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수집한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373호 커버스토리] 한국교회사 연구의 디딤돌, 역사학자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복음과상황〉 초대 공동발행인이었던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역사학자로서 평생을 텍스트와 함께했다. 숙명여자대학교 재직 중에는 신군부를 비판하는 텍스트가 문제가 되어 1980년 8월부터 4년 넘게 해직 상태로 있어야 했다. 해직 기간에는 한국교회사 사료 수집을 위해 미국 등에 흩어져 있는 기록과 자료를 모았다. 인터넷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 외국에서 발로 뛰며 한국의 기독교 역사와 관련한 자료를 찾아내고 복사하고 옮겨 적었다. 그 방대한 자료들이 현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 모여있다. 이 자료들은 후학들의 교회사 연구에 디딤돌이자 동력이 되고 있다.
누구보다도 텍스트의 의미와 가치를 응축하고 있을 이 전 위원장에게 인터뷰를 청해, 사라져 없어질 수도 있었던 자료를 찾아내고 분산된 자료를 모으고자 발로 뛰었던 때의 이야기를 들었다. 인터뷰는 이 전 위원장과 오랜 인연을 이어온 윤환철 미래나눔재단 사무총장이 진행했다. 특별히 이 자리에는 이 전 위원장의 요청으로 복상 초대 편집위원이었던 김회권 숭실대학교 교수가 함께했다. 초대 발행인, 편집위원, 그리고 초창기 기자였던 윤환철 사무총장이 만난 자리였기에 자연스럽게 만 서른 살이 된 복상의 의미를 되새겼다. (편집자 주)
윤환철: 이번 인터뷰 주제는 ‘텍스트’인데요. 사실 선생님이 위험한 텍스트를 쓰지 않으셨다면 저는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1980년 해직당하게 되어 신학을 공부하셨고, 1986년에 할렐루야교회 대학부 전도사로 오시면서 저와의 인연이 시작되었거든요. 그때 전 교인 대상으로 한국교회사 강의도 하시고 가끔 설교 강단에서 야단도 치셨죠. 제겐 첫 번째 ‘전도사님’이셨기에, 교회 전도사는 다 그런 줄 알았습니다.(웃음)
이만열: 그때 학생들은 지금도 저를 ‘전도사님’이라고 부릅니다. 장로, 박사, 교수 등 다른 호칭이 많은데도 계속 전도사님이라고 부르더군요. 그런 사람들이 열몇 명 되는데, 매일 아침 그 아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저도 ‘전도사님’이라고 부르다가 사회운동을 하고 세상에 눈을 뜨게 되면서 일생의 스승님이란 의미로 ‘선생님’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선생님께서 해직 기간에 외국에 흩어져 있는 한국교회사 기록을 모은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제가 해직을 당한 게 1980년 8월부터입니다. 당시 한국 기독교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다가올 한국교회 100주년을 준비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어요. 그 당시엔 아펜젤러,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 선교를 시작한 1885년을 한국교회의 기점으로 보고 있었지요. ‘100주년 준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다름 아니라 역사를 제대로 쓰는 일이었습니다. 쓸 수 없다면 역사를 제대로 쓸 수 있도록 자료를 모아놓아야 한다는 의미였고요. 당시 제가 그런 주장을 공개적으로 여러 곳에서 자주 했습니다. 그걸 듣고 몇 분이 제게 “다른 사람더러 하라고 하지 말고 당신이 그 일을 하면 어때요?”라고 권했어요. 마침 제가 해직된 기간이어서 여러 분들에게 도움을 받아 자료수집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까지 저는 한국사 공부만 한 셈이어서, 한국사 연구를 위해서는 특별히 해외에 자료를 모으러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어요. 따라서 이때 교회사 자료수집을 위해 미국 등 여러 나라를 다니게 되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제 학문과 인생이 ‘우물 안 개구리’ 격으로 한국을 벗어나지 못했을 거예요. 저는 한국 기독교사 자료수집을 계기로 여러 나라를 돌아볼 수 있었고 광활한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지요.
