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뚜벅이: 살자고, 살리자고 걷는 걸음
[365호 이슈 톺아보기]
‘조용한 학살’이 일어나고 있다. 중앙자살예방센터는 2019년 대비 2020년 상반기 자살사망자 증감률(잠정치) 가운데 여성 자살자 수가 3.5% 증가했다고 발표했다.(동일 시기 남성 자살자 수는 10.4% 감소했다.) 특히 코로나19가 확산된 시기인 3-4월에 여성 자살자 수는 각각 11.9%, 14.3%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 눈에 띄는 것은 20대 여성 자살사망자 수였다. 전년도 수치 207명에서 43% 증가해 296명을 기록한 것이다. 왜 죽음을 선택하는 20대 여성이 늘어나고 있는 것일까. 실제로 나 역시 몇 년 전부터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들이 죽음을 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있다.
이름 없이 죽어간 여성들
임윤옥 한국여성노동자회 자문위원은 〈한겨레〉 시론에서 “2월부터 4월까지 모든 고용통계가 ‘코로나19 위기의 얼굴은 여성의 얼굴’이라고 말하는데 여성 고용 위기가 공론화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조용한 학살’이라고 느껴진다”고 밝힌 바 있다. 소수의 안정된 정규직을 제외하면 20대 여성이 구할 수 있는 일자리 중 상당수는 비정규직, 저임금, 서비스직이다. 코로나19가 확산하는 상황에서 대면접촉을 하는 비정규직 서비스업부터 타격을 입었고, 해고나 실직을 당한 비율도 여성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통계청이 발표한 연간 고용현황에 따르면, 2019년 대비 2020년의 남성 실업률은 0.4% 감소한 반면, 동일 기간 여성 실업률은 10.8% 증가했다.) 당연하게도 열악한 일자리 문제는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이어진다. 또한 몸과 마음의 건강과도 연관이 있다.
2020년은 전태일 열사 40주기가 되는 해이기도 했다. 여전히 사람들은 일터에서 죽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이 사회가 거대한 수용소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름 없이 세상을 뜬 여성들. 어디선가 노동을 하다 이름 없이 죽어가는 여성들이 열사가 아니겠는가.
노동자 김진숙
지난 12월 30일. 정년퇴임을 하루 앞둔 한 해고노동자가 자신의 일터였던 영도조선소가 있는 부산에서 청와대까지 걷기 시작했다. 1981년 한진중공업 전신인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해 여성 최초 용접공으로 일하다가, 1986년 노동조합 대의원에 당선되고 어용노조의 부정을 알리는 활동을 하다가 해고당한 김진숙이다. 그는 복직을 촉구하는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31일에는 서울에서 김진숙 복직과 제대로 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는 사람들이 국회에서 청와대까지 1m 간격으로 촛불을 들었다. 청와대 앞에서는 김진숙 복직을 촉구하는 사람들이 단식농성을 이어갔다. 30일 부산에서 세 사람으로 시작한 ‘희망뚜벅이’는 2월 7일까지 이어졌고, 행진 마지막 날에 700여 명이 함께했다.
국회와 청와대를 잇는 촛불이 켜진 12월 31일. 나도 아현역 인근에서 촛불을 들었다. 일터에서 내가 공식적으로 일을 그만두기로 한 날이었다. 노동자이자 운영자로 이중 역할을 소화하며 일을 하다가 사직하기로 결심했다. (운영진 입장에서) 코로나 불경기로 인한 월세와 인건비 부담이 이유였다. 한동안 나는 나를 해고한 듯싶어 머리가 복잡했다. 운영진인 내가 노동자인 나를 해고한 것은 아닐까.
희망뚜벅이에 참가하다
그즈음 김진숙이 쓴 《소금꽃 나무》(후마니타스)를 다시 읽었다. 책을 읽고 편지를 쓰고 마음을 정리하면서 실직 상태에서 느낀 울적함을 덜어낼 수 있었다. 김진숙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청와대까지 걷는다는 소식을 듣고 꼭 참여하고 싶었다. 희망뚜벅이 일정과 SNS에 올라오는 사진을 보면서 언제 참가할 수 있을지 가늠했다. 1월 25일에는 김진숙 복직을 바라는 사람들을 모아 동조단식을 하는 날로 삼고 신문광고를 낸다고 하여 나도 동참하기로 했다. 단식 후 길게 보식기간을 보내고, 2월 6일 희망뚜벅이 행렬에 시간을 내서 참여했다.
