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교회 이야기가 아니다
[365호 커버스토리]
먼저 밝히자면, 이것은 교회 이야기가 아니다. 모태신앙으로 유아세례를 받고 10대 후반에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만났으며, 사회과학을 전공했고, 대학생 선교단체에 오래 몸담았던, (그런데!) 교양을 갖춘 (네, 가진 게 교양밖에 없답니다….) 한 극내향 성향의 여성 이야기다.
교회를 사랑했다
생각해보면 난 유치부 때부터 교회(문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어른들 앞에서 재롱잔치를 해야 하는 건 지극히 내성적인 만 5세 여아에게 큰 시련이었다. 외향성이 많이 필요했던 교회 생활은 내내 곤혹스러웠다. 한편 진지했던 어린이는 초·중·고등부를 지나며 혼자 새벽기도를 다니고 성경도 꾸준히 읽으며 큐티도 하고, 힘들지만 전도도 하려고 노력했고, 무엇보다 진지하게 예수님에 대해 생각했다. 설교 시간에는 떠들거나 딴짓하는 친구들을 경멸하며 열심히 설교를 필기했고, 교회 생활에 열심을 내지 않는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수련회 때마다 단체 숙식을 해야 하는 게 죽기보다 싫었지만 어디 갖다버리기 힘든 모범생 기질로 꼬박꼬박 참석했으며, 청년부에 이르기까지 주변부일지언정 늘 교회 사람이었다. 단체 생활은 싫었지만 교회 공동체에는 깊이 들어갔다. 개인주의를 추구하면서도 공동체를 사랑하는 복잡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개인과 공동체’는 지금까지 내 화두였다. 10대 후반 어느 때쯤에는(청소년기에도 인간은 충분히 자기 실존을 직시할 수 있는 존재인지라) 교회에서 매일 듣던 ‘죄인’이 바로 나 자신이며, 내가 그동안 얼마나 율법주의자로 살았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예수의 삶과 죽음, 십자가 그러니까 복음을 진지하게 여기기 시작했고, 예수님을 따르려 애쓰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시작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교회를 사랑했고, 공동체에 헌신했다. 그야말로 교회는 내 꿈이었다. 스무 살 이후로 상황이 달라졌지만. 요약하자면, 사회과학 공부를 시작하며 습득한 정치·사회적 안목과 감수성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이 가르치는 영성과 불화했고 난 점차 불행해졌다. 음울하고 냉소적인 얼굴로 설교를 들었고, 이분법 세계관이 바탕에 깔린 18세기 찬송가를 부르는 일조차 버거웠다. 설교 예화에 자주 등장하는 ‘토마스’는 내 현실과 상관이 없었고, 6월 25일 즈음에 들어야 했던 반공 설교에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더 이상 주류 기독교 교회 설교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내 비전을 찾기가 어려워졌고, 교회 문화에서 내 자리를 찾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평신도 여성이란 설사 ‘리더’ 역할을 맡는다고 해도, 남성 목회자의 신학과 사회 인식하에서 그저 조신하고 성실하게 혹은 사랑스럽게 그를 돕는 게 최대치였으므로. 한 명민한 친구는 늘 어두운 얼굴로 괴로워하며 설교를 들으면서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내게 이런 명언을 건네주기도 했다. “혜은아. 저 남자 목사님이 네 롤모델이 될 수는 없어.” 당시 내가 가장 치열하게 붙잡고 있던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사는 일에 대한 것이었고, 한편으로 내가 믿는 신앙이 사회 현실에서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에 대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내가 당시 듣던 설교의 의제가 될 수 없었다. 결코. ‘토마스’ 예화를 들던 목사님이 은퇴하시고 새로 오신 목사님은 예수님 이야기보다 조나단 에드워즈 이야기를 더 많이 하시던 때였다.