해직 교수로 해외에 나가는 일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어떻게 외국으로 자료를 찾으러 가게 되셨나요?
제가 자료수집 목적으로 미국에 간 게 1981년인데, 그전까진 해직 교수가 해외에 나갈 엄두를 못 냈어요. 어느 날 아침 하용조 목사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전두환 정권 시절인데, 자기가 이학봉 민정수석을 만나서 제 이야기를 했다고 그래요. 민정수석은 “내 힘으로 복직시키는 건 곤란하지만, 기독교사 자료수집에는 힘을 써보겠다”라고 했대요. 며칠 후에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걸 계기로 제가 한국 기독교사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어요. 뒷날 들은 이야기지만, 제가 출국한 후에 한완상, 서남동, 김찬국 등 다른 해직 교수들도 출금(出禁)이 풀려 해외에 나갈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저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출신의 김용복 박사를 통해 초청장을 받아 미국으로 가게 되었어요.
개인적으로 자료를 모으셨는데, 나중에는 한국기독교사연구회 회장으로서 일을 진행하셨지요?
1982년에 모친이 편찮다는 급보(急報)를 받고 제가 잠시 귀국한 적이 있어요. 그 기간 중(1982. 9. 27.)에 교회사를 공부하는 선후배들이 모여 한국기독교사연구회를 조직했어요. 한국 기독교 100주년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모인 선후배들이 자료 모으는 일을 개인적 차원에서 하기보다는 서로 협력하여 준비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무직 상태인 제게 회장을 맡겼는데, 다시 도미(渡美)할 때는 처음 갔을 때와는 달리 영문 명함을 만들어 갔어요. 명함 덕분에 무직이었던 상태보다는 해외에서 자료수집 등을 하기가 훨씬 수월해졌어요. 한국기독교사연구회 ‘president’(회장)라는 명함을 내미니까 전보다는 일하기가 훨씬 수월해지더군요.(웃음)
인터넷이 없던 시절인데, 어떤 방식으로 자료를 모으셨나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는 당시 선교 관련 잡지 등을 뒤적였어요. 그런 후에는 한국 선교에 주력했던 교단들의 문서보관소들을 다니면서 직접 관련 자료를 복사했습니다. 제가 도미했을 무렵에 한국에 계시다가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교수로 왔던 마펫(S.H. Moffett, 馬三樂)의 도움을 받아 필라델피아에 있는 미국 북장로회 역사협회(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로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지요. 마펫 교수는 장로회신학대학교 부학장으로 있다가 제가 미국에 갈 무렵에 프린스턴에 오셨어요. 그가 한국교회사 관련 자료들을 많이 갖고 있어서 한국에서도 도움을 받았거든요. 그의 집이 학교 구내에 있어서 이삿짐 정리를 도우면서 그가 갖고 있는 한국 관련 문서들을 목록화해 주었지요. 그걸 계기로 필라델피아 북장로회 역사협회에 저를 소개하는 추천서를 잘 써주었어요. 집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였던 그곳에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석 달 동안 매일 다녔습니다. 나중에는 따로 방을 하나 내주면서 거기서 연구하라고 하더군요. 선교사들은 파송받을 때부터 선교부에 거의 정기적으로 보고를 하게 되는데요. 과거엔 모두 편지로 주고받았기 때문에 선교부 문서들이 자료로 남게 되어있었어요. 미국 북장로회는 1910년대까지의 자료들을 모두 마이크로필름으로 만들어 보관하고 있었지요. 잘 안 보이는 것들도 있어서 원문을 요청했는데, 그들의 말이 마이크로필름으로 만든 후 원본은 폐기해 버렸대요. 원본 문서를 폐기하다니… 굉장히 아쉬웠지요. 그 후의 자료들은 제가 마이크로필름으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해 복사본을 가져왔습니다.
