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해석은 어떻게 합의에 도달할까요?

[370호 성서해석, 어디까지 해봤나요] 성서해석에 대한 경제학자의 질문 2

2021-08-31     김재수

지식이란 무엇일까요? 사회과학은 많은 관측치 사이의 패턴을 찾고, 중요 변수 사이의 관계를 지식이라 부릅니다. 패턴을 발견하지 않고 서로 관계가 있는 듯이 말하는 것은 ‘아무 말 대잔치’입니다. 예를 들어, 평소 여성 경영자의 능력에 불평을 갖는 이가 ‘여성 경영자는 무능하다’라고 말한다고 합시다. 이것은 단 하나의 관측치에 기반하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지식이 아니라 아무 말입니다.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기업을 살펴보고, 여성 임원 비율과 기업 성과 사이에 패턴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이제 여성 경영진 참여 비중이 높은 기업일수록 이윤 및 주가가 낮다는 패턴을 발견했다고 합시다. 높은 여성 임원 비율과 낮은 이윤이라는 지식을 바탕으로 남성의 경영 능력 우월성을 주장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이런 식의 주장은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오해하기 때문에 벌어집니다. 상관관계는 하나의 지식이지만, 모든 지식이 유용하지 않습니다.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구분하지 못하면, 지식은 무용하거나 오해를 낳기 쉽습니다.

인간은 상관관계를 인과관계처럼 생각하는 인지적 편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인과관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반사실적 사고를 통해 의심해야 합니다.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또 다른 원인이 동시에 작동하지 않았을까?’라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기업 이윤이 줄어들 때, 여성 임원 승진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높은 여성 비중 때문에 이윤이 낮아진 것이 아닙니다. 기업이 경영 위기에 처하면서 여성 임원 비율이 높아진 것입니다. 또 다른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여성의 임원 승진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에 경제 불황이 왔을 수도 있습니다. 경제 불황 시기를 따로 떼어놓고 보았더니, 여성 임원 비율이 높은 기업이 그렇지 않은 기업에 비해 더 작은 이윤 감소 폭을 보였다고 합시다. 이런 경우라면, 비록 이윤은 줄었지만 여성의 경영 능력이 더 뛰어났다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사회과학이 어떻게 유용한 지식을 탐구하는지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습니다. 많은 관측치에서 패턴을 찾고,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구분하는 것이라 요약할 수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사회과학은 아무 말 대잔치를 하지 않고, 섣불리 결론으로 뛰어들지 않는 사고방식입니다. 이런 식의 훈련을 받은 사회과학자가 흔히 유통되는 설교와 성서해석을 대하면 어떤 논평을 할까요?

성서해석은 과학보다는 예술

첫째, 어떤 사안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 또는 ‘성서적 입장’이라는 주장을 접할 때마다, 관측치가 지나치게 적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어, 동성애에 대한 성서의 입장을 알아보자고 했을 때, 성서가 동성애를 직접 언급하는 대목은 몇 개 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단 몇 개의 관측치에서 패턴을 찾아냈다는 과감한 주장을 볼 때마다 깜짝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상관관계로부터 인과관계를 분리하지 않고 결론으로 뛰어들 때가 많습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소돔과 고모라 심판을 동성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 상관관계일지도 모르는 사건을 마치 인과관계인 듯 확신합니다. 인과관계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반사실적 상황과 다른 원인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꼼꼼하게 따져야 합니다. 실제로 성서에서 언급된 동성애 관련 구절은 문맥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습니다. 이는 인과관계 증명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성서가 여러 형태의 문학 장르로 기록된 역사인 점을 생각할 때, 사회과학의 사고방식을 성서해석에 적용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관측치도 적고 반사실적 상황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서해석이 실증과학처럼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어떤 사안에 대해 ‘성서적 입장’을 말하는 이들이 성서를 마치 실증과학처럼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서해석은 과학보다는 예술에 가깝지 않을까요? 관측치가 적다 보니,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많습니다. 보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패턴을 상상해낼 수 있습니다. 여러 입장이 공존하는 이유입니다. 동시에 모든 패턴이 불완전합니다. 만약 실증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방식으로 서로 다른 해석을 평가한다면, 거의 언제나 반례와 난제를 들 수 있습니다. 실증과학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단 하나의 옳은 성서해석도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성서해석의 주요 과제는 충분히 그럴듯한 패턴을 상상해보는 것입니다. 누가 더 근사한 해석, 더 예쁜 옷을 입힐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런 식으로 성서해석에 접근하면 서로가 찾아낸 다양한 패턴이 아름답다고 평가해줄 수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기 취향이 아니라고 하면 됩니다.

물론 나쁜 성서해석은 분명하게 존재합니다. 몇 안 되는 관측치마저 무시하거나 배반하는 해석입니다. 교조주의적 해석, 협소한 신학적 입장에 갇힌 해석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안타깝게도 보이는 것을 전부로 생각하는 인간의 인지적 편향은 작은 수의 관측치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인 인과관계를 주장하는 나쁜 성서해석을 쉽게 받아들입니다.

‘바른 해석’과 ‘스토리’의 관계 

《비폭력 대화》(한국NVC센터)의 저자인 마셜 로젠버그에 따르면, ‘비폭력 대화’는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유하는 이유 없이 내게 화를 냈다” “하원이는 넷플릭스를 너무 많이 본다” 같은 표현에는 이미 평가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이유 없이’는 추측이고, ‘화를 냈다’도 관찰이라 할 수 없습니다. ‘주먹으로 탁자를 쳤다’가 관찰입니다. ‘너무 많이 본다’도 ‘하루에 다섯 시간 동안 본다’로 진술되어야 관찰입니다. 폭력적 대화는 관찰과 평가를 분리하지 않지만, 비폭력 대화는 관찰과 평가를 분리합니다.

