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악이 폭로되는 자리
[371호 커버스토리]
한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오페라 가수가 되고 싶었다. 그 꿈은, 어쩌면 동경에 가까웠다. 으리으리한 집, 멋진 피아노 앞에서, 전직 오페라 가수였다는 친구 엄마가 부르는 아리아를 들으며 소녀는 오페라 가수를 동경했다. 하지만 소녀에게는 음악적인 재능이 없었다. 공부를 곧잘 했지만, 아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공부에 특출한 재능이 없으면 대학을 꿈꾸지 않던 시절이었다. 소녀는 중학교를 1년 다니다 중퇴했다.
소녀는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녀의 두 번째 꿈은 직장인이 되는 것이었다. 소녀의 눈에는 사무실에 나가는 여성들이 근사해 보였다. 이 꿈은 실현 가능해 보였고, 부모님도 지지해주셨다. 그렇게 소녀는 직장인이 되었다. 직장은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멋진 동네에 있었다. 작은 사무실이었고 수습 직원이었지만, 사무실에 나가 일한다는 사실 자체가 좋았다. 소녀는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일했다. 근면함은 그녀의 천성 같은 것이었다. 열심히 하다 보니 좋은 조건으로 이직할 기회도 생겼다. 몇 번의 이직이 있었고, 그사이 소녀는 어엿한 성인이 되었다. 그녀는 어디를 가든 성실하게 일했다. 돈을 벌어 가족의 생계를 돕고, 맡은 일을 완수한다는 사실에 그녀는 소소한 기쁨을 누렸다.
어느 날 그녀에게 새로운 도약의 기회가 찾아왔다. 지인의 소개로 방송국에서 사무직 업무를 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방송국은 매력적인 직장이었고 보수도 이제껏 일했던 어느 곳보다 좋았다. 단, 그 방송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특정 정당에 가입해야 했다. 정당의 기조에 동의하는 건 아니었지만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정치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도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방송국 직원이 되었다.
방송국에서 그녀는 자신의 재능을 꽃피웠다. 그녀는 누구보다 속기를 잘했고 당시 방송국에서는 그런 그녀의 재능이 유용하게 쓰였다. 그녀는 곧 그 방면에서 인정받았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는 멋진 날들이 이어졌다. 물론 매일 신나는 일만 있지는 않았다. 나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녀의 나라는 이전에 전쟁을 겪었고 또 한 차례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회가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오늘날처럼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없었고 그나마 접하게 되는 정보는 제대로 된 소식이라 할 수 없었다. 더 적극적으로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해외 뉴스를 뒤져야 했다. 그건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아무리 신나던 일도 익숙해지면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방송국 일에 대한 열정이 사그라들던 어느 날 그녀에게 다시 좋은 기회가 생겼다. 속기에 관해서는 탁월하기로 정평이 났기에 찾아온, 흔치 않은 기회였다. 나라의 고위직 간부와 일을 할 기회. 그녀가 할 일은 간단한 서류 업무, 속기 업무였지만, 보수는 방송국에서 일하던 때보다 훨씬 좋았다. 그녀는 그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승낙했다. 그렇게 그녀는 고위직의 비서가 되었다. 언제나처럼 그녀는 성실하게 일했다. 대체로는 평범한 일들이었다. 가끔 기밀 서류를 다루기도 했지만, 내용을 보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그녀는 약속을 잘 지켰다. 그녀는 자신이 맡은 바를 성실하게 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이 있었다. 그녀의 하루하루는 지극히 일상적이었고 비교적 평온했다.
하지만 이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전쟁은 막바지에 이르렀고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아주 좋은 직장이었던 그녀의 일자리는 이제 위험한 곳이 되었다. 패전을 감지한 이들이 무단으로 직장을 이탈했다. 그녀에게도 직장을 떠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도망치지 않았다. 책임감이 강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걱정하는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서 그녀는 직장으로 갔다. 결국, 그녀의 나라, 그녀의 조국은 전쟁에서 패했다. 이로써 그녀의 직장은 사라졌다. 그녀의 상사이기도 했던 지도자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는 망연자실하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 곁을 지켰다.