그다음은 미국 남장로회 사료연구소(Historical Foundation)가 있는 노스캐롤라이나주 블랙 마운틴으로 갔습니다. 미국 남/북 장로회가 합친 때가 1983년이기 때문에 제가 갔을 당시 분리된 상태였지요. 프린스턴에서 그곳까지는 자동차로 이틀이 걸렸는데, 찬송을 부르면서 운전해 가니까 차 안에서 부흥회를 하는 기분이었어요, 그곳에 계시던 최덕성 목사(뒷날 고신대 교수)의 도움을 받았어요. 남장로회 선교사들 편지 등의 자료는 거의 다 마이크로필름으로 되어있었어요. 마이크로필름을 일일이 확인하여 그 안에 있는 한국 선교 관련 자료를 찾아 현상해왔지요. 마이크로필름은 특수 용지로 인화하거든요. 제가 인화를 많이 해서 연구소의 특수 용지를 다 써버렸죠. 블랙 마운틴은 경치 좋고 공기 맑은 시골이에요. 그곳에 그런 용지 파는 곳이 없으니까 큰 도시에 부탁해서 용지를 사주시더군요. 매일 복사하는 데만 돈이 제법 들었어요. 그래서 연구소 책임자에게 이야기했어요. 내 형편이 좀 어려운 편인데 봐줄 수 있겠느냐고요. 그랬더니 요금을 매일 계산하지 말고 매일 프린트한 매수만 기록하고 끝나는 날 계산하자고 하더군요. 나중에 일을 마치는 날 전체 요금을 계산하더니 절반만 내라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미국의 남쪽 분들은 인정이 많다는 걸 실감했어요. 그때가 가을이었는데, 애팔라치아산맥 남쪽에 속한 그곳에서 본 그 불타는 듯한 단풍, 정말 잊을 수가 없어요. 그 소식을 가족에게 전하려고 그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지요.
마펫 교수의 이삿짐 정리를 도와주신 것도 그렇고, 할인 문의를 한 것도 그렇고, 선생님은 혼자서 때마다 참 지혜롭게 운신하셨네요?
하하. 그렇지만 저 혼자서 한 게 아니라 정말 여러 사람의 다양한 도움과 배려를 받으면서 일을 수행한 셈이지요. 사료 수집에는 비용이 많이 들었어요. 당시 북장로회 극동 선교부 책임자인 이승만 목사는 해직 교수들을 많이 도왔어요. 그는 가끔 프린스턴을 찾아와 위로하면서 제게 물질적인 도움도 주셨어요. 평양 출신인 그는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CUSA) 회장도 역임하셨는데, 해직 교수들을 많이 도왔어요. 그는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많이 노력했어요. 정말 존경받을 만한 분이었습니다.
그렇군요.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했던 교단 선교부의 자료는 거의 다 확보해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 감리교 쪽 사료는 뉴욕의 인터 처치 센터와 드루 대학교(Drew University)에서 찾았습니다. 인터 처치 센터에서는 마이크로필름을 구했고, 드루에는 문서로 된 것이 있었어요. 드루의 경우 여름방학 때 기숙사에 거하면서 자료를 복사하고 사진들도 찾았어요. 흩어져 있는 자료를 모으려면 여러 번 찾아가야 합니다. 한국교회사 자료는 미국뿐 아니라 캐나다와 영국에도 있습니다.
