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空) 교회 아닌, 모두(共)의 교회로
[365호 커버스토리]
교회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 질문이 왜 지금 다시 필요한가? 두 가지 질문이 이 글을 쓰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최근 한 설문조사에서 개신교인 이미지가 천주교인, 불교인에 비해 상당히 부정적으로 나왔다고 소개한 기사를 접하였다. 한국교회의 공공성 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최근 코로나19 방역 정국에서 보여준 ‘일부’ 한국교회의 모습은 국민의 건강과 방역이라는 공동선을 훼손하는 이기적이고 비상식적인 것이었다. 한국교회의 집단감염 사례가 반복되면서 국민 여론은 점차 코로나19 집단감염의 장기화에 대한 책임을 기독교에 전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현상은 ‘기독교 혐오’1)라는 다소 과격한 표현으로 언론에 등장했다. 이를 반(anti)기독교 현상의 연장선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코로나19 정국에서 유독 부각된 현상으로 보고 있다. 과거 반기독교적 주장의 논지가 일부 교회나 목회자의 개별적 일탈 정도로 인식되었다면, 최근 ‘기독교 혐오’ 논란의 핵심은 한국교회는 어째서 비상식적인 ‘일부 교회’의 일탈을 통제하지 못하느냐는 구조적 차원에서의 문제제기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최근 증가하는 ‘공교회’(公敎會)에 대한 관심과 재조명의 필요를 잘 보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공교회’와 ‘공공성’을 주제로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논의해보고자 한다.
교회란 무엇인가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공교회 개념은 우리에게 익숙한 사도신경에서 잘 드러난다. 성령을 믿는다는 고백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선물, 즉 보혜사 성령이 우리(교회)와 함께한다는 것(마 28:18-20)을 믿는 일이다. 하나님의 사귐과 소통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물론, 성도와 성도 간의 사귐과 소통을 가능케 하고(고후 13:12-13), 때로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케 할 능력을 주신다는 것(고전 12:4-6)을 믿는 것이다. 무엇보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하나임(엡 4:3-4)을 고백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거룩한 공회’(the Holy Catholic Church)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the Communion of Saints)을 믿는다는 표현은, 교회란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특성을 가지며 각 지체들은 성령 안에서 연결되어 있는 유기적 공동체임을 보여준다. 먼저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좇아 거룩해야 한다. 거룩함이란 교회의 정체성이자 존재 목적이다. 세속에 물들지 않으며, 세상 권력에 저항하고,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고 이로써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게 복음을 실천하는 사명으로 ‘부름 받은 자’(ecclesia)들을 일컫는다. 또한 교회는 유기적인 공동체로서 성만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따르는 기억의 공동체이자, 함께 만나고 보듬어주는 사귐의 공동체임을 나타낸다고 하겠다.2)
비슷하게 ‘니케아신조’에서도 교회의 본질을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그리고 사도적인 교회’(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로 정의한다.3) 여기서 ‘보편적인’(Catholic)이란 로마가톨릭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universal) ‘일치된’(unity) 그리고 ‘전체의’(whole) 교회를 의미한다. 특별히 보편적인 교회란, 획일화된 것이라기보다는 다양함 가운데 일치와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교회라는 뜻에 가깝다. 다시 말해, 교회란 다양한 시공간에서 각자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따르며 한 성령 안에서 한 몸, 한 공동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교회성이란 다양함과 조화로움을 추구한다. 몸 된 지체가 각기 다양하듯이 말이다. 신약성서 속 서신서들은 초대교회 공동체의 분열을 무엇보다 경고하고 있으며, 교회의 하나 됨을 유지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현안이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아무리 많이 나타나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음을 수차례 강조한다(고전 13:1-3). 또한 선교의 역사는 유대인 중심의 민족주의와 율법과 전통, 문화적 경계를 넘어서는 확장의 역사이기도 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피조물은 새것이 되었으며 한 가족이 되었다는 인식의 확장은 바울의 이방인 선교의 신학적 뿌리가 되었고, 다양한 차이와 경계들은 사랑으로 극복되고 유지되었다.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는 공교회란 ‘보편적 교회, 세계적 교회, 우주적 교회’임을 믿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보편적인 교회로서 공교회의 특징을 바로 이 포용성에서 찾는다.