교회를 옮기다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신앙의 통전성을 배운 후에는 교회 안에서 갈증이 더 깊어졌다. 이런 내게 대학 선배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듯 보이는 교회를 안내해줬다. 마침 내가 방문한 그날 그 ‘올바른 듯 보이는 교회’의 설교 제목은 무려 ‘이랜드 사태’였고 난 시원한 냉수를 마시듯 설교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2007년 샘물교회 피랍 사태와 기독교적 기업경영을 표방했던 이랜드의 비정규직 대량해고 사태로 꺾여버린 기독교의 위상에 대한 탁월한 분석과 그에 대한 정직한 반성이 덧붙여진 설교였다. 얼떨떨한 상태로 교회를 나왔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날 안내해준 선배가 “어땠어?”라고 조심스레 물었고, 난 이렇게 답했다. “저랑 너무 잘 맞아서 문제인 것 같아요.”
이토록 내 정치·사회적 감수성과 결이 같아도 되는 걸까. 내 현실 혹은 사회와 동떨어진 설교로 예배 시간에 뛰쳐나가게 만들어도 문제, 너무 정확히 나랑 맞아도 문제. 가장 문제는 나 자신인 것도 같고.
어찌 되었든 난 그 교회를 내가 성인이 되어 자발적으로 선택한 첫 교회로 삼았고 가정교회에도 들어갔다. 그 교회는 어디 밖에 나가서 (기껏해야 복음주의권 안에서지만) “저 이 교회 다녀요”라고 말하면 좀 우쭐해지는 네임드 교회였다. 나까지 진보적이고 똑똑해지는 듯한 느낌을 주었으며, 기독교에 관심 있는 불신자를 데려오거나 기성 교회에 실망한 이들을 초대하기에도 좋은 대안적 교회였다. 그런데… 그곳에서 난 많이 외로웠다.
교회가 훈련의 최종 목적으로 삼고 있던 ‘하나님 나라 운동원’이 되기에 난 한참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 부족함은 매일의 예배 시간과 가정교회 모임에서 확인되었다. 한 편의 논리적 설교를 듣고 나면 머리는 시원해졌으나 ‘어떻게 저렇게 멋지게 살지?’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고 가정교회 모임에서는 주로 혼이 났다. 하나님 나라에 걸맞게 살지 못했다는 고백들이 이어지고 멤버들은 충고를 듣고 교정을 받았다. 대안을 표방하는 교회답게 어느 정도 전통 교회에 실망한 교인들이 많이 모였는데 (전반적으로) 전문직이 많았고 학벌이 높은 편이었다. 특출한 능력이 있거나 적극적으로 나서려고 노력하지 않는 한, 어디 한구석 끼어들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서로에게 큰 관심이 없는 게 가장 낯설었다. 항상 서로에 대한 관심이 가득가득한 전통 교회가 불편했는데, 이렇게 웨스턴식(?!)으로 서로에게 무관심한 것도 이상했다.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 역시 내가 문제일까.
그 와중에 최악은 나의 스탠스였다. 외향적이지도 못하고 운동가가 될 만큼 목소리가 크지도 않으며 외모가 매력적이지도 못하고 무엇보다… 사회적 지위가 0에 수렴했다(당시 작은 규모의 단체 간사).
체계적 교회 시스템에 속한 하나의 원자
가정교회 모임에서도 모두의 무관심 속에 남 얘기만 주야장천 듣다가 입 한 번 떼지 못하고 돌아오던 날이 쌓이던 어느 날, 가정교회가 2주 후에 해체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당시에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으나 이내 알게 된 해체 이유는 가정교회 리더의 성 스캔들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스캔들의 진실 여부를 알 수 있는 위치에 처하지 못하므로 그 이야기는 넘어가야겠다. 다만 그분께서는 평소 행실에 만전을 기하고자 가정교회 여성 멤버와 일대일로 만나지 않는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키셨다는 것만 언급하고 싶다. (미리 경험한 펜스룰… 그런데 특정 여자 청년들은 일대일로 만나셨다는 이야기를 풍문으로 들었다.)
각설하고, 난 이 과정에서 내가 교회의 체계적 시스템에 속한 그저 하나의 원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철저히 ‘시스템’으로 돌아가던 교회 안에서 가정교회가 해체되자 마치 학원 수강생이 학원 끊듯 그 조직과 아무 상관이 없는 존재가 되었달까. 졸지에 갈 길 잃은 양 떼 처지가 된 가정교회 멤버들을 (나이가 제일 많다는 이유로! 이노무 나이이즘) 이끌어야 했고. 그렇게 어영부영 모임을 이끌어가던 차, 시간이 좀 지난 후 권역 담당 목사님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그때 담당 목사님이 미안해하며 건넨 말은… 놀랍게도 괜찮냐는 안부가 아닌 가정교회 주간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전달사항이었다.
