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책방지기들의 ‘텍스트’를 대하는 자세

[373호 커버스토리] 순천에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강성호·이로운 부부

2021-11-30     강성호·이로운
강성호 작가(가장 왼쪽)와 이로운 예술강사(오른쪽) 가족. ⓒ복음과상황 정민호

강성호·이로운 부부는 9년 전 연고 없던 순천에 자리를 잡았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곳이었지만, 2016년 1월 골목책방 ‘그냥과 보통’을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책방 운영을 계기로 지역 사람들과 더 돈독하게 관계가 맺어졌고, 2017년 5월에 태어난 아이는 이웃들에게 큰 사랑을 받으며 크고 있다. 3년 가까이 운영하던 책방은 문을 닫았지만, 여전히 두 사람은 ‘텍스트’를 매개로 순천 안팎의 풍성한 이야기를 써가고 있다.

이로운 예술강사는 필사와 독서 모임을 이어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직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옥천동 이음이네 집》을 만들었다. 이 책은 곧 떠날 집에서의 추억이 아이에게 소중한 자산으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밥도 잠도 TV도 줄이고 초능력을 발휘해 만든” 것이다. 한편, 《한국기독교 흑역사》(짓다), 《저항하는 그리스도인》(복있는사람)을 쓴 강성호 작가는 지난여름 《혁명을 꿈꾼 독서가들》(오월의봄)을 펴냈다. 독립운동가들의 독서 여정을 추적해 책 읽기와 삶의 관계를 파고드는 책이다.

인터뷰는 순천 옥천동에 있는 자택에서 10월 1~2일에 진행했다. 텍스트에는 미처 담지 못하던 여백의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누는 시간이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 ‘그냥과 보통’이라는 책방도 운영해보셨고, 근래에는 그림책도 만들었잖아요? 페미니즘 서적을 안내하는 책 포스터도 제작하셨고요. 책을 매개로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신 것 같아요.

이로운: 책 포스터는 순천시 청년사업팀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제가 참여하는 페미니즘 독서 모임에서 만들었어요. 책방을 시작한 후에 필사 모임, 영화 모임, 독서 모임 등 다양한 모임을 했거든요. 그러다 출산을 앞두고, ‘출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을 고민한 끝에 ‘페미니즘 독서 모임’을 시작했죠. 강남역 사건이 일어난 2016년에 ‘페미니즘 리부트’로 관련 서적이 쏟아져 나왔잖아요? 책방을 시작한 시점이라 관심은 두고 있었는데, 바로 모임을 여는 것이 조심스럽더라고요.

- 어떤 부분이 조심스러우셨나요?

순천이라는 도시에서 진행하기에는 뾰족한 모임이 아닐까 싶었어요. 관심 보이는 사람이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해 미뤄왔던 거죠. 하지만 편견이었더라고요. 모임을 열자마자 사람들이 나타났거든요.(웃음) 기다렸다면서. 아이를 낳고도 이어져 4년 정도 모이고 있네요.

- 독서 모임만으로 4년이면 정말 기네요. 책방을 닫고도 계속 모이고 있는 거잖아요?

‘페미니즘 서적 함께 읽기’가 모임 정체성이고요. 3년 정도 되었을 때 아무래도 분위기가 떨어지니까 두 주에 한 번 모이던 것이 한 달에 한 번 모이게 되고, 책 나눔보다 바쁘게 사는 이야기가 중심이 되었는데요. 서로 만나면서 힘을 주는 차원에서 정기적으로 모이고 있죠. 모임 이름은 ‘무책임’이에요.(웃음) 올해는 코로나가 있어서 의무적 책 읽기는 내려놓고 쉬어가는 해로 생각하기로 했어요.

사실 페미니즘 독서 모임을 하나 더 하는데요. ‘그냥과 보통’ 자리에 오게 된 책방 ‘서성이다’에서 하는 모임이에요. 독서 모임 수요 조사 차원에서 열었던 행사가 확장되어 지금까지 왔네요. 부담되는 것은 사실이에요. 제가 뭐라고 페미니즘 모임을 두 개씩이나 하나 싶어서. 예전에 SFC(학생신앙운동) 간사로 지내면서 항상 ‘앎과 삶의 일치’를 신조처럼 여겼거든요. 이제 간사는 아니지만, 그런 의식이 제 안에 여전히 남아있어서 괴리감 때문에 힘들 때도 있어요. 이슈가 터질 때 책만 읽고 아무것도 안 하니까요.

