 겸손한 봉사자나 하강한 구원자 모델이 교회 밖 사람들에게 별다른 감동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대전환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더 정확히 말해 오히려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시대가 닥쳐왔다. 물론 이 말을 듣는 그리스도인의 상당수는 아마도 말세를 탓할 것이다. 사악한 이기심으로 이웃사랑에 대한 감정이 가뭄 맞은 논바닥처럼 메말라 붙어 쩍쩍 갈라진 현대인들의 죄악된 마음 밭을 탓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속인들의 눈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겐 너무나 은혜로운 ‘도움을 받는 자’(구원받는 자)를 위한 ‘도움을 주는 자’(구원하는 자)의 자발적 희생 관계가 여전히 부담스럽게 비친다. 둘 중 한 사람만의 희생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방식은 ‘도움을 받는 자’(구원받는 자)를 ‘도움을 주는 자’(구원하는 자) 없이는 제대로 된 자생이나 발화 자체를 해낼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로 타자화하는 위험이 있다. 노동·빈민운동, 인종차별반대운동, 여성운동, 장애·아동인권운동, 이주민권리운동 등 다양한 약자의 권리를 혁명적으로 확장해온 지난 두 세기 동안 인류는 고통받는 자들의 문제를 개인의 불운이나 무능력, 혹은 자연적 숙명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사회적 차별이나 불의와 연관하여 이해하는 쪽으로 발전해 왔다. 지난 글(2020년 10월호)에서 설명했듯,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사랑보다는 정의의 관점에서 해결하려는 방식이 현대인들에게 더 익숙해졌다.

자선보다는 분배에 더 익숙하고, 배려보다는 인권을 기본으로 생각하며, 사랑보다는 정의가 먼저 지켜져야 한다고 여기는 시대가 이미 우리에게 도래했다. 신학자 양명수는 이를 두고 “남을 위하는 것보다는 남을 대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 시대가 되었다고 했다.(양명수, 《근대성과 종교》) 그러나 다수의 그리스도인은 전통적으로 분배보다는 나눔에, 인권보다는 배려에, 정의보다는 사랑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해온 교회의 전통에 여전히 익숙하다. 남을 위하는 일에 훨씬 더 많이 집중한다. 그 결과, 본마음과 다르게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이 매우 빠르게 사회부적응자 혹은 문화후진자(‘문찐’)로 고립되어가고 있다. 한편으로는 고립을 심각하게 의식하기보다 스스로 세상과 구별된 집단이라고 착각하고 실제로는 스스로 왕따가 된 집단(‘스따’)의 전형이 되기도 한다. 어떻게 우리는 자선과 배려,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분배와 인권, 정의를 균형 있게 고려하는 새로운 교회를 준비할 수 있을까? 다행히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실마리를 나는 올 1월에 막 출간된 책 《사이보그가 되다》(김초엽·김원영)를 읽으며 조금은 찾을 수 있었다.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 신화를 반박하다

이 책은 오늘의 작가상과 젊은 작가상을 수상하며 문단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소설가 김초엽과 변호사이자 작가이며 연극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김원영이 함께 쓴 책이다. 이 책의 독특한 점은 이들의 화려한 직업적 정체성뿐 아니라, 이들이 남들과 다르게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에서 글을 써내려갔다는 사실이다. 김초엽은 보청기를 착용하는 후천적 청각장애인으로서, 김원영은 골격계 관련 질병으로 휠체어를 탄 장애인으로서, 비장애인 관점에서는 전혀 느낄 수도 알 수도 없는 이야기들을 매우 재밌고 설득력 있게 서술한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인공지능 기술의 획기적 발전으로 최근 인문학자들의 관심을 독점하고 있는 ‘포스트휴먼’ 연구의 핵심주제인 사이보그에 대해 ―누가 묻지도 않았을 것이 분명했을 텐데도― 장애인 관점에서 매우 꼼꼼히 성찰해갈 뿐 아니라, 장애인 저자들끼리의 교차 집필과 대화를 통해 사유를 확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쯤에서 독자들은 내게 물을지 모르겠다. “‘도움받는 자’의 언어”라는 제목으로 이번 호 글을 쓰면서 왜 갑자기 사이보그에 대한 장애인의 성찰을 소개하느냐고. 내 답은 아주 간단하다. 이 책의 내용이 전반적으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 그래서 쉽게 ‘도움받는 자’라고 여겨왔던 장애인들이 저자가 되어 직접 자신의 관점에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주체(비장애인-구원자)의 도움을 수동적으로 기다려야만 한다고 여겨지는 언어적 약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도움을 받는 순간 일어나는 그들의 감정과 생각에 대해 숨김없이 자기 언어를 펼쳐나가고 있다.

