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7명이 일터에서 죽는 세상, ‘공정’을 묻는다

[367호 커버스토리]

2021-05-31     박다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하는 청년들

몇 년 전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변호사들과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정규직 교사들이 기간제 교사들의 처우 향상을 반대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기간제 교사들은 학교에서 이미 수년간 교과과목 수업은 물론이고 담임과 같이 학교 내 각종 보직을 수행하고 있기에, 나는 정규직 교사들과 다른 고용형태나 처우를 적용하면 형평에 반한다고 말했다. 다른 두 명의 변호사들은 임용시험을 통과하지 않은 기간제 교사들을 정규직 교사들과 같은 대우를 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했다. 정규직이 되기 위해 수년간 임용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불공정’한 조치가 될 것이라면서. 나는 ‘동일노동동일임금’은 지극히 당연한데, 단지 임용시험만을 기준으로 모든 근로조건을 달리 정한다면 ‘동일시험동일임금’이 아니냐며 반박했다. 우리의 대화는 중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상당 부분의 교육을 직접 담당하고 있는 비정규직 교사, 대학 교수의 비중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고 임용시험 없이도 정규직 교사가 된 사립학교 교사들도 기간제 교사들의 처우개선에 반대한다는 이야기로 나아갔다. 사법시험 출신 일부 변호사들이 로스쿨과 변호사시험을 통과해 변호사가 된 이들을 차별한다는 세간의 이야기로도 번졌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그 변호사들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사법시험을 통과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로스쿨 출신인 자신들의 노동이 저평가되는 것에는 분노하면서, 임용시험이라는 하나의 기준을 절대적으로 적용해서 실제 동일한 가치의 노동을 이미 수행하는 이들을 차별하는 학교 내 현실에 대해서는 감수성이 낮아 보였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내로남불’이 아니냐고 속으로 쉽게 평가했다. 이후 사회 곳곳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하는 청년들 입장이 ‘공정 담론’의 일환으로 소환되는 모습을 보면서 그날의 대화를 종종 떠올렸다.

‘공정’과 ‘능력주의’를 외치는 이유

“헌법상 평등의 원칙에 기한 동일 가치 노동, 동일 임금의 원칙.” 이 말이 내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차별시정·정규직화를 반대하는 청년들에게 가장 익숙한 언어로 전할 수 있는 핵심이다. 당신들의 뜻과 입장에 함께할 수 없다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와 자리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이들 편에서 서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결어(結語)이기도 하다. 나의 지식과 마음을 다해 법원과 입법부, 정부, 사회를 계속해서 설득하겠다고.
이렇게 간단하게 결론 낼 수 있는 글이었다.

그런데 뭔가 개운치 않았다. ‘공정’ ‘능력’ 따위의 언어를 들고나와 차별에 찬성한다고 하는 청년들의 성난 얼굴을 보면서 나는 고통스러웠다. 단순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비탄한 마음과 상황에 공감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공정’을 말하는 저 성난 청년들의 적대감 뒤에 숨겨진 시공간을 함께 경험한 세대로서, 우리 세대의 민낯을 직면하는 일이 고통스러웠다.

앞서 말한 동료 변호사들과 나는 경쟁과 줄 세우기를 (설령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도)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호흡하며 살아온 세대이다. 줄을 서지 않은 채 나중 온 자가 먼저 되는 세상은 본 기억도 없지만, 그런 세상이 펼쳐진다 해도 쉬이 납득하기 어렵다. 서로 가르쳐주며 공부한다고 해도 다 같이 A를 받을 수 없고 세 명이 수업을 들으면 반드시 한 명씩 A·B·C를 받아야 하는, 교수님이 A·A·B를 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엄격한 상대평가’를 겪어왔다. 배운 대로,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는데 사회에 나오려고 보니 ‘멀쩡한’ 자리가 몇 개 없었다. 이전 세대가 청춘의 낭만이나 방황이란 걸 즐겼던 시간에 독서실로 학원으로 어학연수로 자기 착취의 쳇바퀴를 성실하게 돌렸지만, 특별한 배경 하나 없는 평범한 우리가 당도한 길 끝에는, 어딘가는 부서지고 고장난 반값 노동의 자리가 넘쳐났다.

