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다리를 건넌 우리 강아지,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370호 무브먼트 투게더]

2021-08-31     황병구

삥코와 함께한 9년

삥코를 처음 만난 때는 9년 전인 2012년이었습니다. 아무 연고 없는 춘천으로 거처를 옮겼던 해였지요. 첫아이는 중3과 고1 사이의 ‘쉼이 있는 청소년 갭이어’를 경험했고, 둘째 아이는 춘천 근교 초등학교로 전학하면서 몇 가지 버킷리스트를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중 하나가 강아지를 기르는 일이었지요. 아빠 엄마가 적극적이지 않자 둘째 아이는 당시 EBS 〈동물일기〉의 유기견 입양 프로젝트에 응모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우리 가족 모두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3살 정도인 퍼그와 페키의 잡종견을 입양하게 되었지요.1)

삥코라고 이름 지은 이 녀석은 유기견이었습니다. 오래도록 겪은 피부병으로 털도 정상이 아니었고, 식변증이 있었습니다. 길에서 얻은 뇌전증으로 한 달에 한 번 정도 심한 경련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기도 했지요. 아이들은 삥코를 동생처럼 돌봤습니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던 첫째는 삥코와 거의 종일 일과를 같이하곤 했어요.

사진: 필자 제공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로 1년 반을 춘천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아이들의 사춘기를 함께 보냈고요. 춘천에서는 산책도 자유롭고 집도 널찍했지만 서울에서는 아파트에서 지내게 되면서 삥코는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아이들도 어느새 다 자라 바빠진 하루를 보냈기 때문이지요.

긴 시간을 함께하면서 삥코는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뇌전증으로 인한 발작과 경련의 빈도가 늘어나고 줄어드는 일도 반복되었고요. 작년 들어서는 산책을 시킬 때마다 눈에 띄게 몸이 무거워 보였습니다. 저는 살가운 애정표현이 서툰 아빠들처럼 그저 엄격한 훈육 담당이었지만 나름 반려가족들의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역할을 맡았지요. 차량을 동원해야 하는 병원 일정과 복약지도를 챙기고, 발생하는 온갖 비용들을 감당했습니다.

사진: 필자 제공

삥코의 장례를 치르다

하지만 올해 2월 1일. 삥코는 우리 가족의 기대보다 일찍 곁을 떠났습니다. 그즈음 잘 먹지 못하고 열도 나고 특정 부위가 부어오르는 증상을 보였지요. 병원을 오가면서 치료에 집중했지만 만성질환에 따른 신장과 간 손상으로, 정밀검사를 한 지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돌봐주던 아이들 품에서 숨이 멎었기에, 두 아이의 슬픔이 생각보다 컸고 또 오래갔습니다. 평소 보살피는 일을 거의 도맡아 챙겨온 아내도 망연자실했지요. 집에 있는 사각 티슈가 동이 났습니다. 저 역시 한참이나 먹먹했지만 침착함을 다시 찾았습니다. 반려견 장례업체를 통해 가족들과 화장을 진행했지요.

장례를 마치자 아이 주먹만 한 유골함이 소박하게 남았습니다. 첫째 생일인 5월 1일, 온 가족이 함께 춘천을 방문해 주향교회 화단에 삥코를 묻어주었지요. 삥코가 처음 집에 와서 자주 산책하며 놀던 곳이었습니다. 담임목사님과 친구였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요. 눈물을 멈추지 못했던 아이들은 장례 때 ‘삥코 덕에 우리가 행복했다’고 작별의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2월 1일부터 둘째의 생일인 2월 19일 사이를 ‘삥코절’이라고 칭하면서 매년 기념하기로 했지요. 선물같이 우리 집에 찾아왔던 때를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삥코의 유골함과 꽃다발. (사진: 필자 제공)

하나님 형상을 지녔다는 것

삥코도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후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며 이런 바람을 나누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문득, 오래전 헨리 나우웬이 장애인 공동체에서 깨달아 나눈 몇 가지 가르침이 떠올랐지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어떤 능력이나 자격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대상, 즉 존재론적 정체성이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다는 것은 모종의 기능이 아닌 ‘관계’ 측면에서 정의해야 하고, 신체, 인지능력, 정서의 됨됨이, 사회적 역할 가능성 여부를 떠나 각 존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임을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고요.

아내와 아이들도 동의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 형상을 지닌 이들이고, 우리와 사랑을 나눈 생명 있는 존재들 역시 그 형상의 일부를 확장해서 덧입는 셈이라고요. 어쩌면 하나님께서 그 관계를 언젠가 다시 이어주시는 것을 허락하실 수도 있으니, 그런 기대는 합당하다고요.

