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드는 사랑이 필요하다
[365호 오수경의 편애하는 리뷰]
“저희 영화 〈윤희에게〉는 퀴어 영화입니다. 보시다시피 지금은 LGBTQ 콘텐츠가 자연스러운 2021년입니다. 그게 정말 기쁘고요. 앞으로 더 고민해서 좋은 영화 찍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월 9일 제41회 청룡영화상 각본상과 감독상을 받은 〈윤희에게〉 임대형 감독의 수상 소감 중 일부다. 대한민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영화제에서 ‘퀴어 영화’인 〈윤희에게〉가 상을 받은 건 정말 “LGBTQ 콘텐츠가 자연스러운 2021년”이 되었기 때문일까? 그의 말은 며칠 후 반박당하고 만다.
2월 13일 SBS에서는 그룹 ‘Queen’의 리드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삶을 담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방영했다. 그러나 영화는 프레디 머큐리와 그의 동성 연인이 키스하는 장면을 포함하여 몇 장면이 삭제되었다. 비판에 직면한 SBS는 “동성 간 키스 장면을 불편해하는 의식이 사회에 깔려있다 보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보헤미안 랩소디〉가 ‘12세 이상 관람가’ 등급 영화였고, 비록 ‘19세 이상’ 시청이 가능하다지만 선정적 장면이 가득한 〈펜트하우스〉를 여과 없이 방영하는 SBS의 해명치고는 궁색했다.
있지만 없는 존재, 성소수자
며칠 사이에 마주한 두 개의 장면은 성소수자를 향한 사회 인식의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명색이 2021년인데 우리는 여전히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어떤 존재를 삭제해야 하는 과거 습성과 그 존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려는 미래적 지향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을 경험하고 있다.
TV 드라마는 이 긴장 사이에서 ‘성소수자’를 어떻게 재현하고 있을까? 이전 글에도 서술했지만, 몇몇 논쟁적 드라마를 제외하면 성소수자들은 tvN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 속 한양처럼 일탈적 존재로 그려지거나 MBC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처럼 ‘브로맨스’로 변형되거나 ‘존재하지만 굳이 직접 언급하지 않는’ 투명한 존재로 재연되곤 했다. 어찌 보면 ‘슬기로운’ 균형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선택은 전혀 슬기롭지 않다. 오히려 대중에게 왜곡된 관점을 제공하는 차별과 혐오의 ‘마이크’를 허용하기 때문이다.
최근 어느 정치인은 ‘퀴어 퍼레이드’에 관해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 말은 명백한 혐오 발언이다. 이 말이 TV 드라마를 비롯한 대중문화에도 적용된다면 어떨까? 대중이 가난한 풍경을 보고 싶지 않다고 하여 모든 드라마에 ‘재벌’만 나온다면 그 세계를 ‘균형감’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엄연한 사회 구성원인 장애인, 외국인노동자, 성소수자 등을 보고 싶지 않다고 하여 그들을 드라마에서 삭제한다면 그 세계를 온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와 삶의 방식과 지향이 다르다고 해서 ‘안 볼 권리’ 혹은 ‘거부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낡고도 폭력적인 발상이다.
편드는 사랑이 필요하다
다행히 최근 TV 드라마는 성소수자들을 일탈적이거나 에둘러진 존재로 재현하지 않고, 보통의 존재로 가시화하고 있다. 성소수자를 일상적 인물로 등장시킨 JTBC 드라마 〈멜로가 체질〉이나 tvN 드라마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를 비롯하여 트랜스젠더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tvN 단막극 〈삼촌은 오드리 헵번〉 등이 대표적이다.
얼마 전 종영한 JTBC 드라마 〈런 온〉은 성소수자를 일상적 존재로 재연하는 것을 넘어 다양한 성적 지향과 정체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관한 모범적 통찰을 제공했다. 극 중 오미주의 선배이자 동거인인 박매이는 ‘무성애자’ 캐릭터로 나온다. 한국 드라마에 ‘무성애자’라고 명명된 캐릭터가 등장한 점도 특별한데 드라마는 한발 더 나아가 ‘무로맨틱 무성애자’와 ‘유로맨틱 무성애자’를 분류하는 등 성소수자의 다양한 결을 섬세하게 재연했다. 또한 서로를 향한 ‘존중의 거리’를 유지했다. 박매이에게 한눈에 반한 정지현은 박매이에게 이렇게 묻는다. “교제 중인 분 있으십니까? 아, 가장 먼저 이 질문이 선행됐어야 했죠? 연애 대상에 남성이 포함돼 있습니까?” 지구상에 ‘이성애’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주는 한국 드라마 생태계에 이 얼마나 신선한 자극을 주는 장면이란 말인가.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년이자 이영화의 친구인 고예준이 스스로 동성애자라고 엄마와 여동생에게 고백한 후의 장면도 인상적이다. 아들의 커밍아웃에 엄마는 “설명하지 마. 너 이번 주일부터 엄마랑 같이 교회 가!”라는 말로 도망치다가 이내 자신의 탓으로 돌리지만, 여동생 고예찬은 오빠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도 남자 좋아해. 남자 좋아하는 게 뭐 그렇게 유세라고. 엄마가 뭐라 하면 내가 오빠 편들어 줄게.”
엄마와 동생의 상반된 반응은 앞서 언급한 두 개의 사건과 오버랩된다. 한쪽에서는 어떻게든 ‘없는 존재’로 만들고 싶어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있는 존재’로 인정하는 입장이 양립하는 풍경 말이다. 이 관습과 지향 사이에서, 물론 충분하다고 여길 수는 없겠으나 미디어는 점점 다양한 존재를 인정하고, 가시화하는 지향을 선택하고 있다. 여전히 저항이 강력하다지만 그만큼 대중의 인식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부족하다. 우리 사회는 “엄마가 뭐라 하면 내가 오빠 편들어 줄게”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 많아져야 한다. 그래야 더는 차별과 혐오로 인해 소중한 생명을 잃지 않을 수 있다. 게다가 지금은 무려 2021년 아닌가!
오수경
낮에는 청어람ARMC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드라마를 보거나 글을 쓴다.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이웃들의 희로애락에 참견하고 싶은 오지라퍼다. 함께 쓴 책으로 《을들의 당나귀 귀》 《불편할 준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