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 속에서 지킨 믿음
[372호 묵상 스케치 - 개혁신앙의 뿌리]
피에르 발도의 정신을 따른 발도파는, 자국어로 성서를 번역하여 가르치고 자발적 가난을 실천한다는 이유로 로마가톨릭교회의 교권에 의해 정죄당하고 쫓기는 이단자로 살아야만 했다. 1215년 이단으로 정죄된 후 800년이 넘는 세월을 견디며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한겨울 폭풍 한설을 견디고 핀 꽃처럼, 모진 박해 속에서 지킨 믿음이었다.
이탈리아 피에몬테주에 있는 작은 산골 마을 토레 펠리체는 발도파가 신앙을 지키고자 몸을 피한 은신처였다. 피에몬테의 주도인 토리노에서 남서쪽으로 60km 정도 떨어진 조용한 산악 지대로, 사람들 눈을 피하여 숨어 지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지금도 그곳에는 발도파 역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는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당시 발도파는 로마교회 감시를 피해 산 위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꼬불꼬불한 산길로 차를 타고 한참 올라가야 발도파의 역사와 만날 수 있다. 〔그림1〕은 발도파가 자녀들을 복음으로 가르치기 위해 세운 학교이다. 자녀들을 바른 신앙으로 가르치지 못하면 신앙의 대(代)가 끊어지고 말 것임을 알았기에, 그들은 그토록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신앙교육에 최우선 관심을 두었다. 교육을 통해 세대를 이어가며 말씀에 기초한 믿음을 굳게 붙들고 수백 년을 버텨왔다. 다음 세대 신앙교육을 걱정하고 있는 한국교회에 교훈을 주는 대목이다.
1655년 4월 24일, 로마가톨릭의 사보이 공작이 토레 펠리체를 비롯하여 피에몬테주에 있는 발도파 신자 수천 명을 끔찍하게 죽인 ‘피의 부활절 학살’이 벌어졌다. 발도파는 로마가톨릭으로 개종하라는 요구에 맞서 끝까지 저항하였다. 조슈아 자나벨이 이끈 불굴의 전사들이 펼친 저항운동은 발도파 역사의 전설이 되었다. 유럽 개신교 국가들은 박해받는 발도파를 구하기 위해 선박을 보내고, 금식 기도와 모금 활동을 펼치며, 군대 파견까지 검토하였다. 영국의 문호 존 밀턴은 〈최근 피에몬테에서 일어난 학살〉이라는 시를 통해 “그들을 잊지 마시고 당신의 생명책에 그들의 신음을 기록해주소서. … 그들이 피에 굶주린 자들에 의해 학살되었나이다. … 순교자의 피와 재가 뿌려졌나이다”라며 울부짖었다. 편안하게 넓은 길과 양지로만 다니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발도파가 겪어야만 했던 고난의 역사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림2〕는 토레 펠리체에 있는 발도파 교회이다. 피에몬테의 발도파는 1848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종교 자유와 시민의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1853년 토리노에 발도파 교회가 세워지면서, 이제 발도파도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며 예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이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교회에서 예배했을 때 그 감격이 어떠했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토레 펠리체에 위치한 교회 출입문 위에는 빛을 밝히는 촛대와 “빛이 어둠에 비칩니다”(Lux Lucet in Tenebris)라는 발도파 좌우명이 적혀있다. 빛이신 예수께서 기꺼이 어두운 세상 속으로 들어오셨듯이, 이들은 참으로 캄캄한 세상 안에서 복음의 빛이 되어 살기를 소원한 사람들이었다.
오늘날 발도파 교회는 세계개혁교회연맹(WARC), 세계감리교협의회(WMC),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속한 회원 교단이다. 피에몬테를 비롯한 이탈리아에 2만 5천 명 정도,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등에 1만 5천 명 정도가 흩어져서 신앙을 이어가고 있다. 비록 발도파가 교세는 작을지 모르지만, 영향력으로 보자면 종교개혁운동의 선구자요, 고난 가운데서도 담대한 신앙으로 세상을 이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박해 속에서 지켜낸 아름다운 발도파 신앙은 진정한 제자도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게 한다.
그림 이근복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을 역임했다.
글 박경수
장로회신학대학교 교회사 교수.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교회사로 석사학위(Th.M.)를, 클레어몬트 대학원에서 종교개혁사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저서로 《종교개혁, 그 현장을 가다》 《인물로 보는 종교개혁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