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받는 사람들의 자리를 찾아주는 책이 많이 팔렸으면”
[373호 커버스토리] 이종연 IVP 편집장에게 듣는 ‘편집하는 마음’
‘텍스트’와 ‘세계’를 잇는 대표 직업군으로 출판 편집인을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이종연 편집장을 떠올렸다. 한국교회에 유의미한 IVP(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국내서들이 그의 손을 거쳤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20대 중반이던 2006년 말 〈복음과상황〉에 입사하여 2013년 퇴사한 전직 기자이기도 하다. 복상과 〈뉴스앤조이〉가 한 몸이던 때에 입사해 70권 넘게(195호~270호) 잡지를 만들었으며, 두 매체 독립과 이후의 시간 가운데 오롯이 자리를 지켰다. 그가 몸담았을 당시 복상 편집장이 세 번 바뀌었다. 그는 2013년 IVP로 자리를 옮겨 국내서를 기획·편집해 왔다. 기독교 출판계에서 내는 책 중에 외서 비중이 높다 보니 그의 자리가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종연 편집장의 개인 이력과 편집 이야기를 담아보았다. 서울 서교동에 있는 북카페 ‘산책’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 책에 대한 첫 기억이 있다면 들려달라. 어렸을 적부터 책을 좋아했나?
어렸을 적 집에 책이 별로 없었다. 누가 독서를 권해온 적도 없고, 책 선물을 받은 기억도 없다. 교실의 학급 문고, 학교 도서관에 많았다. 나는 여기, 책은 저기 있었다. 그 거리 때문에 호기심이 생겼던 것 같다. 갖지 못한 물건을 향한 욕구 때문인지 학급 문고 책은 다 읽었고, 도서관 책도 제법 많이 빌려서 읽었다. 결핍에서 시작한 독서였으나, 고등학교 때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책 읽기가 재밌었다. 주말이면 도서관에 갔다. 공부도 했지만 주로 책을 읽었는데, 어쩌면 중독 아니었을까.(웃음)
생각나는 책은 V. C. 앤드루스의 《다락방의 꽃들》 시리즈. 한 소녀의 사랑 이야기가 담겼는데, 나중에 보니 고딕 소설1)이었다. 독특하고 특별한 세계를 만난다는 느낌 때문에 깊이 몰입해서 읽었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 등, 앤드루스의 다른 책들도 읽었다. 그렇게 한 작가를 파기도 했고, 《폭풍의 언덕》·《테스》 같은 세계 명작들이 열심히 짝사랑만 해서 지독히 외로웠던 10대 시절을 버틸 수 있게 도와주었다.(웃음)
- 책을 향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진로를 잡지사와 출판사로 이끌었던 것인가.
전혀 아니다.(웃음) 아주 평범한 교사가 되고 싶었다. 그 꿈이 고등학생 때까지 이어졌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친구들을 상담해주는 ‘또래 상담사’ 교육을 받아 자연스럽게 상담심리에 관심이 생겼다. 입시 실패로 원하던 과는 들어가지 못했다.
복상도 가려던 직장이 아니었다. 대학 졸업 후 유학을 준비했다. 4학년 때 진로를 고민하는 시간을 보냈는데, 신앙이 중요한 이슈였다. 하나님이 화해와 평화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지 않았나. 기독교인이 화해의 사도로서 평화를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평화학을 전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평화학을 공부한 선교단체 간사님이 미국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 성서신학대학원(AMBS)과 노트르담 대학을 추천해줘서 영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마침 전 복상 기자이자, 현재는 미래나눔재단에 있는 윤환철 사무총장님을 IVF(한국기독학생회) 사회부 캠프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이후 윤 총장님에게 복상 기자에 지원해보라고 권유받았다. 그게 계기가 되어 지원서를 넣었고, 일할 기회를 얻었다. 복상과 〈뉴스앤조이〉가 하나였던 시기다. 분단 체제 미래의 한반도 평화를 위해 꼭 필요한 기독교 매체들이라고 생각했다.
IVP는 복상 기자를 그만둘 때쯤 ‘국내서 기획’에 참여해달라는 제안을 받아 편집자로 일하게 되었다.
