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순간 형이 붙든 말씀

[369호 내 인생의 한 구절]

2021-07-30     한호민

“백승학 씨와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형을 찾기 위해 보호기관이나 병원에 전화를 걸면 늘 되돌아왔던 질문이었다. 그때마다 “친구입니다”라고 대답하곤 했다. 이 질문에 답하는 일은 2018년 6월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형은 지나친 음주로 식도와 간이 많이 상했고, 50년의 생을 고시원에서 쓸쓸히 마감했다. 구청 직원은 내가 가족이 아니기에 시신을 확인해줄 수 없고, 무연고자로 처리하는 것이 비용과 절차상 유익이 있다고 설명했다. 형의 가족에게 연락해 보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십수 년 전에 알코올중독자 아들과 남이 되기로 하면서 두었던 그 거리를 죽음 앞에서도 유지하고 싶어 하셨다.

나는 형의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사회적으로 형의 죽음은 무연고자의 죽음이다. 누군가에게는 냄새나는 노숙인, 무명의 아저씨, 병원비를 낼 수 없는 골칫덩어리 술꾼의 죽음이다. 그러나 나는 형을 기억하고 싶다. 나의 소중한 친구였던 백승학으로 말이다. 이제는 볼 수 없지만 매년 형의 삶을 기록하며 나의 친구로 옆에 두려 한다.

기도실에서 만난 노숙인 아저씨

대학교 3학년이었던 2007년 가을이었다. 실험 수업 전 기도실에 들러 기도하고 나온 차였다. 리포트를 정리하면서 기도실 앞 벤치에 앉아있었다. 어디선가 오랜 기간 씻지 않은 사람에게서 맡을 수 있는 냄새가 났다. 그리고 한 노숙인이 더듬더듬 말을 걸어왔다. “저기… 기도실에 들어가도 되나요?” 나는 조금 거리를 두면서 들어가셔도 된다고 했고, 서둘러 수업에 가려 했다. 그때 노숙인은 “죽기 전에 한 번 기도하고 죽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심하게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장 낮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는 성경 구절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내 주변에는 다들 살만한 것 같은데 가장 낮은 자가 누구일까요?’라는 질문을 하나님께 드렸던 차였다. 그런데 죽기로 결심한 노숙인 아저씨를 만난 것이다.

형은 자기는 학생이 아닌데 기도실에 들어갈 수 있겠냐면서 계속 중얼거렸다. 솔직히 나는 출석이 아주 중요했던 수업을 빼면서까지 이야기를 이어갈 용기가 없었다. 나는 수업을 다녀올 테니 2시간만 기다려달라며 뛰어갔다. 뛰어가면서,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분을 만나게 하신 것이라면, 휴강 되게 해주세요. 아니면, 저는 그냥 지나칠 것 같습니다”라고 기도했다.

그렇게 뛰어서 도착한 실험실 앞에는 ‘오늘 수업 휴강’이라는 종이가 붙어있었다. 내 인생에 이처럼 가장 즉각적이고 분명한 기도 응답은 처음이었고, 이후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혼자 형을 만나기가 무서워서 선교단체에서 함께 활동하던 친구를 불렀다. 그렇게 잔디밭에 앉아 짬뽕 한 그릇, 소주 한 병을 가운데 두고 셋이 이야기하며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저 친구가 되자는 마음

일주일에 한 번 시간을 정해서 만나기로 했다. 형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노숙인이 된 상황을 한 사람의 무능력으로 치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당시 내가 속해있던 공동체는 일주일에 한 번 노숙인분들께 식사를 제공하는 밥차 운동에 자원봉사로 참여하고 있었다. 그것을 주도하던 친구의 노력으로 승학이 형의 삶을 회복할 방법들을 찾아갔다. 시간이 조금씩 흘러 형은 장애인과 노숙인들의 회복을 돕는 좋은 교회를 만났고, 노숙도 청산하고 직장도 얻었다. 그렇게 해피엔드로 끝날 것 같았던 이야기는 형의 알코올중독으로 인해 틀어졌다. 형은 다시 거리로 나오게 되었고, 방황하는 시간을 보내다가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비전트레이닝센터에서 알코올중독 회복 프로그램을 거치며 임대주택에 거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또다시 가족에게 버림받았던 지난날의 상처 때문에 거리로 나오기를 반복했고 노숙 생활로 돌아가곤 했다. 그리고 술과의 끊임없는 싸움으로 삶을 이어갔다.

