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를 향한 시선들 2: 장애신학
[377호 장애와 신앙의 교차로에서]
2층 본당으로 가는 층계참 위에서
내가 어렸을 적에 다녔던 삼천포의 모교회 예배당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2층 본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생각난다. 지은 지 수십 년 된 건물이었으나 상태는 양호했다. 설계하면서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든 사람들을 얼마큼 배려했을지 모르겠다. 다만 어렸던 내가 느끼기로 마냥 가파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난간을 짚으면 크게 불편하지 않게 오를 수 있었다. 병이 덜 진행된 시점이라서 이 길이 ‘장애’로 인식되지 않았고, 건물 이곳저곳에 계단이 많다는 점도 크게 의식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생각해본다.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게 예배당을 드나들 수 있었는데, 지금은 어떨까 하고 말이다. 불편 없이 그 교회를 다닐 수 있을까? 아마 지금의 내 몸 상태를 고려한다면, 다른 교회를 알아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취업해서 서울로 올라오기 전에 다녔던 부산의 한 교회는 예배당 입구부터 계단이었다. 제법 높은 돌계단을 네댓 개쯤 올라가야 예배당 건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휠체어 이용자가 한 분 계셨는데, 1층 로비에 걸린 스크린에서 나오는 영상으로만 예배하셨던 기억이 난다. 이 교회도 본당이 2층에 있었다. 8년 전 당시는 병의 진행으로 계단 오르기가 이전보다 꽤 힘들었고, 때때로 난간을 생명줄처럼 붙잡았다. 컨디션이 괜찮을 때는 나름대로 어렵지 않게 계단을 오를 수 있었는데, 좋지 않을 때는 다리를 절거나 꾸역꾸역 힘겹게 오르는 티가 났다.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주일예배 직전이나 훨씬 더 여유 있을 때 들어가기를 선호했다. 안내자가 입구를 지킨다거나 많은 사람이 몰리지 않는 시간 말이다. 불편한 몸을 그대로 드러내기가 유독 교회에서는 어려웠다.
왜 그랬을까? 교인들이 내 병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볼 때 매번 답하기도 번거로웠고(그들은 한 번 묻지만, 나는 같은 이야기를 수없이 반복했고, 지난번에 답한 내용을 다시 묻기도 했다), 기도 제목으로 계속 거명되는 일도 싫었다. 기도하면 고침 받을 수 있다는 관점을 강요하거나, 기도원 혹은 ‘치유 집회’를 소개해주거나, 내 믿음을 평가하는 일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다 보면, 지치게 된다. 자연히 방어적일 수밖에(나 또한 일말의 희망을 품고 한때 ‘치유 집회’를 전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내 몸을 붙들고 나만큼 기도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병이 낫기를 누구보다 나 자신이 바라지 않았겠나). 존재 자체가 수년 이상 기도 제목으로 남아있고 여전히 병은 진행되는, 그러니까 기도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썩 유쾌하지 않은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대학에 올라와서 이곳저곳 다닐 교회를 (교단을 가리지 않고) 찾아다니며 일종의 ‘탐방’을 해봤던 처지에서 말하자면, 단독 예배당 건물을 가진 교회는 죄다 본당이 2층에 있었다(유행했던 건축 양식이 있었을까?). 아마 예배할 공간 면적을 최대한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 그런 교회들은 보통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또 다른 공통점은 본당으로 가는 길에 전신을 볼 수 있는 거울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모교회 같은 경우, 본당으로 가려면 못해도 열 걸음 이상 디뎌야 한 번 꺾어지는 계단을 올라야 했는데, 층계참의 벽에는 큰 거울이 있었다. 모르기는 몰라도, 예배에 참석하기 전 교인들이 몸을 단정히 하는 데 도움이 됐겠다. 당연히도 예배에 참석하기 전에 한 번, 예배를 마치고 내려오면서 또 한 번 이 거울과 만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어떤 자세로 예배당에 와있는지 스스로 돌아보라는 듯이 거울은 늘 거기 그 자리에 있었다. 과거에는 이 거울 앞이 불편하지 않았다.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옷매무새를 고치는 자리였으니. 