소녀의 이름은 브룬힐데 폼젤(Brunhilde Pomsel, 1911-2017), 괴벨스1)의 비서였으며 히틀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 지하 벙커에 함께 있던 이들 중 한 사람이다. ‘독일’ ‘제2차 세계대전’ ‘나치’라는 이름을 지우면 그녀의 삶은 의아할 만큼 평범하다.
폼젤은 히틀러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정복자의 야망 같은 것은 없었다. 그녀는 유대인이나 공산주의자를 혐오하는 사상에 동조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회사원이 되어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꿈을 가진 소시민이었다.
폼젤은 괴벨스도 아니었다. 그녀는 대중을 선동하는 일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대중을 선동하는 집회에는 거부감을 느끼는 쪽이었다.
폼젤은 하물며 아이히만2)조차 아니었다. ‘악의 평범성’의 대명사처럼 되어있는 아이히만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500만 유대인을 열차에 태우는 일’에 실제적으로 가담했다. 이에 비해 폼젤은 유대인을 학살하라는 명령에 직접 관여하거나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한 일이 없었다. 폼젤이 한 일은 그저 단순한 서류 작성과 속기 업무였다. 하지만 그녀는 히틀러의 이너서클에 매우 가까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그녀가 ‘단순한 서류 업무’라고 믿었던 일은 어쨌든 나치가 자신의 조직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그녀는 나치 이념에 동조하지 않은 채로, 아주 조용히, 내부자의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것이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폼젤이 선전부에 들어가게 된 것을 온전히 그녀의 ‘선택’으로 보기도 힘들다. 당시 독일 사람들에게 나치의 ‘제안’은 ‘명령’에 가까웠고,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목숨을 잃을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물론 폼젤은 에디트 슈타인3)이나 본회퍼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히틀러도 괴벨스도 아이히만도 아니었다.
당시 나치는 언론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정부는 유대인들을 잘 대해주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정부가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을 ‘보호’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유대인들이 곤경을 겪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전란 중에 가게를 닫고 피난을 가거나 고통을 겪는 이들이 그들뿐만은 아니었다. 폼젤은 유대인에 대한 적의를 가진 이가 아니었다. 아니, 당시 독일 대중과 견주면 호의적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녀는 가까이 있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유대인 친구들에게 식사를 사주는 호의를 베풀기도 했다. 폼젤은 그저 너무 위험한, 선을 넘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조심했을 뿐이다. 지극히 평범한, 온전히 그녀의 선택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선택들이 그녀를 괴벨스의 비서가 되는 길로 이끌었다. 폼젤은 그렇게 조용히, 나치가 저지른 극악한 범죄에 참여하는 길로 이끌렸다.