- 결국 독자에서 기자로, 기자에서 편집자로 위치가 바뀌는 경험을 한 셈이다. 독자로서 책을 접할 때, 기자로서 책을 접할 때, 편집자로서 책을 접할 때 느낌이 각각 다르겠다.
독자는 ‘읽고 싶은 책’, 기자는 ‘읽어야 할 책’, 편집자는 ‘읽혀야 하는 책’에 관심을 둔다고 생각한다. 물론 편집자도 독자의 시선으로 책을 봐야 해서 명징하게 나뉘지 않는다.
독자로서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골고루 읽는 편이다. 소설을 자주 읽었다. 천명관·김애란처럼 언어 감각이 뛰어난 책, 박완서·장강명처럼 자기 서사가 비치는 책, 김초엽처럼 상상력이 탁월한 책을 좋아한다.
기자로서는 복상이 기독교 잡지사니까 역시 기독교 서적을 읽게 되지만, 필요에 따라 다른 분야 책도 많이 읽었다. 첫 직장이라 초반에는 글쓰기 및 취재 일반에 관한 책, 인터뷰 서적, 우리말을 다루는 책을 봤다. ‘상황’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니까 사회과학·인문학 서적을 보는 일도 빼놓을 수 없었다. 기독교권을 넘어, 여러 분야에서 이슈를 잘 해석하여 전달할 수 있는 안목을 지닌 기독교인 필자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특별히 박득훈 목사님의 ‘하나님 나라와 자본주의’ 강의를 들은 일을 계기로, 목사님과 수강생들이 함께 경제학 서적을 읽는 독서 모임을 만들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할 때보다 훨씬 많은 책을 이때 읽었다. 신자유주의 비판서, 마르크스주의 관련서 등을 보면서 노동의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매우 유익했는데, 몇 년 참여하다가 출산 이후 육아를 하면서 못 가게 되었다.
편집자로서는 한국교회 전반에 읽혀야 하는 책이 무엇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고민의 깊이는 단순 관심 수준을 넘어야 하고, 출판사 색깔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게 책을 기획해야 한다. 쉽지 않지만 재밌는 일이다. ‘독자들은 어떤 책을 좋아할까?’ ‘우리 출판사에 요구되는 책은 무엇인가?’ 고민하다 보면, ‘지금 필요한 책’에 대한 독자들의 고민과도 맞물리게 된다.
- 출판 편집자가 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나눠달라. SNS 등 환경의 변화로 과거보다 역할이 늘어난 것 같은데.
많이 변했다. 편집자 일은 확장되어온 측면이 있다. 전에는 물성을 지닌 상품인 책을 만드는 일 자체가 편집자 업무였다. ‘원재료와 같은 저자의 생(生) 원고를 받아 어떻게 완제품으로 만들어낼 것인가?’가 핵심이었다. 지금은 기획·편집을 넘어 홍보 및 마케팅, 물류까지 관여하게 되었다.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한다. 편집자로서 첫 번째 일은, 내고 싶거나 내야 한다고 생각되는 책을 써줄 작가를 찾거나 이미 그런 책을 쓴 외국 저자를 발굴하는 것이다. 출판사로 투고되는 출간 의뢰 원고들에서 옥석을 가려 보물을 발견하는 일도 가끔 있겠다. 원고의 가치와 완성도, 시장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출간이 결정되면 편집에 들어간다. 계속 저자와 소통하며 작업한다. 번역 원고도 예외 없이 원뜻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말에 맞게 자연스럽게 읽히도록 고친다.
책의 얼굴인 표지를 구상할 때 디자이너가 가장 어울리는 디자인을 할 수 있도록 코디네이팅해야 한다. 판형과 장정, 종이 재질과 서체 변화 등 외형인 만듦새와 관련해 생각할 거리가 많다. 제목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내용을 집약해야 해서 깊이 고민할 수밖에 없다. 요즘은 홍보 마케팅하는 일도 많이 요구받는다. SNS에서 편집자들이 활동하는 것도 일방적 광고가 아닌 소통을 원하는 시대정신과 만나 빚어진 일이다. 나도 나름대로 편집자 후기를 쓰고 카드 뉴스를 만든다든지, 출간 기념회나 독자 이벤트를 여는 등 후속 작업을 해왔다.