책에 등장하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비장애인들에게는 낯설어서 너무도 소중한데, 그중 가장 대중적인 예를 이 글에 옮겨본다. 김초엽은 작년 초 공개된 현대자동차의 ‘두 번째 걸음마’라는 광고의 서사를 장애인 관점에서 비평한다.(《사이보그가 되다》, 70쪽) 한 후천적 장애인 양궁 국가대표 선수가 현대자동차의 웨어러블 로보스틱을 착용하고 부모님 앞에서 처음으로 스스로 일어나 걷기 시작한다. 광고는 이 순간을 ‘두 번째 걸음마’라고 부르며, 그를 지켜보는 부모뿐 아니라, 그 광고를 지켜보는 시청자가 경험하는 감동에 ‘휴머니즘 기술’을 개발하는 기업의 사회적 가치를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비장애인에게는 이보다 더 감동적일 수 없는 장애인 이야기인데, 막상 장애인 김초엽은 거리를 두고 사유한다.

그에 따르면, 이 광고가 보여주는 사이보그 기술은 기본적으로 장애를 ‘정상 능력’의 손실로 보고 기술을 통해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전제한다. 문제는 이러한 관점에 익숙해진 대중은 장애인을 위한 기술이 손상된 몸을 대체하는 ‘따뜻한 서비스’라는 단순한 생각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장애인 입장에서 볼 때, 장애를 ‘정상의 결핍’ 혹은 ‘비정상’이라고 전제하는 기술 개발은 ‘시혜적 기술’에 불과할 수도 있다. “장애인은 기술을 사용하는 주체가 아니라 누군가가 베푼 온정의 수혜자로 위치”되기 때문이다.(72쪽) 특히 저자는 이러한 낭만적 광고는 몸에 기계(보형물이나 보청기 등)를 부착할 때 겪는 장애인들의 실질적 고통(피부의 짓누름, 전기적 기계 착용의 불편함, 기계 착용을 주변인에게 들키지 말아야 하는 차별적 현실, 매우 비싼 비용 등)에 완전히 무지할 뿐 아니라, 장애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보다 언젠가 반드시 종식되고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 여기게 한다고 지적한다. 한마디로, 장애인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기술이 능력차별주의에 근거하여 장애인의 몸에 대해 “취약한 몸, 손상된 몸, 의존하는 몸”(276쪽)이라는 혐오를 유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비판을 두고 이 책의 저자가 기술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섣부르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 두 저자가 비판하는 핵심 내용은 ‘정상인들의 사회’에서 만들어진 ‘장애인을 위한 기술’이 장애인들이 자기 몸의 상태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비장애인과 어울려 살 수 있는 적정 수준의 기술적 대안을 찾기보다, 장애인의 신체에 직접적으로 기술·기계를 적용하는 기술상품을 개발·판매하여 장애인을 ‘정상인’이라는 범주에 일방적으로 복원하려는 편리한 방법을 택해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비장애인들의 삶의 방식에는 하나도 변화를 주지 않으면서, 장애인들의 존재 방식 자체에만 격변을 요구해왔다는 말이다.

이 책이 소중하게 다가온 까닭은, 현재 장애를 갖지 않은 나는 절대 가질 수 없는 ‘다른’ 시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공감 능력과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자신이 겪어보지 않은 타자의 어려움이나 고통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다. 상대방이 자기 관점에서 제대로 그 고통을 서술하는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지 않는다면, 아무리 내가 선한 의도로 그를 돕고 싶어 한다고 해도 결국 의도와 상관없이 시혜적으로 인식될 뿐이다. ‘시혜’는 주는 이의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받는 이의 입장을 배제하는 나눔의 구조적 문제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소위 ‘타자’라고 지목되어 온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의 말을 더 많이 들어야 할 뿐 아니라, 더 많이 들을 기회를 구조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일상적 대화 속에 자리잡게 될 그들의 언어가 기울어진 나눔의 구조 축을 더 균형 있게 바로잡을 풍부한 사회적 자원이 될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 대한 전통적 해석의 한계