선과 악이라는 구분 자체에 회의적인 현대인들조차 ‘나치’ ‘홀로코스트’라는 죄악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래서인지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나치의 만행에 대한 분석은 차고도 넘친다. 혹자는 히틀러와 괴벨스 같은 ‘개인’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한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사악하며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분석한다. 혹자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의 위험성과 대중선동에 휘말리는 대중의 역학에 초점을 맞춘다. 혹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흉흉한 국제정세라는 맥락에서 이를 다루기도 한다. 유럽 대륙에 만연했던, 뿌리 깊은 유대인 혐오 문제와 이를 연관 짓는 분석도 있다. 그 모든 것이 문제일 수 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생존을 위해 몸을 사리면서 아무런 악의 없이 저 모든 죄악의 배경을 이루는, 저 모든 죄악에 연료를 제공하는 무수한 폼젤들의 삶이 있다. 인류의 ‘악’에는 괴물 같은 인간들의 사악한 의지, 그 괴물 같은 인간들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의지뿐 아니라 무수한 폼젤들의 평범한 삶이 깊이 연루되어있다. 우리의 눈은, 아무리 기민하고 냉철한 지성의 눈조차 그 지점을 보지 못하거나, 혹은 보지 않으려 한다. 우리의 눈은 기본적으로 ‘분리하려는 눈’이기 때문이다. 끔찍한 악과 마주해, 혹은 끔찍한 악의 배경과 연료가 되는 너무나 평범한 삶과 마주해, 우리는 끔찍한 악의 ‘예외성’을 부각하려 하고, 평범한 삶에서도 ‘예외적인 면모’를 찾으려 한다. 그렇게 죄인, 죄 된 국가, 죄 된 세상에서 무고한 ‘우리’를 솎아내려 한다. 그것은 폼젤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그저 살아남고자 했을 뿐, 남에게 해를 끼치고 싶은 마음 같은 것은 추호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그녀의 말이 맞다. 하지만 온전히 맞는 이야기는 아니다. 좋은 기회가 오면 그것을 잡고 싶은 평범한 욕구,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본능, 심지어 맡은 일을 완수하려는 성실한 책임감과 같은 바람직한 덕목조차 거대한 악의 원료가 될 수 있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던 그녀의 (다소 소극적인) 호의는 이 거대한 악으로 허망하게 흡수된다. 우리 중 누구도 폼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근본적으로 우리 모두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고 폭로한다. 십자가를 세웠던 이들, 십자가에 예수를 못 박으라고 명령했던 소수 권력자들, 예수를 미워했던 일부 무리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이야기한다. 십자가에는 그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을, 끝나지 않는 인류의 죄책이 집약되어있다. 인류의 역사에는 부당한 권력, 권력의지와 권력 다툼들에서부터 소시민적인 나약함, 비겁함, 무지까지가 뒤엉켜 무고한 희생자를 만들고 마는 십자가들이 즐비하다. 홀로코스트나 십자가와 같은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죄가 폭로되는 자리가 아니어도, 정직한 시선으로 우리 삶의 자리를 살피면 어디나 그곳에는 십자가가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나이고, 또 너인 무수한 폼젤들이 있다.
1) 파울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 1897-1945)는 나치 독일에서 국민계몽선전부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유대인·집시·장애인 등 수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학살하는 데 앞장선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의 최측근이었다. 여론 조작, 왜곡 보도, 연설 등을 통한 대중선동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1930년대에 나치당이 세력을 확장하고 히틀러가 집권하는 데 일조했으며, 2차 대전 당시 침략 전쟁을 미화하고 독일이 총력전을 벌이도록 부추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괴벨스를 총리로 지목했으나, 괴벨스는 다음 날 자녀들을 독살하고 아내와 함께 죽음을 택했다.
2)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 1906-1962)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나치 독일의 유대인 절멸 정책을 주도한 나치 친위대 소속 실무 책임자로, 당국이 유대인 학살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데 기여했다. 독일의 항복 이후 미군 수용소에 붙잡혔다가 탈출했으며, 숨어 지내다가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의해 체포되었다. 정치 이론가 한나 아렌트는 1961년 공개재판에서 무죄를 주장하는 그의 모습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담아내면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1962년 6월 1일 교수형에 처했다.
3) 에디트 슈타인(Edith Stein, 1891-1942)은 가르멜 수도회 수녀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한 유대인 출신의 가톨릭 순교자이다. 1998년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다. 젊은 시절 현상학의 창시자인 독일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 밑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그의 개인 조교를 맡았으며, 현상학과 관련한 독자적인 연구로 영특한 철학자의 면모를 드러내기도 했다. 1922년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된 이후로도 철학적·신학적으로 통찰력 있는 글들을 남겼다.
정다운
낮에는 회사에 다니고 밤에는 번역을 한다. 서로 다른 두 언어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에 관심이 있다.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십자가》 《신학자의 기도》 《기억하라, 네가 누구인지를》 《오라, 주님의 식탁으로》 등을 옮겼다. 팟캐스트 〈슬기로운 독서생활〉과 〈모두의 아멘〉에도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