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이야기, 살아갈 이야기

[374호 그림책으로 우리의 안부를]

2021-12-31     김주련

지난 한 해의 특별한 순간은 언제였나요? 마스크를 쓰고 주먹을 맞대어 인사를 나누며, 제발 안전하길, 건강하길 기도하던 순간들이 어느 한순간의 점이 아니라 길고 긴 선으로 지금까지 이어지는 가운데, 이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남겨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어떤 순간에 대한 기록이 기록하는 사람에게는 특별한 순간을 붙잡아 간직하는 데 의미가 있다면, 그 기록을 읽거나 보는 자들에게는 그 순간에 대한 새로운 체험과 다짐을 줄 수 있기에, 우리가 맞이하는 순간들을 어떤 기록으로 남겨야 할지 생각했습니다. 백지 위에 손을 올려놓고 오래도록 머뭇머뭇하다가 자주 찾은 위안은 걷기, 계속 걷기, 그리고 읽기, 계속 읽기와 같은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다 맞이한 올해,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안부를 묻는 가운데서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가 또한 이 순간 살아갈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음을 발견하며 모든 순간의 의미를 헤아려봅니다.

모든 때의 모든 아름다움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전도서의 지혜자는 기록했습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무언가를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와 치료할 때, 헐 때와 세울 때, 울 때와 웃을 때, 슬퍼할 때와 춤출 때, 돌을 던질 때와 돌을 거둘 때, 안을 때와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습니다. 어느 한쪽이 좋고 어느 한쪽은 좋지 않다는 전개가 아니라, 아무런 가치판단을 하지 않은 채 나란히 배치하여 모든 때가 다 필요에 따라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조금 두껍지만 얼마 전에 노르웨이 작가 리사 아이사토가 쓰고 그린 《삶의 모든 색》이라는 일러스트북을 통해, 다시 한번 사람이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겪게 될 모든 순간이 그 나름의 색으로 각자의 시절을 경축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아이의 때, 소년의 때, 어른의 때가 기나긴 시간으로 이어지면서 인생의 전 여정에 깃든 여러 색이 충분히 아름다웠습니다.

‘아이의 삶’에서는 빗속에서 놀며 행복했던 순간과 크리스마스의 신비로움, 새로 접하는 세계의 놀라움, 온종일 지치도록 놀며 집에 가기 싫어하던 괴로움, 천하무적의 용맹스러움, 자주 다치는 바람에 생긴 상처들, 나를 빼고 벌어지는 세상의 불공평함에 맞서던 일들이 사랑스럽게 그려져 있습니다. ‘소년의 삶’에서는 천방지축 놀던 시절을 지나 향수를 쓰기 시작하고, 학교와 공부라는 고달픈 길을 저마다 힘겹게 지나면서 잊을 수 없는 선생님을 만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어른들의 걱정을 사고, 뒤죽박죽으로 보이는 세상에서 당당하게 날갯짓을 칩니다. ‘자기의 삶’에서는 자기를 찾아가는 순간들과 사랑하는 짝을 찾는 사랑의 순간들이 그려지고, ‘부모의 삶’에서는 모두가 처음 겪는 일에서 오는 당혹감과 밤낮으로 버텨야 하는 매일의 일과 속에서 곤혹스러워합니다. ‘어른의 삶’에서는 자신이 참 강하고 영원하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지만 어떤 날은 버스에 치인 사람같이 처참해질 때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떠나는 빈 둥지 속에 찾아오는 고요함과 외로움, 연로하신 부모를 돌봐드려야 하는 무거운 책임감으로 조금씩 몸도 마음도 늙어갑니다. 그리고 마음은 스물두 살이지만 몸은 낯설기만 한 노년의 ‘기나긴 삶’에서는 손주들과 함께 마법처럼 찾아오는 크리스마스의 신비와 밤낮으로 꿈꾸는 일들과 낙천적인 일상이 그려집니다. 무엇보다 죽음이라는 두려움 앞에서 곁을 지켜주는 사람 덕분에 외로움과 상실을 경험하는 가운데서도 삶의 모든 순간의 아름다움을 가슴에 품게 됩니다. 나면서부터 죽음 너머의 순간까지 어느 한 장면도 아름답지 않은 순간은 없는 것입니다.