- 해가 갈수록 페미니즘 콘텐츠에 대한 정서가 변화를 겪는 것 같아요. 책방을 열었을 때 이후로 체감하신 부분이 있으신가요?

영화과를 졸업한 이력을 살려 예술강사로 여러 기관에서 영화나 미디어 교육 등을 하고 있는데요. 보조교사로 순천대학교 학생이 두 명 왔어요. 쇼트커트로 머리를 짧게 쳤더라고요. 알고 보니 영 페미니스트들이었어요. 서로 반가워서 막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생각보다 페미니즘 서적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처음에 좀 놀라기는 했죠. 저에게 페미니즘은 기존의 세계관을 깨고, 새로운 언어를 만나는 공부였거든요. 우리 세대가 독서를 통해 질문하면서 사유를 넓혀왔다면, 요즘 20대는 페미니즘을 삶으로 받아들여 왔더라고요. 제가 고민한 문제들을 상식으로 체화한 세대 같아요.

- 필사 모임은 진행할 때 어떠셨나요?

제가 그전까지 필사를 열심히 하던 사람은 아니었고요.(웃음) 서울에 있는 ‘일단멈춤’이라는 책방에서 필사 모임을 진행한 기록을 보고 ‘해보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죠.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 동안 자기가 가져온 책을 필사하는 모임이에요. 바쁘게 살다가 그 시간의 정적을 공유하는 일이 좋은 경험이더라고요. 관심 없는 책에 눈길을 돌릴 수도 있는 계기도 되죠. 필사가 다 끝나면, 서로 필사한 문장을 듣고 자연스럽게 책을 소개하는 시간을 보내거든요. ‘나에게는 안 맞는 책일 줄 알았는데, 문장을 들으니까 좋네?’ 하고 반응할 수 있잖아요. 이제 멤버들과는 사적으로만 만나고 있죠. 저도 캘리그래피를 하다 보니 좋은 문장이 있으면 가끔 써보게 되더라고요.

ⓒ복음과상황 정민호

- 안 그래도 자택에 캘리그래피가 많더라고요.

사실 SFC 간사를 하기 전 ‘교회 언니’ 시절부터 찬양 가사를 쓰는 일을 좋아해서 피오피(POP)에도 얼씬거렸죠. 글씨 쓰는 일은 SFC 공보부에서 단련되었어요. 그렇게 관심을 두다가 취미로 배워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캘리그래피 수업을 듣게 되었고요. 잊을 만하면 쓰는 정도로 꾸준히 하고 있어요.

- 책방을 통해 많은 일이 있었네요. 순천에는 어떻게 오시게 되셨나요?

서른 살까지 부산에서 부모님과 지냈어요. 6년 동안 해왔던 SFC 간사를 그만두면서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시작했어요. 대학원에서 문화를 연구하고 싶었는데요. 어머니가 말씀 그대로 “시집이나 가지, 무슨 대학원이냐?”라고 반응하더라고요.(웃음) 나이 서른에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독립을 못 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어요. 새 직장을 모색하다가 예술강사라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지역을 배정받을 때 전남권으로 신청했죠. 부산은 이미 포화 상태이고, 전남권에는 영화과가 없어서 다른 지역 강사 의존율이 높거든요. 영화 수업을 신청해서 신규 강사로 배정받을 수 있는 학교가 순천에 있어서 오게 되었어요.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고 9년째 살고 있네요.(웃음) 사실 책방을 열기 전까지 순천은 저에게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도시였어요. 그러다 책방을 통해 지역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아이가 생기면서 달라졌죠. 아이가 동네에서 정말 많은 사랑을 받거든요. 동네에서는 ‘인싸’가 되면서(웃음), 저도 지역 밀착형 인간이 되었죠. 거리를 거닐다 아는 사람을 만나 안부를 나누는 일상은 대도시에서는 상상할 수 없어요. 아이에게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어른이 돼서도 마을에 대한 이미지가 남아있을 테니까.

ⓒ복음과상황 정민호

- 그림책 《옥천동 이음이네 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도전! 순천시민책’ 프로젝트에 참여한 결과인데요. 순천시에서 11월 11일에 1,111권의 책을 동시에 출간하는 행사로 시민 작가를 배출하는 기네스에 도전하거든요. 사실 이번에 채색을 처음 해봤어요. 책을 보시면, 페이지마다 저희 아들 이음이 얼굴이 달라요.(웃음) 40쪽을 그리는데, 기한을 맞추느라 힘들었죠. 저는 5권을 받았고, 여분으로 인쇄한 책은 다른 책들과 함께 순천시에서 전시한다고 하더라고요.