‘사회생활’이라 부르는 경제활동을 하면서 자신을 죽이고 영혼에 힘을 빼고 밥벌이를 하는 것이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이 세대는 사회생활로 진입하기 전부터 자아가 없고 영혼도 없는 그 세계에 ‘제발 들어가게 해달라’고 하며 경쟁적으로 자신을 팔아야 했다. ‘자소설’로 자조하는 자기소개서를 계속 쓰다 보면 어느덧 그 안에는 한 줌의 자신도 남지 않고, 회사와 조직이 찾는 ‘인재상’ 언저리에 있는 누군가만 있을 뿐이다. 자신을 팔고 갈아넣어 간신히 덜 부서지고 덜 고장난 자리를 차지했지만, 큰 권력을 가진 이부터 작은 권력을 가진 이까지 숨 쉬듯 휘두르는 직장 내 갑질이며 불투명한 인사 시스템, 언제나 (직원 월급 줄 때만) 힘들다는 회사,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자리까지, 취업에 ‘성공’했다는 이들이 마주하는 일터의 보편적 모습이다. 공무원, 공공기관, 대기업, 중소기업 등 직종 불문, 자격증 소지 불문 등장인물만 조금씩 바뀔 뿐 비슷한 장르의 비슷한 이야기가 도처에 넘쳐난다.

잠시만 멈춰 생각해보자. 과연 비정규직 노동자를 겨냥해 ‘공정성’을 들먹이며 차별을 정당화하는 상황들이 정말 ‘공정 담론’ ‘능력주의’로 단순하게 수렴할 수 있는 것일까. 이들에게 주어진 언어가 그다지 많지 않은 상태에서 몇 개의 언어로 거칠게 입장을 토로했던 것은 아닐까. 혹은 언론 등에서 ‘손쉽게’ 세대와 상황을 틀 지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들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우리의 상황과 고통을 묵과하지 말라, 우리의 시간을 방치하지 말라, 우리의 이야기를 경청하라”가 아니었을까. 쳐다보기 싫어 고개 돌렸던 내가 속한 세대의 목소리, ‘능력’의 결과인 ‘차별’에 찬성한다는 그들의 ‘공정’에 대해, 주시하고 돌이켜보며 고민했던 지난 얼마간의 시간 끝에 내린 조심스러운 결론이다.

하루 평균 7명이 일터에서 죽는다

그러나 이것이 이 글의 끝이 될 수는 없다. 여전히 동료 청년들에게 묻고 싶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냐고. 비정규직이라는 ‘신분’으로 차별을 겪고 배제당하는 것이 일상이 된 누군가 앞에서, 우리의 과정이 고단했고 우리의 노력이 대단했다는 것만이 외침의 내용이 되어도 괜찮은 것인지. 그보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거나 ‘돌도 씹어 먹을 나이’라면서 우리의 값싼 노동을, 극한의 경쟁을 당연히 여기지 말라고, 우리 의견에 귀 기울이라고, 더 정확한 언어로 우리 공동체와 사회에 균열을 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무엇보다 ‘그들만의 공정’이 되지 않기 위해 나와 이웃의 노동 자리를 꼼꼼하게 돌아보는 일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누군가 ‘저녁이 있는 삶’을 말하는 동안, 다른 누군가는 위험한 일터로 날마다 출근하며 ‘삶이 있는 저녁’을 기원한다. 하루 평균 7명의 사람이 날마다 일터에서 떨어지고, 무너지고, 끼이고, 깔리고, 불타거나 화학물질에 노출되고, 폭발이나 감전을 당해 죽는다. 하청업체에 입사한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가 몇 개월 만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원청 사업장에서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 시신으로 발견된다. 수개월간 일주일에 5~6일을 물류센터에서 야간조로 일하지만 날마다 근로계약을 체결하는 일용직이기 때문에 법으로 정해진 건강검진 한 번 받지 못한 채 과로로 죽는다. 매일 손에 닿는 독한 냄새의 화학물질이 무엇인지 궁금하지만 첨단산업에 종사하는 기업은 영업 비밀이라며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채 생산력 향상만 외치고 노동자는 갑자기 시력을 잃는다. 민원인의 괴롭힘과 동료들의 방치에 오랫동안 괴로워하던 청년 노동자는 출근길에 몸을 던져 노동을 종료한다. 비정규직 노동자와 이주노동자는 정규직인 내국인 노동자보다 유해물질에 두 배 이상 더 심각하게 노출되고 위험한 공정에 내몰려 더 많이 병들고 아프다. 안전 조치에 큰 비용이 부담되거나 고도의 기술적 조치가 필요해서가 아니다. 단지 재해가 발생했을 때 회사가 받는 불이익인 ‘목숨값’이 안전·보건 비용보다 싸기 때문에 죽음이 반복된다면, 이런 삶의 자리들은 과연 공평하고 올바른가.