1983년 초에는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로 갔지요. 토론토 대학교 안에 신학교들이 모인 빅토리아 대학교가 있어요. 토론토에서도 한 달 정도 머물면서 문서보관소에서 사료를 찾아 복사했지요. 또 우리나라 첫 의료선교사이자 뒷날 주한미국공사로 왔던 알렌(H.N. Allen)의 문서는 뉴욕 공공도서관에 있는데 복사비가 비싸서 제대로 수집하지 못했어요. 그 뒤 다시 뉴욕에 간 건 1984년 여름이었습니다. 당시 대한성서공회사 집필을 부탁받았는데 다시 자료수집이 필요해졌어요. 뉴욕에 한 달 이상 지내면서 미국성서공회(ABS) 자료를 수집했어요. 영국 역시 성서공회 사료를 수집하기 위해서 1986년 여름방학 때 갔습니다. 초기 한국어 성경 번역과 반포 업무는 주로 영국성서공회로도 불리는 대영성서공회(BFBS)를 통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지요. 영국이 영적으로 부흥할 때는 성경 번역과 보급을 통해 선교의 주역을 맡았던 BFBS가 2차 세계대전 후 영적으로 쇠락해지니 런던에 있는 5층짜리 건물을 유지하지 못해 사무실은 스윈던으로, 도서관과 고문서실은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옮겼더라고요. 내가 자료수집을 위해 방문하겠다고 하니 그쪽에서 아예 고문서실이 있는 케임브리지 대학 중앙도서관으로 가라고 그래요. 당시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던 조카 이성구 박사의 도움을 받아 케임브리지 대학 중앙도서관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새로운 기록을 발견하기도 했지요.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록이요?
1885년 3월 8일 자로 존 로스(John Ross)가 BFBS에 보낸 편지입니다. 존 로스는 스코틀랜드 교회의 지원을 받아 만주 선교사로 갔다가 한국 선교에 관심을 두고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했는데요. 1882년 초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간행한 이래 1887년에는 《예슈셩교젼셔》(신약전서)를 펴냈어요. 그는 번역 간행된 한글 성경 등을 보급하기 위해 서상륜(徐相崙)을 1882년 10월 초 심양(沈陽: 만주 봉천)에서 서울로 파송해요. 그가 약 3년간 서울에서 성경 반포 사역을 하고 난 뒤 1885년 초 심양의 로스에게로 돌아와 보고했습니다. 그 보고를 받고 로스는 자신의 한국어 성경 번역과 인쇄 등을 도와준 BFBS에 3월 8일 자로 편지를 보냈어요. 그 편지를 보면, 서울에 70명, 서울의 서쪽(황해도 소래로 추정)에 18명, 서울의 남쪽(남양이나 안성으로 추정)에 20명이 구도자로 모이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이 기록을 찾기 전까지만 해도 아펜젤러,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한 1885년 4월 5일을 한국교회(선교)의 시작이라고 봤지요. 그러나 이보다 거의 한 달 전에 쓴 이 편지를 통해 아펜젤러, 언더우드가 한국에 도착할 때 이미 서울을 중심으로 백여 명의 구도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거지요. 이 자료 덕분에 아펜젤러, 언더우드 선교사가 최초로 복음을 전해주었다는 통설이 바뀌게 되었지요. 이렇게 새로 발굴된 자료에 의해서 한국 기독교사 기점이 바뀌었습니다. 자료(기록)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사례이지요. BFBS 측 자료를 찾다가 다시 에든버러의 스코틀랜드성서공회(NBSS)에도 가서 자료를 살폈어요. NBSS는 BFBS의 사업비 중 절반 혹은 3분의 1을 함께 부담하면서 한국 선교를 도운 곳이었거든요. NBSS는 직접 한국 사업을 하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에든버러를 방문, 그곳에서 간행된 선교잡지에 수록된 한국 관련 자료나 이곳 출신의 존 로스나 존 맥킨타이어에 관한 자료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중요한 일을 해놓으셨어요. 그때 모으신 자료 덕분에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다음 세대들의 문화적 기반이 생겼으니까요.