- 저자 소개가 재밌어요. 특히 “우리가 이 집에서 서로를 사랑하며 보냈던 시간들이 이음이에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소중한 자산으로 남기를 바라며 이 책을 쓰고 그렸다. 엄마가 밥도 잠도 TV도 줄이고, 초능력을 발휘해 만든 이 책을 이음이가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라고 쓴 부분이요.(웃음)

마지막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열심히 그렸죠.(웃음) 곧 아파트로 이사하거든요. 이 집과 이 동네를 이음이가 추억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했어요. 주택에 사는 일이 정말 좋은데요. 근처에 이음이 또래 친구들이 별로 없어서 아이 키우는 젊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로 가기로 했죠. 떠나는 게 정말 아쉬워요.

- 글 쓰는 일도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요? 영화과를 나오기도 하셨고.

SFC에 있을 때 선배 간사님들이 크고 작은 지면을 맡겨줘서 신학대학원이나 SFC에서 발행하는 잡지에 몇 번 글을 쓰기는 했어요. 글쓰기에 대한 욕심은 있는데 쓰는 동안 너무 괴로워서 매일 미루고 있어요. 언젠가 내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야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는 있어요. 신랑이 기록을 바탕으로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저는 저 자신과 주변 이야기에 관심이 많아요.

- 글을 쓰신다면 어떤 주제를 염두에 두고 있나요?

말씀드릴까 말까 고민되는 이야기예요. 이 인터뷰가 조심스러웠던 이유이기도 하고요. 제가 지금 교회 바깥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알면, 예전에 저를 알았던 분들이 의아해할 것 같아요. 그분들에게 지금도 부채감을 안고 사는데요. 저는 서른 살까지 굉장히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어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정체성이 있었거든요. 정체성에 변화가 생기면서 경계에서 사유해보고 싶어졌고, 그 시도가 여기까지 저를 이끌었네요. SFC 간사를 할 때는 제 생각에 균열이 생기고 질문이 생겨도 확장해나가기 힘들었어요. 저를 지켜보는 후배들, 학생들이 있었으니까.

저를 ‘신실한 이로운’만으로 기억하는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면 어떻게 반응할까 싶네요. 사실 부산을 떠나올 때 부모님만 떠난 것이 아니라 공동체도 떠난 것이었어요. 지켜보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제가 어떤 사람인지, 저는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경험하고 싶었거든요. 괜찮은 교회를 찾아다니다가 세월호 때 전환점이 왔고, 이후 계속 경계에 존재하다가 어느 순간 ‘나는 교회 경계 바깥으로 나오게 되었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죠.

문제는 지금은 연락이 끊겨버린, 제가 너무도 사랑했던 운동원들이에요. 옛날에 제가 설교하고 강의하면서 이 사람들에게 ‘우리는 이런 크리스천이 돼야 해’라고 말하는 선동가로 살았거든요. 이 사실이 부채감으로 남아있어요. 계기와 기회가 있다면, 제가 어떻게 생각이 바뀌었는지, 어떤 과정을 통과해왔는지 이야기하고 싶기는 해요. ‘사과’라고 말하면 우습지만,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있죠. 그때 ‘이것만 정답이야’라고 해서 미안하다고. 쓰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이 숙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 늘 걸림돌처럼 느껴져요.

- 되게 묵직한 숙제인 것 같네요.

저는 기자님들을 포함하여 울타리 안에 있는 분들이 잘못되었거나 저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게 여길 수도 없고요. 제가 경계 안에서 활동할 때는, 바깥으로 나가서 손가락질만 하는 사람들이 너무 싫었거든요. 어떻게든 내부에 남아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보려 하고 뭐 하나라도 변화를 일으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우리인데, 팔짱 끼고 말 보태는 일은 너무 쉽잖아요. 바꿔나가는 시도와 노력에는 1도 도움 주지 않을 거면서 ‘그것밖에 못 해?’라고 말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요. 결국 그 안에서 작은 시도를 끊임없이 하는 사람들이 멋지다고 생각해요.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고요. 다만, 그럼에도 경계 밖으로 나오고 싶은 사람은 나와도 된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저는 그런 사람들의 곁이 되어주고 싶고요.

ⓒ복음과상황 정민호

- 괜찮으시면, SFC 생활을 할 때 이야기를 조금 들려주시겠어요? 지금도 그곳에 계신 분들을 향해 깊은 마음을 품고 계신 것처럼 느껴져서요.