“하나님의 교회,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교회,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는 모든 인종, 민족, 국가, 이념, 성별, 계급 등 모든 상대적 차이를 넘어서 어머니 마음처럼 모두를 품고 받아들인다는 뜻이다.”4)
그러나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노(老)학자는 공교회의 본질적인 네 가지 특성인 단일성·거룩성·보편성·사도성 가운데 한국교회가 “거룩성과 사도성은 강조하면서도 교회의 단일성(Una)과 보편성(Catholica)에 대한 충분한 숙지는 그 갈 길이 참으로 멀다”고 아쉬움을 토로한다.5) 오늘날 한국 사회에 만연한 개신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또한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앞서 언급한 설문에서 개신교인을 향한 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다. ‘거리를 두고 싶은’(32.2%) ‘이중적인’(30.3%) ‘사기꾼 같은’(29.1%) 이미지가 가장 높게 나타났고, ‘이기적인’ ‘배타적인’ ‘부패한’ 이미지도 뒤를 이은 것이다.6) 코로나19 정국을 지나오면서 한국교회가 보여준 모습은 실망스러웠고 위 설문 결과는 한국교회가 앞서 언급한 공교회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공교회(空敎會), 껍데기만 남고 속이 빈 교회
오늘 우리가 다시 ‘공교회’에 대해 논의하는 이유는 ‘교회란 무엇인가’를 알고자 함이 아니다. 한국교회에서 공교회성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를 묻기 위함이다. 어쩌면 교회에 대한 지식은 이미 차고 넘친다. 진지한 신자라면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이다’(엡 1:22-23)라는 대답을 떠올리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가 복잡한 사회 현실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이다. 과연 한국의 수많은 교회들이 하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우리는 내가 출석하는 교회와 그 외의 교회들을 같은 교회로 여길까? 국내 수많은 교단과 각 교단 사이의 차이들은 좁혀질 수 있을까?
좀 더 솔직해지자면, 언론에 비춰진 ‘저 교회’의 모습이 나의 신앙과 기준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에도 공교회성이 유의미한 역할을 하는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주변 지인으로부터 “그러니까 저 교회도 어쨌든 같은 기독교인 거지?” 혹은 “도대체 교회들은 왜 그런데요? 코로나 상황에서 왜 대면 예배를 고집하는 거예요?” 같은 질문들을 접할 때마다 드는 당혹감도 부인할 수 없다. 또 그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대답으로 고작 “아니, 저 교회가 특이한 거야. 보통 교회들은 안 그래”라며 선을 긋는 것 이상을 기대하기 어렵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부 교회들에서 자신들의 신앙과 행동만이 유일하고 진실한 신앙이라고 말할 때마다 밀려오는 답답함도 있고, 고작 ‘일부’ 교회의 돌출적 행동이 전체 교회 이미지를 훼손하는 상황에도 뾰족한 해법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절망감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이다. 마치 속은 빈 채 껍데기만 남은 공교회(空敎會)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한다.
과거에도 공교회에 대한 논의는 있었는데 그때마다 이유는 달랐지만 문제의식은 항상 비슷했다. 바로 한국교회의 타락과 공공성의 위기, 그리고 자정능력의 부족 등에 대한 것이다. 그럴 때마다 거론되는 문제의 본질은 한국교회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개교회주의’(個敎會主義)와 ‘교파주의’(敎派主義)를 향한 경고였다. 김경재는 한국 초기 선교 역사에서 각 교단의 자립성을 강조한 결과,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에 대해서는 충분히 강조하고 실천하지 못했다고 말한다.7) 따라서 이제라도 대형교회의 양극화를 줄이고, 도시와 농촌 간의 격차를 줄이기 위하여 행동과 물질로 도와야 한다고 제언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 교회를 진심으로 고백한다면, 내 교회만 우선시하는 이기적인 태도나 일반 사회에 덕이 되지 않는 행위를 하여 교회의 거룩성에 위해를 가하는 일은 지양하기 마련이다.