다니카와 슌타로의 《이십억 광년의 고독》이라는 시집에 〈산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 / 지금 살아있다는 것 / 그것은 목이 마르다는 것 / 나뭇잎 사이의 햇살이 눈부시다는 것 / 문득 어떤 멜로디를 떠올려보는 것 / 재채기하는 것 / 당신의 손을 잡는 것 // … 아름다운 모든 것을 만난다는 것 / 그리고 감춰진 악을 주의 깊게 막아내는 것 // 살아 있다는 것 / 지금 살아 있다는 것 / 울 수 있다는 것 / 웃을 수 있다는 것 / 화낼 수 있다는 것 /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 …

생의 모든 순간에 대한 사랑의 온기를 노래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어느 한 장면만 축복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맞이하는 모든 순간, 때로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는 일들까지도 하나하나 아름다움으로 헤아리는 마음입니다. 안희연 시인이 쓴 《단어의 집》이라는 산문집에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 왜 ‘별 세는 밤’이 아닐까 생각하며 말한 인상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세는 것’과 ‘헤는 것’의 차이가 수량을 센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셈이 따져 묻고 판단하는 일이라면 헤아림 속에는 가늠하고 생각하는 과정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헤다’는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듯이 힘과 의지, 애씀이 수반되는 말이니 매사 헤아리며 살자고 했습니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지나가는 세월의 날수를 세는 것을 넘어 우리가 맞이하는 모든 날에, 심지어 고통스럽게 여겨지는 이 순간들을 잘 헤아리며 슬기로운 마음을 얻기를 소망해봅니다.

모든 순간을 수집하면서

《책그림책》으로 잘 알려진 크빈트 부흐홀츠가 쓰고 그린 《순간 수집가》라는 그림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그림이든 비밀이 있어야 하지. 나조차 그게 뭔지 모를 수도 있어. 그리고 사람들이 내 그림에서 나보다 훨씬 더 많은 걸 발견할 수도 있단다. 나는 수집가일 뿐이야. 난 순간을 수집한단다.” 구닥다리 철테 안경을 쓰고 조금 뚱뚱한 편이어서 학교 애들에게 곧잘 놀림을 받는 아이가 사는 주택으로 이사를 온 화가인 막스 아저씨가 아이에게 해준 말입니다.

막스 아저씨는 자주 집을 비우고 돌아다녔고, 어느 때는 마치 탐정처럼 거리 구석구석을 살펴보기도 하고, 모래언덕 사이를 뛰어다니기도 하고, 방파제 옆 공원 벤치에 오랫동안 조용히 앉아있기도 하면서 늘 들고 다니는 작은 공책에 몇 자 끼적거리거나 빠른 속도로 스케치하곤 했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그림을 그리는 아저씨의 작업실에 아이는 언제든 드나들며 놀 수 있었고, 아저씨 옆에서 바이올린을 켜면서 특별한 우정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아저씨는 완성된 그림들을 뒤집어놓았기 때문에 아무도 그림을 볼 수 없었습니다. 너무 일찍 보여주면 찾았다 싶은 길을 다시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저씨는 꽤 오랫동안 여행을 떠나면서 아이에게 화실 열쇠를 주고 언제든 들어가게 해주었습니다. 아이가 화실에 들어갔을 때 그동안 벽을 향해 있던 그림들이 모두 아이를 향해 있었습니다. 그림들 앞에는 아저씨가 쓴 메모들이 있어서 아저씨의 화실이 이 한 명의 아이를 위한 특별 전시장이 되었습니다. 그림들에는 가끔 아저씨가 들려줬던 믿을 수 없는 사물들과 사건들이 하나하나 아주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이야기들, 허무맹랑해 보이던 이야기들을 그림으로 보면서 아이는 전혀 낯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림들이 아이를 휘어잡고 그림 속으로 잡아끄는 것 같았습니다. 한 어른의 너른 시야가 한 아이의 가슴의 폭을 얼마나 확장했을지 짐작이 됩니다.