지금은 달리 보인다. ‘아픈 몸’이 그곳에 놓인 거울의 인상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교회 다닐 때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그 자리는 늘 ‘위장’하기 위한 장소였다. 거울 앞에 서면 언제나 표정을 재정비했다. 숨이 차거나 다리가 아파도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 층계참은 쉬어가는 자리였고, 불편한 내 몸뚱이와 엘리베이터 없는 교회 건물의 접근성에 한 번쯤 의문을 품는 그런 자리였다. 교회에 문제 제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 물음들은 내 안으로 곧잘 되삼켜졌다. 비용이 들어가는 문제였고, 나 혼자 불편을 감수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돌아보면, 층계참에서 내 안에 생겼던 의문은 언뜻 보면 소소할 수 있으나, 나름대로 중요한 신학적 물음일 수 있었다. 단순하게는 장애인을 향한 교회의 태도일 수 있고, 조금 멀리 나아가서는 교회가 어떤 인간의 형상을 표준으로 삼느냐와 연관되어 있었다. 미로슬라브 볼프는 《세상에 생명을 주는 신학》(IVP) 서두에서 “신학은 인간의 초월적 갈망과 일상의 분투 사이의 끊을 수 없는 연관성에 관한 것”(16-17쪽)이라고 했고, 이 책은 “신학이 필요한 존재가 있다면 바로 인간이다. 세상의 생명을 위한, 참된 삶을 위한 신학자들이 되자”(230쪽)라는 말로 끝난다. 괜히 삐딱하게 보는지 몰라도, 저런 메시지에 밑줄을 긋다가도 한 번씩 생각하게 된다. 저 ‘인간’이라는 단어를 읽으며 ‘장애인’을 조금이라도 떠올려보는 그리스도인이 몇이나 될까 하고 말이다.
장애신학(Disablity Theology)이란 무엇인가
장애신학·장애인신학·재활신학·사회복지신학·특수교육신학 등 이름은 다르지만, 장애인이 삶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를 다루는 신학적 논의들은 계속 존재해왔다. 조금만 관심을 두고 검색해봐도 관련 서적을 제법 많이 찾을 수 있다. 사실 이렇게 이름 붙인 신학들이 등장할 필요는 없었다. 기존 신학들이 장애인 문제를 제대로 다뤘다면 말이다. 김홍덕이 지적하듯이,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신학해석은 교회가 장애인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공간을 마련해 놓지 않았다.”1) 울리히 바흐는 장애인은 신학의 자리에서 기껏해야 교회의 사회선교나 세상에 대한 책임 다음의 부수적 위치에 놓여왔으며, 교회는 장애인/비장애인을 포괄하는 ‘통일된 인간학’이 아니라 장애인을 주변부로 내몰아 게토화하는 ‘균열된 인간학’을 갖고 있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2)
물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도 존재했다. 지난 연재 글(2022년 3월·376호 참고)에서도 ‘장애인’의 범주가 ‘발명’된 지 200년도 지나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1세대 영국 장애학이 그렇듯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 영향을 받은 분석이지만, 자본주의 태동 및 근대사회 시작과 더불어 ‘일할 수 없는 몸’으로서 ‘장애인’ 개념이 등장했다는 데 딱히 이론의 여지는 없을 것 같다. 근대 이전 상황을 고찰하기 어려운 까닭은, 서구 중세의 장애인이 가난한 자와 병자를 논할 때 부수적으로 다뤄졌다는 데 있다. 종교개혁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장애를 따로 떼어놓지 않았고, 빈자를 위한 구제와 자선을 언급할 때 함께 논의되었다.3) 다른 경우와 비교해봐도 장애인 인권은 늦게 발전했으며, 국제법상 장애인 권리를 인정받은 시점도 최근이다.4)
장애신학 등장 및 변화 양상 또한 역사·사회의 흐름에 발맞춰간다. 사회적·학문적으로 보면, 대체로 장애에 관심 있는 비장애인 연구자의 작업물에서 발생하는 공백을 장애인 당사자가 메우고, 장애인/비장애인이 함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듯하다. 최대열은 장애신학을 세 유형으로 정리하는데, 이 흐름과 대동소이하다. 그는 ‘장애인을 위한 신학’ ‘장애인에 의한 신학’ ‘장애신학’으로 구분한다.5) ‘장애인을 위한 신학’은 ‘선교신학’ ‘복지신학’ ‘재활신학’ ‘디아코니아신학’ 영역에서 비장애인 주도로 이뤄졌으며,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실제적 실천을 둘러싼 기초 논의를 담았다. ‘장애인에 의한 신학’은 당사자주의와 맞닿는데, 장애인이나 그 주변인이 장애 경험·의식 등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세 번째 유형 ‘장애신학’은 장애인/비장애인 이분법을 넘어, ‘장애’ 자체를 주제/매개로 삼아 종합적 고찰을 꾀한다. 앞선 두 유형을 포괄하며 장애학의 발전과도 맞물려 나아가고 있다.