SFC를 만나기 전에는 훨씬 더 보수적인 신앙인이었어요. 선교단체에서 활동하느라 교회 생활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을 싫어했거든요. SFC 만나고 나서 오히려 사유가 넓어졌죠. 간사를 하면서 좋은 선배들을 통해 크리스천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견문을 넓힐 수 있었어요. 저를 키워준 곳이에요.

대학 졸업 후 6년 동안 간사를 했어요. 캠퍼스 사역을 맡게 되었을 때 공부를 정말 많이 했어요. 간사로서 대학생 청년들에게 정말 도움이 되고 싶었거든요. 앞서 말씀드린 내적 고민은 이때 겪었죠. 청년 이슈가 한창 떠오르던 시점이었고, 《88만원 세대》(레디앙),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푸른숲)와 같은 책이 나왔을 때였는데 읽다가 제가 막 뜨거워지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도 20대 후반인 청년이었는데, 너무 일찍 ‘선생 타이틀’을 달면서 청년들을 빨리 대상화해버린 것 같아요.

그 당시 저는 청년들이 교회 안에만 있을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어떤 이슈가 돌아가는지 알아야 하고, 그에 대한 신앙적·신학적 고민이 준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복상도 열심히 읽었죠. 애독자였거든요. 복상 사무실에 가서 편집장님도 만날 정도였으니까요. 우리 리더들 데리고 정병오 선생님을 찾아가 《시대를 뒤서 가는 사람》(좋은교사)으로 저자와의 만남을 진행하기도 했고요. 청어람아카데미(현 청어람ARMC)에도 방문했어요. “너희가 학교에서 예배 한 번 더 드리는 수준으로 선교단체를 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곤 했어요. 계속 질문하면서 청년들 사고의 폭을 넓혀주고 싶었죠.

- ‘열혈 간사’였네요. 그랬는데, 왜 SFC를 나오기로 결심하셨나요?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장벽을 많이 느꼈어요. 제가 의대와 간호대 캠퍼스를 맡았어요. 거기서 의약분업, 의료 민영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죠. 의대와 간호대를 다니는 크리스천으로서 이런 질문들을 가까이해야 한다는 이유였어요. 학교 큰 모임 시간에 다큐멘터리 〈하얀 정글〉을 함께 보고 소모임별로 토론해보라고 시키고요.(웃음) 그러다 문득 내가 멋진 간사가 되기 위해 학생들을 자꾸만 동원한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다들 자기 공부를 하기도 버겁고, 개인의 문제로 더 힘든 상황일 수도 있는데 말이에요. 이 친구들에게는 함께 모여서 찬양하고, 기도회에 참여하고, 위안 주는 말씀을 듣는 일이 더 소중할 수 있잖아요.

맡았던 또 다른 캠퍼스는, 소위 ‘지잡대’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나려고 전과나 편입을 준비하고, 토익을 공부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많았어요. 생업으로 아르바이트하고. 그런 친구들에게 “지금 아르바이트가 중요한 것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일이 너무도 부끄럽더라고요. 수련회보다 아르바이트가 중요할 수 있고, 세상 싸움보다 자기 싸움이 더 큰 문제일 수 있는데…. 손가락질할 수 없잖아요. 간사 일에 회의를 느꼈죠.

- 고민이 깊었겠어요.

말하자면, 저는 우리가 다 같이 하나님 나라 운동가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똘똘 뭉쳐있던 거죠. 그때 제가 복상을 학생들에게 그렇게 읽으라고 했는데, 안 읽더라고요.(웃음) “정말 다른 크리스천이 되어야 해. ‘빛과 소금’이라고 말만 해서는 안 돼. 보여줘야 해”라고 말하고 다녔죠.

지금 교회를 다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밝힌 상태에서, 복상에 제 생각을 꺼내놓는 일이 조심스러운데요. 지금 SFC 안에 계신 분들 때문이에요. 자기 씨름을 이어가고 계실 텐데, 힘 빠지게 만들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 정도 씨름도 안 하는 제가 어떤 더 나은 길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저는 경계에서 사유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느덧 그것을 포기한 사람이 되었네요. 더 치열하게 씨름해보고 싶어서 나왔는데 말이에요.

청어람ARMC 세속성자 모임이나, 교회 바깥에서 다른 모임을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 저에게는 감이 잘 잡히지 않아요. ‘더 사랑해야 할 수 있는’ 모임 같아요. 관성대로는 어려운 일이죠. 정말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것 같고, 회의감도 더 많이 들지 않을까 싶고. 저는 거기까지는 안 되나 봐요.(웃음) 저는 제가 쓰는 언어를 통째로 다 버렸잖아요. 거기서 오는 굉장한 빈곤이 있는데요. 다른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죠. 그래서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복음과상황 정민호

- 빈곤을 채워줄 글쓰기를 응원합니다.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 ‘좋은 독자’ ‘좋은 관객’은 어떤 존재일까요?

