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에 휘둘리지 않는 인권 활동의 중심은 신앙”
[372호 사람과 상황] ‘북한인권변호사’ 전수미 (사)화해평화연대 이사장
전수미 변호사는 탈북민 지원 활동가와 변호사로 20년간 북한 인권 문제에 힘써왔다. 탈북민 지원 NGO에서 6년간 탈북민 구출사업에 참여했던 그는 현재 8년째 북한 인권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성폭행 피해 탈북민과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된 탈북민을 무료로 변호한다.
20대 시절에는 국내 접경지역에서 삐라(대북전단)도 날렸던 그였는데, 지난해 8월 ‘대북전단금지법’이라 불리는 남북교류협력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자리에 증인으로 참석했다. 대북전단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며 전단 살포 행위를 막아선 것이다. 그 외에도 전 변호사는 그가 속했던 대북 단체에 전달된 후원금이 단체장의 경조사비, 룸살롱비로 쓰였다는 사실을 고발하면서 회식 자리에서 성폭행을 당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대북전단금지법’ 증언 후 1년이 넘는 시간을 버텨온 그의 이야기를 듣고자 인터뷰를 요청했다. 10월 4일 서울 여의도 화해평화연대 사무실에서 전수미 변호사를 만났다. 전 변호사는 다른 인터뷰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신앙 이야기를 비중 있게 털어놓았다.
- 북한 인권 문제에 오래 관여하셨다. 어떤 계기로 이 일을 시작하셨나.
스무 살 때 함께 교회를 섬기던 친구의 죽음이 큰 영향을 줬다. 친했던 그 친구가 어느 날 내게 “이번 주에 시간이 되냐, 얘기할 게 있다”고 했는데, 나는 그 주에 기말고사가 있어서 만남을 미뤘다. 그런데 친구가 목요일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 일로 한동안 큰 충격에 빠져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 친구가 의붓아버지에게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하고 있었고, 그 일을 어머니에게도 말할 수 없어서 나를 만나려 했다는 것이었다. 죄책감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기도하다가, 인도 관련 책을 보고 무작정 인도로 떠났다.
- 인도와 북한 인권 사이에 어떤 접점이 있었던 건가?
콜카타에 있는 테레사하우스에 가면 병동에 환자들이 많았다. 거기서 봉사활동을 많이 했다. 환자들을 도왔고,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런데 거기서 만난 외국인 친구가 내게 “왜 한국 사람들은 국제기구 활동엔 관심이 많은데 가까운 북한 사람을 돕는 데는 관심이 없냐”고 물었다. 단순한 호기심이었겠지만, 나에겐 그 말이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후 한국에 와서 NGO를 소개받았다. 2000년대 초반이었는데, 대다수 북한 인권 단체는 탈북민이 만든 단체였다. 나는 국제팀장, 대외협력실장으로 국제 업무를 담당했다.
- 주로 어떤 일을 했나.
BBC나 CNN에 탈북민 인터뷰를 연결하고, 미국 민주주의진흥재단(NED)에 제출할 보고서를 썼다. 유엔(UN)에 북한 인권 보고서도 제출했다. 그 외에 민원을 받거나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일도 했다. 탈북 여성들에게서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를 꽤 받았는데, 들어보면 성폭행을 당하거나, 임금을 못 받거나, 북한에서 약으로 쓰이는 가루를 들고 와서 마약 검출로 구속되는 등 부당한 일을 겪는 상황이었다. 법적 도움이 필요한 경우, 우리 단체를 돕는 변호사들을 연결해줬다. 그렇지만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변호사들이 평소엔 자기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 봉사활동하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내가 변호사가 되어서 이분들을 도와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 바로 실천에 옮기는 모습이 대단하다.
단순하고 무식한 면이라고 생각한다. ‘무언가 꼭 해야겠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상황이다’ 생각되면 별다른 의심 없이 그냥 하곤 한다. 변호사 역시 내가 해야 할 일이고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이라 여겼다.
- 중요한 결정이었을 텐데 신앙을 이유로 들었다. 어떤 신앙 여정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모태신앙으로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어릴 때부터 하나님은 내게 많은 시련을 주신 것 같다. 어릴 때 교회에서 숨바꼭질하다가 옥상에 숨었는데, 교회 오빠가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서 내 바지를 벗겼던 적이 있다. 그때 난 그게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마침 술래가 나를 찾아내서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성범죄 현장에 처한 적이 있다. 나 말고도 아마 전국의 수많은 여성이 어릴 때부터 많은 성범죄에 노출되었을 것이다. 내 경험들은 나중에 탈북민들을 섬기고 그들이 겪는 어려움을 이해하는 데 조금씩 도움이 되었다. 하나님이 일부러 내게 이런 시련을 허락하신 게 아닌가 싶다.
