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왜 수도회인가?
[377호 수도회, 길을 묻다]
※ 2019년 〈복음과상황〉에서 교회 역사에서 ‘낯선 전통’이라는 주제로 공의회, 수도회, 이단 역사를 되짚어보는 시리즈 3부작을 기획했습니다. 2019년 1월부터 2020년 3월까지 그 첫 번째인 ‘공의회의 사회사’를 연재한 후 2년 만에 두 번째 주제로 ‘수도회’를 다루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1년 동안 진행될 이 연재에 독자님들의 응원과 격려, 건설적인 비판을 기대하겠습니다. ― 필자 주
‘수도회’를 탐구하는 여정의 시작점에서
수도회,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까? 아마 세속과 떨어진 곳에 있어서 높은 벽으로 외부와 차단된 채 고립 속에 살아가는 모습일 듯싶다. 당연히 그곳에서 살아가는 수도사나 수녀의 모습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으로 보인다. 종교가 없는 이들조차도 삶과 죽음의 본질을 찾아가려는 수도사들의 숭고하고도 고된 수행의 길에 경외감을 보낸다.
‘고요’ ‘침묵’ ‘은둔’ ‘금욕’ ‘멈춤’ ‘절제’ ‘성찰’, 수도회와 연관되는 대표적인 단어들이다. 물론, 수도회를 이런 단어로 수식하는 일이 전혀 어긋난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이미지가 굳어지다 보니, 수도원 기행은 지금도 고색이 짙은 수도회 건물을 찾아다니며 옛 시절을 더듬어보는 답사나 박물관 기행에 가깝다. 역사 가운데 생겨났다가 사라진 수많은 수도회를 단순히 탈세속적 경향으로만 묶어버리는 일은 그 가치를 축소시킨다. 수도회의 삶을 살펴보며 길을 물어야 할 좀 더 적극적인 이유를 찾을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수도회는 결코 한때의 유행이나 흐름이 아니다. 제도교회와 함께 그리스도교를 형성해오는 데 중심 역할을 해왔다. 수도회의 쇠퇴는 그 자체로 그리스도교 한 축의 쇠퇴로 이어진다. 수도회를 살피는 여정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수도회에 대한 정형화된 인식을 내려놓는 일이다. 수도회나 수도사의 삶이 현대사회와 종교, 그리고 우리 개인의 삶과 무관한 ‘옛것’이 아님을 따져보자. 수도회와 관련한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그에 답하는 것으로 여정을 시작해보자.
그리스도교는 금욕의 종교인가?
수도사란 세속 사회 기준이 아닌, 수도 공동체 규칙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계율 수도사(regular monks)라고 부른다. 삶의 지침과 방향이 분명한 삶이다. 대중들의 일상적인 삶보다 종교적·윤리적으로 더 높은 수준이 요구된다. 흔히 가난, 순결, 순종으로 대표되는 덕목이 포함된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수도회는 존재 자체로 이원론적 세계관을 반영한다. 덜 까다로운 윤리적 의무가 부과되는 일상의 삶과, 더 높은 수준의 조직적이고 체계화된 의무가 부과되는 수도회의 삶으로 나뉘게 된다. 수도회가 요구하는 높은 수준의 도덕, 윤리적 삶을 세속에 살면서 충족하기란 불가능하기에, 수도회의 존재는 세상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 당연히 수도회의 삶이 더 나은 삶으로 간주되어왔다.
수도원 공동체는 그리스도교 탄생 이전에 존재했던 불교를 포함한 대부분의 고대 종교와 철학 전통에서 발견할 수 있다. 고대 종교와 사상의 전통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에서 독자적으로 수용하고 발전되어왔다. 여기에서 가장 먼저 던질 수 있는, 혹은 던져야 하는 질문은 ‘그리스도교는 금욕의 종교인가?’이다.