한국기독교사연구회만으로는 그렇게 모아온 방대한 자료를 축적·활용하는 데 한계가 있었어요. 1984년에 복직된 이후에는 신앙과 학문의 동지들과 함께 연구소를 세우기로 했지요. 1990년에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를 세우고 1995년에 사단법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때 옥한흠, 하용조, 홍정길 목사와 손봉호 교수가 큰 도움을 줬어요. 2003년에 국사편찬위원장으로 갈 때까지 소장 겸 이사장을 맡아 자료 확보와 보관, 연구에 신경을 썼지요. 다행히 최근까지도 연구자들이 그 덕을 크게 보고 있습니다. 옛날 같으면 미국 등 각국에 흩어진 자료들을 찾아다녀야 했지만, 지금은 그런 자료들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 거의 모아놓았기 때문에 연구하는 분들이 대단히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지요. 전에는 한국교회사 연구를 위해 미국 등 해외에 가야 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지요. 웬만한 자료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 수집되어 있어요. 덕분에 일반대학에서도 한국 기독교사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는 분이 많이 늘어나고 있어요. 코로나 시대를 맞아 해외에서 공부하는 분들이 우리 연구소에 있는 중요한 자료들을 디지털화해 달라는 요청을 하시는데 그만한 재력이 없어요. 내년이 연구소 시작 40주년 되는 해인데, 자료와 관련한 기념사업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자료를 디지털화하기 위해 독지가들의 도움이 정말 필요해요.
선생님은 공공의 목적을 위해서 기록과 아카이빙을 철저하게 한 사람 중에 대표적인 분인데요. 많은 사람이 모르는 선생님 업적 중에 중요한 게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내실 때 조선왕조실록을 공공화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전에는 조선왕조실록 시디롬이 600만 원에 이르고, 보급판도 50만 원에 판매되었는데요. 그 조선왕조실록 시디롬의 저작권 등을 국사편찬위에서 매입해서 2005년부터 온라인에 무료로 공개하셨잖아요. 덕분에 한국 사극 콘텐츠 등이 풍부해졌다고 생각하는데요. 이후에 한국학 관련 콘텐츠들이 폭발적으로 생산됐습니다. 조선왕조실록 기록들을 누구나 볼 수 있게 되자 창작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해서 다양한 사극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었던 거지요.
제가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있으면서 힘쓴 몇 가지 일이 있습니다. 그중에 정말 중요한 일이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일이었습니다. 첫 번째 사업은 51권짜리 임시정부 자료집을 만드는 작업이었습니다. 원래 해방 60주년을 맞아 60권을 계획했지요. 지금이라도 예산만 있으면 60권을 채울 수 있어요. 대한민국 제헌 헌법 전문에는 3·1 운동을 통해 이루어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했다는 말이 그대로 나와요. 그런데도 그 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임시정부를 위해서 한 게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임시정부 자료집을 만들었습니다. 그전까지 정리되지 않고 있던 한국 독립운동사도 나름대로 정리했고요.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을 온라인화한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시디롬 번역판이 처음에는 600만 원에 판매되었다는군요. 연구하는 사람들이 사비로 그런 돈을 들일 여유가 어딨겠어요. 정부가 역할을 해야지요.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의 원문과 번역에 대한 판권을 전부 국사편찬위원회가 사들였던 거지요. 원문은 사진을 찍어 이미지로 내보내는 한편, 원문의 한자는 타자로 쳐서 활자본을 원문 이미지와 함께 온라인화했습니다. 타자로 쳐야만 검색이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다음에 한문 원문을 우리말로 번역했습니다. 이 세 가지 작업물을 모두 온라인에 올리니까 사람들이 번역 오류를 찾아서 속속 연락해왔어요. 그걸 받아 계속 수정했지요. 지금은 거의 완벽한 상태입니다. 조선왕조실록 자료를 온라인에 올리니까 그 뒤 역사 콘텐츠뿐 아니라 사회·문화적인 콘텐츠가 정말 많이 파생되어 나왔어요. 그러니까 기록이란 정말 중요한 일이죠. 나 스스로도 그 자리에 있으면서 가장 잘한 일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로 하는 것은 공기 중에 새버리고 말아요. 써놓으니까 후세 사람이 읽고 정리를 합니다.
학술적인 책이든 비학술적인 칼럼이나 에세이든, 역사에 관한 책도 많이 내셨는데요. 최근에도 《역사의 길, 현실의 길》(푸른역사)이라는 책을 내셨어요.
