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지켜져야 한다
[370호 시사 꼬리잡기]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이하 ‘인천산선’)를 설립한 미국인 선교사 조지 오글(George E. Ogle, 한국 이름 오명걸) 목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쁜 소식, 즉 ‘복음’이 도시화한 세계, 산업화한 세계에서 어떤 메시지로 전해져야 할지 고민했던 사람이다. 인천산선의 이름도 그런 고민의 흔적이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눅 4:18-19, 새번역)
조지 오글 선교사는 이 말씀 위에 인천산선의 사역을 구축했다. 그는 농촌에서 도시로 올라와 주변부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도시 노동자들과 빈민들에게 주목했는데, ‘약한 것을 강하게’라는 말로 인천산선의 사역을 요약했다. 그가 1961년 9월 인천 화수동의 한 초가집에 ‘기독교도시산업선교회’라는 간판을 걸 때, 일대는 적지 않은 초가집이 띄엄띄엄 있었고, 그런 초가집을 이웃 삼아 작은 판잣집들이 지붕을 잇대어 촘촘히 이어졌다. 그 옆에 드문드문 기와집이 존재했으며, 그 너머로는 육중한 공장들이 병풍을 치듯 자리 잡았다.
이런 화수동 풍경은 당시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급격히 변화한 한국 사회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단면이었다. 화수동은 그야말로 도시화와 산업화를 압축해 보여주는 동네였다. 이곳에서 도시산업선교회를 시작한 이유는 산업화·도시화하는 세상 한 가운데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를 지향하려 한 것이다.
도시화·산업화 가운데 노동과 여성을 품다
어렵고 힘들고 가난했던 1960년대, 인천산선 설립 당시 여성들은 어린 나이에도 힘든 부모를 돕고 오빠와 남동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학교가 아닌 공장에 가야 했다. 실밥과 먼지로 가득한 작업장의 열악한 환경에서 눈을 비비며 일해야 했다. 지금 한국 사회의 경제적 여유는 이들의 희생과 무관하지 않다. 과거 공장에서 일했던 여성 노동자는 그 시절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당시 공장에서 일한 아이들처럼, 둘째 언니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돈 벌러 갔듯이 나도 그렇게 공장에 들어갔습니다. 꿈을 갖는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습니다. 내가 돈을 벌어야 남동생이 학교에 갈 수 있었으니까요.”
가족을 생각하면서 학교 대신 공장을 선택한 여성들에게 주어진 현실은 너무도 가혹했다. 저임금에 기초한 수출주도형 경제체제에 묶여 위험한 작업환경에서 비인격적으로 무시당했으며, 만성적으로 임금을 착취당하면서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소모적 인간으로 살아야 했다. 온몸으로 사회모순을 견뎌야 했다. 이런 여성들의 삶과 저항을 예수의 사랑으로 품고 성경의 예언자적 정의로 지지해주고 도와주던 곳이 인천산선이었다.
1970년대에 노동자들과 동고동락했던 인천산선 조화순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공순이·공돌이라고 무시당하고 비하하면서 살았는데, 왜 살아야 하는지 삶의 의미가 부여되면 정말 달라져. 표정부터 옷 입는 거까지 정말 달라져. 가치관이 달라지니까. 옛날에는 중학교 동창 친구를 만나면 집에서 논다고 말하고,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면 회사 다닌다고 그랬어. 공장 다닌다고 말하지 않고…. 그런데 의식이 바뀌니까 공장 다닌다고 떳떳하게 말하게 됐지. 노동자라는 긍지와 자부심이 생겨서. 이제 당당한 거야!” 조화순 목사는 계속해서 말했다. “누가 시켜서 그랬냐? 공순이들이 어떻게 학생 타입으로 변했느냐? 형사들이 그렇게 말을 했어요. 거기다가 동일방직은 동일대학이란 얘기도 있었어요. 거기만 가면 똑똑해진다고 했어요.”
무엇이 있었기에 ‘거기만 가면 똑똑해진다’는 말을 들을 만큼 노동자들이 달라졌을까. 그곳에는 ‘약한 것을 강하게’에 가치 지향점을 두고 노동자들과 함께한 인천산선의 사람들이 있었다. 조지 오글, 조승혁, 조화순, 김동완, 김정택, 황영환, 김근태, 최영희, 인재근, 김지선 등을 비롯한 수많은 노동운동가, 민주 인사가 그들이었다.
독재정권 탄압 가운데 인권을 품다
군사정권은 ‘인민혁명당 사건’을 빌미로 조지 오글 선교사를 강제로 추방했다. 1974년 12월 14일, 출국 비행기에 탑승한 조지 오글 선교사에게 한 장의 엽서가 전해졌다. “오글 목사님, 안녕히 가십시오. 저는 한 젊은이입니다. (제 이름을 쓸 수 없습니다.) 저희 대부분은 목사님께서 저희 나라의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일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저희 마음도 목사님과 함께 울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이름은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 제발 건강하십시오.” 엽서에는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담겨 있었다. 독재정권의 몰염치한 강제추방 폭거를 겪는 조지 오글 선교사에게 ‘결코 혼자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 민주 시민의 마음이 담겨져 있었다.
