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해석은 어떻게 판별될까요?
[369호 성서해석, 어디까지 해봤나요] 성서해석에 대한 경제학자의 질문 1
〈청소년 매일성경〉(이하 ‘청매’)에 ‘큐티, 경제학과 만나다’라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편집부는 독자(의 부모와 교회학교 교사)들의 항의로 연재를 종료할 수밖에 없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곧 교계 언론 〈코람데오닷컴〉은 관련 소식을 보도했습니다. ‘매일성경 본문 해설,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기사는 달란트 비유(마 25장)와 포도원 품꾼의 비유(마 20장)에 대한 제 칼럼을 소개하고, 몇 명의 신학 교수 인터뷰를 통해 “상당히 위험한” “선동적인” “사회주의 이념에 입각” “성경을 왜곡” “비성경적 묵상” 등의 말로 비판했습니다. 왜 그렇게 판단했을까요?
전통적으로 두 비유 속의 주인은 하나님으로 해석됩니다만, 일부 성서학자들은 전복적인 방식으로 해석하는 시도를 해왔습니다. 그들은 상당수 비유를 당시 사회 상황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거나 극적으로 표현한 이야기로 봅니다. 그렇다면 비유 속 주인은 당시 시대의 ‘갑’이고, 종과 품꾼은 ‘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달란트 비유를 주인의 독점력과 부당한 사업에 대한 한 달란트 받은 이의 저항 이야기, 포도원 품꾼 비유를 주인과 품꾼 사이의 비대칭적 협상력과 불공정 계약 이야기로 읽어볼 것을 제안했습니다.
페이스북 댓글에서는 적지 않은 이들이 저를 향해 날 선 말을 쏟아냈습니다. “마귀 새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지옥 불로 이끄는 거짓 교사” “사이비 이단”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반응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떤 목사는 설교에서 “김재수 교수 … 사상으로 하나님 말씀을 뒤집어엎는 … 악마 아니에요? 악마? 이거 마귀 아니에요? 이거 사탄이죠!”라고 일갈했습니다. 〈코람데오닷컴〉은 얼마 후 또 다른 보도를 내놓았습니다. 청매를 발간하는 한국성서유니온선교회를 향해 동성애, 차별금지법, 페미니즘에 우호적인 청어람ARMC를 후원하고 있다며 압박했습니다. 결국 성서유니온은 청어람ARMC 후원을 중단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말씀의 길을 바르게 걷겠다”라고 발표했습니다.
여기까지는 ‘근본주의 신앙을 가진 이들의 거칠고 폭력적인 분노’가 만든 일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낯설지 않은 풍경입니다. 워낙 상식을 넘어서는 일들이 자주 벌어지기 때문에, 이 정도 사건은 가벼운 해프닝 정도로 넘어가리라 짐작했습니다.
콘텍스트를 넘어(무시하고) 텍스트로
사건이 알려지자 여러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페이스북과 다른 매체에 제 칼럼에 대한 비평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흥미로운 사건이 터지면 관련 분야에 있는 이들이 한마디씩 거드는 일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청매 연재 중단이나 청어람ARMC 후원 중단 사태가 아니었습니다. 다들 두 비유에 대한 제 청매 칼럼을 비평했고, 왜 틀린 해석인지를 조목조목 설명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글 끝에 ‘하지만 마녀사냥은 동의하지 않음’ 정도의 인사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제 칼럼에 대해 쏟아지는 비평을 보며, 어느 목사는 다음과 같은 촌평을 날리기도 했습니다. “평소 생물학자한테 진화론 가르치고, 천체물리학자한테 빅뱅 이론 가르치고, 물리학자한테 양자역학 가르치려고 들면서도 아무런 부끄럼을 모르던 목사들이, 경제학자가 성경 해석 좀 했다고 집단 발광들 하는 거 좀 웃기지 않아요?”
