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다 계획이 있다
[370호 내 인생의 한 구절]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거울 속의 나에게 소리쳤다.
“왜 아직도 살아있는 거야?”
거울 속의 나도, 모진 말을 내뱉는 나도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줄은 몰랐으니까. 거울에 비친 나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나에게 철저한 타인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정신이 번쩍 든 것도, 어쩜 그 순간이었다. 오기로라도 살아남아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살아남았다. 1년하고도 8개월, 바이러스가 우리를 괴롭혀온 시간보다 조금 더 긴 시간, 훨씬 더 고통스럽게 나는 살아왔다. 지금까지는 그런 나를 감추느라 애썼는데 그럴 힘을 아껴서라도 이제 나는 살아야겠다.
우울의 심연에서
“어떻게 오게 되셨어요?”
목사고시 하루 전날이었다. 그만 처음부터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 자리에 와서 당신 앞에 앉기까지 수없이 고민했다는 말부터 꺼내야 할까, 거울 속 나를 만나고 왔다는 이야기로 시작해야 할까. 담당 교수님을 만나기 전 예진하는 거라고 했으니 이 사람은 3년 차 레지던트쯤 될까. 업무량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감정은 메말라 보였다. 나는 과거의 나를 ‘잘 통제된’ 사람이었다고 설명하다가 이제는 그 기능이 고장 나 버린 것 같다고 했다. 줄곧 질문만 건네던 그 선생님에게서 건조한 위로의 말 한마디를 듣는 것으로 예진은 끝이 났다.
“어떻게 해드렸으면 하세요?”
담당 교수님의 첫 마디에 두 번째로 말문이 막혔다. 병원에 가까워질수록 불안했고 진료실에 들어가서는 다리를 떨고 있었다. 그 병원만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정신건강의학과가 정문 바로 옆에 있다는 건 그날 처음 알았다. 그 문턱을 넘기가 어려울 사람들, 그 앞에서 여러 번 망설일 사람들을 위한 배려 같아서 고마웠다. 한참 동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로 끙끙대다가 겨우 찾아낸 말이 이랬다.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우울증약은 먹고 싶지 않다고 버티는 나에게 의사 선생님이 이런 말을 했다. “제가 불경한 이야기 하나 해볼게요. 확실히 알 수 없는 성경을 믿는 것보다 2~3주면 효과가 나타나는 제 말을 믿는 게 더 쉽지 않나요? 이 약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일 수 있잖아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의사 선생님은 목사고시를 하루 앞두고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나에게 축구선수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축구선수가 다친다고 다 축구를 그만두나요? 이건 쉽게 고칠 수 있는 병이니 치료받고 재활하면 되는 거지 하던 일을 그만둬야 하는 건 아니에요.”
그 얘기를 듣는데 가장 깊은 위로를 받은 듯 눈물이 났다. 우울증에 걸리면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거니 기도하라는 식의 이야기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한다는 말에 나는 그런 이야기를 제일 싫어한다고 했더니, 그럼 더 나 같은 사람이 목사가 되어야겠단다. 수납을 위해 키오스크로 갔는데 생전 처음 보는 ‘스님 전용’ 버튼에 당황했다. 그제야 그곳이 불교 재단에서 세운 병원이라는 걸 깨닫고 피식 웃고 말았다. 우울증은 종교와 신분을 가려서 오지 않고 누구든 걸릴 수 있으니 “쉽게 고쳐요”라는 말 한마디에 충분했던 하루였다. 목사고시 하루 전날, 나는 그렇게 정신건강의학과의 문턱을 넘었고 하나님은 그곳에도 계셨다. 1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자니 용기를 내준 그날의 나에게 참 고맙다.
살아갈 수 없는 중에도 삶은 계속되었다. 부상병이었지만 목사고시에 합격했고, 아시아 각국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민주주의와 평화를 논하며 수업을 들었고, 얼마 전에는 영어로 논문까지 썼다. 흔들리는 채로 불혹의 나이 마흔이 되어 뒤늦은 독립을 했고, 이제 ―한 번도 꿈꾸지 않았던― 박사과정의 출발선에 서 있다. 여전히 재활 중인 부상병인데 전액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으니 삶을 멈출 수 없다. 어떤 책에서 그랬다. 우울증에 걸렸을 때는 기도도 짧게, 말씀도 짧은 구절을 읽으라고. 그 말 덕분에 게으르게 말씀을 읽고 드물게 기도하는 나에게 다시 거울을 보면서 “그러고도 목사후보생이냐”라고 비난하는 걸 멈출 수 있었다. 그런 중에도 나는 계속 전도사였고 우울한 나를 감춘 채로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런 중에도 설교 준비를 위해 성경을 들었고 주석책을 펼쳤다. 그럴 때마다 말씀은 우울의 심연에 빠진 나를 구해주었다.
하루씩만 살아남자
기독교학, 신학을 전공한 나에게 사회과학은 영 낯선 분야였다. 게다가 영어로 수업을 들었기 때문인지 사회과학 분야의 논문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감이 오질 않았다. 사실 언어나 전공만 탓할 문제는 아니었다. 버거운 삶을 꾸역꾸역 이어온 탓에 수업에 집중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래도 거울 속의 나에게 비난만 했던 건 아니다.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내가 고마워’라고 토닥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아무튼, 영어도 부족했고 사회과학적 소양도 부족했고 삶의 의지는 더더욱 부족했던 까닭에 낯선 언어로 논문을 쓰기가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논문 제출일에 다가서던 즈음, 카페에서 마감에 박차를 가하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법무부 위촉 멘토로 활동하며(참 열심히도 살았다) 알게 된 재정착 난민 가정의 아이들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배가 아파요.”