네 번째 칼럼집입니다. 〈한겨레〉 등에 발표했던 칼럼을 주로 모아서 정리한 책이에요. 2015년 이후 신문과 SNS에 쓴 글들을 모았습니다. 원고의 반 정도는 아직 출판이 안 됐는데 올해 말까지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해직당한 이유 가운데는 당시 전두환 군부 정권을 비판하는 글을 쓰고 CBS 등에 칼럼을 발표한 일도 있지 않나 생각해요. 1980년 12·12 사태 이후에 발표한 칼럼이나 강연은 1996년에 낸 《한 시골뜨기가 눈 떠가는 이야기》(두레시대)에 일부 수록되어 있습니다(2020년에 새물결플러스에서 개정판 출간). 그 책에는 ‘쑥스러운 이야기’라는 제목의 해직 이야기도 있어요. 그 이후에 2000년대에 쓴 칼럼들은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지식산업사)라는 제목으로 2010년에 나왔습니다. 이 책의 제목은 백제 의자왕(義慈王)이 성충(成忠) 흥수(興首)의 충간을 싫어하여 옥에 가두어버리자 그 뒤 “감히 말하는 자가 없어졌다”고 한 〈삼국사기〉(三國史記) 구절에서 가져온 것이지요. 그리고 《잊히지 않는 것과 잊을 수 없는 것》(포이에마)이 2015년에 나왔습니다. ‘한 역사학자의 시대 읽기, 하나님의 뜻 찾기’라는 부제가 달렸는데, 제가 낸 칼럼집 중에는 가장 많이 읽힌 책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선생님의 평생 독자인데, 쓰시는 속도를 못 쫓아갈 때가 많습니다. 연세가 들면서도 판단력을 또렷하게 유지하면서 글을 쓰시는 비결이 무엇인가요? 주변에서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 생활에 부끄러운 것이 너무 많아요. 그런 중에서도 지금까지 쭉 계속해온 일 하나가 있는데요. 아침에 일어나 기도하고 꼭 성경을 읽습니다. 주로 영문 성경을 읽습니다. 지금은 NIV로 구약 한 장, NRSV로 신약 한 장, 또 예루살렘바이블(JB)로는 창세기부터 새로 한 장씩을 읽습니다. 이렇게 석 장을 읽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정신이 맑은 건지도 모르지요.
김회권: 후배들이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저는 성서 텍스트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실 때 사용하시는 알파벳이자 문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성서 텍스트가 다 담지 못할 정도로 광대무변하고 초월적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이 역사 속에 나타나셔서 개인과 집단에 말을 걸어오시는 방법, 형식, 그리고 어법과 화법에 대해서는 가장 표준적이고 최종적인 권위를 가진 정경입니다. 신구약 성서에 드러난 하나님은 인간에게 다가오실 때 거룩하신 하나님, 즉 손쉬운 접근과 인간 편에서의 자기 동일시를 허락하시지 않는 엄청난 이격과 거리두기의 하나님입니다. 이 거룩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야욕, 욕심, 과도한 열정, 권력욕, 재산 축적욕, 권력 남용 등 모든 종류의 부정하고 불의한 열정과 에너지를 극도로 위축시키고 약화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욕심을 부단히 경계하고 자기를 진지하게 성찰하도록 촉구하는 거룩한 말씀들로 가득 차 있기에, 성경을 읽는 행위는 이렇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눈초리 앞에 자아를 노출하는 행동입니다. 저도 매일 새벽 4시 30분 전후로 말씀 앞에 노출되는데요. 성서 속 하나님이 당신과 대적하는 개인, 집단, 단체, 왕조, 제국, 그리고 권력 집단들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읽으면서, 신문·방송을 장악하는 악인들의 활동상에 위축되지 않을 자유를 얻습니다. 나아가 성경 텍스트 안에는 세미한 하나님 음성이 아주 조용하게 들립니다.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를 들으려면 자기 부인, 자기 감금적 자아 억제에 연단되어야 합니다. 성서 텍스트 앞에 제 모습은 항상 과몰입적 과능동성, 자기 열정 충만 상태의 어설픈 몸부림입니다.