벤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최종원 교수의 책 제목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를 뒤틀면, 복음주의자의 반응을 잘 요약할 수 있을까요? 콘텍스트는 사라지고 텍스트만 남는 상황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념 문제에 집착하는 근본주의자의 분노로 시작된 사건은 성서해석에 대한 복음주의자의 깊은 염려와 민감한 반응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번 사건은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남겼습니다. 첫째, 과연 올바른 해석은 어떻게 판별될 수 있습니까? 둘째, 교회 내에서 다른 해석이 있을 때, 어떻게 건강한 합의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두 질문은 이번 사건을 정리하기 위해 6월 25일 열렸던 청어람ARMC 집담회가 던진 질문이기도 합니다.
저는 경제학자의 시각으로 답해보려고 합니다. 사회과학 연구 방법론과 성서해석 방법론이 같을 수는 없지만, 사회과학이 줄 수 있는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동시에 제 논의는 사회과학이 지닌 한계도 고스란히 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신학 교수는 경제학 교수보다 빨간펜 채점을 좋아할까?
청매 칼럼을 비평한 대다수 글에서 공통으로 발견한 강렬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틀렸다’입니다. 경제학 논문이나 토론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단어입니다. 경제학자는 다른 설명 방식에 대해 ‘틀렸다’라고 잘 말하지 않습니다. 반면 성서해석에 대한 논쟁에서는 다른 의견에 대해 ‘틀렸다’라는 표현이 빈번하게 사용됩니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경제학자가 경제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을 짧게 소개하겠습니다. 경제학자는 ‘이론’을 통해 경제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합니다. 이론은 ‘생각의 틀’입니다. 경제학에서 가장 강력한 이론으로 꼽히는 수요공급 이론을 생각해 봅시다. 수요공급 이론은 상품의 가격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어떻게 변하는지를 설명합니다. 가격 관련 이슈가 천 개 정도 있다고 합시다. 수요공급 이론은 그중 9백 개의 이슈를 잘 설명해낼 수 있습니다. 반면 백 개의 이슈는 잘 설명하지 못합니다. 수요공급 이론에 들어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요공급 이론은 틀린 것일까요?
아닙니다. 수요공급 이론의 진정한 힘은 잘 설명하지 못하는 백 개의 이슈에서 드러납니다. 수요공급 이론은 몇 가지 중요한 전제와 가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 중 무엇 때문에 백 개의 이슈에는 잘 적용되지 않는가를 생각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수요공급 이론이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어떤 대안 이론이 나타나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장이 충분히 경쟁적이라는 가정은 독과점 이론을, 시장 참여자가 모든 정보를 알고 있다는 가정은 비대칭정보 이론을, 재화에 공공성이 없다는 가정은 공공재 이론을 낳았습니다. 이처럼 좋은 이론은 현상을 잘 설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을 탐구할 수 있도록 디딤돌 역할을 합니다. 좋은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대안 이론을 상상하게 합니다.
하나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이론이 경쟁하고 공존하는 경우는 흔합니다. 경제 현상은 복잡하고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어서, 복수의 이론이 서로 다른 측면을 설명합니다. 하나의 현상을 어느 특정 이론이 다른 이론보다 더 잘 설명하는 경우도 존재하지만, 대개 이들은 서로를 보완하며 문제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경제학자가 다른 설명 방식에 대해 ‘틀렸다’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는 이유입니다. 잘 훈련된 경제학자는 여러 경쟁적 이론을 동시에 고려하며 경제문제를 관찰해야 합니다.