때로는 이 모든 작업을 편집자 역할로 보는 것은 ‘너무 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리 있는 말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요즘은 디자이너나 마케터도 여러 요구를 받는다. 디자이너가 책 내용이나 마케팅 방향에 의견을 내기도 하고, 마케터가 저자 발굴 등에 뛰어들기도 한다. 그렇게 업무가 겹쳐지는 묘한 지점이 있다. 모두 고유한 역할을 충실히 맡으면서 출판 전반에 참여하는 전문가가 돼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 편집자 일을 시작하던 시점과 편집장이 된 지금을 비교할 때 마음가짐에 어떤 변화가 있는가.
어떤 일이든 배움에는 끝이 없다. 그때도, 지금도 열심히 배워야겠다는 갈급한 마음을 갖고 있다. 월간지 기자에서 편집자로 막 바뀌었을 때 잡지와 단행본 느낌이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잘 몰랐다. 초반에는 적응하느라 바빴는데, 책 외형을 만드는 전 과정, 특히 내가 잘 모르는 제작 공정을 많이 배우려고 제작부 선배를 매우 귀찮게 했다.(웃음)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채로 기독교 서적을 만들고 있다는 부담감 때문에 3-4년 전부터 유학을 심각하게 고민했는데, 코로나가 터지면서 내 꿈도 터져 버렸다.(웃음) 그러다 편집장이 되고 말았다.
- 하나의 원고가 독자에게 전달되기까지 편집자 역할이 적지 않다. 편집장님이 생각하는 ‘좋은 편집자’란?
외형적 측면과 내형적 측면으로 나눌 수 있겠다. 어쨌거나 편집자는 ‘돕는 사람’ 아닐까. 저자가 자신의 주장을 가장 잘하도록 하는 일이 내형적 도움이라면, 그 책을 필요로 하는 독자들이 잘 읽을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외형적 도움이다. 도움을 제공할 때 편집자는 ‘말 많은 헬퍼(helper)’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와 독자를 위해 자기만의 전문적 기술을 드러내야 한다.
흔히들 편집자를 ‘첫 번째 독자’라고 한다. 원고를 읽으며 궁금하거나 이해하기 어렵거나 비약하는 내용이 있다면 저자에게 물어봐야 한다. 편집자 뜻대로 말없이 고치면 사고가 날 수 있다. ‘이건 저자의 생각이지’ 하고 소극적 태도로 넘어가면 아쉬움이 남을 것 같다. 저자 역량을 끌어올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
원고가 출판되면 어떻게든 팔아야 한다. 사실 출간하는 책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물건이 아닌가. ‘하나밖에 없는 이 좋은 물건을 어떻게 독자들에게 잘 전달할까’가 핵심이다. 유려하고 눈에 띄는 카피, 알짬을 담은 매력적인 문안으로 책을 소개해야 한다. 필요한 독자가 못 찾을 수도 있으니 카드 뉴스나 광고 등으로 끊임없이 말을 걸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저자와 독자에게 사랑받는 편집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출판 프로세스를 보면, 편집자에게 매우 중요한 자질은 소통 능력이다. 모든 일은 거대 담론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주 세세하고 자질구레한 요소까지 다 챙겨야 일이 잘 돌아가더라. 한 권의 책을 만들 때 ‘책임 편집자’ 호칭을 붙여준다. 기획부터 물류까지 전 과정에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면서 많은 사람과 소통해야 한다는 뜻이다.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겸손한 태도와 내가 옳다고 느끼는 생각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한 몸부림 사이에서 미묘한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함께하는 이들에게 먼저 신뢰를 얻으려면 개개인에게 맞춰서 최대한 잘 소통할 수 있어야겠다. 사실 어떤 일이든 소통 능력이 기본이다. 기본만 잘 지켜도 좋은 책을 만드는 역량을 키워갈 수 있다고 본다.
- 편집자가 돼서 다행이다’라고 느끼는 순간이 있나.
