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 있는 곳에 그들이 있었다
[377호 커버스토리]
나를 받아줄 교회가 있을까
넓고 어두운 방 안에 수십 명의 사람이 모여 동그랗게 앉아있다. 기타 치는 소리가 은은하게 흐르고, 옅은 불빛으로 무릎 꿇고 눈 감은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인다. 소리 내어 기도하는 사람도 있고, 찬송가 가사를 읊조리는 사람도 있다. 멀뚱멀뚱 눈을 뜬 채로 사람들을 가만가만 쳐다보는 사람도 있는데, 그게 바로 나다. 한 사람에게 시선이 잠시 멈추었다가 옆으로 차례차례 옮겨가며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았다. 마음속에 어떤 뜨거운 마음이 일어 눈물이 그렁그렁해졌고, 언젠가 내가 영화를 만드는 날이 온다면, 이 순간을 반드시 첫 장면으로 담겠다고 생각했다.
4년 전 여름이었다. 별똥별이 이따금 떨어지고, 별들이 우수수 쏟아질 것만 같던 밤하늘 아래, 청평의 어느 펜션에 남들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어릴 적에 빼먹지 않고 열심히 다닌 교회 수련회였지만, 매우 생경하게 다가왔다. 게이 정체성으로 살기로 마음먹고 나서 한동안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 이듬해 성소수자 교회를 찾았고, 드문드문 참석하다가 끝내 수련회까지 오게 되었다. 낮에 도착해서 일정을 보내고 있는 교회 성도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저녁 먹고 쉬는 시간이라 그런지 성도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도 나누고, 벽마다 붙어있는 개인 롤링페이퍼에 전하고 싶은 말을 적고 있었다. 게이들이 가득한 수련회라니, 난생처음 보는 풍경이 마치 꿈꾸는 것만 같아서 한동안 넋 놓고 보고만 있었다.
모두가 저마다의 사연으로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가진 어떤 성도는 용기 내서 목사에게 상담을 요청했다가 다른 교회를 추천하면서 나가주길 바란다는 권고에 교회를 나오게 되었고, 여장하고 교회 예배에 참석한 성도는 담임목사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오랫동안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던 성도는 담임목사에게 어렵게 커밍아웃했다가 기도하면 변화될 거라며 교회 봉사만 강요받기도 하고, 끔찍한 전환 치료를 강행한 목사에게 시달리다가 트라우마로 힘들어하는 성도도 있었다. 나도 이들처럼 내가 다닐 수 있는 마지막 교회라는 심정으로 이곳을 찾았다. 둥그렇게 모여 앉은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바라볼 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어떤 마음이 오가는 것을 느꼈다. 나 또한 보이지 않는 실로 이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여기도 교회라는 생각이 들자 안도감에 눈물이 났다.
구원받은 다음 날에 또 무너지다
내가 한동안 교회에 나가지 않은 이유는 나를 이해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주일이면 당연히 교회 가고, 유난스럽게 목사님 설교도 수첩에 받아 적고, 믿음 좋다고 칭찬받는 어린이였다. 중고등부에서는 성가대도 하고, 밤늦게까지 문학의 밤을 준비하고, 자습 시간에 성경도 꺼내 읽는 유별난 학생이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방학마다 해외 단기선교 간다고 기도 편지를 열심히 쓰고, 전도 소책자 들고 캠퍼스를 누비며 열심히 전도하고, 교회에서 여러 가지 봉사도 많이 하는 열성적인 청년이었다. 목사님, 부모님, 주일학교 선생님, 간사님 그 누구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모두 만족시킬 수 없음에도 그것이 내 신앙이라 생각했다. 내가 게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노력해온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무너져 더 이상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여드름이 꽃피는 사춘기에 접어든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걸 알았지만,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일말의 욕망이 들어오면 그런 나 자신이 너무도 싫어 그것이 사라지도록 무릎 꿇고 간절히 기도했다. 내 간절한 마음은 응답받지 못하고, 똑같은 행동만 되풀이했다. 교회에서 부흥회 또는 수련회 마지막 날이면, 목사님은 끊임없이 죄를 고백하라고 했고, 회개하고 죄인의 삶에서 구원받으라 외쳤다. 그렇게 구원받은 것 같은 다음 날에 또 무너지는 나 자신을 보고 나면, 아무도 모르는 더욱더 깊은 굴을 파야 했다. 또 주일이 오고 예배당에 들어서면 이중적인 나 자신이 너무 싫어지다가 예배가 끝나면 죄책감이 조금 덜어진 것 같아 평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잠시, 교회 안에서 나의 숨은 모습을 들킬까 싶어 늘 무서웠고, 두려웠다. 어떤 날에는 내 정체성이 탄로 나서 교회 사람들에게 놀림받고 비난받는 악몽을 꾸기도 했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교회 형의 추천으로 기독교 동아리에 가입했고, 그곳에서도 나는 그 누구보다 열성분자였다. 전도 소책자를 달달 외워 전도하고, 방학이면 해외로 단기선교를 떠나고, 매일 아침 성경 묵상 모임을 위해 동아리방으로 달려갔다. 나는 누구도 알면 안 되는 성 정체성을 더욱더 깊숙한 곳에 꼭꼭 숨길 수 있었다. 학년이 올라가고 기독교 동아리에서 리더 역할을 맡게 되자, 나와 같은 리더가 될 수 있도록 모범을 보이는 나 자신이 한없이 이중적인 사람처럼 생각되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것 또한 무뎌졌고, 무난한 시간이 흘러 학교를 졸업했다. 더는 숨길 곳을 잃어버린 나는 대학생 시절 꽁꽁 싸맨 포장들이 하나씩 벗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는 발가벗겨져 어딘가에서 이를 갈며 슬피 우는 짐승이 되진 않을까 두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아는 형이 다니는 교회에 방문하게 되었다. 잠시 들른 교회에서 도인 같은 얼굴을 한 목사님이 환하게 반기며 커피 한잔을 내어주었다. 교회를 소개하면서 나와 비슷한 또래의 청년들이 모여 함께 책을 읽는 모임이 있다고 소개해주었다. 비록 내게는 조금 어려운 책이었고, 진지하게 오가는 이야기 속에서 나는 우물쭈물하기 일쑤였지만, 서로 진솔한 마음들을 나누는 시간이 좋았다. 모임이 끝나면 다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고, 나를 꽁꽁 감싼 포장을 한 꺼풀 벗겨내는 자유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늘 그랬듯 여기서도 열성분자가 되었고, 또다시 나를 포장하고 숨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누군지 알게 되면 모두 나에게 실망하고 떠날 거라는 두려움도 여전했다. 결국 끝끝내 말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따금 부모님이 다니는 교회에 나가던 날에는 때마침 동성애를 혐오하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설교를 들어야 했다.