- 꼭 시련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게 있다고 생각하나.
나는 좀 그런 것 같다. 시련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게 있다. 중국 현장에서 공안에서 쫓기다가 다친 적이 있다. 거기는 벽을 넘지 못하게 하려고 뾰족한 유리 조각을 꽂아놓는다. 그 벽을 타고 넘다가 오른팔 일부가 잘려 나갔다. 중국에 몰래 갔던 때라 수술할 수 없었다. 결국 수술이 늦어졌고 손가락 세 개의 힘줄, 동맥이 다 끊어져 버렸다. 장애 판정을 받고 오른손 손가락을 두 개만 쓰니까 왼손도 손가락 두 개만 사용하게 된다. 그전까지 피아노 반주도 했고 손으로 하는 것들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왜 내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은 내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 손의 감각이나 반사신경까지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들의 소중함을 알게 된 계기라 여긴다.
- 신앙도, 활동도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없었나.
NGO 일을 하면서 성폭행을 당했을 때, 너무 수치스러운 마음에 자살 기도를 하기도 했다. 그때도 힘들어서 다 그만두고 싶었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다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탈북 여성들도 그런 일을 많이 당하고 자살 기도도 많이 하시니까, 내가 포기하면 그분들을 도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분들을 지키는 일을 하면서 함께 살자는 생각으로 버텼다.
- 다른 힘든 일은 없었나.
임금을 잘 안 준다거나, 야간까지 근무하는 때도 많았다. 인권 의식 결여 등 NGO 상황이 너무 열악하기도 하다. 탈북민 관계자들은 북한에서 인권 교육을 받을 때 ‘인권’이라는 용어가 미 제국주의와 남조선이 북조선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말이라고 교육을 받기도 한다. 그 영향도 있는 듯하다. 물론 북한에서 지금 그런 교육을 하고 있지 않지만, 예전에는 비뚤어진 인권 의식을 갖고 계신 분들도 있었다.
- 2020년 8월, 북한 인권 단체가 후원금을 용도에 맞지 않게 사용했다는 사실을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증언했다.
NED 관계자로부터 지적을 받았다. 그동안 미국에서 지원한 돈을 왜 제대로 쓰지 않았냐고 하더라. 관계자들이 재정 사용에 관한 내용은 전혀 보여준 적이 없어서 난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몰랐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머릿속에 스쳐가는 장면들이 있었다. 그 돈으로 찜질방, 룸살롱 가고 노래방에서 도우미까지 부르고, 심지어 단체장이 북한에 있는 자기 가족에게 보내기도 한 것이 아닌가 의심되었다.
- 그런 것들을 바로잡으려고 용기를 낸 건가.
그렇다. 탈북민 단체장 중에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여성에게 성폭행을 저지르는 사례도 있다. 이들은 국내에 갓 들어온 여성 탈북민에게 장학금을 주거나 무언가를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을 보여주며 접근한다. 본인이 미국 대통령 같은 권력자와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북한에서는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사진을 찍으면 그 사람은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 되는데, 이곳에서도 그런 위계질서를 이용해 협박하는 것이다. 결국 피해자는 피해 사실을 얘기하지 못한다. 이런 일들이 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추가 폭로, ‘미투’까지 했다.
- 증언한 지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이후 어떤 일들을 겪었나.
관계자는 물론 모르는 사람들의 전화에 시달렸다. 수많은 협박과 폭언이 있었다.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왔는데, 지인이자 선배였기에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이내 “방송 봤어요. 왜 그렇게 대책 없이 용감해요?”라고 비난해서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고통이 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올해 4월 미국 의회 톰 랜토스 인권위원회 주최 ‘대북전단금지법’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하기도 했는데, 그때도 폭언과 협박에 시달렸다. 심지어 이곳 화해평화연대 사무실에 칼을 들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CCTV를 달았다.