간단하게 말하면, ‘배우면서 일한다’는 것. 기독교 출판사에서 일하는 편집자라서 더 그럴 텐데, 기독교 도서는 재미만 추구하지는 않는다. ‘어떻게 삶과 신앙을 분리하지 않고 살 수 있는가’ ‘팬데믹 가운데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등 본질적인 질문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나만 해도 독자로서 책을 찾을 때 재미보다 필요가 앞선다. 느슨하게 신앙생활하고 싶지는 않아서, 내가 품고 있는 질문들에 답하는 책들에 대한 필요가 있다. 그렇게 신앙인으로서 읽어야 하는 책의 첫 번째 독자가 되는 일이 무척이나 설레고 좋다.
읽으면 좋지만, 자발적으로 읽기 힘든 책들도 있지 않나. 이 일이 그런 책을 읽도록 묶어주기도 한다. 가끔 저자들이 책에 감사 인사를 쓰면서 편집자 이름을 언급해주실 때가 있다. 그러면 아주 기분이 좋다. 열심히 일한 보람을 느낀달까. 물론 막 티를 내지는 않는다.(웃음)
- 앞서 신학 전공자가 아니라서 기독교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는 데 부담을 느끼기도 한다고 말했는데, 다른 분야를 전공했기 때문에 얻은 이점도 있을 것 같다.
처음에는 신학을 전공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기독교 자체가 외국 종교이고, 외국 신학자들 이름과 계보는 책을 읽어도 잘 모르겠더라. 지형도를 그리기 힘들었다. 그러다 기독교 출판사가 신학책만 펴내는 곳도 아니고, 그렇게만 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짬밥이 쌓일수록, 신학 전공이 장점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 편집자는 자기 학문을 펼치는 사람이 아니기에 자기 신학을 표출하는 일과 거리가 멀다. 신학을 전공해도 기독교 출판 전반을 다 알지 못한다. 칼 바르트가 ‘기독교인이라면 모두 신학자’라고 했고, 김민석 작가님이 《요한복음 뒷조사》(새물결플러스)에 ‘질문하는 사람은 모두 신학자’라고 썼는데, 동의가 되었다. 김진혁 교수님의 《질문하는 신학》(복있는사람)에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신앙인이라면 신 자체를 고민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과 인간이 겪는 고통 등에 관심을 두면서, 어떻게 응답할지 다채롭게 질문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러려면 신학만큼 이 세상 학문과 사고하는 능력이 필요하고, 다양한 영역을 향한 관심이 중요하겠다. 최근 사회에 ‘감수성’이 대두된다. 어떤 안건에 감수성 있게 대응하는 일이 중요한데, 올해 IVP에서 《예수의 정치학》을 절판하고 《실패한 요더의 정치학》을 출간한 일도, 계약돼있던 장 바니에 책을 내지 않기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2)
나는 경제학·사회학을 전공할 때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학문이라는 생각으로 공부했다. 전공이 편집 일에 큰 도움을 주지는 않지만, 사회를 이해하는 밑바탕을 잘 다지게 했다고 생각한다. 흔히들 학교 공부가 전부가 아니라고 하지 않나. 늘 학문으로서의 신학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하려 한다.
- 편집한 작업물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책 몇 권만 소개해달라.
돌아보니 직간접적으로 기획한 책이 20여 권, 책임 편집을 맡았던 책이 40여 권이더라. 사실 책을 낼 때 항상 다음 책에 관심을 두고 공부해야 해서 출간되면 빨리빨리 흘려보낸다. 그래도 모두 다 소중한데, 안정혜 작가님의 《비혼주의자 마리아》, 티시 해리슨 워런의 《오늘이라는 예배》, 김경아 작가님의 《성을 알면 달라지는 것들》, 일레인 스토키의 《우리가 멈추지 않는다면》을 꼽을 수 있겠다. 책을 고르는 과정에서 내가 신앙의 실천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우연히도 다 여성 저자가 썼다.(웃음) 네 권 다 출간 후 여러 분야에서 상을 받았고, 앞의 세 권은 지금도 많이 판매되고 있어서 감사하다. 일레인 스토키 책은 너무 안 팔려서 속상하고.