인혁당 사건은 1974년 중앙정보부가 유신 반대 투쟁을 벌인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을 수사하면서, 이들의 배후·조종 세력으로 인혁당재건위를 지목하고, 이 조직을 북한 지령을 받는 남한의 지하조직으로 조작한 사건이다. 관련자들은 국가보안법 및 대통령긴급조치 제4호 위반으로 기소되었으며, 대법원은 1975년 4월 8일 이들 중 8명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다. 8명은 판결 후 불과 18시간 만에 사형 집행을 받아 가족들도 모르게 죽임을 당했다. 국가가 무고한 국민에 대해 사법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박정희 정권 시기에 벌어진 최악의 인권유린 사건이었다. 스위스 국제법학자협회가 인혁당 사건 연루자들에게 사형이 집행된 1975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지정할 정도로 국내외적 반향이 컸다.
조지 오글 선교사는 인혁당 사건의 전모를 만천하에 공개하면서 무고한 이들을 구명하기 위해 힘썼다. 그들의 생명과 인권을 지켜주고자 했다. 인혁당 사건이 고문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렸고, 진실을 위한 투쟁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이 사건 때문에 중앙정보부에 강제로 연행당하고 결국 강제추방된 것이다. 조지 오글 선교사는 추방당한 후로도 미국 전역을 돌며 한국의 인권 실태를 알렸다. 한국인들의 인권을 신장하는 일에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 활동은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라는 성서 가르침을 따르는 순수한 정의 실천이었다.
조지 오글 선교사에게 엽서를 전한 젊은이의 바람은 지금 현실이 되었다. 한국 시민들은 지금 민주적 가치를 마음껏 누리며 살고 있다. 민주 대한민국은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조지 오글’이라는 이름을 한국 현대사에 기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20년 6월 10일 열린 6·10민주항쟁 제33주년 기념식에서 조지 오글 선교사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조지 오글 선교사가 2020년 11월 15일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한국의 각계각층 인사들은 깊은 애도와 감사를 담아 “한평생을 예수처럼 살다 가신 또 한 분의 의인이 소천하셨다”면서 그를 추모했다.
철거 위기에 놓인 인천도시산업선교회
한국의 도시화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평균보다 높다. 2010년 기준으로 85.4%로, 평균인 47.1%의 두 배에 가까운 수치다. 이는 단기간에 이뤄진 급속한 산업화의 결과다. 압축 성장으로 한국은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지만, 해결해야 할 많은 사회문제를 노출시킬 수밖에 없었다. 구조화된 경제 불평등, 고착화된 소득 양극화, 심화된 빈부 격차, 빈곤·차별·배제 문제, 지역·계층·세대·성별 갈등으로 이어지며 사회 공동체는 약화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도시화·산업화한 세계 속에서의 복음에 주목했던 조지 오글의 고민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런 조지 오글 선교사가 설립한 인천산선이 지금, 소실될 위기에 처해있다. 기독교 사회선교의 거점이자 한국 민주화의 산실이고, 민주 노동운동의 요람이며 또 다른 의미의 민주화 관련 산업 유산이기도 한 인천산선이 화수화평지구에서 진행되는 토건자본의 재개발 사업의 희생양으로 머지않아 철거될지 모르는 상황에 놓였다. 이에 인천산선이 소속된 기독교대한감리회와 90여 개의 인천 시민단체들이 일제히 ‘존치’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인천시, 인천동구청, 재개발조합에 진정서를 보내고, 공식 기자회견과 담당기관장 면담을 통해 존치 의견을 계속해서 전달하고 있다.
그럼에도 지난 7월 19일 인천시가 화수화평지구 재개발사업안을 승인하고 고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인천산선 철거가 가시화하기 시작하자, 4대 총무였던 김정택 원로목사가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김정택 목사가 벌인 30일의 단식농성, 필자의 10일 단식농성을 통한 항의에 이어 인천시민들의 자발적 릴레이 단식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기독교인·비기독교인 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인천산선 존치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인천산선 철거 위기는 역설적으로 인천산선의 존재 의미를 부각하고 있다. 1970-1980년대 당시 이루어낸 사회변혁의 성과를 다시 기억하기 시작했다. 권위적 사회체제를 민주적 사회체제로 바꾸어낸 역사를 소환하며 또다시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싶어 한다. 다양하고 교묘한 형태로 진화되어 구조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 자리한 부정의·불공정을 폭로하면서 더욱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가 구현되길 바라는 것이다. 인천산선이 전하고자 했던 복음은 땅끝까지, 모두에게 들려져야 할 하나님의 기쁜 소식이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지켜져야 한다.
김도진
인천도시산업선교회 8대 총무이자 미문의일꾼교회 담임목사. 1998년 담임목사로 부임한 이후 장애인 야학, 푸드뱅크 사업을 이어오고 있으며, 동일방직 노동운동사 등 한국 산업화 과정 사료(史料)를 모아 ‘도시산업선교회 기념관’을 준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