적어도 복음서에서 보이는 그리스도의 행적은 금욕적인 수도 공동체의 삶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상징적인 일곱 가지 기적 중 가장 먼저 언급된 내용은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기적(요 2장)이다. 이는 그리스도가 의도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특성이 전형적인 금욕 공동체와는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는 바리새파나 사두개파 등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 먹고 마시기를 탐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곧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첫 기적이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를 마시는 데서 시작되었다면, 이 땅에서의 예수의 마지막 만찬은 더 이상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마무리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막 14:25)
이 구절이 수도회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존재하는 근거가 된다. 세속의 일상을 즐겨야 할 근거와 금욕해야 할 이유를 모두 찾을 수 있다. 포도주를 더 이상 마시지 않겠다는 금욕 선언은 ‘하나님 나라’ 도래와 연결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승천하신 예수가 올라간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행 1:11)는 예수 재림에 대한 긴박성을 믿었다.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통한 하나님 나라 성취를 염원한 이들이 스스로 세상에서 빠져나와 사막에 수도원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 땅에서 일상 교회와 수도 공동체의 긴장이 필연적으로 생성되었다. 그러니 수도회 공동체를 금욕이나 탈세속화라는 단어로 규정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리스도교는 금욕적인 삶을 통해 자기완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수도회 존재의 핵심은 일상과 하나님 나라를 긴장 속에 이어주는 데 있다.
수도회는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을 추구하는가?
그리스도교가 금욕주의 종교가 아니라고 규정한다면, 수도회 성격을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이라고 보는 시선 역시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수도회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모나스테리온(μοναστήριον)은 ‘혼자’를 의미하는 모노스(monos)와 ‘장소’라는 뜻의 테리온(terion)이 결합된 용어이다. 수도사를 나타내는 단어인 몽크(monk)는 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풀어 쓰자면 수도회는 세상과 떨어져 홀로 살아가는 이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이다. 자연히 수도회는 ‘세상’에서 벗어난다는 의미가 강하게 묻어있다. 수도원주의의 이상을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여 수동적인 삶을 선택하는 것으로 연결하곤 한다.1)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 같은 경우는 유럽 중세 그리스도교가 남긴 부정적인 유산의 일부로서 수도원주의를 수동적이고 도피적인 삶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이 지점에서도 몇 가지 새로운 고민이 필요하다. 세속에서 벗어나려는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수도회 공동체가 형성되고 크게 확장된 첫째 성장기는 흥미롭게도 300년 이후 그리스도교 공인 시기와 겹친다. 300년 가까이 박해의 대상이던 그리스도교가 비로소 박해를 벗고 로마제국으로부터 비로소 인정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 그리스도인들의 고민은 좀 더 근원적인 데 있었다. 그리스도교 공인이 곧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가져온 것인지는 불확실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은 더 이상 차별과 박해, 불이익을 받지 않고, 오히려 유리한 사회적 지위를 차지할 기회가 되었다. 박해를 감수해야 하는 종교와 혜택을 기대할 수 있는 종교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교 공인을 그저 승리의 소식으로 보기에는, 그리스도교가 마주할 도덕적·윤리적·종교적 수준의 하락은 결코 간단치 않았다. 이러한 세속화의 위험을 자각한 이들이 제국의 중심을 떠나 사막으로 들어갔다는 점은 종교의 세속화를 향한 사전 경고였다. 수도회의 성장을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라는 기준으로 바라보기보다는, 그들이 누구보다 현실 세계에서 종교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 컸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2천 년 이상 이어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한 수도회를 살펴보면, 과도하게 세속화된 현실 사회와 타락한 제도교회에 대한 대조공동체로서 등장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거대한 제국 로마를 무너뜨린 후 유럽 세계를 장악한 게르만 이민족들이 빼어난 그리스도교 문명을 만들었다는 점은 아일랜드의 수도회를 비롯하여 유럽 전역에서 등장한 수도회의 기여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그뿐 아니다. 