《비혼주의자 마리아》는 한국교회 내 여성 차별과 폭력의 현실을 풀어낸 IVP 최초의 만화책이다. 《오늘이라는 예배》는 일상이 우리를 형성하고, 일상 행위가 영적 실천과 예배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하루’의 일과 안에 담아낸다. 《성을 알면 달라지는 것들》은 교회에서 금기시되고 편향된 교육이 이뤄지기도 하는 ‘성’에 대해 균형감 있고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다. 성교육이 곧 성품 교육이자 생활 교육이 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우리가 멈추지 않는다면》은 세계 여성 폭력의 현실을 고발한다. 여성 폭력의 이론적 근거들을 설명하고 반박하며, 이를 둘러싼 세계 종교의 내부 논쟁 등도 소개한다. 각종 사례와 증언을 보고서 형식으로 전한다. 폭력의 잔인성, 심각한 폭력이 편재한다는 사실에 몸서리치면서 편집했고, 작업하면서 많이 울었다. 여성학 교재나 참고서로 읽어도 좋다. 워낙 방대한 자료와 다양한 이론이 담겨있어서.
- 개인적으로 IVP라고 하면, 번역 출간된 유명 외국 저자의 스테디셀러들이 떠오른다. 편집장님은 국내 기획을 담당해서인지 이런 책들과 결이 다른 서적을 제법 출간해온 것 같다. 앞서 언급했듯이, 만화책 《비혼주의자 마리아》를 기획 출간하기도 하는 등 유의미한 시도를 지속해온 듯하다.
나는 처음부터 국내서 기획에 특화된 편집자로 일을 시작했다. 그만큼 ‘국내 저자가 쓴 책들을 기획해야 한다’는 출판사 목표가 뚜렷했다. 복상에서 일했던 경력을 인정받았다는 생각이 들고, IVP 국내서 기획을 활성화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것 같아 감사하다. 내가 기획한 책들에 더해, 복상에서부터 관계가 있던 저자분들이 흔쾌히 원고를 투고해주기도 했다. 경험과 경력이 출판에 활용되어 서로 윈-윈이 아니었나 싶다. 《비혼주의자 마리아》는 안정혜 작가님과 함께 기획한 만화책인데, 텀블벅이 성공하고 지금도 잘 팔려서 여성 편집자로서 무척 뿌듯하고 보람을 느낀다. 출간 이후 안정혜 작가님이 언론 인터뷰, 행사, 강연 등을 굉장히 많이 하셨는데, 그때마다 내 이름을 꼭 언급해주셨다. 이렇게 기획자 이름을 많이 언급하는 저자가 또 있을까. 나도 오늘에야 비로소 안정혜 작가님 이름을 언급할 수 있어서 참 기쁘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리며 “린든 작가님, 정말 팬이에요!”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웃음)
- 편집한 책 중에 많이 팔리기를 원했는데, 그렇지 못했던 책이 있다면.
미로슬라브 볼프의 《인간의 번영》. 정말 좋은 책인데, 많이 안 팔렸다. 지구화 시대에 각 종교가 새로운 비전으로 삼아야 할 척도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종교인이라면 꼭 읽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방사능 오염, 기후 위기 등 환경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자본주의의 지구화가 불러온 양극화가 매우 문제시되는 시대이다. 이때 세계 종교가 각자가 추구하는 최고의 모습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내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지구화가 진정한 인간 번영을 추구할 수 있도록 종교가 공적 역할을 회복해야 한다는 이 책 주장에 너무나 동의한다. 이것이 어쩌면 거대한 주장 같지만, 나는 무척 와닿았다. 열심히 공부하면서 만든 책이다. 종교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번영을 위해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분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 기독교 출판계에서 나오는 도서들에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말을 일부 관계자에게 들은 적이 있다. 이에 관한 생각과 더불어, 기독교 출판계에 어떤 책들이 필요하다고 보는지 이야기해달라.
많은 기독교 출판사가 지금 이 순간에도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독자의 다양한 수요에 맞는 책을 내야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독자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출판 시장이 어려운데도 새로 출판사를 시작하는 분들이 있다. 1인 출판사가 많이 생겼는데, 이분들이 심지어 ‘내가 내고 싶은 책만 낸다’라고 해도 다양성이 확장된다고 본다. 행정 업무도 많고 수입도 일정하지 않아 여러모로 힘들 텐데, 독자들이 개성 있는 각 출판사가 내는 책들에 많은 관심을 보이면 좋겠다.