‘이게 머선 일이고.’
아마 그때가 아니었나 싶다. 제도권 주류 교회 공동체에 속해야 할 의지를 상실한 때는.
대개의 한국교회(아니, 한국 사회…)가 그렇듯 아마추어적인 행정력과 조직력 안에서도 오로지 예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버티다가, 그래도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춘 공동체에 있게 되자 처음에는 그 소속감에 흡족했다. 깔끔한 편집과 폰트 선택에서 프로 냄새 물씬 풍기는 주보(첫 장 왼쪽 윗면의 발행날짜부터 마지막 장 ‘찾아오시는 길’까지 탐독하는 활자 중독증에게 안성맞춤), 전공자가 틀림없는 전문가들의 예배 오프닝 연주(공연장에 온 것 같았다), 무엇보다 탄탄한 훈련 시스템과 개방적인 가정교회 모임은 멋있었다. 그런데 그 멋있음에 걸맞지 않게 무방비 상태로 무너져버린 가정교회, 교회의 무관심, 여기에 “가정교회 보고서 제출”이라는 결정적 멘트는 그나마 붙잡고 있던 마지막 정신줄마저 놓게 만들었다.
사실 성 스캔들로 가정교회가 해체된다고 했을 때 난 사과를 받고 싶었다. 가정교회 멤버들은 전혀 모르던 몇 개월간 교회와 리더 사이에 어떤 과정이 있었고, 흡사 권력다툼으로까지 느껴졌던 그 과정으로 가정교회가 산산조각이 났는데, 결과를 통보받은 이후 내가 들은 이야기는 그 상황이 이랬다더라 저랬다더라는 풍문뿐이었다. 그 와중에 힘들게 멤버들을 추슬러 알아서 모임을 이어가던 차에 교회가 건넨 말이 보고서 제출이라니.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덜렁 내던져진 가정교회 멤버들의 정신적·신앙적 타격은 결코 작지 않았다. ‘체계적’이던 그 교회에서 이들에게 영적 관심을 가진 이는 별로 없었다. 가정교회 시스템에서 이탈하게 되자, 멤버 한 명 한 명이 교회와 맺고 있던 공적 관계가 사라졌고, 누구의 책임도 관심 대상도 아니게 된 당황스러운 현실. 이게 영적 공동체인 교회가 맞나? 그래도 당시 우리 권역 담당 목사님이 교회에 대한 나의 날 선 질문에 긴 시간 인내심을 갖고 토론해주시고 시간을 내어주신 데 대해서는 아직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여성 최고의 부르심은 현모양처?
최근에는 그 교회 출신 활동가의 성 스캔들 소식을 또(!) 전해 들었다. 놀라거나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제도권 교회, 엘리트, 남성, 목회자 아니면 활동가라는 범주에 속한 분들께서 보이는 말과 행동은 대개 매우 전형적이라, 그 전형성의 층위에 따라 가능한 결말 중 하나가 성 스캔들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전형성의 지리멸렬함을 이미 충분히 맛본 뒤이므로 의연하게 냉철해지는 것이다. 이미 그것은 예견된 결말이라고.
먼젓번 교회는 정치적으로 극우적 색채를 띠고 사회문화적으로는 중산층 자본주의를 지향하며 젠더적으로는 철저히 가부장 유교문화로 성별 역할을 구분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제정신으로 예배드리기 힘들어 옮긴 대안적 교회에서도 가부장 문화는 공고했다. 기성 교회나 대안 교회나 매한가지라는 경험을 하니 환멸이 밀려왔다.
이전 교회는 여성 최고의 부르심은 현모양처라는 설교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결혼을 지상 최대 과제로 여기는 문화를 공고히 세운 뒤 암묵적으로 비혼 여성들을 본투비 패배자로 여기는 분위기가 상식으로 깔려 있어 어떤 반론도 제기할 수 없는 세계였다. 그러나 지적으로 세련된 교회 또한, 같은 이야기를 그럴듯한 다른 언어로 말하는 모양새였다.