무노조가 경영전략인 세계 일류 기업에서 감히 헌법상 기본권인 노동3권을 행사했다는 이유만으로 온 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이 ‘문제인력 일일동향’이라는 이름으로 경영진에 보고된다. 경찰이 미행하고 은행 계좌 내역이 털린다. 똑같이 생긴 전시장에서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차량을 똑같은 조건으로 판매하지만, 그중 절반의 판매사원은 비정규직 노동자로 기본급 0원에 4대 보험 가입이 거절된다. 노사 간 합의대로 야간노동 단축을 요구하자 용역깡패를 풀어 노동자들을 공격한다. 20년을 일한 숙련 노동자가 지난달에 입사한 막내 신입과 동일한 최저임금을 받는다. ‘혁신’이라 주장하는 플랫폼 뒤에 숨은 ‘진짜 사장’에게 지시를 받는 노동자는 어느새 ‘사장님’이 되어 노동법의 모든 보호 범위에서 제외된다. 주 60시간을 일하지만 그중 40시간에 해당하는 급여만 받고 20시간은 무료로 노동한다. 영리한 사장의 사업장 쪼개기 전략으로, 일을 시키는 사장과 근로계약서상의 사장이 달라 부당해고를 당해도 근로기준법 적용이 안 된다고 한다.

안전하고 공평하며 올바른 일터를 소망한다

이토록 참혹해진 우리 노동의 자리에 대해서는 며칠 밤을 새워 쉴 새 없이 말할 수 있다. 일터에서의 고통과 수난으로 어지럽혀진 삶의 비극에 대해서도 끝없이 쓸 수 있다. 여기 어디에 공평함과 올바름의 흔적이 있는가. 어느 세대보다 경쟁과 자기 착취에 길들어 있고 ‘능력’을 갖추기 위해 이전 세대의 곱절은 노력했지만 결과가 이전의 절반에 불과한 성취를 득하는 세대가 가장 민감하게 ‘공정’한 노동을 바랄 수 없을까. 일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있고 노사 간 관계가 투명한 일터, 안전하고 공평하며 올바른 일터를 바라는 건 어떤가.

꿈에서나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작업장의 안전과 보건을 강화하고 공정한 임금을 지급하도록 하는 움직임들이 있다. 균열일터(the fissured workplace) 즉 하청, 플랫폼, 공급체인 등을 통해 이익과 책임이 분리되면서 일터는 더 위험해지고 노동자는 더 궁핍해지는 전 산업적 관성에 법과 제도로 맞서는 흐름이 생긴 것이다. 흔히 ‘자본주의 첨병’이라고 불리는 미국에서 (트럼프 정부 시기 잠시 주춤했지만) 계속되고 있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근로자 오분류(misclassification, 노동법상 사용자로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근로자를 계약상 자영업자로 오분류하는 관행)를 억제하여 저임금 노동자를 보호하고 최대한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며 세금과 사회보험 등의 국가 재정을 확보한다.

노동자 보호는 익숙한 이야기인데, 공정 경쟁과 국가 재정에 관한 내용은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노동자를 사용하면서도 근로계약 대신 용역계약, 위탁계약 등으로 위장하여 임금, 퇴직금, 사회보험료 등 각종 비용을 아끼는 사용자들이 정당한 임금 등을 지급하며 노동자를 고용하는 사용자들의 공정한 경쟁, 즉 시장질서에 해악을 끼친다는 접근이다. 또한 납세자 중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이 제대로 임금을 지급받지 못하고 취약한 생활을 할수록 국가 재정에도 악영향을 준다는 식의 판단도 실로 합리적이다. 균열일터의 아주 일부분을 시정하겠다고 한국 정부가 꺼내들었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정책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취급되었는지를 생각하면 국가 경제, 공정 경쟁까지 들고나와 ‘공정한 노동’을 꾀하려 하는 미국의 시도와 성과에 대해서는 한 번쯤 돌아봄 직하다.

종종, 하나님 나라를 묵상하고 상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온전히 임한 세계의 법과 제도는 어떠한 모습일지 그려보곤 한다. 한참을 상상하고(정확히는 ‘소망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 나는 이 땅에서 무력하고 보잘것없지만, 간신히 내가 딛고 있는 우리 사회 공동체에서 실현할 수 있는 것들을 꿈꾼다. 다른 취약한 누군가에게 위험이 확인된 업무의 수행을 요구하지 않는 사회. 생계를 위해 위험한 일터에 스스로를 몰아넣지 않아도 되는 세상. 노동을 통해 이익을 보는 이에게 책임도 마땅히 지우는 법질서. 손님이든 민원인이든 누구도 왕이 아닌 직장. 소비자의 편의를 위해 발암요인인 야간노동을 ‘샛별’이나 ‘로켓’ 따위의 단어로 숨기지 않는 사회. 노동자의 목숨값이 천하보다 무거운 세상. 내 이웃의 존엄과 노동의 대가를 우습게 여기는 이들에 맞서 함께 ‘공정’을 외치는 공동체…. 우리가 함께 돌아보며 돌보는 노동의 자리 곳곳에 공평(公)과 올바름(正)이 있기를 소망한다. 

박다혜
타인의 일터를 가까이서 경험하고 이웃의 삶터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며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민주노총(금속노조) 법률원’ 또는 ‘법무법인 여는’으로 불리는 일터에서 노동자 관점으로 법을 해석하며 소송, 자문, 연구, 교육 등의 노동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