- 그들이 과격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북한 인권 이슈가 여러모로 정치화하기 쉬운 것 같다. 실제 북한 주민들, 그리고 탈북민의 일상이나 생각은 그렇지 않은데, 일부 정치화된 탈북민의 이야기가 전체 의견이 되어버리곤 한다. 안타깝게도 한쪽 말만 듣고 그게 전부인 줄 아는 것이다. 1990년대나 2000년 초반에 탈북한 이들이 겪은 상황을 북한 전체 이미지로 고착시키고, 현재 북한의 체제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대북전단을 보내면 북한 인권 투사 이미지로 알려지고, NED 등 미국 관련 기관으로부터 후원금도 받을 수 있는데, 문제들을 폭로하는 증언 때문에 전단 살포와 후원금이 끊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탈북민이 처한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북한에서 온 사람들 상당수가 남한에 정착하기 힘들고, 어떤 이들에게는 대북전단에 대한 후원이 생계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단 살포와 북한 인권 단체를 지키는 게 북한 인권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신다. 그분들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알면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진심이지만 잘못 알고 계신 거다.
- 탈북민을 많이 접해보지 않은 입장에서는 정치화된 증언과 그렇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맞다. 그래서 나는 미국 톰 랜토스 인권위 청문회에서도 제발 정치화된, 의도가 있는, 언론에 많이 나온 유명한 탈북민의 이야기만 듣지 말고, 지금 대한민국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분들의 이야기에 주목해달라고 얘기한다. 언론에 많이 나온 탈북민 중 일부는 대본에 특화되기도 한다. 그런데도 미국 의회 의원들은 탈북민 3만 4천 명 중 1%의 생각을 진실로 여기는 것 같았다. 정말 속 터지는 일이다.
- 평범한 탈북민의 일상이 궁금해진다. 근래에는 북한 사람을 작중 인물로 내세우는 대중매체 작품도 많았던 것 같다. 주로 현실 물정 모르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작전을 수행하는 요원 등으로 나온다. 최근에 화제가 된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도 독한 인물로 그려졌는데.
다들 막 힘들게 탈북하셔서 독한 성격을 갖고 있을 거로 생각하는 듯하다. 물론 그런 분들도 있겠지만, 남한 사람들이 다양한 것처럼 북한에서 오신 분들도 모두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예를 들면, 최근에 만난 친구는 평양외국어고등학교를 나온 학생이었다. 그 친구는 남조선에서 좋은 대학도 가보고 미국으로 유학도 다녀오고 싶다고 했다. 나중에 교수가 되고 싶다고 한다. 유학 탈북을 한 거다. 부유층 중에는 중국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려고 잠깐 나온 사례도 있다. 나올 때는 국경수비대에 뇌물을 주고 나왔지만, 수비대가 바뀌는 바람에 국경으로 돌아가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탈북한 사람도 있다. 사람만큼이나 탈북의 유형도 다양하다. 우리는 탈북민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은 것 같다.
- 대다수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면.
북한이 많이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듯하다. 20~30년 전 북한의 인권유린 상황과 2019년 이후 상황은 정말 다르다. 최근에 북한에서 오신 분들은 인권 교육도 받고 와서 확실히 달라진 점이 있다. 예를 들면 북한은 원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에는 조선중앙통신에서 장애인 인권에 관한 방송을 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노력에도 인권 상황이 아주 열악한 점이 많다. 그래도 변화를 인정하고 더 큰 변화를 끌어내는 움직임이 필요할 것 같다.
- 북한의 인권 개선을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인권 문제를 해결하라는 메시지를 특정 국가가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인권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고 한 국가를 압박하는 용도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한 국가가 특정 국가의 인권 문제를 계속해서 지적하는 것은 효과적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든 점도 있다. 유엔 차원의 국제사회 연대 속에서 지속적인 문제 제기가 필요한 이유다.
- 북한 인권을 북한에 사는 사람의 인권 문제로 제한하지 말고 한반도 전체 ‘코리아 인권’ 차원에서 보자는 제안을 하시기도 했다.
탈북민 인권에도 지속적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우리는 이들이 대한민국을 향한 신뢰 하나에 목숨을 거는 어려운 선택을 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단순히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북에 있는 사람들은 통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남한에 간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가장 유심히 살피지 않을까 싶다.
- 탈북민들이 살아가는 현실은 어떤가.