책은 쉽게 쓰였든 어렵게 쓰였든 작가, 편집자, 출판사 등을 거쳐 나온 콘텐츠잖아요? 많은 사람의 공이 들어간 것이죠. 조금 더 많은 사람에게 가치를 인정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생각하는 ‘좋은 독자’는 출판사와 작가가 그다음 책을 낼 수 있게끔 책을 ‘사주는’ 사람이에요.(웃음) 텍스트를 만들기 위해 들인 노동들이 너무 값싸게 뿌려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어요. 좋은 책 많이 사서 읽어주는 사람들이 좋은 독자인 것 같아요. ‘좋은 관객’도 마찬가지예요. 제값을 주고 극장에서 영화를 봐주는 사람들요. 영화를 업으로 하는 이들에게는 스코어가 중요하거든요. 영화를 보고 입소문도 많이 내주는 사람이 좋은 관객 아닐까요? 그에 더해 서평이나 리뷰를 통해 재해석해주는 분들도 좋은 독자이자 관객이겠죠.

- 책방에서 책을 구입하는 사람이 좋은 독자라는 말씀인 것 같네요.(웃음) 책방을 운영하시면서 만난 손님 중에 기억에 남는 분이 있으신가요?

공무원 시험을 치르고 나면 늘 방문했던 청년이 있었어요. 책을 잔뜩 사가면서 “한동안 제가 못 오면 떨어진 줄 아세요”라고 하더라고요.(웃음) 그러고는 진짜 1년 뒤에 또 나타났어요. 또 책을 잔뜩 고르고 같은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어요. 다음 해에는 합격 소식과 함께 책을 한 보따리 사갔죠. 같이 기뻐했던 기억이 나요. 저희가 2년 8개월 책방을 운영하고 마무리하는 날,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찾아와줬어요.

시험이 끝나고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았겠어요. 이 사람에게는 책방에 가는 일이 진짜 하고 싶은 일 중 하나였잖아요. 책방을 정리하는 날, 많은 사람이 찾아줬는데, 대다수는 사적으로도 아는 사람들이라 책방을 닫아도 이어지는 관계였어요. 그런데 이 청년은 진짜 책 손님이었거든요. 꽃다발을 받을 때 이 사람과는 마지막 만남일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요. 그때 기분이 조금 이상했어요. 내가 정말 책방을 닫는구나 실감나기도 했고요. 그렇다고 따로 연락해서 만날 사이는 아니라는 사실을 이 사람도 알고 저도 아니까, 정말 각자 잘 살자고 하면서 헤어졌던 일이 기억에 남네요.

 역사 연구가 강성호 작가. Ⓒ복음과상황 정민호

- 이로운 선생님으로부터 작가님의 다음 책이 ‘서점의 역사’가 될 거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강성호: 어릴 때를 떠올리면 서점이 주는 느낌이 좋았던 것 같아요. 갈 데 없을 때 가서 놀았던 곳이고, 때로는 피난처이기도 했던 추억이 있어요. 또 아내와 함께 3년 가까이 책방을 운영한 경험도 있어서 자연스럽게 서점의 역사에 관심이 생겼어요. 자료를 찾아보니까 생각보다 다채로운 내용이 있어서 한 권 분량으로 쓸 수 있겠다 싶어요. 목차를 대략 짜두었는데, 시작은 조선 시대가 될 것 같아요. 당시 서점은 없었지만 조정 관료들 사이에 서점 설치를 둘러싸고 의견 차이가 심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또 식민지 시대의 서점은 어땠는지, 전쟁을 겪으면서도 사람들이 서점을 찾았던 이유는 무엇인지, 민주화운동을 비롯해 세상의 변화를 꿈꿨던 사람들이 서점에서 무언가를 도모하는 이야기를 풀어낼 생각입니다.

- 삶과 책의 주제가 맞물려가는 느낌입니다.

돌이켜 봤을 때 제가 책을 계속 쓰는 이유도 같아요. 책 쓰기 자체가 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인 듯해요. 기독교 역사와 관련한 책을 쓴 일도 마찬가지였어요. 20년 넘게 열심히 교회에 다녔는데, 책을 쓰면서 저를 더 알고 싶었던 측면이 있었어요.