장애신학은 사회구조를 문제 삼으며 해방과 변혁을 이야기하는 각종 상황신학(해방신학, 정치신학, 여성신학, 흑인신학, 민중신학, 생태신학 등)의 흐름과 관련이 있다. 또한 각 상황신학이 제시하는 억압받는 대상이 장애 문제와 연관이 깊은 사례도 있기에(장애 여성 등), 최대열·김성원 등은 다른 신학과의 연계 필요성을 제시하기도 한다.6) 눈길을 끄는 대목은 성령론에서 특히 초자연적 신유 은사를 앞세우기도 하는 오순절 신학과의 충돌이다. 장애신학의 한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 《사회복지 신학》(예영커뮤니케이션)이나 《장애도 개성이다》만 해도 장애를 ‘개성’으로 보고, 장애학에도 이 같은 인식이 존재한다. 육체적·정신적 장애의 치유를 강조하는 오순절 신학과 대치하는 측면이 있는 셈이다.
‘장애’ 관련 구절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또한 장애신학에서 다루게 되는데, ‘하나님이 장애인을 창조하셨나?’ ‘장애는 죄의 결과인가?’7) 등과 관련한 논의가 진행될 수 있다. 성경은 장애를 마냥 긍정적으로 보지도 않고, 그렇다고 부정적으로만 보지도 않는다. 구약의 경우 “듣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 눈이 먼 사람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아서는 안 된다”(레 19:14)라는 구절은 고대 근동 문화를 고려했을 때 유례를 찾기 힘든 ‘장애인 보호 법령’이지만, 21장 제사장 관련 규례를 보면 장애인은 “몸에 흠이 있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21:18) 처지로 그려진다. 그러나 상반되는 듯한 두 구절은 모순되지 않는다. 앙리-자크 스티케가 밝히듯, 고대 유대교 시스템은 ‘장애인’을 ‘결함 있는’ ‘불순한’ 존재로 규정하여 종교적 제의에서 배제했지만, 윤리적 차원으로는 일상 가운데 장애인/비장애인을 통합하도록 이끌었기 때문이다. 스티케에 따르면, 예수는 안식일(시간)에 회당(공간)에서 병을 고침으로 종교적 제의에 덧씌워진 시공간적 금기를 해체하고 전복한 인물로, 요한복음 9장에서 보듯이 ‘내면적 인간의 성스러움’을 일깨웠다.8)
시대마다, 인물에 따라 다르게 드러나는 장애에 관한 기독교적 해석을 비교하는 일도 장애신학의 탐구 영역에 들어간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탁상담화》(CH북스)를 보면, 정신질환을 겨냥한 표현으로 “우울증은 마귀의 작태라고 나는 결론짓습니다”(368쪽) “마귀는 정신 이상자들처럼 자신이 육체적으로 사로잡는 자들에 대해서는”(378쪽) 등이 등장하는데,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비판의 소지가 있다. 자기 자신이 각종 만성질환과 우울증 등의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음에도 루터가 이렇게 발언한 배경에는 당대의 관념이 자리하고 있다. 이에 반해, 중세기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은 여러모로 대조적이라서 흥미롭다. 지적장애인은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았기에 그들에게 세례와 성찬을 베풀 수 있다고 밝히기 때문이다. 손은실은 아퀴나스의 주장 등을 통해 당대 가톨릭교회 장애 인식을 제시하는데, 중세를 ‘암흑시대’로 인식하는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성 루이 9세, 여성 신비가들은 신체적 고통을 ‘거룩성’과 ‘영적 정화’를 위한 ‘선물’로 여겨 받아들이고 인내하면서 자선에 힘썼다.9)
당신 교회에 장애인은 몇 명인가? 확실한가?