막스 아저씨는 세상을 여행하면서 만난 순간들을 수집해서 그림으로 옮겼을 뿐이지만, 그 그림들은 한 번도 동네 밖을 떠나보지 못했던 어린 소년의 가슴을 열어 온 세상의 신기함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아저씨가 없는 화실을 매일 드나들던 아이가 마지막으로 등대 그림을 보면서 자신의 바이올린을 가져와 등대 그림 속에서 울려 퍼지는 곡을 연주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섬에 있는 등대’라고 아저씨가 그림 앞에 쓴 쪽지 뒷면에 아이는 이렇게 썼습니다.

‘막스 아저씨, 전 거기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또렷하게 들을 수 있어요.’

세대를 초월하여 아름다운 창작의 연대가 이뤄지는 장면이었습니다. 음악이 울려 퍼지는 아저씨의 등대 그림과 그림 속 음악을 실제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는 아이의 합작이 탄생하는 위대한 순간이었습니다. 계절이 지나가고 집으로 돌아온 아저씨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떠나고 아이는 잠시 아저씨를 잊은 듯 보냈지만 어느 날 아저씨한테서 소포가 왔습니다. 소포에는 그림 한 장이 있었습니다. 방파제 위에 빨간 소파가 있고, 그 소파는 그림들에 둘러싸여 있고, 소파 위에 파란 점퍼를 입은 남자아이가 서서 바이올린을 켜는 그림이었습니다. 바로 막스 아저씨 화실에서 그림을 보던 아이의 모습이었죠. 그림 뒤에는 아저씨의 낯익은 글씨가 있었습니다. “예술가 선생님, 선생님의 바이올린 선율은 언제나 내 그림 속에 있다는 거 알고 있나요?” 그리고 막스 아저씨의 그림대로 이 아이는 대학교에서 바이올린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그냥 지나쳐 사라져버리게 하지 않고 수집한 어떤 순간들이 다른 한 삶에 새로운 의미로 펼쳐지게 할 수 있음에 설레는 장면들이었습니다.

마커스 보그의 《놀라움과 경외의 나날들》 서문에 이런 기도문이 인용되었습니다. “하루씩 지나가고 한 해씩 사라지건만, 저희는 기적들 사이를 장님처럼 걸어갑니다. 저희의 눈을 볼 것들로 채워주시고, 저희의 마음을 알 것들로 채우소서. 당신의 현존이 마치 번갯불처럼 저희가 걸어가는 어둠을 비추는 순간들이 있게 하소서. 저희가 어디를 바라보든, 떨기에 불이 붙었지만 불에 타서 없어지지 않는 것(출 3:2)을 볼 수 있게 도우소서. 그리고 당신께서 빚으신 흙덩이인 저희들이 거룩함에 닿게 하시고, 놀라움 가운데 ‘이 얼마나 경이로 가득한 곳인가…’(창 28:17) 하고 외치게 하소서.” 올해도 하루씩 한 해씩 지나가고 사라지겠지만, 분명한 것은 매일 우리가 이 기적들 사이를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매 순간 경이와 경탄으로 수집하며 걸을 수 있기를 다짐해봅니다.