ⓒ복음과상황 정민호

- 순천 지역사에 관심을 두고 책을 쓴 이유도? 

특별한 연고가 있어서 순천에 정착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순천에 관해 알려주는 책을 구해 읽으려고 했죠. 쉽지 않더라고요. 비매품으로 몇 종이 출간돼 있었는데, 비매품이라 더 구하기 어려웠어요. 저라도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해서 냈어요. 많이 팔리는 책은 아니지만, 이 책을 통해 좋은 사람들과 연결되고 네트워크가 생기고 있어요. 연구할수록 중앙사 연구보다 지역사 연구가 더 재밌어요. 지역사의 매력은 매우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와닿는다는 사실이에요. 100년 전 사진을 보면, 제가 걸어가는 길이 100년 전 풍경 그대로예요. 거기서 오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지역사를 공부하면서 순천에 애정이 생겼다고 할까요.

- 순천 지역사에서 특별히 주목하고 있는 부분이 있을까요?

순천의 역사를 디아스포라 관점에서 정리해볼 생각인데요. 1948년 여순 사건 때도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켰고, 1984년에는 주암댐을 만들면서 수몰민이 몇천 명에 이르게 됩니다. 이주를 통해 순천의 역사를 다뤄보려고요. 지금까지 지역사는 주로 호국 관점으로 다뤄졌죠. 임진왜란 때 이 지역을 어떤 장군이 지켰다, 의병 몇 명이 일어났다는 식으로요. 이런 접근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관점으로 지역사를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복음과상황 정민호

- 대중이나 주민들의 관심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요. 

상상력이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100년 전 풍경을 띄우고 강의하면 뭔가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기분이 들어요. 그런데 그런 사진 백 장, 천 장을 갖고 이야기해도 감흥 없이 듣는 사람이 있죠. 아마 그런 분들은 100년 전 사람이 타임머신을 타고 오더라도 별로 감흥을 느끼지 못할 것 같아요. 아쉽지만 비난할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분들에게도 역사를 와닿게 이야기해줄 수 있는 책을 쓰고 강의를 해야겠지요. 

- 유명 강사나 작가들이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사료를 제한적으로 사용하다가 문제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죠. 저도 기사를 쓰다 보면, 강하게 자극적으로 말하기 위해서 비슷한 유혹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작가님 책들은 대중서인데도 매우 꼼꼼한 사료 점검에 기초를 두는, 정제되고 침착한 문장들이 대다수입니다.

사료를 하나하나 확인하는 작업은 석사과정 때 몸으로 체화한 것 같아요. 일제강점기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 기독교 역사를 다룬 신문들을 헌책방에서 구해서 하나하나 읽었어요. 그걸 정리하면서 깨달은 점은, 우리가 불과 몇 년 전 있었던 일들도 잘 모른다는 사실이었어요. 그래서 역사를 대할 때 하나의 틀이나 답을 정해두고 거기에 사료를 채우기보다는 무주공산에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사건을 수집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사료를 파다 보면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한 번은 1970년대 신문에 ‘다방 목회’라는 표현이 나와서, SNS에 올렸더니 사람들이 좋아하더라고요. 사료는 사료대로 보면서 대중들과 소통하는 경험이 쌓이다 보니, 더더욱 원텍스트에 대한 관심과 집중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강성호 작가의 저서들이 포함된 책장. Ⓒ복음과상황 정민호

- 교회사 관련 책 《한국기독교 흑역사》,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에도 사실 확인을 엄밀하게 거친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정리가 되었더라도, 대중들 사이에서는 설교 등을 통해서 정확하지 않은 내용이 많이 유통되고 있잖아요.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이었을 텐데요.

사실은 기독교 역사는 3부작을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두 책에 대한 호응이나 판매량을 보면서 제 역할은 여기까지구나 싶어 내려놓았어요. 제일 힘들었던 때는 한국의 교회와 사회가 워낙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이다 보니 발화하는 사람의 위치와 지위에 따라 내용을 수용하는 정도가 달라지는 걸 느끼는 순간이었어요. 질문하신 취지대로 정리한 책이었는데, 어떤 이들은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젊은 평신도가 말한다는 이유로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제가 한국교회 안에서 나아갈 수 있는 지점은 여기까지구나 체념하게 된 것 같아요. 그나마 제가 남자였기 때문에 이 정도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30대 여성이 이 책을 써서 강의를 다녔다면 아마 저보다 더 높은 벽을 실감했겠죠.

- 생각하셨던 3부작 중 세 번째 책의 주제는 무엇이었나요?