6일 일정은 인덕원역에서 시작해 흑석까지 가는 길, 서울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인덕원역에 조금 늦게 도착해 체온을 재고, 참가자 명부에 이름과 연락처를 적었다. 행렬은 이미 출발했고, 나처럼 늦게 도착한 사람들은 뒤쪽 행렬에 따라붙었다. 어떨 때는 앞 사람을 제치며 걷고 어떨 때는 뒷사람에게 길을 내주며 걸었다. 입춘이 지난 때라 봄기운이 올라오니 걸으면서 땀이 났다. 옷을 여러 겹 껴입고 목도리에 모자까지 쓰고 갔는데, 더워서 겉옷을 벗었다.
걸어가던 중에 반가운 분들을 만났다. “구로동맹파업동지회”라는 자보를 붙이고 나온 분들이었다. 구로동맹파업은 1985년 6월 24일부터 29일까지 구로공단에 있는 민주노조들이 노조 탄압에 맞서기 위해 벌인 파업이다. 구로동맹파업의 주역들을 만나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여쭈었더니 감사하게 포즈를 잡아주셨다. 그중 한 분이 나보고 혼자 왔냐고 물어보셔서 혼자 왔다고 하니, 혼자서 다니는 것도 좋은데 동무랑 같이 나오지 그랬냐고 하셨다. “그러게요, 나오면 아는 얼굴을 만날 것 같아서요” 하고 웃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사람들
동지회로 함께 나온 분들은 그날 근무 일정을 빼고 나오셨다고 했다. 나도 “희망뚜벅이에 참가하기 위해 어제 일을 열심히 했어요” 대답했다. 주말 근무를 하는 많은 분들이 일을 다른 날로 바꿔가며 희망뚜벅이에 동참하러 나오셨구나 싶었다.
‘해고는 살인’이란 말이 있다. 반면, 해고하지 말라고, 복직시키라고 하는 건 ‘살리라’는 말이다. 살자고, 살리자고 걸음으로 말하려고 나온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 희망을 찾기 힘든 세상에서 오래간만에 희망을 만난 듯했다. ‘우리가 희망이네!’
걷다가 반가운 친구들을 만났다. 친구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점심시간, 단식 후 처음으로 떡을 먹었다. 천천히 씹어 삼키며 달콤함을 음미했다. 경찰들이 길을 못 가게 막으면 친구들과 자리 깔고 앉아 어쩌다 함께 걷던 분들과 간식 판을 벌였다. 나는 점심시간에 먹다가 남긴 떡을 식사를 거른 친구에게 건넸다. 한 친구는 호두를, 같이 걷던 분은 구운 고구마를 꺼냈다. 같이 간식을 나누어 먹고 있으니 길이 뚫렸다. 우리는 다시 일어나서 걸었다.
남태령 고개를 넘어 서울로 들어가는 길을 발로 밟으며 한 발자국씩 걸어갔다. 희망뚜벅이 걸음에 잠시나마 동참하며 점들이 모여 선을 이루는 감각에 대해 생각했다. 아, 이 사람들이 선을 만들어나가고 있구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여러 장기투쟁사업장에서 다 나와서 걷고 있다’고 한 친구의 말이 마음에 남았다. ‘다들 나오고 싶었구나’ 한 말도. 하루 반나절, 희망뚜벅이 일정에 참여하면서 발견한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점들을 연결해 연대하는 선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인덕원역에서 서울까지 걸어간 따뜻한 기억을 선물로 받았다. 먼저 걸어주신 김진숙 지도위원님께 고마운 마음뿐이다.
코로나 시기, 사회적 타살로 목숨을 잃는 약한 고리들이 드러났다. 이제 왜 그들이 죽는지 질문하기보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살 수 있을까를 질문하기로 했다.
우울증을 앓았던 20대의 어느 날, 침대에 누워 곰곰이 생각하다가 예수가 만약 지금 살아있다면 해고당한 KTX 승무원 노조의 여성 노동자들, 성소수자들, 모든 억압받고 핍박받는 이들과 함께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던 예수의 가르침을 떠올려본다. 삶으로 생명으로 죽은 이들을 위한 애도를 해나가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지혜
한때 복음주의 학생운동에 참여했고, 그 이후로 여러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삶을 살았다. 모태신앙이지만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지금은 무직 상태로 글을 편집하고 글을 쓰는 노동으로 먹고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