중세 그리스도교 문명의 형성 과정에서 제도교회 타락에서 새로운 수도회가 등장하여 교회 개혁을 이끌었다. 중세기 교회 개혁의 역사는 새로운 수도회 탄생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십자군 원정이 한창이던 시기, 군사 수도회나 구호 수도회의 등장은 수도회가 세속과 밀접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현실 세계에 대한 대조공동체의 정점은 기존 수도회와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니고 등장한 탁발수도회에서 찾을 수 있다. 탁발수도회는 홀로 살아가는 은둔 형태가 아니라, 세속 한가운데 들어와 탁발(구걸)을 통해 생존을 이어가는 선택을 했다. 이 탁발수도회가 생겨난 12세기 말엽은 교회 측면에서 보자면, 가톨릭교회의 권위가 정점을 찍던 시기이며, 현실 사회에서는 도시와 화폐경제 성장이 두드러진 원시적 자본주의가 생겨났던 시기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세속의 권력과 부를 버리는 무소유를 선택했다는 것은 단순한 도피적 삶을 넘어서는 가장 급진적인 형태의 사회참여로 읽을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수도회가 사회와 건전하게 상호작용하지 못했을 때 존재 의미를 상실한 사례는 종교개혁기와 프랑스혁명 당시 수도회의 해산과 파괴에서 엿볼 수 있다. 종교개혁은 가톨릭교회의 한 축을 지탱해오던 수도회의 해산과 파괴로 이어졌다. 그만큼 수도회는 엄청난 부와 종교적 권력을 가진 타락한 구체제의 상징이었다. 그러니 수도회를 세상으로부터의 도피 공동체라고 규정하는 것은 간편하지만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수도회가 긍정적으로 작용할 때는 세속의 종교적 지향점을 제시하는 역할을 했다.
수도사의 삶은 우리와는 무관한가?
수도회는 존재 자체가 사회적·종교적 반향을 불러왔다. 수도회는 운영 지침과 방향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수도 규약과 더불어 이를 지키며 살아가는 수도사들이 있기에 유지된다. 세속 사람들과 비교해 더 높은 수준의 윤리, 도덕적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애쓰는 수도사들은 분명 우리와는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 듯 보이지만, 교회의 권위와 명령을 따르고 순응하는 대가로 더 나은 내세와 구원을 보장받았다. 금욕적인 삶이 그리스도교 수도회의 본래 목적인 하나님 나라 성취의 차원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개인의 완성에 머물게 된 셈이다.
개신교 종교개혁은 당대 가톨릭 수도회의 자기완성을 위한 금욕과 신비주의의 한계를 비판하였다. 이 비판은 수도회 폐지로 이어졌다. 그렇다고 수도회 폐지가 수도회에 주어졌던 역할을 모두 외면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제 수도사들의 금욕은 일상의 그리스도인들이 합리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덕목이 되었다. 하나님 나라 성취가 수도사들이 전위에 서서 일구어가는 가치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 몸담은 대중 모두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 즉 소명 안에서 구현해야 할 덕목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절대자 앞에서 단독자로 삶과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고 걸어가는 수도사이다. 한 해에 수십만 명이 찾는다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은 비록 수도사의 길을 걷지는 않지만 정신없는 일상을 잠시 뒤로한 채 삶을 성찰하고 길을 찾아보려는 현대인의 고뇌와 갈망을 대변한다. 매일 수십 킬로미터를 꾸준하게 일정 거리를 걸어도 한 달 이상이 걸리는 800km가 넘는 길이다.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길은 고되지만 동시에 가장 쉬운 길이라는 말이다. 매일 걸어가야 할 이정표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힘든 길이지만, 포기하지 않는 한 순례길의 종착지는 반드시 나온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길은 쉽다. 최종 목적지가 다가올수록, 더 이상 걸을 필요가 없는 순간이 가까워질수록 다른 깨달음이 다가온다. 산티아고 길이 순례가 아니라 현실의 삶이 순례이고, 우리 일상이 순례자의 삶이라는 말이다. 이제야말로 편한 길을 떠나, 진정한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자각이다. 이 길은 지도나 표지판이 분명하지 않기에 훨씬 더 고단하고 불확실하다.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겨우 한 걸음, 신뢰 없이는 걸어갈 수 없는 길이다. 이 관점으로 수도사의 삶을 다시 생각해보면, 일상의 수도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평탄한 길이다. 그 길은 따라야 할 규칙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고, 그에 따른 보상도 비교적 잘 정립되어있다. 역설적이게도, 불확실한 현실 가운데 수도사의 삶을 요구받는 우리가 더 큰 고난의 길을 가고 있는 셈이다. 수도사의 삶이 우리와 무관하다는 오해하지 말자. 우리는 모두 일상의 순례를 하는 수도사들이다.