사진: 필자 제공

이런 이야기를 짧게 제 페이스북 담벼락에 올렸지요. 많은 반려가족들이 위로를 받았다며 댓글을 달았습니다. 또 CBS 〈잘잘법: 잘 믿고 잘 사는 법〉 임지은 프로듀서에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반려동물을 잃고 펫로스 증후군으로 상심과 우울을 겪는 분들이 관련 콘텐츠를 제작해달라는 요청을 많이 한다며, 페북에 쓴 내용을 풀어서 전해달라는 각별한 부탁이었습니다.2)

영상이 업로드된 이후, 큰 위로를 받았다는 반려가족 크리스천들의 댓글이 봇물처럼 달렸습니다. 다행스러웠고 보람도 있었지요. 여러 경로를 통해 8만 명 정도의 분들이 이 내용을 접한 듯합니다. 반대로 인간의 존엄성에 도전하는 비성경적인 주장이자 상상이라고 하는 근본주의 시각의 비판들도 만만치 않았지요. 영상에서 제가 〈복음과상황〉 이사장으로도 소개되었기에 ‘자유주의 좌파신학자’로 몰리기도 했고요.

실제로 기성 교단 목사님들이나 신학 교수님들은 ‘세상을 떠난 반려동물을 이후에 다시 만날 수 있을까?’라는, 괜한 논란이 예상되는 민감한 주제를 다루기를 저어하셨습니다. 그래서 논란이 덜할 듯한 일반 성도인 저한테까지 요청이 온 것입니다. 신학적 해석이 아니라 목양적 위로로 여겨지길 바랐지요. 그럼에도 굳이 논란과 시빗거리로 만들고 싶어 하는 분들도 계셨던 것 같습니다.

동물들의 영혼에는 미래가 없다?

‘동물들의 영혼에는 미래가 없다’고 판단하며 즐겨 인용되는 구절이 있지요. 전도서 3장 21절입니다. 그러나 본뜻은 그 판단과 반대되는 강한 부정임을, 다음 세 가지의 번역본을 비교해보면 금세 파악할 수 있답니다.3)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개역한글)
사람의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땅속으로 내려간다고 누가 입증할 수 있겠는가?(현대인의성경)
사람의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아래 땅으로 내려간다고 하지만,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새번역) 

또한 제가 영상에서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헨리 나우웬의 《영성에의 길》(IVP)을 읽으면서 내용 구성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형상으로서 인간됨은 지성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다는, 즉 생각하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하는 능력에 있다는 선명한 가르침이었지요. 목양적 위로였기에 제 영상 내용에서는 신학적 논증에 힘을 기울이지는 않았습니다. 더 정밀한 내용을 원하시는 분은 구약학자 전성민 교수님의 저서 《세계관적 설교》(성서유니온) 18장 ‘동물: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을 읽어보시거나, 이 내용을 따로 정돈해주신 전 교수님의 페이스북 포스팅4)을 참고하셔도 좋겠습니다. 아울러 영상에서 직접 다루지는 못했지만 C. 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홍성사) 9장 ‘동물의 고통’에 담긴 내용들은 제 목양적 위로를 공격했던 경박한 신학과 사상적 편향을 부끄럽게 하기에 넉넉한 성찰들입니다.

위로가 없는 기독교라면

감히 돌이켜보면 제가 출연을 부탁받아 감당했던 일,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제 신학적 사고를 변증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더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삥코의 반려가족 아빠로서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아이들보다 정서적 유대나 애틋함도 적었지요. 그래서 미안함과 아쉬움도 있지요. 다만 보호자로서 도리를 다하려 했습니다.

말 못하던 동물이었지만 그 생명이 끝나는 곳에서 통곡하는 아이들을 보며, 눈물을 그치지 못하는 아내를 보며, 제가 느끼는 슬픔 너머 사랑하는 이들의 상실과 결핍을 위로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더 살뜰히 헤어짐의 과정을 챙기고도 싶었습니다. 제가 가진 작은 신앙의 원리들을 마음에 담아 조금이라도 위로하고 회복할 수 있는 이야기를 건넨 것이었지요.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저 역시 위로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곁에 살아있지 않지만 수많은 사진과 영상, 기억으로 존재하는 삥코가 제게 괜찮다고, 고맙다고 말하는 것 같았달까요. 우리 가족은 팔복의 신비처럼 애통과 긍휼과 위로의 순환을 경험했습니다.

증오 가운데에서는 논쟁에서 승리하더라도 결코 상대방의 정치적 입장은 바뀌지 않고, 멸시 가운데에서는 변증으로 제압하더라도 결코 듣는 이의 신앙적 입장이 바뀌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또 위로가 없다면 기독교의 신학적 진리와 사상은 아무 능력이 없겠지요. 복음이 상황을 만나는 지점에서 결국은 사랑과 위로가 전해지지 않을까요.

■ 각주

1) youtu.be/9ngDEkv9ICg?t=139
2) 방송인의 고충도 알고 있었고 방송사에 지인도 많았던 저는 마지못해 응낙했고, 고민 끝에 마련한 원고로 제작된 영상은 다음 링크에 있답니다. youtu.be/L_V5I7I6dps
3) 이 내용을 자세히 다룬 영상도 있어서 소개해 드립니다. www.youtube.com/watch?v=dyKIYhE744s
4) www.facebook.com/sminchun/posts/10225668356198279


황병구
심각한 수준의 공학 전공자였으나 뜻한 바가 있어 선교와 문화사역으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경영학을 공부하고 비영리 공익재단 본부장을 거쳐 지금은 IT 스타트업의 CEO이다. 〈복음과상황〉에서는 필자와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는 이사장으로 힘을 보태고 있다. 최근에는 ‘각종문제연구소 소장’이라는 닉네임으로도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