모든 요일의 시와 만나기를

《다니엘이 시를 만난 날》이라는 짧은 그림책을 보면, 다니엘이 “공원에서 시를 만나요. 일요일 6시에”라는 안내문을 읽고 시에 대해 궁금증을 갖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에 거미줄에 맺힌 이슬을 보고 있는데 “시는 아침 이슬이 반짝이는 거야”라고 거미가 말해줍니다. 화요일에는 오래된 참나무에서 만난 청설모한테 “시는 바삭바삭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거야”라는 말을 듣습니다. 수요일에는 굴속 다람쥐에게서 ‘시는 오래된 돌담이 둘러싼 창문 많은 집’이라는 말을 듣고, 목요일에는 개구리에게서, 금요일에는 거북이에게서, 토요일에는 귀뚜라미가 귀뚤귀뚤 우는 소리에서 시가 뭔지를 듣습니다. 그리고 토요일 밤에는 부엉이의 속삭임을 통해 시를 배웠습니다. 마침내 일요일이 되어 다니엘은 사람들 앞에서 시를 발표합니다. 다니엘의 시는 다름 아닌, 월요일부터 토요일 밤까지 만난 순간들을 수집한 노래였습니다. 머리를 짜내어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난 장면들, 자신이 들은 말들을 모아 자신의 운율에 맞춰 배열했을 뿐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연못에 비친 노을을 보며 걸음을 멈추고 “내 생각엔 저게 바로 시 같아” 하자, 잠자리가 “내가 보기에도 그래”라고 대답합니다. “시란 쓰는 것이 아니라 줍는 것”이라는 말처럼 모든 순간의 만남에 대한 기록이 아름다운 작품으로 새롭게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순간 수집가’. 그리스도인의 좋은 별명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살아가라고 주신 날들을 걸어가는 동안 만나는 모든 순간에 대해 좋든지 좋지 않든지 좋을 수밖에 없는 시간이 됨을 신뢰하며 나름대로 기록할 내용을 생각합니다. 매일 어느 한 공간에서 끄적거리는 어느 한순간에 대한 글과 그림이, 어느 날 어느 한 사람에게 특별한 경험으로 도착하게 될 수 있으니까요.

삶의 모든 색
리사 아이사토 지음 / 김지은 옮김 / 길벗어린이 펴냄 / 2021년
천진한 어린 시절부터 나이가 들어 다시 천진한 마음으로 이어지기까지 모든 삶의 색이 다양하게 펼쳐집니다. 세대별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무릎을 치는 공감을 끌어내기에 충분합니다.

순간 수집가
크빈트 부흐홀츠 지음 / 이옥용 옮김 / 보물창고 펴냄 / 2021년
섬에 사는 한 소년이 화가 아저씨와의 만남을 통해 그냥 쉬 사라질 수 있는 순간들이 어떻게 특별한 순간으로 새롭게 경험될 수 있는지 깊이 있는 이야기로 다가옵니다. 

다니엘이 시를 만난 날
미카 아처 지음 / 이상희 옮김 / 비룡소 펴냄 / 2018년
“어느 날 시가 내게로 왔다”고 한 파블로 네루다의 말처럼 모든 요일의 만남과 그 기록이 아름다운 시가 되듯, 지금 이 순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다 보면 우리도 시를 쓸 수 있습니다.

■ 연재 순서

1. 안녕, 안녕
2. 어서 와, 여기가 네 자리야
3. 걱정이 있지만, 지낼 만해요
4. 날마다, 뭔가를 계속한다는 것은
5. 나여서, 나니까
6. 눈물이 나고, 실수도 많지만
7.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8. 살아온 이야기, 살아갈 이야기
※ 이어서 꿈, 들어줌, 연대, 밥, 게으름, 어른에 대해 몇 권의 그림책들과 함께 계속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김주련
글도, 그림도 ‘긁다’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하늘을 보며 땅 위에 서 있는 내 마음의 어떠함과 생각의 어떠함을 긁어 쓰고 그리면서 오늘은 더 그리움을 쌓아가고 싶다. 지은 책으로는 《좋게 나쁘게좋게》, 《어린이를 위한 신앙낱말사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