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비움과 채움

[366호 커버스토리]

2021-04-30     국인희

공간을 보면 채우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사람으로, 물건으로, 살아있는 것으로, 죽은 것으로 채운다. 심지어 아무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은 공간을 가리켜 여백으로 채워져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최초의 공간이 빈 모습인 이유는 무엇으로든 채워져야 할 숙명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혼의 공간, 교회

현재의 교회로 적을 옮긴 지 여러 해가 흘렀지만, ‘교회’라는 추상의 공간을 떠올릴 때면 나의 머릿속은 모교회 모습으로 채워진다. 모교회가 수십 년에 걸쳐 신축과 증축을 거듭했음에도 회색 석조 건물의 통일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마도 최초로 지어진 본당이 고딕양식이었기 때문이리라. 그 고딕양식의 본당에서 나는 유아세례를 받았다. 그래서 그 공간은 우리 가족에게 본당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새롭게 이룬 가정에 처음 허락하신 자녀의 유아세례를 기념하는 공간이 된 것이다.

이어 주일학교를 단계별로 거쳐 청년부를 졸업하기까지 참 많은 시간을 교회에서 보냈다. 그 시간은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내 영혼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3차원 세계에 사는 우리 모두의 기억이 그러하듯 교회라는 공간 배경에 품긴 형태로 말이다. 지금도 모교회 안에 들어서면 교회 공간들 위로 나와 내 친구들이 보냈던 시간이 증강현실처럼 펼쳐진다. 소년부 시절, 부활절 성극에서 맡은 작은 배역을 수행하기 위해 숨죽여 등장 타이밍을 기다렸던 벽과 자주색 벨벳 커튼 사이의 좁다란 틈새, 이제는 근현대사 박물관의 소품으로나 볼 수 있을 나무 흑판과 접이식 철제의자로 빽빽했던 고등부 영어성경반 활동실, 국내 선교를 위한 준비 모임을 하며 단순 노동작업을 하다가도 당시로는 엄청나다 여겨졌던 공동체의 고급정보를 하나씩 공유하며 흥분에 휩싸였던 D관의 모처, 이 시대 청년과 한국교회 처지를 애통해하며 진심을 다해 기도하고, 성경공부하고, 토의했던 청년회실. 누군가는 심고 누군가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던 우리의 신앙 성장 공간인 모교회를 나는 정말 사랑한다.

선점의 공간, 교회

1970~1980년대에 끝내주게 잘나갔던 나의 모교회는 내가 본격적으로 주일학교 교육을 받기 시작한 1990년대까지 고질적인 공간 부족 문제를 겪고 있었다. 중등부를 다녔던 1990년대 중반에는 3개 학년이 각기 다른 장소에서 예배해야 했을 정도였다. 1학년 때는 A관 5층, 2학년 때는 B관 지하, 3학년 때는 C관 4층, 뭐 그런 식이었다. 고등부가 되어서야 전체 학년이 다 모여 예배할 수 있는 본당에 입성할 수 있었는데 우리가 본당에서 보낸 시간은 채 1년이 못 되었다. 그해 겨울 교회의 숙원사업이던 기념관 건물이 완공되었기 때문이다. 예배실, 활동실, 공연홀, 주차장이 완비된, 지하 5층부터 지상 8층까지 있는 최신식 건물이었다.

기념관을 정식으로 개방하기 전, 친구들과 함께 내부공간을 둘러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날이면 날마다 교회에서 죽치고 있었던 시절이라 가능했던 행운으로 기억한다. 기존의 건물과는 사뭇 다른 넓고, 높고, 반짝이는 첫인상에 낯섦을 느꼈던 것도 잠시, 우리는 모교회에 설치된 최초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가 지하 5층까지 역으로 내려오며 새 건물의 전 층을 구석구석 탐방했다. 다양한 목적에 따라 여러 크기와 모양으로 지어진 공간은 어렸던 우리 눈에도 참 좋아 보였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더랬다. “이제 더 이상 모임 공간 걱정할 필요 없겠구나!”

그런데 상황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전의 건물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큰 수용 공간이 생겼지만 공간에 대한 이슈는 이전보다 더 잦게 발생했다. 기념관이 완공되었을 즈음 모교회 교인 수는 이미 뚜렷하게 감소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사람은 줄고 공간은 늘었는데 공간을 두고 벌어지는 다툼은 더 자주 일어나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점 대상이었던 옛 공간들은 5G급 속도로 찬밥신세가 되었다. 규모가 크거나 유력한 인사가 소속되어 있거나 교회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아는 공동체일수록 1지망 공간을 차지할 확률이 높았다.

내가 대학부에 들어갔던 그해에 지도위원을 대상으로 공청회가 열렸던 사실을 기억한다. 개최 이유는 신축 기념관에 대학부 활동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책임을 지도위원들에게 묻기 위함이라고 한 선배가 나에게 설명했다. 투표로 선출되었다고는 하나 그래봤자 평신도인 대학생이 다수의 항존직으로 구성된 지도위원을 공청회 자리에 세웠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한 사건이다. 그 시절 내가 소속되었던 대학부 공동체가 얼마나 민주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못내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 신축 건물에 우리 부서의 활동공간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오래된 건물을 쓰게 되었다는 것, 과연 그것이 공청회를 해야 할 만큼 중요한 문제였을까.