경제학의 표현 방식은 비폭력 대화의 가르침과 묘하게 닮았습니다. 경제학 연구방법론은  ‘실증적 명제’와 ‘규범적 명제’를 구분하라고 가르칩니다. 실증적 명제란 ‘~이다’라는 관찰적 진술입니다. 어떤 경제정책이든 양면성을 지니기 때문에, 비용과 편익을 있는 그대로 분석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이 어느 정도 오르면 어떤 시장 조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진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실증적 명제는 사실에 관한 것이므로 입증되거나 부인될 수 있습니다.

규범적 명제란 ‘~해야 한다’라는 평가적 진술입니다. 예를 들면, ‘최저임금을 얼마만큼 올려야 한다, 올리지 않아야 한다’와 같은 주장입니다. 규범적 명제는 연구자의 선호와 가치관에 따라 달라집니다. 최저임금 인상 효과에 대한 정확한 사실관계를 공유한다고 해도 연구자마다 평가를 달리 할 수 있습니다.

경제학 내에서의 토론은 언제나 실증적 명제로 시작합니다. 사실관계 및 사실확인에 바탕하고 있으므로, 서로 의견이 다른 이들이 왜 달리 생각하는지를 합리적이고 명확하게 의사소통할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의견 차이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다름’의 문제라는 것이 대화에서 잘 드러납니다.

경제학 토론과 달리 성서에 관한 토론은 실증적 진술과 규범적 진술이 구분되지 않고 뒤섞여 이뤄집니다. 규범이 실증을 압도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설교자는 성서의 이야기 그 자체를 전달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바른 해석(규범적 진술)을 청중이 받아들일 것을 요구합니다. 비폭력 대화의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다면, 많은 이들은 성서의 스토리를 폭력적으로 말하고 듣기를 좋아합니다.

저는 성서에 담긴 이야기를 참 좋아합니다. (싫어하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스토리 그 자체를 좋아합니다. 예수의 달란트 비유가 능력주의를 지지하는 방식으로 해석되든, 당당한 을의 저항으로 해석되든, 종말론적 삶을 살라는 요구로 해석되든, 일단 달란트 비유가 재미있고 좋습니다. 아직 해석이 이루어지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달란트 비유를 좋아합니다. 종들에게 서로 다른 액수의 돈을 나누어주는 것, 종들이 다르게 행동하는 것, 주인의 평가가 종들의 성과에 따라 달라지는 것, 한 달란트 받은 이가 저주를 받는 것, 이 스토리 자체가 참 재미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통해 말했다는 사실도 너무 재미있습니다.

반면 어떤 이들은 ‘스토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해석’을 좋아합니다. 실증적 진술을 생략하고 규범적 진술로 뛰어듭니다. 제가 〈청소년 매일성경〉에 쓴 비유 해석이 논란을 낳았던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들이 비유 장르에서조차 바른 해석이라는 규범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성서는 스토리 모음이 아니라 핸드북이나 규범집처럼 사용됩니다. 성서를 질문하고 씨름하는 안전한 장소가 아니라, 믿고 순종해야 하는 엄숙한 장소로 여기는 것입니다.

해석 공동체일까, 이야기 공동체일까

경제학자의 관점으로 성서해석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세 가지 단상을 써보았습니다. ①신학은 성서해석을 위한 생각의 틀이고, 다름을 이해하는 방식이어야 할까?(하지만 신학을 불변의 법칙처럼 여기고 성서해석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를 좋아한다.) ②성서를 실증과학처럼 읽을 수 있을까?(하지만 성서를 실증과학처럼 읽는다.) ③성서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좋아할 수 있을까?(하지만 정답이 있는 규범책처럼 읽는다.)

제가 쓴 ‘청매’ 비유 칼럼 때문에 발생한 성서해석 논쟁은 기독교 공동체에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던졌습니다. 과연 우리는 서로 다른 해석이 존재할 때 어떻게 합의할 수 있을까요? 사회과학자로서 제가 성서해석에 대해 제기한 세 가지 질문은 ‘왜 우리는 꼭 합의에 도달해야 하는가’라는 역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합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성서를 불변의 법칙, 실증과학, 규범 모음집으로 간주하는 데서 비롯된 것 아닐까요?

가족들과 옛날이야기를 나누면, 다들 조금씩 다르게 기억합니다. 해석의 차이는 더 큽니다. 유일하게 바르고 타당한 단 하나의 해석을 찾아야 할까요? 서로 다른 해석을 허용하면, 추억은 아무렇게나 왜곡되고, 가족은 해체되고 말까요? 가족은 똑같은 해석을 공유해야 하는 해석 공동체일까요?

우리 가족은 이야기 공동체입니다. 누구는 즐거운 순간으로, 누구는 창피한 순간으로 해석하지만, 같은 추억을 모두가 소중하게 간직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잘 지냅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서로 안 싸우고 더 잘 지냅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해석 공동체여야 할까요, 이야기 공동체여야 할까요?

김재수
미시간 주립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2009년부터 인디애나 퍼듀 대학교에서 미시경제학, 가격과 시장 이론 등을 가르친다. 지은 책으로는 《99%를 위한 경제학》 《시장, 세상을 균형 있게 보는 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