제가 선생님이 또렷함을 유지하며 글을 계속 쓰시는 다른 비결을 더 찾아보자면, 끊임없이 묻는 삶의 자세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게도 질문하시는 때가 많았는데, 선생님은 새로운 이슈가 생기면 후배들에게 사건의 경위와 본질을 파악하고자 계속 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김회권: 선생님이 판단력과 분별력을 유지하는 힘은 지금 선생님이 의미 깊게 만나는 사회적 교제권에서 오는 것으로 보입니다. 선생님 말씀에 영향을 받는 친교권이 적지 않고, 그들이 선생님을 고립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대다수는 자기를 둘러싼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판단력과 분별력이 휘어지기도 합니다. 선생님 주변에는 서로 탄식을 나눌 영적 동역자와 후진들이 많은 편입니다. 그동안 좁은 길을 걸어오신 보상이자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후배들에게 남기는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선생님과의 만남은 그 보람의 일부를 향유하는 일이면서도 은근히 부담이 있습니다.
이만열: 그런데 이제는 쓰는 게 참 힘이 듭니다. 지금까지 계속 일기를 써왔는데, 그것도 너무 오래 걸리고 힘에 부칩니다. 두어 시간이 걸리지요. 저녁에 일기를 쓰면 진이 다 빠져서 아무것도 못 해요. 전에는 어떤 제목을 가지고 서너 시간을 써서 페이스북에 올릴 수 있었는데, 요새는 그게 잘 안 됩니다. 쓰다 보면 졸리고, 졸리면 생각이 안 나니까요. 그래서 최근에 쓴 일기 중에는 윤 선생 같은 젊은 후배들이 쓴 참신한 글에 내 생각을 붙여놓은 것도 있습니다. 내가 쓰는 글을 줄이고 이 시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글들에 내 생각을 덧붙이는 거지요.
선생님은 본지의 초대 공동발행인이기도 하신데요. 한국 복음주의계에서 독특한 논조를 지닌 이 잡지가 여러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생존할 수 있게 많은 도움을 주셨지요.
복상이 참 어려움이 많았지요. 1991년에 시작할 때부터 간행비를 댈 사람이 없었고요. 박철수, 강경민, 김회권, 이문식 목사가 중심이 되어 잡지를 만들겠다고 발행인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을 때 저 혼자 하지 않고 김진홍 목사와 함께 시작했어요. 시작 때는 두 명의 발행인으로 했지요. 그러다 잡지가 상당히 진보적인 논점으로 흐르게 되었는데, 그때 복상의 정체성에 대해 문제 삼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러자 복상 정체성에 복음적 성격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하여 손봉호 교수, 홍정길 목사와 함께 네 사람 발행인 체제로 가게 되었지요.
아무래도 민주화운동이 계속 이어지던 1991년 상황에서 본지가 탄생한 데는 세계 복음주의 맥락도 있었지요?
복상의 발행 동기 중의 하나가 바로 세계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1974년 로잔언약’이었습니다. 복음 전파와 마찬가지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에 참여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 복음화 국제대회’(The 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에서 천명한 사건이었지요. 150여 개국 3천여 명이 합의한 그 선언문이 국내에는 1980년대 중반에 소개되면서 젊은 기독 청년들 숨통이 트였습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 기독교 복음주의권 안에는 갈등이 많았어요. 사회참여가 복음주의와 격리된 일처럼 여기는 문화가 있었으니까요. 로잔언약이 소개된 후에는 달라졌지요. 청년들이 모여서 선거를 포함한 다양한 사회운동에 참여하게 됐고, 그런 관점을 논의하고 담을 매개체(잡지)가 필요하게 되어 복상이 탄생했습니다. 창간호에 로잔언약이 부록으로 실렸고, 초기 몇 년간은 그 취지를 천명하기 위해 로잔언약에 따라 이 잡지를 간행한다는 문구를 꼭 잘 보이는 곳에 표기했지요.