‘Faster learners and Slower learners.’ 인문학도답게 내가 마감 중이던 논문의 제목은 일반적인 사회과학 논문 제목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화를 준 아이들 아빠는 언어습득이 빠르지 않은 ‘Slower learner’였고 “배가 아프다”라는 표현만으로는 어떤 상황인지 단번에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연거푸 전화가 끊어지는 걸 보고서야 나는 서둘러 가방을 챙겨 나왔고 난생처음 119에 전화를 걸어 구급차 지원을 요청했다.
20분 정도의 거리를 어떻게 운전해서 갔는지 모르겠다. 그때는 내가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다는 것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 자리에 내가 필요했고 구급차가 병원으로 출발하기 전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서둘러 액셀을 밟을 뿐이었다. 아내가 아직 퇴근 전이라 극심한 통증에도 남겨질 아이들부터 걱정하는 아빠와 어린 두 자녀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그 순간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삶의 의지로 충만해진 나였다. 급한 숨을 내쉬면서도 ‘살기 위해’ 안전히 차를 몰았으니 말이다.
복통의 원인은 급성 맹장염으로 밝혀졌다. 우여곡절 끝에 병원으로 옮겨졌고 다음 날 아침으로 수술 일정이 잡혔다. 카페에서 처음 전화를 받았던 게 저녁 7시 반 즈음이었는데 병실로 옮겨지는 걸 지켜보고 분실물 소동까지 겪느라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자정을 넘겨 집에 돌아오던 게 그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번 다른 재정착 난민의 담낭 제거 수술 때도, 요양원에서 투병 중이던 노모의 사망 선고를 받게 된 재정착 난민 가족들을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가던 때도 졸린 눈을 비비며 운전대를 잡았었다. 솔직히 처음 멘토로 자원했을 때만 해도 이분들의 이야기로 논문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연구자와 연구 참여자로 인터뷰를 하는데, 한 아이 엄마가 늘 많이 도와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얼른 되받아쳤다. “도와준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요. 가족한테는 도와준다는 말을 쓰지 않잖아요.”
그분들은 모를 거다. 내가 ‘하루씩만 살아남자’라고 생각하며 이 시간을 버텨왔다는 걸. 그런 중에도 가족처럼 함께 살아가는 당신들이 있다는 게 내 하루하루를 그나마 견딜 만하게 해주었다는 걸.
신학대학원 입시 때 암송해야 했던 성경 구절 개수가 몇 개였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100개는 훌쩍 넘기는 숫자였는데 그 많은 구절을 외웠는데도 기억이 흐릿해졌다. 삶의 구체적인 상황들 속에 새겨진 말씀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외운 것들이니 기억에 오래 남을 리가 없잖은가. ‘내 인생의 한 구절’이라니, 명색이 전도사인데도 당장 떠오르는 구절이 없었다.
그러다 희미하게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날은 둘째를 출산한 재정착 난민1) 가정에 줄 선물을 사러 기독교 서점에 들렀을 때였다. 푸른빛 십자가에 맘이 홀려 나에게도 선물을 주기로 하고 성경 구절을 고르기 시작했다. 색깔은 3가지 모두 푸른빛이라 마음에 들었는데 내 마음에 꽂히는(?) 구절이 오락가락했다.
쟁쟁한 구절들 앞에서 고민 끝에 잠언 말씀을 택했다. 박사과정에 덜컥 합격하고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던 나에게는 전조등처럼 길을 비춰주는 말씀이었다. 의지적으로 이 말씀을 붙들기로 했다. 한동안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채로, 계획을 세울 수도 없는 마음으로 하루씩 살아왔는데 돌아보니 ‘하나님에게는 다 계획이 있으셨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고 싶으면서도 치열하게 살아낼 자신이 없어 그만두고 싶기도 했는데, 내 걸음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옮겨지고 있다니 그 길에 순응하기로 했다.
맹장염 수술을 했던 재정착 난민의 아내에게서 며칠 전 “선생님, 임신 있어요”라는 문자메시지가 왔다. 바쁜 일들을 제쳐두고 산부인과에 가서 함께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듣고 태명을 지어줬다. 단번에 떠오른 이름이 ‘축복이’였다. 삶은 모두에게 축복이어야 하니까. 지금도 나에겐 별 계획이 없다. 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내 삶을 축복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걸음을 맡긴 채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1) ‘재정착 난민’이란 유엔난민기구(UNHCR) 추천을 받아 제3국 난민캠프에서 고국이 아닌 다른 국가로의 이주를 희망하는 난민을 심사한 뒤 받아들이는 제도로, 한국은 2015년 처음 시행했다.- 편집자
김혜미
‘호기심 가득한 야구광 김 씨’라고 소개되는 걸 즐긴다. 한 기독교 신문사에서 6년간 취재기자로 일했고 키르기스스탄의 아이들에게 직접 쓴 동화책을 선물하기도 했다. 김포의 한 교회에서 어린이부 전도사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