어느 날 골로새서 본문으로 여성이 남성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말을 너무도 진지하고 긴박하게 전하는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예배 소감을 쓰는 종이에 그런 해석은 동의도 공감도 안 된다고 써서 제출했다. 그다음 주, 설교자는 내 글을 읽고 난 후 “이 글을 쓰신 분은 골로새서 전체 맥락을 보지 못한 것 같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골로새서 1장부터 이어오던 설교를 안 듣고 그날만 참석해 부분만 듣고 오해한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뭐, 교회 예배에 단 한 번도 빠진 적 없이 모범생 개근에 필기까지 하며 설교를 들은 내가 들을 소리는 아니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가족 공동체가 해체되지 않으려면 아내는 하나님이 권위를 위임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고, 사람들이 결혼을 안 하는 이유는 혼자 살아가는 게 속 편하다고 부추기는 트렌드 때문이며, 싱글로 살면 성품을 다듬을 기회를 놓친다는 설교. 이게 여성 최고의 부르심이 현모양처라는 메시지의 다른 버전이 아니고 뭘까. 다만 이 교회에서는 그에 대해 반론을 써낼 수 있는 소통 창구가 열려 있다는 걸 위안으로 삼아야 했던 걸까.
이런 일도 있었다. 현대인의 우울증 극복을 주제로 설교하던 상담 담당 목사님이 십여 년 동안 십여 명의 아이를 낳은 어떤 서양 여성이 아이들과 바글바글 함께 찍은 사진을 화면에 띄우면서 희대의 명언을 날려주셨던 예배 시간. “자, 이 사진을 보세요. 어머니의 표정이 어떻죠? 우울함 같은 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요. 쉬지 않고 아이를 낳으며 돌보다 보니 우울할 새가 없었던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다른 사람을 돌보고 그들을 위해 사는 사람은 우울할 틈이 없어요.” 와우. 이날 설교는 지금까지 내가 들은 워스트 설교 톱3에 속한다.
한두 번 경험하는 일도 아니었지만, 한여름 열대야도 능히 이겨낼 오싹하고 기괴한 사진 해석에 힘이 쑥 빠졌다. 아이 키우느라 우울증에 빠진 사람은 많이 봤는데, 아이 열 명 키우느라 우울할 새가 없다는 팩트체크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며 다른 이를 돌보며 살라는 메시지는 기상천외했다. 손을 번쩍 들고 질문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호흡을 가다듬고 부들부들 집에 돌아온 난 이 모든 정황을 하나의 단편소설 형식으로 기록해두었다(이번 원고를 위함이었던가). 초중고 통틀어 수업 시간에 질문 한 번 던진 적 없던 나를 교회는 손 들고 질문하고 싶어 안달난 적극적 인간상으로 만드니, 그저 어메이징 그레이스.
그럼에도 교회를 다니는 이유
신앙을 잃고 싶지 않아 고민하며 옮긴 진보적 노선의 교회에서도 여성인 내게 주어진 비전은 ‘현모’였다. 현명한 엄마로는 부족해 아이를 넘치게 낳아 건강한 정신력으로 키워내는 생산력까지 권장받으며. 심지어 그게 우울하지 않게 사는 길의 예시라니. 이 그로테스크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상담 목사님의 우울증 극복 설교를 듣고 나는 심히 우울해졌다.
이쯤 되면 교회 안에서 신음하는 내게 이런 질문을 하는 이들이 꼭 있다. “그런데 교회 왜 아직도 다녀?” 그러니까. 나 왜 아직도 교회 다녀? 그렇다. 난 아직도 교회에 다니고 있다. 가족 중심으로 편성된 교회 부서 안, 어디에도 속할 곳 없어 조용히 예배만 출석하고 있지만 교회를 떠날 생각은 없이 끈질기게.