오늘날 사람들이 장애인을 대할 때면 흔히 범하기 쉬운 실수는 장애를 ‘전체 인격성’10)으로 보편화해서 보는 일이다. 이는 곧바로 거부감, 공포심, 불안감으로 이어진다. 누구든 맞닥뜨려본 적이 있을 것이다. 특정한 손상이 눈에 띄게 드러나는 장애인을 처음 만났을 때 그 신체적 특징이 다른 모든 면을 압도하는 경험을. 일종의 ‘원초적 반응’인데, 여기서 비롯하는 감정은 손상과 장애의 성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는 현시대에 자리 잡은 ‘건강에 대한 이상’ 때문이기도 하다. 몰트만은 우리가 장애인을 대할 때 인간이 아닌 ‘장애’를 먼저 보며, 장애인이 함께하는 주체이기보다 (도움을 줄지언정) ‘객체’이기를 바란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장애인을 공공적 삶에서 배제하면 할수록 그들을 향한 공포심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정신분석학자 시몬느 소스는 사람들이 장애라는 예외적 사건을 만났을 때 ‘불합리’를 견디기 어려운 나머지 ‘인과관계’를 추적하려 하고, 전혀 타당하지 않은 생각이지만 감염의 공포를 느끼기도 하면서 장애인을 멀리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 반응은 아이들에게서 쉽게 관찰된다.11) 장애 형상은 비장애인을 불안정하게 만드는데, 이는 우발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장애를 지닌 몸’의 특성에서 기인한다.12) 정신적·신체적 손상이 언제든 재난과 사고, 노화 등에 의해 비장애인에게 발생할 수 있는 ‘인간의 현실’이라는 점 또한 ‘감염의 공포’나 ‘불안정’ 요소로 다가온다. 실제로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 조사통계팀에서 지난 1월에 공개한 〈2021년 장애인 통계〉를 보면, 2017년 기준 장애인 전국 추정치 약 281만 명 중 88.1%가 ‘후천적 원인’에 따라 장애를 갖게 되었다고 응답했다. 이 수치는 이제까지 90% 전후를 꾸준히 유지해왔다.
김홍덕은 기독교가 장애인을 대할 때 전통적으로 네 가지 관점, 즉 ‘신의 징벌’ ‘죄의 결과’ ‘귀신 들림’ ‘불쌍한 자’로 보아왔다고 밝히며, 장애인을 향한 교회의 편협한 시각과 태도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바로 “장애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벌 또는 교훈적 가르침을 위한 경책” “장애는 비장애인에게 은혜와 교훈을 주는 수단” “장애인은 하나님의 특별한 메신저나 천사 또는 신비한 능력을 타고난 존재”라는 점이다. 세 가지 태도는 모두 교회가 장애인을 ‘목회 대상’으로만 보도록 하나의 틀을 제공하며, 장애인을 ‘정죄’ ‘동정’ ‘대상화’의 눈으로 인식하게끔 추동해간다. 장애인의 형상은 천차만별인데도 특정한 모습이나 견해를 대표화·이론화하는 셈이다.13)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개성을 지닌 한 명의 인간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장애를 ‘전체 인격성’으로 보편화하는 문제와 더불어, 사람들은 많은 경우 장애인을 ‘어린아이’로 취급하는 경향을 보인다.14) 로완 윌리엄스는 《심판대에 선 그리스도》(비아)에서 ‘목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 주목하는 누가복음을 다루며 이를 언급한다(99-133쪽). 스탠리 하우어워스 말을 빌려, 우리가 사회 및 교회 공동체에서 오롯한 한 명의 구성원으로 취급하지 않고 ‘평범한 성인 이하’로 보는 어린이를 대하듯 장애인을 비장애인 기준에서 보호하려는 태도를 보인다고 지적한다. 그렇기에 장애인들이 시위하거나, 기존의 태도에 불복하고 자기 권리와 자유를 주장하는 모습을 보이면, 오히려 “당혹감을 느끼고 심지어는 분노하며 상처를 입기까지”(117쪽) 한다는 것이다. 로완 윌리엄스는 장애인을 통해 ‘타자성’을 깨닫고 자기가 구축해온 세계를 기준으로 타자를 재단하려는 충동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 세계의 불완전성을 알아보고, 더 깊은 현실에 맞게 세계를 확장하기 위해 나아갈 때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제안한다. 이는 어린이를 대하는 태도 또한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만든다.
로완 윌리엄스가 언급한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는, 세계 장애인들의 삶과 목소리를 통해 장애학을 정립하고자 시도하는 《우리 없이 우리에 대한 것은 없다》(울력)에 나오는 ‘온정주의’와 다르지 않다. 저자 제임스 찰턴은 온정주의가 장애 억압의 중심부를 차지한다고 말한다(93-98쪽). 횡단보도에 선 시각장애인을 도와준답시고 묻지도 않고 팔을 잡아끄는 행위, 휠체어 이용자가 식당에 왔을 때 ‘동행자에게’ 휠체어 이용자 의사를 묻는 일 등에서 온정주의적 태도를 만날 수 있다. 같은 눈높이에서, 같은 주체로 대하지 않는 셈이다. 우리는 너무도 많은 영역에서 지레짐작대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일례로, 한때 정부에서 청각장애인에게 1종 운전면허 취득을 원천적으로 금지한 일이 있었다. 교통사고 위험이 클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2018년 청각장애인 기사들이 운행하는 ‘고요한택시’가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청각장애인의 운전과 관련한 기사가 잇따라 나온 적이 있는데, 2019년 3월 14일 자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청각장애인의 교통사고 발생률은 0.012%로 0.86%인 비장애인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비장애인보다 1.5배 정도 넓은 시야, 방어 운전을 하려는 태도가 주요인으로 꼽혔다.