여기까지 생각을 따라오다 보니 문득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려움이나 고통 속에 있는 타자의 말을 듣기 위해 얼마만큼 노력하고 있나 하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는 이내 우리의 일방성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고통받는 이를 돕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가르치는 가장 대표적인 성서 본문인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떠올려 보자.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를 사악하게 묻는 율법교사의 함정과 같은 질문에 에둘러 답하고자 했기 때문이겠지만, 예수의 내러티브에도 선한 사마리아인과 강도 만난 이 사이에 도움을 매개로 한 주체와 객체의 전형적 도식이 반복되고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의 위험과 고통에 진심을 다해 응했고, 주막에 데려가 그의 치료 비용을 전액 책임지는 선한 일을 베풀었다. 그 자체로 사랑을 베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 본문을 이렇게만 읽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해석학적 관점은 약자를 도울 능력이 있는 ‘정상적 지위’에 처한 그리스도인의 입장에만 우리 시선을 묶어 둔다. 이 본문을 읽은 그리스도인 대다수는 자신을 제사장이나 레위인, 선한 사마리아인에게 대입할 수는 있어도, 강도 만난 자에게 대입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바로 그 증거이다. 이렇게 도움이나 구원의 ‘주체’의 관점에서만 성서를 해석을 하게 되면, 결국 교회에는 모두 ‘정상인’의 범주에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자들만이 남게 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대다수 한국교회들의 주류 집단에 이러한 ‘정상성’의 범주를 벗어난 이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성찰해야 한다.

김초엽의 제안처럼, 이제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며 강도 만난 자의 상황을 애써 상상해야 한다. 이를 위해 오늘날의 신학자와 설교자는 이와 유사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강도 만난 자의 마음과 생각을 상상하며 메시지를 새롭게 재구성해야 한다. 나아가 그들이 직접 신학적 글쓰기를 하고 출판할 수 있도록, 또한 직접 설교강단에 설 수 있도록 구조를 바꿔야 한다. 강도에게 죽을 만큼 폭력을 당했을 때 느꼈던 공포가 얼마나 컸는지, 믿었던 동족이 자신을 피해 지나갈 때 느꼈던 좌절은 어땠는지, 그도 남들처럼 꺼려왔던 사마리아인에게 도움을 받게 되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주막 주인은 그에게 어떻게 대해 줬는지, 치료 비용을 모두 사마리아인이 지불한 것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하는지 등, 어찌 보면 너무나 답이 뻔해 보이는 질문에 대해 ‘도움을 받는 자’가 직접 말할 기회를 주어야만 한다. 혹시나 그의 친척이나 가족이 사는 집이 주막보다 훨씬 더 가까웠을 수 있고, 주막의 주인이 그를 홀대했을 수도 있고, 그가 비록 강도를 만나 당장은 돈이 없더라도 부자였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선한 마음으로 기꺼이 도움을 주고자 하는 관점에서는 너무 사소해 보이는 질문들을 놓고 서로 대화하는 일이 실제로 도움을 받는 이의 삶이나 자존감을 더 잘 지켜주는 데에 매우 중요할 수 있다. 이미 세상은 ‘말 못 하는 타자’로 일반화되던 ‘약자들’을 자기 관점에서 스스로 말하게 하고, 그 말에 주의 깊게 관심을 두며 의사결정에 반영하는 다소 복잡한 의사소통 체계로 진화하고 있다. 교회도 이에 발맞춰 갈 때가 되었을 뿐이다.