우리가 대한민국이 싫어서 외국에 나갔다고 해보자. 거기서 외국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욕하거나 비난하면 기분이 어떨까. 불쾌할 것이다. 탈북민도 마찬가지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왔지만, 북한을 무조건 비난하는 걸 되게 싫어한다. 자기가 살았던 곳이고 지금도 내 가족이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북한에서 온 분들을 보면 그분들의 이력을 온전히 존중해주지 못한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사상검증하듯, 북한의 지도자를 비난해보라 한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는 북한 출신이라는 사실 자체가 차별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것으로 차별받는 것이다. 북한에서 태어난 것은 선택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성별도 그렇고, 장애도 그렇다. 선택하지 않은 것으로 차별받지 않도록 하는 게 내 소명이라 생각한다.
탈북민 중에는 “북한에서 온 줄 몰랐어요. 남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라는 말을 최고의 칭찬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이 얘길 듣고 굉장히 안타까웠다. 본인의 정체성이 지워지길 바라는 것이지 않나. 그동안 얼마나 차별을 당했으면 그랬나 싶다. 탈북민이라도 진심으로 환대받고, 본인의 출신을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분들은 미래 통일의 주역이다. 남북한 체제를 둘 다 경험한 분들이지 않나.
- 남한 사회에서 북한은 늘 중요한 이슈다. 어떤 정책이 필요하다고 보시는지.
다른 나라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하다가 북한의 외교를 더 신뢰한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 최소한 북한은 각 나라를 상대하는 기조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담당자가 잘 바뀌지 않는 편이니 그럴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5년마다 정책과 기조가 널뛰기하니까 예측이 불가능해진다. 신뢰가 있어야 외교가 어렵지 않아진다.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예측 가능성이 있어야 하고, 예측이 가능해지려면 기본적인 기조가 있어야 한다. 나는 그 변하지 않는 기조와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우리가 주도적으로 외교를 할 수 있다.
- 시민들 사이에도 북한에 대한 시선은 온도 차가 크다. 통일에 관해서도 개인마다 의견이 다른데.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면서 느끼는 점은 청년 세대가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자기 일이 아니다. 당장 우리가 먹고살기 힘든데 북한에 뭘 해줄 필요가 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사실 경제적 관점으로 보면 내수 시장은 최소 인구 1억 명이 넘어야 안정적이라고 한다. 우리가 외부의 유가나 환율에 따라 크게 휘둘리지 않고 내수 시장으로 버티려면 더 많은 인구와 시장이 있는 게 유리하다. 지금 청년들이 겪는 어려움, 일자리와 출산 등 문제의 전반적인 해결점이 최종적으로는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이라고 본다.
또, 우리가 북한과 북한에서 오신 분들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점이 있다. 북한이 굉장히 폐쇄적인 사회라 그렇지만, 서로의 상황을 교류하고 알게 될 창구가 생기면 또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 무조건 통일해야 한다고 청년들에게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기성세대로서 북한이 어떤 나라인지 알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다. 그다음 결정은 우리 후대 세대가 스스로 운명을 결정했으면 좋겠다. 후배들은 현명한 선택을 할 것이라 믿는다.
- 올해 화해평화연대가 창립되었다. 소개를 부탁드린다.
오랫동안 북한에서 오신 분들을 만나고 섬기면서 북한 이슈만으로 남남갈등과 남북갈등 그리고 다른 국제 관계가 모두 연계된다고 느꼈다. 이 이슈를 좀 더 평범한 일상으로 가져와 나누는 장을 만들고 싶었다. 정치적 맥락을 배제하고 북한 청년들과 남한 청년들이 교류하는 공간과 기회를 만드는 시도다. 그래서 탈북민들과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단법인화했다.
지금 앉아있는 이 자리에서 탈북민 청년들과 남한 청년들이 주기적으로 만나 교류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남한 청년들이 탈북민 청년들의 PPT 만들기나 자기소개 쓰는 방법을 알려주고, 탈북민들은 북한에 대한 이해를 돕는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간다. 자유롭게 놀다 가기도 한다.
- 어떻게 보면, 시대정신과 상관없이 북한에 관한 관심과 활동을 꾸준히 이어온 곳이 기독교가 아닐까 싶다. 앞으로도 기독교가 유의미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북한 인권 활동과 사역을 20년간 하면서 버틸 수 있었던 건 기독교 신앙 덕분이다. 신앙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활동을 한다고 내게 어떤 보상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동안 이념에 휘둘리지 않고 활동했다. 앞으로도 특정 영역의 이익이 아닌 ‘한반도’ ‘북한’ ‘탈북민’의 보편적 인권을 지키는 일에 힘쓰고자 한다. 적어도 나에게 신앙과 기도는 앞으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 같다.
진행 정민호 기자 pushingho@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