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의사를 만나고 싶다

[369호 오수경의 편애하는 리뷰]

2021-07-30     오수경

병원에서 겪은 안 좋은 기억을 말하라면, 침을 튀겨가며 격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특히 모 대학병원 실험실 같은 진료실에서 인턴·레지던트들이 우르르 몰려와 내 몸을 관찰하며 실험 대상 다루듯 여기저기 찔러보던 일은 오랫동안 병원 가기를 두려워하게 만들 정도로 강렬한 경험이었다. 대형 병원 시스템은 또 어떤가. 예약하고 가도 오래 기다리는 건 보통이고, 긴 기다림 끝에 의사를 만나도 진료 시간이 5분을 넘기는 경우가 드물었다.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의사 앞에서 잔뜩 준비해간 내 몸에 관한 질문을 삼켜야 했다. 나에게 병원은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 속 ‘율제병원’과는 너무 다른 공간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병원의 전면은 아닐 것이다. 우리 아빠는 오래전 모 대학병원에서 암 수술을 받고 5년 후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 이후로도 정기검진을 받으러 다녔는데 15년 넘도록 같은 의사가 진료했다. 몇 년 전 어느 날, 아빠는 그 선생님이 정년퇴임한다는 소식을 전하며 잠시 눈물을 훔쳤다. 아빠는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고 퇴임을 아쉬워했다. 아빠에게 그는 율제병원 의사와 같은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현실과 판타지 사이의 공간, 율제병원

어쩌면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저마다 의사에게 당한 불쾌하거나 부당한 경험, 병원이나 의료계에서 일어나는 여러 부정적 현실 위에 해맑고 무해하기만 한 판타지를 코팅해놓은 것 같은 드라마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병원’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상을 다루었음에도 이 드라마의 장르를 분류한다면 ‘판타지’가 어울리지 않을까? 그렇다면 마냥 ‘판타지’이기만 한 것일까? 그 판타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드라마가 단지 판타지로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걸 넘어서는 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이들을 돕기 위해 기꺼이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주는 선한 부자, 자신의 직무에 성실한 의사, 선의를 의심하지 않고 서로 존중하며 협력하는 관계, 생명을 살리는 일을 가장 우선에 두고 최선을 다하는 직업인의 세계를 보노라면 먼지 한 톨 없이 쾌적한 세상을 만난 것 같다.

얼마 전 시작한 시즌2는 시즌1과 비교해볼 때 등장인물과 서사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결을 보여준다. 시즌1에 비해 의사들의 (애정) 관계나 주요 인물들의 서사를 전면 배치하기보다는 한 걸음 물러나 병원 일상에 주목하여 환자와 그 가족들의 서사를 중심에 두었다. 그래서 병원이라는 시공간이 시즌1보다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무엇보다 마치 ‘천상계’에 사는 이들처럼 여겨졌던 선하기만 한 이들과는 다른 결의 의사들도 배치하여 선명한 대비를 이루게 한 게 특징이다.

2화에는 그토록 원하던 아이를 어렵게 임신했는데 갑자기 양수가 터져 입원한 산모의 이야기가 나온다. 산달이 아직 많이 남아 수술을 하면 사산할 수밖에 없는 상황. 먼저 진료를 본 주치의는 산모를 위해서라도 수술해야 한다고 냉정하게 말하지만, 산모의 절박한 심정을 이해한 양석형 선생은 아이가 자력으로 생존할 수 있는 주수(23주)를 채울 수 있도록 산모를 돕는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결국 사산하게 된다. 어떤 선택이 옳았는지는 각자 판단할 몫이지만, 양석형 선생은 산모를 최우선에 두며 그녀에게 잊지 못할 위로를 주었다. 이 에피소드에서 드라마는 냉정한 판단을 한 의사가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소 사무적으로 환자를 대하는 장면과 양석형 선생이 두 손을 모으고 정중하게 환자를 대하는 장면을 대비한다.

비슷한 맥락으로 시즌2에서 눈여겨볼 인물은 유일하게 ‘나쁜’ 의사로 나오는 흉부외과 천명태 선생이다. ‘공포의 3분 진료’로 유명하며 진료 시간에도 휴대폰을 보거나 불친절하고 고압적인 태도로 환자를 상대하기에 병원 내 기피 대상 1호다. 그러나 소위 ‘VIP’ 환자들에게는 충성을 다하는 속물적 의사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지만, 한편으로는 어딘가에 있을 현실적 의사, 즉 대부분의 시청자가 만나봤을 법한 의사를 표상하는 것은 아닐까? 드라마는 천명태 선생과 다른 ‘선한’ 캐릭터의 의사들을 자주 교차 배치하여 보여준다.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스틸컷

위로와 은혜를 넘어선 ‘지향’으로서의 드라마

이런 대비는 비록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다. 비로소 이 드라마 제목처럼 ‘슬기로운’ 의사는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즌1이 우리 예상을 벗어나는 상황을 통해 “모든 부자나 의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에요~”라고 해맑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면, 시즌2는 “우리는 이런 의사를 만나고 싶습니다!”라고 환자 혹은 가족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 같다고 할까? 그래서 이 드라마는 의사들이 보면 더 좋을 드라마다. 물론 검사나 변호사들이 법정 드라마를 못 보듯, 의사 입장에서 리얼리티가 떨어지고 오글거려 보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양석형 선생이 사산한 산모를 위로하기 위해 다시 교과서를 펼쳐든 것처럼 이 드라마는 ‘의사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넘어 ‘인간과 생명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나름대로 모범 답안을 내놓는다.

많은 이들이 이 드라마를 통해 느끼고자 하는 건 단지 위로만은 아닐 것이다. 화면 바깥에 존재하는 현실도 그랬으면 하는 바람을 공유하고, 현실 세계가 점점 상실해가는 미덕과 윤리를 그 ‘슬기로운’ 의사들을 통해서라도 만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천명태 선생이 아닌, 이익준·안정원·김준완·양석형·채송화 선생과 같은 의사들에게서 진료를 받을 권리가 있다. 또한 직장에서 ‘위인’ 채송화 선생과 같은 선배를 만나면 좋겠다. 이런 소박하지만 아득한 꿈을 꿔볼 수 있는 이 드라마를 단지 당도 높은 ‘판타지’로만 기억하고 싶지 않다.  

오수경
낮에는 청어람ARMC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드라마를 보거나 글을 쓴다.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이웃들의 희로애락에 참견하고 싶은 오지라퍼다. 함께 쓴 책으로 《을들의 당나귀 귀》 《불편할 준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