그 가운데 나와 친구들은 그저 친구로 있었을 뿐이었다. 형은 술을 얻기 위한 거듭된 거짓말과 계속되는 실패, 에너지와 재정 지출 등으로 힘든 시기가 많았다. ‘노숙인을 돕자’고 시작했던 관계라면 그만두었겠지만, ‘그저 친구가 되자’는 마음이었기에 계속 곁에 있었던 것 같다.

형은 계속 술을 먹고 거리로 나가고 다시 병원에 입원하는 삶을 반복했다. 나는 신기하게 형의 위치를 찾아내었고 형도 나에게 연락해서 다시 만나곤 했다. 그렇게 다시 형의 위치를 찾아내어 입원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서 찾아갔던 2015년 여름 어느 주일날, 병실에서 형과 예배를 드렸다. 문득 “형은 어떤 성경 구절이 가장 좋아?” 물어보았다. 형은 요한복음 3장 16절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형은 2008년부터 3년 정도 비전트레이닝센터에서 생활했는데, 그때 신앙이 생긴 것 같다. 트레이닝센터에서 찬양을 듣는 것으로 마음의 평안을 누린다고 자주 말했다. 우리는 그저 여러 번 성경을 읽고 낭독했다. “호민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단다. 얼마나 좋냐!” 그 말의 묵직함이 정말 컸다. 형의 믿음 고백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오셨고 그것을 믿는다고 했다.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술을 의지해 살아온 삶을 한탄하며 가만히 생명을 끊으려고 한 형에게 들었던, 첫 만남과는 사뭇 다른 그날의 고백은 정말 진했다.

삶의 끝에서 붙들었던 요한복음 3장 16절

형이 좋아하는 것은 지렁이 젤리, 시가 넘버6, 삼겹살… 그리고 애증의 소주이다. 형과의 마지막 식사는 구의역 주변에서 먹은 삼겹살이었다. 계속 소주를 시키려는 형님과 말리는 나의 실랑이도 기억난다. 맛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몸이 망가져 있었던 형은 무언가 씹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우걱우걱 먹는 모습이 좋다고 했다. 입원 중에는 성경 필사와 종이 십자가 접기를 좋아했다. 우리 아이들 주라고 분홍색 종이 십자가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형은 함께 선교단체 활동을 하던 친구들을 늘 걱정하고 좋아했다. 우리의 군대 문제, 이성 문제, 진로 등을 많이 걱정했고 가능하면 졸업식, 결혼식에 술 취하지 않은 멀쩡한 상태로 가려고 애썼다.

형이 떠나고 나서 형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고시원에 찾아갔다. 물건은 이미 다 치워져 있었다. 씁쓸해하는 내게 고시원 원장님이 종이 한 장을 보여주셨다. 몸에 한계가 온 형이 병원에 실려 가기 직전에 종이에 적어달라고 부탁하고 계속 읽어달라고 했단다. 요한복음 3장 16절. 생의 마지막에 붙들었던 말씀이 적힌 종이를 건네받고 나는 한참 울었다. 그러면서 고시원 원장님은 내게 ‘둘째 아이가 많이 아프냐’고 물었다. 승학이 형이 병원에 가면서도 계속 ‘호민이 둘째가 아픈데 기도해달라’고 자신에게 거듭 부탁하셨다는 것이다. 당시 둘째 아이가 조금은 특별한 존재로 태어날 수 있다는 산부인과의 결과를 듣고 힘겨웠던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형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어디서 할 수 없는 한탄을 늘어놓았었다. 그 후 다행히도 둘째가 건강히 태어났고 바로 형에게 연락해서 알렸는데, 형은 술에 취했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정작 자신이 죽을 만큼 아픈 상황에서도 ‘호민이 둘째’를 위해 계속 기도하고 마음 써주었던 것이다.

이제는 형이 떠나고 3년이 지났다. 3년이 지나도 여전히 형을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하고 어지럽다. 그리고 많이 그립다. 살아있었을 때 함께하지 못한 일들이 아쉽다. 아내는 형님이 우리 집에 오셨을 때, 밥 한 공기 더 달라는 요청을 들어주지 못했던 것이 그렇게 아쉽다고 한다. 함께 여행 가자던 약속을 못 지킨 것도 마음에 남는다. 더 살갑게 표현하지 못했지만 형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다고. 나와 친구가 되어주어서 고맙다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한다는 그 말씀을 붙들며 잘 살아가겠다고.

한호민
은진, 여준, 해준과 함께 산다. 홍어와 멍게 젓갈, 두리안, 삶은 땅콩, 에스프레소를 좋아한다. IVF 나음누리 간사이고 현재는 신학 연수 중이다. 예수승리교회를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