비슷한 예로, 임희국(2019) 교수는 공교회의 본질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설명하면서 대형교회의 목회세습 문제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좇지 않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비판한다.8) 특별히 그는 명성교회 목회세습은 초대형교회의 권력화, 교회의 사유화, 교회의 기업화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사건이자 교회의 공교회성을 무시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공교회성에 대한 논의는 개인과 개교회가 막대한 자본과 권력을 사유화하지 못하도록 하는 신학적·구조적 안전망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이영(2012)은 기독교 연합기관들이 점차 사유화되는 것을 비판하며 건강한 연합기관 사역을 위해서는 공교회적 구조가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9) 그는 한국 기독교 초기부터 이어져 온 연합기관들은 공교회적 구조로 운영되었기에 교회의 연합 정신은 물론 조직 운영 및 재정적인 투명성 등이 유지될 수 있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범개신교 연합기관을 만들어 하나의 일치된 목소리를 내는 일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런 배경에는 한국교회가 보수적 입장을 대변했던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진보적 입장을 대변했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로 양분하여 대사회적으로 통일되고 일관된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판단이 자리한다.10)
코로나19 방역과 관련하여, 정부는 종교단체에 대면 방식의 집회를 금지하는 정책들을 내놓았다. 이와 관련하여 가톨릭과 불교는 상대적으로 일원화한 입장과 행동이 가능했던 반면, 유독 개신교는 그렇지 못했다. 이런 배경에는 한국교회가 공교회적 구조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들이 뒤를 이었다. 적어도 언론 및 공론장에서는 개신교의 입장이 불확실했으며 혼란을 가중하는 역할을 한 셈이다. 따라서 하나의 일관된 목소리를 내기 위한 교단장 및 연합기관 간의 대화는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공교회적 연합기구의 또 다른 존재 이유는, 현대사회의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들에 적절히 대응할 전문 연구 인력과 이를 충분히 대화하고 토론할 수 있는 내부 공론장이 필요하다는 데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대응하여 최선의 결과를 도출할 수 있도록 공교회적 기구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이런 합의 과정과 결과를 수용할 자세가 필요하다. 이런 과정은 한국교회의 인식 차이와 갈등을 줄이고 한 교회로서 힘을 모을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상황에서 비대면 온라인 방식의 예배에 대한 신학적 논의와 그에 대한 신속하고 적절한 대응이 가능하려면 교단 및 연합기관 차원의 인력 및 재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기독교 교단 및 연합기관은 개신교가 공교회성을 실천할 수 있는 구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존재한다. 먼저 한국교회의 수많은 교파와 분열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이다. 너무도 쉽게 교파가 만들어지고 없어지는 상황에서 하나의 일치된 권위 있는 조직을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두 번째는 일부 대형교회에 너무 많은 권력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불균형한 상황에서는 개교회의 입장이나 이익이 우선될 여지가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현재 교단 및 연합기관의 인력 구성이 한국교회 전체를 대표하기에는 편향적이라는 점이다. 목회자 및 중직자, 중년 남성 중심의 의사결정 및 단체 운영은, 자칫 젊은 세대와 다양한 신앙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로부터 충분히 소통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하고 그 결과 교회 내외적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의사결정을 하게 할 우려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는 한, 교단 및 연합기구는 공교회적 구조는 갖추었지만 실질적 기능을 하지 못하는 빈 교회로 남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서 있다.
모두를 위한 공교회(共敎會)로!
지금 다시 공교회에 대한 논의를 하는 이유는 단지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접근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한국교회가 개교회주의 버리고 공교회성을 담보하여 종교로서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서 찾을 수 있다. 미로슬라브 볼프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 기독교 신앙의 “기능장애”를 진단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11) 볼프가 말하는 신앙의 “기능장애”는 일종의 공교회성 상실과도 같다. 그는 크게 두 가지 형태의 기능장애를 설명하는데, 하나는 나태함이고 다른 하나는 강요이다. 먼저 신앙의 나태함이란 우리가 사는 현실 문제로부터 회피하여 모든 것을 개인적인 것으로 축소하거나 영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태도를 말한다. 반면에 교회가 공적 영역에서 책임을 다하려면 끊임없이 현실과 소통하며 복잡한 문제들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 공공신학이란 공적인 문제에 대해 기독교적 입장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현대사회 문제를 더 깊이 이해하고 다양한 집단과 소통할 수 있는 충분한 전문지식을 기반으로 공론장에 참여하는 신학적 방법론이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가 더욱더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볼프가 지적한 두 번째 기능장애의 특징은 신앙을 강요하는 태도이다. 나태함과 유사하지만 신앙의 강요는 공론장에서 어떤 방식(수단)을 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과거 기독교는 복음을 전한다는 목적으로 어떤 방식을 사용해도 상관없다는 실수를 범했다. 이런 인식과 태도는 기독교가 주류였던 시대로부터 기인한다. 교회는 당시 누리던 힘을 이용하여 쉬운 방식으로 선교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과 같은 세속사회에서 내 생각만을 강요하는 태도는 비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강압적이고 무례한 종교로 인식하게 만든다. 특히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에 따른 정부 지침을 무시하고 대면 예배를 강행하는 일이 마치 종교탄압에 저항하여 신앙을 지키는 행위인 것처럼 주장하는 태도는 사회적 상식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크리스텐덤 시대 속 강압적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과 같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모순이며, 한국교회의 공교회성이 결여된 기능장애의 단면과도 같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교회의 공교회성은 ‘공공성’(公共性)으로 보완될 수 있다. 교회는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교인만이 아니라 모두의 삶을 더 나은 사회로 만들기 위한 책임을 가진다. 특별히 교회는 공적인 영역에서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를 실천하며 함께 살아갈 공존과 평화의 가치를 형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김경재 교수는 오늘날 교회의 공공성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하셨듯이 ‘타자’를 위해 존재하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정의·평화·생명의 가치로 변화되도록 돕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변혁의 길이라고 말한다.12) 두 번째로 현대사회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개인 및 집단은 상호 간의 연대와 책임을 가지기 마련이다. 교회는 일반 사회적 기준보다 더 높은 윤리적 의식과 사회적 책임을 가져야 한다. 공공성이란 교회와 교인만을 위한 세상이 아니라,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한 가치와 실천이다. 볼프는 이를 ‘인류의 번영’이라고도 부른다.