한국 기독교 역사를 젠더 관점으로 써 보고 싶었어요. 지금 한국 기독교의 여성사를 보면, 교회에 헌신했던 권사님들 이야기가 주를 이루잖아요. 분명 대단한 일이지만, 여성사를 넘어 젠더 관점에서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에 여성들 이야기를 강조한 부분이 꽤 되는데, 다음 편에 대한 예고와 복선을 깔아둔 것이기도 해요. 그런데 지금 생각으로는 저는 아마 추진하지 않을 것 같아요.

- 고민 중이라고 받아들이면 될까요?

호응이나 반응을 떠나서, 여성의 이야기를 남성이 쓰는 게 맞을까 하는 개인적인 고민도 있어요. 사실 제가 대학생 때부터 자칭 ‘페미니스트’였거든요. 물론 그때는 허세였는데.(웃음) 그때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면서 일본군 ‘위안부’라든지 미군 기지촌, 소위 ‘양공주’ 이야기를 접하면서 제가 알고 있는 역사라는 것이 남성에 의해 여성이 착취당하고 희생되는 시스템으로 유지됐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자연스럽게 페미니즘 논의를 받아들였죠. 그런데 동아리에서 저와 친하게 지내던 여성 후배가 저와 대화하다가 저보고 가부장적이라고 하더라고요. 충격이었어요. 그때부터 고민이 됐죠. ‘과연 남성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가, 될 수 있다면 그 지점은 어디인가?’ ‘과연 여성의 이야기를 남성이 쓰는 게 맞는가? 발언권을 내가 쥐려는 건 아닌가?’ 물론 이런 고민 이외에도 제 내공도 달리는 부분도 있고요.

강 작가가 모은 기독교 고문서들. Ⓒ복음과상황 정민호

- 기독교 고문서들을 소장하고 계신데요.

지역사 쪽 빼고는 어떻게든 처분하려고 해요. 지금으로서는 더 연구를 할 일이 없을 것 같아서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 기증하는 방향도 생각해봤는데, 몇 권 안 되니까 좋아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이 자료들이 필요한 연구자가 있으면 줄 의향이 있어요. 특히 한국 기독교 여성사를 쓸 연구자가 자료를 찾고 있다면 드리고 싶어요. 많지는 않지만, 연구를 하는 데 꽤 쓸모 있을 거 같거든요.

- 《혁명을 꿈꾼 독서가들》에도 여성 혁명가들 이야기가 묵직하게 담겨 있어요. 페미니즘 관점을 녹여내려고 애쓰신 것 같아요.

여성들의 기록이 많이 없어서 어려웠어요. 나혜석을 제외하고는 거의 자료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추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갈지가 큰 어려움이었지요. 출판사 사정으로 계획이 무산되기는 했지만, 《한국기독교 흑역사》 개정판을 준비하던 중이었는데 거기에도 교회 성폭력의 역사를 추가하고 싶었죠. 사실 처음 구상 단계에서는 포함되어 있었어요. 체력이 다해서 더 쓰지 못한 부분이에요. 그래서 특히 더 아쉬움이 남아요. 시민단체에서 근무할 때 한두 시간 쪽잠을 자면서 썼거든요.

- 책에 옛날 잡지들을 인용한 부분을 보니까 페미니즘 이야기도 제법 나오고, 개혁에 관한 이야기도 언급되는데요. 지금 기준으로 봐도 급진적인 내용이 있어요. 주어와 상황은 계속 바뀌지만, 결국 시대와 상관없이 고민의 양상은 비슷하구나 싶습니다. 많은 사료를 접하다 보면, 역사를 통해 현재를 보는 눈도 생길 것 같아요.

주어도 바뀌고, 구체적 상황도 더 따지고 보면 다른 부분이 있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고민의 지점들이 큰 틀에서 맞닿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연구자로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입장에서 과거의 원텍스트를 읽었을 때 고민이 커질 때가 많아요. 지금의 관점에서 이 텍스트가 전하는 사건과 사람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역사를 공부할 때 주의할 점인데요. 사료를 접할 때 지금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것은 좋지만, 어떤 인물이나 사건을 지금 관점으로 보면서 단적으로 ‘나쁘다’ ‘좋다’ 쉽게 평가해서는 안 되는 것 같아요. 중간 지점에서 줄다리기를 통해 균형을 맞추는 일이 중요한데 쉽지 않지요. 적지 않은 독자들이 확실하게 얘기해주기를 기대하고 더 좋아하니까요.