우리네 교회가 장애인을 한 사람의 주체로서 받아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위르겐 몰트만과 로완 윌리엄스는 각각 ‘만남’과 ‘대화’가 유일한 길이라고 이야기한다. 장애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접촉점을 늘리는 것이 급선무이다. 예전 교회 사람들이 내게 던진 병에 관한 질문은 내 몸 상태를 배려하는 방향으로 환경을 바꾸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늘에서 오는 일순간의 기적을 구했다. 기도는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불편은 계속되었다. 어떻게 보면 순수할 수도 있는 그 마음을 타박하려는 것은 아니다. 지금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조금 다른 이야기를 꺼내놓지 않을까 싶을 뿐. 나는 다리가 불편하다 보니, 피치 못하게 계단을 오르면 꼭 난간을 찾는다. 그런데 난간이 있더라도 청소가 안 된 탓에 옷이나 손이 더러워지는 경우가 꽤 많다. 그럴 때마다 세상은 난간이 필요 없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남장애인심리상담센터 김용구 목사는 〈뉴스앤조이〉 1월 4일 자 인터뷰 기사에서 ‘장애인전용 화장실’15) 수준이 그 교회의 장애 인식 수준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전적으로 공감이 가는 이야기다. 그 말대로, 장애인전용 화장실이 설치되지 않은 교회도 많아서 문제이지만, 있더라도 각종 도구로 가득 채워놓았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나는 누군가와 약속 장소를 정하기 전에 후보지를 물색할 때 공을 들인다. 그곳이 1층인지, 1층이 아니라면 엘리베이터는 없는지, 있다면 엘리베이터로 가는 가장 최적의 루트는 어디인지, 내 몸 상태를 따졌을 때 어떤 경로가 가장 빠르고 편한지 등 온갖 정보를 사전에 조사한다. 그러지 않으면 변수가 생겼을 때 제대로 대처할 수 없고, 몸을 무리하면 회복에 최소 하루 이상이 걸리기 때문이다. 가까운 이들 중 장애인이 있다면, 그와 만날 때 그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곳까지 왔는지 한번 상상해보는 데서부터 제대로 된 ‘마주 봄’이 시작되지 않을까 싶다. 데이비드 앤더슨은 《신학적 관점에서 본 장애인 이해》(밀알서원)에서 자신들 교회에 장애인이 없다고 반응하는 이들을 향해 ‘확실한가?’ ‘왜 당신 교회에 장애인이 없는가?’라는 두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고 언급한다(21쪽). 나는 이를 변용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당신 교회에 장애인은 몇 명인가?’ 세계보건기구(WHO) 통계(2011년)인 15%에 비교하면 어떤가? 더 적게 잡아서 한국 장애인출현율 5.4%에 비교하면? ‘당신이 헤아린 그 숫자가 확실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혹시 갖은 이유로 본인이 장애인임을 숨기고 있는 사람은 없을까? 이 물음 앞에서 그 교회가 장애인에게 열려있는지 아닌지가 드러나지 않을까.
1) 한국장애학회 편저, 김홍덕, 〈장애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와 과제〉, 《장애학으로 보는 문화와 사회》(학지사), 113쪽.
2) 더 자세한 내용은, 위르겐 몰트만 논문 모음집 《하나님 나라의 지평 안에 있는 사회선교》(대한기독교서회) 7장(118-137쪽)으로 수록된 울리히 바흐의 강연문 〈신학적 주제로서의 장애인〉을 참고하라. 이 책에 대해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점은, 세계적 신학자 몰트만의 장애인에 대한 견해를 집중적으로 볼 수 있는 저술임에도 ‘장애인 차별 용어’로 규정되는 단어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2000년 번역판뿐 아니라, 2017년 개정판을 확인해도 ‘벙어리’ ‘귀머거리’ ‘소경’ ‘절름발이’ ‘문둥이’ 같은 단어가 그대로 나온다. 한국교회가 오랫동안 사용했던 번역 성경에 대해서도 이와 관련한 문제 제기가 존재한다. 채은하의 논문 〈부적절한 장애인 호칭들의 문제와 대안 – 공인 번역 성경들을 중심으로〉, 《장신논단 Vol. 52 No. 2》(2020)을 참조하라.