한국교회가 개교회주의에 빠져 ‘공공성 위기’라는 지적을 받게 된 것은 신앙이 개인과 교회에만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신앙이 성과 속을 구분하듯,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구분하고 배제하고 차별하는 이분법적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교회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을 모두 사랑하셨다. 교회 밖에 있는, 나와는 다른 그래서 차별하는 대상을 위해서도 구원의 길을 여셨고 사랑을 보이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교회가 세상 속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도 교회만을 위한 방식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공교회적 상상력이 우리에게 절실한 이유이다.
코로나19 상황이 한국교회의 민낯을 드러내었다. ‘일부’ 교회의 문제라고 치부하곤 하였는데, 개교회로 분열된 채 서로에게 연대와 책임을 갖기를 포기하고 각자도생을 선택한 우리 내부의 문제가 이번 기회에 드러난 셈이다. 우리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라고 고백하지만 다른 교회를 경쟁상대나 나와 상관없는 곳으로 여기진 않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교회의 본질을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로 배워왔지만, 그 교회가 정작 속 빈 강정처럼 개혁과 자정 능력을 상실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세상에 보냄 받은 공동체임을 사명으로 알고 있지만, 정작 나와 교회만을 위한 이분법적이고 배타적인 신앙의 기능장애 상태는 아닌지 세심한 자기점검이 필요한 시기이다. 한국교회는 다시 공교회의 의미와 실천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번만큼은 단순히 지적인 깨달음에서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에서 설 자리는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1) ‘기독교 혐오’에 논의는 사랑제일교회발 집단감염이 빠르게 증가하던 8월 20일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 했다. 기독교 언론인 〈노컷뉴스〉(2021. 8. 20)와 〈국민일보〉(2020. 8. 31)는 논설을 통하여 교회발 집단감염으로 인한 ‘기독교 혐오’에 대한 우려의 논지를 실었고, 〈아시아경제〉(2020. 8. 18)는 사회면 기사로 사랑제일교회 집단감염과 ‘기독교 혐오’ 논란에 대한 기사를 문화현상으로 다루기도 하였다. ‘기독교 혐오’라는 용어가 과연 적합한지에 대해서는 좀 더 차분한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이를 문화적 현상으로 보기에는 일관된, 그리고 충분한 경험적 조사들이 뒷받침되어 야 할 것 같고 또한 성급한 일반화나 프레임 논란으로 근본적인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못할 수도 있다고 본다.
2) 예를 들면, 장윤재 교수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성만찬, 친교, 소통 세 가지 관점에서 설명한다. 장윤재, “기독교 신앙의 핵심: 사도신경”, 《기독교와 세계》(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17), 215-217쪽.
3) 이와 관련하여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김경재, “개신교회의 공교회적 가치와 공공성의 의미”, <기독교사상> 649호(2013), 16-25쪽.
4) 위의 글. 19쪽.
5) 위의 글.
6)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 ‘종교(인) 및 종교인 과세 관련 인식조사’, 2020. 7. 17. (전국 만 20-59세 남녀 1,000명, 온라인조사, 2020.6.23. ~ 6.26). 자세한 내용은 목회데이터연구소, <넘버즈> 61호(2020.8.28.)를 참조하라. http://mhdata.or.kr/mailing/Numbers61th_200828_Full_Report.pdf
7) 김경재, “개신교회의 공교회적 가치와 공공성의 의미”, 22-23쪽.
8) 임희국, “공교회의 빛으로 본 명성교회 세습”, <기독교사상> 732호(2019), 83-92쪽
9) 나이영, “‘공교회성’을 회복해, 개신교의 권위와 위상을 세우자”, <기독교사상> 639호(2012), 258-263쪽 참조
10) 위의 글, 262-263쪽
11) 미로슬라브 볼프/김명윤 옮김, 《광장에 선 기독교》 (IVP, 2014) 참조
12) 김경재, “개신교회의 공교회적 가치와 공공성의 의미”, 20쪽.
김상덕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평화와 언론사진, 공공신학을 주제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으로 근무 중이며 명지대학교 객원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The Role of Religion in Peacebuilding》 《평화의 신학: 한반도에서 신학으로 평화 만들기》 《더불어 함께하는 평화교육》 등의 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