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을 바꾸는 평범한 사람들
[370호 오수경의 편애하는 리뷰]
고백하자면, 월드컵이나 올림픽 같은 국제 대회를 챙겨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 기간 동안 즐겨 보던 드라마나 예능이 줄줄이 ‘결방’되는 일에 소심하게 분노하는 편에 속한다. 축구팬과 야구팬들이 주변에 많지만 그들의 희로애락에 부화뇌동하지도 않는다. 한때는 농구 직관을 즐긴 적도 있었으나 그것과 무관하게 된 지 오래다. 그런 내가 올림픽 경기를 챙겨 보다니! 그것도 울면서 보다니! 나라 전체가 들끓었던 ‘2002년 월드컵’ 때도 경기를 보며 “대한~민국!”을 외치는 대신 조용히 드라마를 봤던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판’을 바꾸는 평범한 선수들
얼마 전 막을 내린 ‘2020 도쿄 올림픽’은 차별과 금기에 도전한 ‘성평등 올림픽’으로 기록될 만하다. 우선 남녀 선수 성비 균형(51:49)을 맞춘 첫 번째 올림픽이다. 여자 선수뿐 아니라 역대 최다 성소수자 선수(168명)가 참가한 대회이기도 하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이에 맞춰 선수들이 무지개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출전하는 것을 허용했다. 독일 여자 체조 국가대표팀처럼 노출이 많아 성적으로 대상화하기 쉬운 유니폼 대신 안전하고 편한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 선수들도 있다. 그리고 최초로 트랜스젠더 여성인 뉴질랜드 역도 국가대표 선수 로렐 허버드가 올림픽에 출전했다. 이 최초의 사례는 과학과 인권 분야의 최신 연구 정보를 포함한 새 트랜스젠더 가이드라인의 필요성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판을 바꾸는 것도 모자라 아예 판을 만든 여성들도 있다. 영국 여자 사이클 국가대표 선수 베서니 슈리버는 영국 정부가 ‘여자 선수는 메달을 딸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예측하여 여자 사이클 선수들에게 재정 지원을 전혀 하지 않은 데 굴하지 않고, 크라우드 펀딩으로 출전해 금메달을 땄다. 우리나라 여자 양궁 국가대표 안산 선수도 마찬가지다. 성차별주의자들의 온라인 폭력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판 위에서 최선을 다해 최초의 양궁 3관왕이 되었다. 선전에 선전을 거듭하며 감동적인 드라마를 만든 여자 배구 국가대표팀도 빼놓을 수 없다. 올림픽을 치르기 전에 터진 각종 악재를 극복하고 4위를 기록했다. 애초에 메달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들의 성취는 오직 자신들의 것이었다.
우리 사회가 이제야 비로소 ‘2002년 월드컵’의 영광에서 벗어나 ‘2021년 올림픽’으로 한 세대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면에서 이번 올림픽은 의미가 있다. 그동안의 국제 대회가 국가 간 경쟁을 부추기며 메달과 순위 경쟁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통한의 은메달’ ‘아쉬운 동메달’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고개 숙이며 국민들에게 죄송해하는 선수들이 없었던 최초의 올림픽이 아니었을까? 대신 “잃을 게 없어서 그냥 즐겁게” 뛰고, “생각했던 목표 그 이상을 이뤄내서” 만족하고, “아직 어리니까 더 많은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고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성장”하겠다며 밝게 웃고, SNS를 통해 팬들과 소통하는 선수들이 남았다. 1등이 주목받고 승리가 목표인 세계에서 결과와 무관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순간들을 누릴 감각을 지닌 세대가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번 여름에 유난히 많이 들었던 말은 “괜찮아”와 “잘했어”다.
새 세대가 만들어낸 ‘괜찮아’ ‘잘했어’의 세계
다양성을 존중하고, 그에 맞춰 판을 바꾸고, 결과와 상관없이 무대 자체를 즐길 줄 아는 감각은 대중문화를 통해서도 형성되고 있다. ‘땅끝마을’ 해남서중 배드민턴 선수단을 중심으로 한 SBS 드라마 〈라켓소년단〉은 스포츠 성장 서사의 문법을 충실하게 따르되, 몇 가지 차별점이 있다. 제목이 비록 라켓‘소년단’이지만, 여성 캐릭터들이 남성들의 성장을 돕는 보조 역할에 머물지 않는다. 즉 ‘치어리더’에서 벗어나, 남자 감독이나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과 서로의 성장을 도모한다. 주인공 윤해강이 배드민턴을 시작하는 계기가 단지 ‘와이파이’ 때문이듯 이들의 목표는 ‘소체(소년체전) 출전’이지만, 이기고 지는 것에 자신을 소모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오늘과 싸운다”는 청소년 국가대표 숙소에 걸려있는 문구처럼 개인의 성장과 그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에 초점을 맞춘다.
SBS 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도 마찬가지다. 말 그대로 ‘골’을 때리고자 애쓰는 여성들의 거친 숨소리와 흠뻑 젖은 땀과 승부를 넘어서는 격려와 연대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배우, 희극인, 모델, 전직 국가대표 선수거나 선수의 가족이라는 정체성은 이 프로그램에서 잠시 접어두고 ‘축구선수’라는 ‘본캐’로서 최선을 다한다. 예능인지, 스포츠 중계인지 헷갈릴 정도다. “여자에겐 언제나 운동장의 9분의 1쯤만이 허락”되어 왔다는 작가 이다혜의 말처럼, 〈골 때리는 그녀들〉은 기울어졌던 운동장에서 마침내 운동장의 전부를 차지한 ‘운동하는 여성들’이 본격 등장했다는 면에서 의미가 크다.
누군가는 ‘여자 배구가 반짝 인기를 끈다고 판이 달라지겠어?’ ‘이런 프로그램 하나 생긴다고 뭐가 달라지겠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소개한 대로 ‘판’을 바꾸는 새로운 세대가 출현하였기에 앞으로의 세계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한 사람에게 어떤 운동 하나가 삶의 중심 어딘가에 들어온다는 것은 생각보다 커다란 일이었다. 일상의 시간표가 달라졌고 사는 옷과 신발이 달라졌고 몸의 자세가 달라졌고 마음의 자세가 달라졌고 몸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가 달라졌다”는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민음사) 저자 김혼비의 고백처럼, 어떤 장면들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다르게 형성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탄이 되기도 한다. 〈라켓소년단〉 속 윤현종 코치의 말처럼 “1등과 2등이 경기를 지배한다지만 판을 바꾸는 건 평범한 선수들”이기 때문이다.
오수경
낮에는 청어람ARMC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드라마를 보거나 글을 쓴다.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이웃들의 희로애락에 참견하고 싶은 오지라퍼다. 함께 쓴 책으로 《을들의 당나귀 귀》 《불편할 준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