이것은 교회와 사회 속에서 신앙을 따르는 삶을 진지하게 추구하는 신앙인이자 여성이 끝내 중산층 핵가족을 이룬 현모양처가 되지 못해 제도권 교회에 자리를 갖지 못한 이야기. 일정한 사회적 지위와 운동가로서의 성향을 지니지 못해 그림자 같은 존재로 지내다가 우연히 (아니면 남성 중심적 가부장 문화에 절어 있는 교회의 예상 가능한 결말로서) 남성 리더십의 성 스캔들 때문에 교회 시스템에서 밀려나 공동체에 의욕을 상실한 이야기. 써놓고 보니, 주류 교회 역사와 문화에서 서서히 배제된 어느 진지한 그리스도인 여성의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고.
교회 바깥에서 교회를 다닐 힘을 얻다
다시 이 질문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난 왜 아직도 교회에 다닐까. 이 모든 모순과 환멸과 배제에도 불구하고 왜. 왜. 왜.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교회를 이탈할 충분한 이유를 차곡차곡 수집하고 있는 중에도, 교회를 떠나지 않은 것은 교회 바깥의 작용 때문이었다. 파라처치 즉 선교단체에서 배운 성경의 다른 해석 세계, 기독교 신앙의 매력, 선교단체 선배들이 삶으로 보여준 세상 속 그리스도인의 실제 모습, 기독 인문 아카데미에서 배운 기독인문교양 지식, 대학원에서 배운 여성신학 등. 기독교 신앙의 넓고 깊은 세계를 알게 해준 교회 바깥의 누군가들. 이들 때문에 난 무척이나 강하고 건강한 개인이 되었다. 일부(!) 제도권 교회의 뻘짓에도 교회를 쉽게 떠나지 않을 만큼 견고한 확신이 생겨난 것이다.
세상에서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 분투하며 살 때 더 깊어지는 예배의 기쁨만 한 다른 기쁨을 알지 못한다. 나처럼 배제된 이를 품는 예수의 복음만 한 다른 메시지 또한 난 알지 못한다. 무엇보다 매년 사순절과 부활절을 지나며 깊어지는 십자가에 대한 이해와 이로 인해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강력하고도 신비한 작용은 날 교회 안에 더욱 뿌리내리게 만들 것이다. 비록 내가 용기 있는 우리 자매들처럼 ‘믿는페미’ 같은 연대를 만들어내지는 못하지만 교회 안에서 믿는 페미로 살 것이고, 세상 속에서 여전히 교회 다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 예정이다. 제도권 주류 교회는 날 끊임없이 밀어내지만,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내 마음을 누구도 밀어내지는 못할 것이므로. 언젠가 여력이 되는 때 새로운 공동체를 모색해보고 싶은 소박한 꿈을 품고서.
2021년 새해 결심으로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근성만 가지고 세상 속에서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가 힘들다. 근력이 필수. 어려운 자세를 잡을 때마다 강사님 하시는 디렉션이 얼마나 주옥 같은지 마치 계시처럼 들려온다. “내 몸을 잘 들여다보세요. 이 자세를 잡았을 때 어디가 가장 아프고 당기는지를.” 나는 특히 고난도 자세에서 왼쪽 허벅지 근육과 복부 아랫부분이 타는 듯이 아프다. “저 못하겠어요.” 눈물이 찔끔 나는데, 우리 강사님, 부드럽고 친절하게 다가와 “자, 좀 더 버텨보세요” 하며 내 다리를 뒤로 잡아…당긴다. 허걱.
그래, 그 말을 하고 싶다. 성경에서 가장 절묘한 비유라고 생각하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그 비유. 나 같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 왼쪽 허벅지 근육쯤 되겠다. 교회가 좀 더 유연하게 그 몸을 움직여 세상 속에 존재한다고 할 때마다 뻐근하게 당기는 지점. 다시 한번, 이것은 교회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부름 받아 그 몸 왼쪽 허벅지쯤 붙어있는, 한 그리스도인의 무척이나 개인적인 그냥 그런 이야기다.
박혜은
한양대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고, 숭실대에서 ‘권정생의 세 장편동화에 나타난 성서적 주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죠이선교회에서 오랫동안 간사로 일했고, 남들보다 좀 늦게 사회에 나와 책과 관련한 이런저런 일들을 했다. 현재는 공공헌책방 서울책보고에서 운영팀 매니저로 일하며 책과 사람을 잇는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