다니고 싶은 교회를 찾다
게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 후에는 교회에 나갈 수 없었고, 나가고 싶지 않았다. 나와 같은 정체성을 가진 친구들이 궁금해서 게이 관악합주 모임을 찾아 가입했다. 취미로 악기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는 한편, 나와 같은 정체성을 가진 친구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들은 내가 누구라 밝히지 않아도 나를 알았고, 그저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날 이후 단원들과 함께 악기를 불었고, 즐겁게 술을 마셨고, 연말이면 연주회를 열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연습하기 위해 모였고, 매주 만나는 그들이 내게 교회보다 더 교회 같았다.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마음이 처음 들었다.
악기 연습이 끝나면 언제나 뒤풀이를 했다. 그날도 악기 모임 친구들과 술 한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성소수자 교회를 다닌다는 어떤 형의 말을 들었고, 그런 곳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그 형에게 교회 이름을 듣고도 한동안 망설였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 용기 내어 성소수자 교회를 찾았다. 교회 문을 열었을 때 성가대 가운을 입고 개회송을 부르는 남자 서너 명이 보였고, 예배당 안에는 말끔한 복장을 한 이들이 성경책을 들고 자리에 앉아있었다. 여느 교회와 다르지 않은 모습에 오히려 당황했다. 오랜만에 교회에서 예배하는 나 자신이 신기했고, 그런 나를 환대하는 분위기가 낯설면서도 좋았다. 예배가 끝나고 나오는데, 이 교회에 교인으로 출석하는 목사님 한 분이 내게 빵 한 덩어리를 건넸다. 당신이 집에서 직접 만든 빵이라면서, 혼자 자취하면 가져가라고 했다. 집에 돌아와 빵 한 조각을 떼어 입에 넣으면서 다음 주에도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매주 악기 모임을 나갔고, 교회도 빠지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내가 나라는 사실을 더욱 긍정하게 되었다, 문득 애정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긍정하는 나를 고백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커밍아웃하기로 마음먹으니 가장 먼저 이전에 다니던 교회 형이 떠올랐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뜸 들이다 크게 심호흡 한번 하고 털어놓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담담하게 이야기했고, 형은 차분하게 들어주었고, 웃으며 가벼운 농담도 주고받았다. 그동안 ‘여자친구 있냐’고 물어봐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가을 하늘처럼 마음이 두둥실 부풀던 날이었다. 또 하루는 오랜만에 교회 청년부 누나를 만났다. 누나는 내게 만나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고, 그 사람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다고 말해주었다. 혹시 알고 있는 건가 싶어 조금 놀랐지만, 밥 먹는 중에 말하면 체할까 싶어 밥을 다 먹고 카페로 이동했다. 커피를 시켜놓고, 대뜸 애인이 남자라고 고백했다. 그 와중에 파란 하늘이 보였고, 흰 구름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누나는 환하게 웃으며 축하해주었고, 애인과 함께 집에 놀러 오라고 초대도 해주었다. 그동안 꼭꼭 숨겨왔던 마음을 하나둘 풀어놓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계속 교회를 다닐 수 있다는 희망
선한 얼굴로 조곤조곤 설교하던 목사님이 ‘동성애 반대가 죄가 되는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쓴 글을 보았다. 구원에도 예외가 존재한다는 그의 복음을 듣고, 그 교회에서 제자훈련 받으며 내가 배우고 받아들인 복음과 왜 다른지 의아했다. 그의 주장을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몹시 궁금했다. 뜨거운 햇살 아래 물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걸었고, 부정하다며 모두가 멀리하던 한센병자에게 손을 대었고, 모두가 싫어하던 삭개오에게 뽕나무에서 내려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떠올렸다.
내게 있어 복음이란, 환하게 웃으며 내어주는 커피 한잔이었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며 부딪는 술 한잔이었고, 정성스레 만든 빵 한 조각이었고, 조심스러운 고백을 따뜻한 미소로 받아주는 마음이었다. 성소수자의 편에 함께 섰다는 이유만으로 교단 재판에 회부되었던 이동환 목사님과, 당신의 위치에 피해가 갈 수 있는데도 차비만 받고 성소수자 교회에 설교하러 오시는 목사님들을 보노라면, 나는 오늘도 교회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꼭꼭 숨겨둔 죽음이 구원받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한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나를 구원한 복음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고, 목사님도 있고, 예수님도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나는 믿는다.
아이완(익명)
모태신앙으로 자라 평범한 직장에 다니고 있는 30대 중반의 크리스천 시스젠더 남성 게이. 복상을 10년째 구독 중이고, 현재 성소수자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