그럼에도 아쉬운 지점은 있다. 교회 안팎에서 이야기되는 각종 이슈를 잘 따라가지 못하는 듯하다. 이 땅에 발 딛고 살아가는 일반 신자들을 위한 일상 언어가 담긴 책들이 출간되는 속도가 더디지 않나. 이를테면 여성·어린이·환경·소수자를 다루는 서적이 부족하다. 이런 유의 책이 없지 않지만, 균형 잡힌 관점으로 쓰인 경우는 드물다.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기존에 있는 해석을 조금 더 세련되게 표현을 바꿔서 반복하는 데 그치는 듯하여 우려하게 된다. 특히 이분법적 틀로 나눠서 ‘이것만 옳다’ 주장하는 책들은 시대와 동떨어졌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아이들은 계속 자라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각종 이슈나 해석을 보고 배울 텐데, 원론적 이야기만 하면 ‘답을 주지 못하는 기독교’가 되지 않겠나. 우리가 풀어나가야 하는 과제인 것 같다.
- 기독교 출판계에서 IVP의 위치도 많이 고민했을 것 같다.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나.
IVP가 40년 넘게 나름대로 역할을 해와서 직원이기 전에 독자로서 고맙게 생각한다. 동료들도 비슷하게 생각할 것이다. 기획·편집과 방향성이 다변화했지만, 지금은 비슷한 책을 내는 출판사가 제법 생겼다. 경쟁해야 하지만, 결국 칼과 칼이 서로를 더 날카롭게 하는 이치로 보자면 감사한 일이다. 일례로 IVP가 1세기 관련 도서들을 출간해오지 않았나. 로버트 뱅크스 가 쓴 조금 가벼운 책부터 웨인 믹스의 학술서, 메노나이트 저자나 국내 저자의 저술까지 골고루 냈는데, 다른 출판사들도 영향을 받아 1세기 책들을 출간하고 있다.
다만, 이제는 총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이다. 10-20대는 더 심각하다. 책 읽는 사람도 그만큼 비율적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보면, 미래를 낙관하기 어렵다. 인구 감소에 맞춰 기독교 인구가 줄고 있고, 한국교회가 욕먹는 일도 많아 교회를 떠나는 이들도 증가할 것이다. 그럼에도 책이 주는 희망과 위로와 도전이 존재하고, 기독교가 희망할 수 없는 것을 희망하는 종교이기도 하니까 기독교 인구가 줄어도 독서 인구는 늘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희망하고 싶다.(웃음)
IVP의 특색을 보면, 우선 IVF에 속한 출판부이기에 캠퍼스 학생을 비롯해 젊은 세대에 필요한 책을 찾아서 내야 하는 과제가 있다. 30-40대 기독교인을 아우르는 책, 이들의 신앙관·세계관을 정립하고 현실에서 고민하는 지점을 함께 생각하면서 답할 수 있는 책도 필요하다고 본다. 외서를 많이 출간한다는 자각도 있어서 국내서도 계속 내려 하고, 유명 저자 외에 신진 작가 발굴에도 힘을 쏟고자 한다.
- 책이라는 매체만이 갖는 매력과 힘에 대한 편집장님의 생각을 듣고 싶다.
얼마 전, ‘밀리의 서재’에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열림원)을 오디오북으로 들었다. 고독의 중요성에 관한 이야기가 와닿았다. 메시지도 메시지이지만, 이때 내가 점유한 시공간에서 고독이 주는 가치를 누렸다. 독서는 텍스트를 ‘읽는’ 행위이지만, 자기 자신에게 고독을 선물해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책을 읽으려면 나만의 시간과 공간에서 침묵해야 한다. 워킹맘이다 보니 여유를 갖기 어렵다. 그때 책이 고독의 시간을 준다. 텍스트가 말을 걸어오는 가운데 잠깐 멈춰서 생각할 때가 있지 않나. 그때 침묵이 주는 위로가 있다. 《월든》은 배우 한예리 씨 목소리로 들었는데, 이분이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기 자신을 안아주면서 스스로 토닥이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내가 예민하고 완벽주의 기질이 있어서 잘한 일보다 잘못한 일을 먼저 살피는데, 그런 나를 하나님이 안아주시는 것 같았다.(웃음) 책은 재미도 주고 지식도 주지만, 위로도 줄 수 있다. 사람은 저마다 고독한 시간과 위로가 필요한데, 그때 책이 곁에서 가만히 위로해주는 벗이 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김영봉 목사님의 《가만히 위로하는 마음으로》라는 책을 편집한 일이 떠오른다.(웃음)
- 앞으로 어떤 책을 만들고 싶은가.
