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악역은 누구인가?
[364호 오수경의 편애하는 리뷰]
명절이 지나면 친구들과 모여 서로를 위로하곤 한다. ‘고통 올림픽’이라도 하듯 서로가 겪은 일과 느낀 바를 토로하기 바빠 늘 시간이 부족했다. “명절에 행복한 사람은 도대체 누구야?”라는 친구의 한탄이나 “우리의 결혼 생활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힘겹다”는 〈며느라기〉 속 민사린의 독백처럼, 기혼이든 비혼이든 명절은 저마다의 이유로 힘겨웠다. 어디 ‘명절’뿐일까? 태어나는 순간부터 ‘개인’으로 살 수 없는 한국 사회에서 누군가의 자식들은 필연적으로 가부장 사회가 부여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야 했다.
특히 여성은 결혼하게 되면 ‘며느라기’라는 특별한 시기를 경험하게 된다. ‘며느라기(期)’란 “시가에서 인정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 시기”라는 뜻으로 2017년 연재되어 화제를 모은 수신지 작가의 웹툰 〈며느라기〉에 나온 말이다. 〈며느라기〉는 민사린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에서 기혼 여성이 경험하는 은근한 차별을 실감나게 재현하여 화제를 모았다. 그 〈며느라기〉가 최근 카카오TV 드라마로 탄생했다. 드라마는 민사린 부부를 중심으로 구성한 웹툰을 충실하게 재현하되, 무구영의 여동생 무미영, 무구영의 형 무구일과 정혜린 부부, 민사린의 직장 동료 이야기를 원작보다 입체적으로 그렸다.
지극히 평범한 ‘우리’ 이야기, 그래서 더 문제적인
〈며느라기〉에서 민사린이 경험하는 ‘시월드’는 내가 명절 때마다 반복해서 듣는 친구들의 이야기와 닮았다. 얼굴도 본 적 없는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거나 명절을 보낼 때 허리가 뻐근하도록 음식을 준비하느라 부엌에 있는 자신과 어른들하고 담소를 나누는 남편이 있는 거실 사이가 우주의 공간처럼 넓고 아득하더란 이야기, 남편은 처가에서 하지 않아도 되는 감정노동과 대리효도를 자신은 마치 태어나기 전부터 몸에 밴 듯 하더란 이야기, 맞벌이인데도 ‘남편 밥은 꼭 챙기라’는 시어머니의 당부를 듣고도 할 말을 꾹 삼켜야 했더란 이야기, 시어머니가 싫다가도 그 또한 누군가의 며느리였던 걸 생각하면 쉽게 외면하지 못하겠더란 이야기 등 민사린의 경험은 흔하디흔한 모두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더 문제적이다. 먼지처럼 흔해서 오히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누구도 민사린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민사린의 시부모는 자상하며 민사린을 ‘딸처럼’ 아낀다. 남편 또한 민사린의 의사를 존중하려 애쓰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민사린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남편은 시가의 가족 모임을 부담스러워하는 민사린에게 “그날만 그렇게 있어 주면 안 될까?”라고 부탁하는데, 이런 부탁을 단박에 거절할 아내는 거의 없다. 시아버지와 남편에게 갓 지은 밥을 주고 “너랑 나랑은 남은 밥 먹자”며 식은 밥을 그릇에 담는 시어머니의 요청을 뿌리칠 며느리가 얼마나 될까. 그렇게 부드럽게 강요된 역할에 며느리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인간이 아닌, 한 집안의 부속품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싫었으면 못 한다고 하지 그랬어”라는 남편 무구영의 말처럼 거절하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 실행할 수 있는 자유가 며느리에게는 ‘그림의 떡’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모른다. 그 해맑은 무지가 권력이고, 문제의 핵심이다.
진짜 ‘악역’을 찾아라
물론 다른 선택을 하는 이들도 있다. 민사린의 손위 동서인 정혜린은 남편하고 딸과 함께 자신이 일군 가족이 우선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크고 작은 가족 모임에 참석하지 않고 명절 때도 시가를 방문하지 않는다. 물론 정혜린의 이런 행동이 보수적인 민사린의 시가에서 곱게 보일 리 없다. 그렇기에 무구영은 ‘사린이는 다를 것’이라는 바람을 갖고, 민사린에게 대리효도를 기대하게 된 것이다. ‘다영 엄마’ 채수영은 명절 때 큰아버지 댁(민사린의 시가)에 방문했다가 그의 어린 딸이 행주로 상을 닦는 걸 남성 어른들 중 누구 하나도 말리지 않고 ‘잘한다’ 칭찬하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고, 화를 낸 후 짐을 싸서 떠나버린다. 물론 그로 인해 명절 풍경은 싸해진다.
이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며느라기〉 속 여성들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상황에 자신을 맞추는 선택을 한다. 친정에서는 귀한 딸로 존중받는 무미영도 남편과 시가의 관계에서는 을일 수밖에 없는 복합적 존재다. 며느리를 은근히 불편하게 하는 어머니도 가부장제의 희생양일 수밖에 없다.
정혜린의 ‘오지 않음’과 채수영(다영이 엄마)의 ‘가버림’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들의 결정이 불편하고 예외적인 선택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정혜린이 ‘오지 않음’을 선택할 때 ‘함께 오지 않음’을 선택하며 원가족과 선명하게 선을 그을 파트너, 채수영이 짐을 싸서 문을 박차고 나갈 때 당장에는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 순간에 함께 나설 수 있는 파트너가 중요하다. 민사린의 적은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아니다. 이 불합리한 가부장적 체제가 단지 여성들이 만든, 여성들만의 전쟁터도 아니다. ‘며느라기’라는 고통의 시기를 끝낼 주체는 민사린이지만, 이 시기를 끝내는 것은 동시에 무구영의 일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강화길의 소설 〈음복〉이 주는 통찰처럼, 〈며느라기〉 속 진짜 ‘악역’은 여전히 무지하고 해맑은 ‘무구영들’일 수밖에 없다.
오수경
낮에는 청어람ARMC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드라마를 보거나 글을 쓴다.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이웃들의 희로애락에 참견하고 싶은 오지라퍼다. 함께 쓴 책으로 《을들의 당나귀 귀》 《불편할 준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