이론의 역할을 오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요공급 이론이 워낙 강력하기 때문에, 이를 불변하는 법칙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들은 어려운 문제에 맞닥뜨릴 때, 수요공급 이론의 한계를 통해 새로운 설명 방식을 찾지 않습니다. 이들은 수요공급 이론이 틀릴 리 없다고 생각하며, 수요공급 논리를 나머지 백 개의 이슈에 밀어붙입니다. 이런 입장을 시장근본주의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론이 무엇인지, 이론이 어떻게 오용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성서해석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어떤 교리 또는 신학은 마치 경제 현실을 설명하는 경제학 이론처럼 성서를 해석하는 생각의 틀입니다. 좋은 교리와 신학은 성서의 많은 이야기를 일관된 틀로 설명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설명하기 힘든 이야기 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전제와 가정을 살피고, 다른 대안적 설명의 가능성을 탐구할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해야 합니다. 다양한 관점의 신학을 통해 성서의 이야기를 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의 틀을 불변하는 법칙으로 간주하는 실수는 성서해석에서 더 잘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교리와 신학을 마치 불변의 진리로 여기는 실수입니다. 다른 방식의 성서해석에 대해 ‘틀렸다’라고 말하는 이유가 이 때문 아닐까요? 다양한 신학과 관점으로 성서를 읽는다면 ‘틀렸다’라는 표현은 쉽게 등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양한 측면을 보지 못하는 이들일수록 자기 생각의 틀 내에서 도출된 ‘타당한 해석’을 유일하게 ‘바른 해석’이라고 주장하기 쉽습니다.
두 비유에 대한 칼럼에서 저는 전통적 해석을 틀렸다거나, 전복적 해석이 더 타당하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제 칼럼을 비평한 분들과의 대화에서도 이 점을 반복해서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다수는 다른 방식의 해석을 모두 인정하는 제 입장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전통적 해석이 전복적 해석보다 옳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제게 요구했습니다. 이들이 제게 자신들의 옳음을 인정하라고 서슴없이 요구하는 것은 유일하게 올바른 단 하나의 해석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성서해석을 마치 반드시 승자와 패자로 나뉘는 제로섬게임처럼 생각한 탓입니다.
논쟁의 장, 가장 엄격한 해석의 기준
올바른 해석은 어떻게 판별될 수 있을까요? 이론·교리·신학이 생각의 틀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바뀔 필요가 있습니다. 성서해석의 다양성,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을까요? 제 대답은 ‘논쟁할 수 있을 만큼’입니다.
논쟁의 장을 펼치면 황당한 해석이 난무하는 아무 말 대잔치가 될 것을 염려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성서해석의 자유를 이야기하면 곧바로 ‘이단’ 알레르기를 드러내는 분들도 많습니다. 어떤 분은 제가 달란트 비유 속 갑을 관계에 주목한 점에 대해 문제 제기하면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막 4장)를 다음과 같이 볼 수도 있겠느냐고 따졌습니다. “농부가 고의로 길에다 씨를 뿌린 것이다. 소작농이 당시의 비참한 갑을 관계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설명한 거다.” 만약 제가 이런 식의 설명을 했다면 지금의 논쟁이 벌어지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편집부가 이런 글을 내놓을 리가 전혀 없고, 출판된다 해도 응원하는 사람과 비판하는 사람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논쟁할 수 있을 만큼’이라는 기준이 느슨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과학이 발전하는 방식과 과학의 경계도 논쟁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논쟁의 장을 열어놓는 것이야말로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일입니다. 오히려 논쟁이 활발해져야 아무 말 대잔치, 자의적 해석이 자리를 잃지 않을까요? 청소년이 질문하고 토론하며 성서를 공부한다면 이단의 질문에 콧방귀나 날리지 않을까요? 논쟁의 장이 없다는 점은 성서해석의 기반이 그만큼 허술하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전통을 무시할 수 없다’라는 반응도 자주 접합니다. 전통이야말로 좋은 논쟁을 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줍니다. 전통의 힘은 바로 ‘안전감’입니다. 다름과 다양성을 더욱 포용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게다가 전통이라 불리는 모든 것들도 끊임없이 변해온 역사의 결과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성서해석이 더욱 다양해지는 역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전통의 힘을 깊게 신뢰할수록 경계는 더 유연해집니다. 결국 성서해석의 타당성과 다양성은 공동체 역량에 따라 결정되지 않을까요?
김재수
미시간 주립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2009년부터 인디애나 퍼듀 대학교에서 미시경제학, 가격과 시장 이론 등을 가르친다. 지은 책으로는 《99%를 위한 경제학》 《시장, 세상을 균형 있게 보는 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