잘 팔리는 책을 만들고 싶다.(웃음) 오늘 점심을 먹으면서 동료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는데, 내가 생각한 답과 똑같아서 놀랐다. 성경이 언제나 베스트셀러인데, 나도 베스트셀러를 만들고 싶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한 번도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 사람들 자리를 찾아주는 책, 그들이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을 드러내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 좋겠다. 사실 예수님이 전한 복음이 그런 내용이었다. 여성들, 소수자들, 어린이들, 노인들, 난민들, 외국인 노동자들, 가난한 사람들이 모두 인간다운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돕는 책이, 장르를 불문하고 잘나갔으면 좋겠다.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고 배제할 권리가 없음을 드러내주는 책은 모든 기독교인이 좋아할 것 같은데, 내가 믿음이 부족한 것 같다.(웃음) 2019년에 편집한 도로시 세이어즈의 《여성은 인간인가?》가 그런 책이었는데, 참 안 팔렸다. 이런 책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에필로그
인터뷰하면서 복상에 관한 질문도 던졌다. 지금 복상의 부족한 면을 이야기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오히려 칭찬과 격려만 들어 민망했다. 복상 시절을 떠올렸을 때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냐고 묻자, 이종연 편집장은 “사내에서 비밀 연애를 할 때 남친이 몰래 제 자리에 간식을 갖다주었던 일이 기억나네요”라고 답하며 웃었다. 이 남자친구는 몇 년 뒤 남편이 되었다. 현 〈뉴스앤조이〉 김은석 사역기획국장이다. 서로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인생의 동반자로서 같은 꿈을 공유한다는 사실이 참 좋다고 덧붙였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복상에서 일했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복상 에디터들의 업무를 돌아보게 했다.
“저에게는 하나였어요. 매달 복상을 기다리는 독자들이 계시다. 삶의 최전선에서 어떻게든 시대와 호흡하며 신앙인답게 사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복상 독자라고 생각해요. 그분들이 기쁘게 읽을 수 있는, 도전받는 콘텐츠를 담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 그거 하나였어요. 편집위원들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열심히 참여해 주셨는데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어려운 상황도 있었지만, 많은 것을 배웠고 좋은 사람을 얻었어요.”
사실 인터뷰는 12월호가 나오기 한참 전인 8월 19일에 진행했다. 겨울로 들어가는 때에 잡지가 나올 것을 배려하여, 그는 여름 날씨에도 테일러드 재킷을 입고 나오는 ‘센스’를 발휘했다. 서면으로도 인터뷰 답을 꼼꼼히 준비해왔고, 사진 촬영 때의 여러 요청과 30주년 축하 영상 등 거듭된 부탁도 웃으면서 흔쾌히 들어주었다.
1) 고딕 소설은 ‘공포’와 ‘로맨스’ 요소가 섞인 장르이다. 다소 범위가 넓은 소설 양식이지만, 음산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로 오묘한 느낌을 자아내기도 하고, 기괴하고 신비스러운 느낌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등 특유의 매력이 있다.
2) 《예수의 정치학》은 평화신학 대가 존 하워드 요더가 남긴 대표작으로, 기독교 윤리학 분야의 명저로 손꼽힌다. 요더 사후인 2015년, 그가 수십 년 동안 백 명 가까이 되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바 있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공동체 라르슈를 설립하여 섬겨온 것으로 유명한 가톨릭 신학자 장 바니에 또한 사후인 2020년, 과거 6명의 여성에게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진행 강동석 기자 kk11@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