수도사들이 보여준 지향이 오늘의 삶과 연결되는 이유
지금껏 우리가 보아왔고 인식해왔던 수도회와 수도사의 삶은 과거의 영화를 더듬어 찾도록 보존해놓은 박물관의 전시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의 삶은 숭고할지언정 현실의 우리에게는 말을 걸어오지 않는 다른 세계였다. 수도회 역사는 제도교회사의 보조적 역할이라고 오해하기 쉽지만, 수도회는 그 자체로 2천 년 교회사에 독자적 흐름을 형성해왔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수도회는 종교의 가치와 본질을 고민하는 가장 전위에 있었다. 313년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어 세속화 물결이 불어닥친 현실을 자각한 이들이 자발적으로 사막에 들어갔다. 그들은 세속화를 막아선 사막의 영웅들이었다. 1215년 제4차 라테란공의회를 통해 중세 교회의 권력이 유럽 세계 정점에 섰을 때, 그곳이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님을 자각한 탁발수도사들이 등장하여 사도적 청빈을 강조했다. 근대 세계에서는 또 어떠했는가? 양차 대전으로 온 세계가 정신적 공황에 빠졌을 때, 그리스도교의 가치가 무엇인지, 세계인의 질문에 종교가 해줄 답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떼제 수도회나 라브리 같은 새로운 수도 공동체가 등장했다.
수도회의 삶이 박물관의 유산이 아닌, 오늘 여기 우리의 현실 속에서 다시 재생될 수 있어야 하는 이유다. 수도사의 삶이란 과거, 거기, 그들의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여기, 나와 우리의 삶이다. 고독(solitude) 속에 연대(solidarity)했던 수도사들의 가치와 지향이 우리 삶 속에 연결되도록 해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수도회에 길을 묻는 긴 여정을 떠날 충분한 이유가 된다.
1) 막스 베버, 에른스트 트뢸치, 아돌프 폰 하르낙 등 근대 개신교 학자들은 중세 가톨릭교회와 근대 개신교의 핵심적인 차이를 언급할 때 수도원 금욕주의가 개신교의 세속적·합리적 금욕주의로 변천하였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이 관점에서 중세 수도주의를 흔히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로 규정하였다. 이와 관련해서는 Lutz Kaelber, ‘Weber’s Lacuna: Medieval Religion and the Roots of Rationalization’,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57, no. 3》(1996), 465-485쪽 참조.
1부. 수도회의 탄생
1. 오늘 왜 수도원인가?
2. 수도원의 탄생 – 그리스도교 공인과 사막 교부들
2부. 역사 속의 수도회
3. 유럽을 만든 수도회 - 아일랜드 수도회, 베네딕트회
4. 중세 유럽의 개혁자들 – 시토 수도회와 클뤼니 수도회
5. 십자군과 수도회 –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
6. 세속화에 대한 급진적 저항 – 탁발수도회의 등장
7. 여성 수도회와 대안의 종교성
8. 종교개혁, 수도원 폐쇄, 예수회
9. 근대 혁명과 수도원 파괴
10. 근대성의 종말 앞에서 – 떼제 수도회, 라브리 공동체
3부. 수도회가 남긴 현대의 유산
11. 수도사의 일상
12. 수도원이 발견한 의식주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중세교회사 다시 읽기》《공의회 역사를 걷다》 《왜 존 왕은 마그나 카르타를 승인했을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