욕망의 공간, 교회

그즈음의 한국교회는 공간을 새로 축조하는 일에 매우 열심이었다. 부지가 있는 교회는 건물을 새로 올렸고, 부지가 없는 교회는 내부를 리모델링했다. 수양관도 참 많이 지었다. 아주 많은 재정이 새로운 공간을 위해 쓰였다. 건축적으로 훌륭한 교회 공간이 많아졌다. 그 결과 한국교회 성도들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좋은 공간 자원을 누리며 신앙생활할 수 있었다. 최상의 음향시설을 갖춘 홀에서 찬양예배를, 장시간의 착석이 불편하지 않은 공간에서 말씀사경회를, 대규모 조리시설을 갖춘 공간에서 식탁교제를 나누며 개인 신앙과 공동체 영성을 열심히 키워갔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교회 밖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찻잔 속 폭풍처럼 교회 안에만 고여 있었다.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이 결국 공간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그즈음 한국교회의 공간을 채우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한국교회의 공간자원은 절대 작지 않다. 그러나 이 자원을 교회답게 쓰지 않았다. 공유하기보다는 관리하는 일에 더 애를 썼다. 교회 행정은 보수적으로 작동했고 공간 사용에 적합한 대상을 가리기 위해 많은 자격을 요구했다. 교인에게도 인색하게 굴었는데 교회 밖 사람들에겐 어땠겠는가. 교회는 그들을 이웃으로 환대하는 대신 무단침입자로 취급하지 않았는가. 과거의 한국교회는 이웃에 공간을 내어주는 일에 결코 인색하지 않았다. 마을의 대소사를 논하는 공론장으로, 주경야독하는 청년들을 위한 교실로, 민주화운동의 준비실과 상황실로, 어려움을 당한 이웃의 대피소로 교회 공간을 공유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이웃들은 더 이상 교회에 그러한 것들을 기대하지 않는다. 설사 그들이 기대를 품고 교회를 찾게 된다 해도 처음 상대해야 할 사람은 성도가 아닌 용역업체의 경비원일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들이 과연 무엇인지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어울리는 요소로 채워져 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따져봐야 할 때이다. 더욱 안정적인 공간에서 개인 신앙 성장과 교회 공동체성 함양을 도모하고자 최선을 다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다만, 본질을 잃어버리면 아무것도 아닐 뿐이다. 안락하고 쾌적한 공간에서 공동체 활동을 해온 현대의 성도들이 우리 선배 신앙인에 비해 오히려 공동체 의식이 취약한 것은 비단 세대 차이 때문일까. 교회 공간을 선점하기 위해 ‘레벨업’ 과정을 밟느라, 교회 자원을 이웃과 공유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교회 모습이 코로나 시대에는 이웃의 안전을 위협하는 이기심으로 비칠 뿐이다.

한 평 공간이 아쉬운 천만 도시 서울에서, 최상의 공간을 갖추고도 대부분의 시간을 비워놓는 곳은 교회밖에 없을 것이다. 교회는 이 공간을 이웃과 기꺼이 공유해야 한다. 공유경제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공간자원 활용을 극대화하는 것 또한 피조세계를 대하는 아주 성경적인 태도이다. 공간관리 등 실무적 문제가 있을 것이나, 이미 해법을 찾아가는 교회가 곳곳에 생겨나고 있다. 고민하면 해법이 나올 것이다. 교인과 이웃 둘 다 교회를 등져버린 현실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더욱 암담할 것이다. 

영원의 공간, 교회

재작년, 나의 하나뿐인 동생이 모교회 본당에서 결혼예배를 드렸다. 내가 유아세례를 받았던 공간은 이제 동생이 믿음의 가정을 시작한 공간이 되었다. 그사이 본당은 한 번의 리모델링 공사를 거쳤다. 이전에 쓰던 장의자에 쿠션을 덧대어 재활용해 다시 들여놓는 정도의 비교적 검소한 재단장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의자를 채우는 것은 빈자리다. 중등부 시절 함께 메뚜기 뛰며 예배 장소를 옮겨다니던 친구들도, 도움과 지원이 절실한 이웃도 이제는 없다. 오늘날 거의 모든 한국교회가 이러한 형국이다. 사람은 떠나고 공간만 남았다.

지금이야말로 다시 시작하기 가장 좋을 때가 아닐까. 스스로 비우지 못해 비워져버린 공간을 교회다운 것으로 채운다면 떠나간 친구와 이웃이 다시 교회로 눈을 돌리지 않을까. 주일이면 모교회 정문에 서서 구걸하던 노숙인 아저씨를 떠올려본다. 아저씨의 눈에만 보이는 경계선이 있는 것처럼 차마 교회 안으로는 발을 들이지 못하시고 언제나 문에 기대어 계셨다. 지금은 그곳에도 계시지 않는다. 그 아저씨가 다시 교회 문간을 찾아올 만큼만 교회 공간이 회복된다면, 그 밖의 것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천국의 공간을 그려본다. 우리가 마침내 완전해지는 그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공간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을까. 그것들을 즐겁게 추론하며 교회의 빈 공간을 하나씩 채워간다면 사는 동안 우리가 거하는 모든 공간이 영원에 잇닿아 있을 것이다.

국인희
일거리를 찾아 에녹성의 변방을 기웃거리는 생계형 글쟁이. 방송작가, 전시영상구성작가를 거쳤고, 현재는 작은 광고대행사에서 콘텐츠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