참된 종교는 모든 위계질서를 청산한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독일의 철학자 악셀 호네트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인정투쟁’의 시대라 부를 수 있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현대사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사회적 차별과 갈등은 ‘약자-타자’에 대한 주체의 무조건적 환대를 강조하는 철학자 레비나스나 데리다의 이론으로 풀기 힘들다. 대개 사회적 약자들의 요구는 도덕적 주체의 전적인 희생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특수성에 대한 존중과 동등한 사회적 권리를 부여하는 ‘상호인정’ 수준만으로도 충분히 관철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현상이 현대사회의 대세라면, 전통적 신앙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과 한국교회는 안타깝게도 ‘스따’로서의 존재감을 세상에 계속해서 뽐낼 것이다. 가난을 생산하는 자본주의의 문제를 외면한 채 ‘불우이웃’을 위한 장학금만을 제공하는 방식, 청각장애인이 설교를 들을 수 있도록 문자통역이나 수화통역 서비스를 제공하기보다 청각장애인만 모여 있는 교회를 분리하는 편리함을 택하는 방식, 임신 중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여성의 상황은 외면한 채 낙태금지서명을 연판장으로 교회에 돌리는 방식, 코로나19 상황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로 많은 자영업자가 고통받는 상황에서 대면 예배를 진행하는 것만을 종교의 자유로 주장하는 방식, 동성애자들을 죄인이라 단죄하고 그들을 신앙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선동하는 방식 등에서, 나는 ‘정상’과 ‘비정상’, ‘주체’와 ‘약자-타자’, ‘구원하는 자’와 ‘구원받는 자’를 구분하여 위계 짓는 오래된 기독론의 흔적을 공통적으로 발견한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남을 위하는 것보다 남을 대하는 것이 더 중요해진 현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교회는 변화를 거부하는 근본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점점 게토화하는 길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정말 위계의 권력을, 혹은 위계를 스스로 전복하는 자학을 즐기는 주인일까? 그러나 참된 종교는 모든 위계질서를 청산한다. 양명수는 이에 대해 성서의 하나님은 사람을 상대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강조한다. 하나님은 주체와 타자의 도식을 깨고, 인간을 주체로 당당히 세워 하나님과 ‘주체 대 주체’의 관계로 서로를 향해 서게 하신다. 하나님이 사람을 주체로 인정하셨듯이, 이제 인간도 하나님을 주체로 진심으로 인정하기 바라는 마음이 담긴 것이 그리스도교 성육신 신앙의 핵심이다.(《근대성과 종교》, 141-142쪽) 나는 이러한 입장이 전통적으로 수직적 축이 강조된 기독론을 가로축이 강조된 기독론으로 복원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도 수평적 관계에서 인간과 하나님의 동행을 서술하는 기독론이 이제까지 완전히 없진 않았다. 민중신학과 해방신학, 여성신학과 흑인신학 등 대부분의 현대신학들이 주류 교단의 배척에도 이 작업을 꾸준히 이어왔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역에 함께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주체로서 인간을 설명하는 신학적 틀을 마련하기 위해 애써왔다. 이 작업의 첫 단계는 우리가 성서의 내용을 있는 문자 그대로 읽는다는 확신을 버리는 데에서 시작한다.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보듯 특정한 상황을 배경으로 둘 수밖에 없는 성서의 내러티브는 ―세상의 모든 내러티브가 그렇듯이― 늘 특정한 관점으로 치우쳐 있다. 성서의 내러티브 자체만이 치우친 것이 아니다. 그 내러티브를 재전유하여 해석해온 전통적 신학의 관점 역시 늘 성서를 해석할 만한 권위와 지식이 있는 자들의 관점으로 치우쳐 있다. 지식인이며, 사제이며, 남자이며, 백인이며, 서구이며, 비장애인이며, 이성애자인 관점이 주로 치우쳐 온 축이다.

나눔의 구조에서 도움을 받는 자의 언어를 적극적으로 경청할 때 우리 모두가 함께 깨닫게 되는 진리가 하나 있다. 도움은 그들만 받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도움받는 자로서의 존재 자체는 누군가를 도움 주는 자로서 존재하게 하는 존재론적 힘을 갖고 있다. 또한 우리가 어떤 면에서는 도움을 주는 자로 존재했지만, 다른 면에서는 도움을 받는 자로 이미 존재해왔음을 깨닫게 하는 인식론적 힘을 갖고 있다. 다양한 입장의 말들이 거침없이 발화되어 의사결정에 반영될 수 있는 안전하고 열린 공간으로 교회를 하루속히 개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도움을 받는 자의 도움이 지금 우리에게 당장 필요하다.

김혜령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기독교철학과 윤리로 신학박사를 받았다. 이화여자대학교 호크마교양대학 조교수로서 나눔·인권·환대·생명 교육을 맡고 있다. 한국기독교대학신학대학원협의회 소속 목사이며, 기독교대한감리회 신길중앙교회에서 목회를 돕고 있다. 나눔 윤리학을 집필하며 글과 삶의 괴리에서 오는 부끄러움이 크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작업이라 생각하며 글을 써내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