김회권: 저는 로잔언약을 1980년대 중반 대학생 선교단체 ESF(기독대학인회)에서 접했습니다. 당시 사회적 모순에 맞서며 대학생들이 분신자살하는 중에도, 교회는 ‘죄 많은 세상 내 집 아니네’라는 탈세계주의적 복음성가를 많이 부르고 있었습니다. 현실 문제에 초연한 마음의 평안만을 강조하는 그 모습 앞에서 저도 말할 수 없는 갈증을 느꼈습니다. 그때 영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이승장 목사님이 ESF 잡지 〈소리〉에 영국 복음주의 운동 상황을 소개했는데, 로잔언약의 내용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1985년 무크지 〈소리〉, 이승장,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 로잔언약 제5항 해설”, 20-25쪽). 로잔언약을 접한 시기나 방법은 달랐지만, 같은 갈증을 느끼며 탄식하던 사람들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각성하고 연결되면서 복음주의 모임이 만들어지고 이만열 선생님도 만나게 된 것이죠. 복상이 만들어진 계기이자 동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박철수, 강경민, 이문식 목사 등은 조종남 박사가 쓴 로잔언약 관련 도서를 통해 로잔언약에 대해 처음 들었다고 했는데 그 책의 정확한 실체를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 대회에 한국 선교사들도 참석한 걸로 아는데요. 국내에 소개되기까지 세월이 너무 오래 걸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텍스트가 전파되는 일의 파급이 그렇게나 힘이 큰데, 왜 그 엄청난 체험을 텍스트로 출고하지 않았는지 아쉽습니다. 더 일찍 소개되었다면 좋았을 것을요.
이만열: 그렇죠.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역사적으로 탄생한 복상인데 이후로도 참 애로가 많았어요. 1997년 1월호에는 폐간 공지가 나갔는데, 돕는 사람이 생겨서 또 3년을 이어갈 수 있었지요. 지금 우리 교회(서울중앙교회)의 장로인 우창록 변호사가 도움을 주어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2004년에 폐간 위기를 맞았을 때는 〈뉴스앤조이〉와 합치기도 했고요(2005년 1월 통합, 2008년 말 독립). 사실 개인적으론 그런 식으로 유지하는 것에 반대했었어요. 그래서 당시 그 일을 논의하러 온 편집장과 이사진에게 제 생각을 밝히고 그간의 빚을 청산하도록 했어요. 저는 잡지든, 일이든 끝날 때 깨끗하게 죽어야 자기 평가를 제대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병상’에서나마 복상이 유지되는 길로 가고, 지금까지도 하나님이 살려두시는 걸 보면 하나님의 섭리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직도 할 역할이 있어서 지속시켜 주셨으니 시대적 사명을 더 잘 감당하길 빌어요.
당시 기자로 있던 저로서는 좀 의아한 점이 있었습니다. 실무자들이나 필자들이 아무리 자기를 갈아 넣어서 만들어도 잘 팔리지 않아서 폐간을 결정하고 안내한 것인데, 꼭 그럴 때마다 제삼자가 복상은 없애면 안 된다고 나섰습니다. 돌이켜 보면, 섭리가 있는 것 같다고 하신 말씀에 동의가 됩니다. 올해로 30주년을 맞는 복상인데요. 덧붙여주실 말씀이 있나요?
앞서도 말했지만 복상이 힘들게나마 지금까지 살아있는 건 유연성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주의라는 모토를 지향하면서도, 보수나 진보, 어느 한쪽에 함몰되지 않고 자기 객관화를 해볼 여유를 갖고 왔다고 봐요. 앞으로도 그 역할을 계속해야지요. 다만, 시대가 변하는데 잡지가 변하지 않을 순 없습니다. ‘본질’과 ‘본질을 둘러싼 형식’이 있지요. 본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형식을 계속 고쳐가야 합니다. 형식을 고집하면 본질이 변해요. 복음의 순수함을 추구하면서도 변하는 시대에 맞는 예언자 역할을 잘 감당하기를 부탁합니다.
진행 윤환철 미래나눔재단 사무총장
정리 오지은 객원기자(삼프레스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