- 《혁명을 꿈꾼 독서가들》에서 근대의 독서 풍경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기본 2개 국어 이상은 하더라고요. 원서를 구해 어렵지 않게 읽더라고요. 이질감이 느껴지는 대목이었습니다.(웃음)

저도 외국어를 잘 못 하는 게 콤플렉스라 그 부분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제 추측으로는 분단 상황과 연관이 있는 듯해요. 분단되면서 남한 사회가 일종의 섬나라처럼 되었잖아요. 당시는 북쪽으로 가는 국경도 없었고, 일본을 건너가는 데 여권 같은 게 필요하지도 않았고요. 당대 사람들 생각으로는 압록강을 넘어가면 중국이고 상해에는 임시정부가 있었지요. 일본과는 어찌 보면 한 체제였으니까 그곳에서 접하고 받아들이는 세계의 문물도 있었을 테고요. 그들은 동아시아를 세상의 기본 단위로 여기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우리보다 훨씬 넓었던 거죠. 지금 우리는 삼팔선 이남에서 아웅다웅하며 쭉 성장해 왔잖아요.

ⓒ복음과상황 정민호

- 사료들을 대화체로 바꾸어 책에 넣은 것이 인상 깊었어요. 

옛날 잡지에 실렸던 인터뷰를 재구성하기도 했고, 소설 속 대화체로 쓴 부분도 있어요. 요즘 역사책들은 주제와 내용이 무겁더라도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방식을 도입하는 추세 같아요. 올해 4월에 현대사 전공자인 김태우 선생님이 《냉전의 마녀들》(창비)을 냈는데, 그 책도 사료를 바탕으로 소설처럼 대화를 넣었어요. 치밀한 자료 조사와 소설의 방법이 만났을 때의 표본이 되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해요. 1951년 한국전쟁 시기 위험을 감수하고 전쟁 현장을 방문한 국제민주여성연맹의 발자취를 다룬 책인데요. 여러 국가의 여성 리더로 구성된 조사위원 21명이 전쟁의 고통을 호소하는 현장의 목소리를 전해주고 있죠. 역사학계도 연구 방법론이나 전달 차원에 많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 같아요.

- 석사과정을 마치고 곧바로 박사과정에 들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대중서를 내는 데 집중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제가 석사 논문 쓸 때 너무 힘들어서요. 그때 여러 사정상 계속 학생으로 지내기도 어려웠고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어요. 요즘 한국 사회에서 박사가 되어도 취직하기 어렵잖아요. 교수가 바로 되는 것도 아니고요. 어마어마한 실력의 선배들도 비정규직 연구교수를 전전하는 모습을 보고는 잘 납득되지 않았어요. 그렇게 고생했는데…. 결국 박사과정을 포기하고 다른 일을 찾겠다고 순천에서 지내다가 짓다 출판사 사장님의 제안으로 《한국기독교 흑역사》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게 너무 재밌더라고요. 학계에서 논의되는 귀중한 이야기들이 대중과 의미 있게 연결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던 중이었거든요. 제 역량 안에서 대중들에게 학계 논의를 소개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썼어요. 그렇게 몇 권의 책을 썼는데, 올해부터 전남대학교 호남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기 시작했어요. 한편으로는 제 마음에 전문 연구자로서 욕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공부하면서 연구자 정체성을 찾아보려 합니다.

- 호남학과요?

생소하실 것 같은데요. 지역학을 내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학과예요. 이곳에서 함께 공부하는 분들은 저처럼 지역사를 연구하기도 하고, 지역문화를 연구하기도 해요. 학과 교수님 여섯 분의 전공도 문학사, 고전문학 등 각각 달라서 연구 주제에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복음과상황 정민호

- 연구 주제는 무엇으로 잡으셨나요?

일제강점기 전남 지역 언론운동사를 써볼 계획인데요. 흥미로운 것이 당시에는 신문기자나 신문사가 지역 사회운동과 밀접하게 연결된 경우가 많았어요. 비교적 돈이 많은 곳이 신문사였던 것 같아요. 지역 기자들이 돈을 모아 구제 활동을 한다든지, 신문사를 통해서 극장, 영화, 사진 등이 지역사회에 소개되기도 하고요. 일제와의 관계에서 지역 현안을 두고 언론 자유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고요. 이런 여러 양상을 통해 전남 사회의 언론운동사를 정리하고 싶어요. 사실 순천의 근대사를 주제로 잡을까 하다가 밥벌이를 위해서라면 전남으로 연구 범위를 넓혀야겠다고 생각했어요.(웃음)

ⓒ복음과상황 정민호

정리 이범진 편집장·강동석 기자 goscon@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