3)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 당시 교회의 장애 인식은, 《장애인신학》(대한기독교서회)에 실린 두 논문 손은실의 〈서양 중세교회의 장애인 인식〉과 홍지훈의 〈종교개혁사에 나타난 장애인의 삶과 신학〉을 참고하라.
4) 조효제의 《인권의 최전선》(교양인)에 따르면, ‘국제인권장전’이라고 불리는 1948년 세계인권선언과 1966년 국제인권규약은 ‘장애’를 언급하거나 규정하지 않는다. 유엔 장애인 권리선언은 1975년 제정되었고, 1981년 ‘국제 장애인의 해’가 정해졌으며, 장애인권리협약은 2006년 말 제정되어 2008년 발효됐다. 조효제는 장애인 권리가 늦게 인정된 이유로, 장애를 병리 현상으로 설명하려는 의학적 태도, 전통적 장애인관(체념·기피·멸시·연민 등), 사회사업 영역의 시혜적 시각 등을 꼽는다.
5) 각 유형의 구분과 역사, 관련 저술 목록을 자세히 알고 싶다면, 《장애 조직신학을 향하여》(나눔사) 20-25쪽과 《장애 너머 계신 하나님》(대한기독교서회)에 실린 최대열의 〈장애인신학의 역사와 전망〉(특히 24-29쪽)을 참고하라.
6) 《장애 조직신학을 향하여》 8장 ‘함께 걸어가는 장애신학’ 참조. ‘재활신학 서설’이라는 부제가 붙은 김성원의 《장애도 개성이다》(인간과복지)는 ‘생태신학’ ‘여성신학’ ‘포스트모던 신학’ 등의 문제의식과 재활신학을 엮어서 서술한다.
7) 김홍덕의 〈장애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와 과제〉에서 가져온 문제 제기다. 그는 이외에도 ‘에덴동산에는 과연 장애가 없었을까?’ ‘장애인은 과연 부정한 사람들인가?’ ‘하나님은 왜 진노의 표현으로 장애를 만드셨나?’ 등을 언급한다. 안교성은 《장애를 잃어버린 교회》(홍성사)에서 조직신학 각론과 비교하여 신론-신정론, 인간론-하나님의 형상, 기독론-고난의 종, 성령론·구원론-은혜의 주도성, 교회론-교회의 일치, 종말론-잔치의 표상 등의 장애인 관련 주제를 예시한다(47쪽).
8) 레위기 해석은 김근주의 《오늘을 위한 레위기》(IVP)를 참고했다. 김근주와 김홍덕은 21장을 해석할 때 역사 배경과 오늘날 현실을 함께 놓고 문자적 차원을 넘어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스티케의 논의는 ‘장애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저술인 《장애: 약체들과 사회들》(그린비) 1장 ‘성서와 불구성 – 신에 대한 숭배’에 실려있다.
9) 손은실, 〈서양 중세교회의 장애인 인식〉, 《장애인신학》, 96-116쪽. 김홍덕은 지적장애인의 성례 문제를 탐구한 대표적 국내서 《교회여! 지적장애인에게 성례를 베풀라》(대장간)에서 《탁상담화》가 루터의 사적 대화를 취합하여 재구성한 내용임을 지적하며, 루터 문헌 전반을 검토했을 때 장애인을 향한 심한 편견은 없었다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한다. 오히려 루터가 지적·신체적 장애인을 30년 가까이 개인비서로 두기도 했다고 전한다.
10) 위르겐 몰트만, 《하나님 나라의 지평 안에 있는 사회선교》, 57쪽에서 재인용.
11) 《시선의 폭력》(한울림스페셜), ‘근원의 수수께끼: 죄의식·인과관계·망상’(79-91쪽) 참조.
12) 《보통이 아닌 몸》(그린비) 2장 ‘장애의 이론화’ 참조.
13) 〈장애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와 과제〉, 111-113쪽.
14) 《하나님 나라의 지평 안에 있는 사회선교》, 56쪽.
15) 김원영은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사계절) 7장 ‘권리를 발명하다’에서 ‘오줌권’을 논한다. 골형성부전증으로 지체장애 1급 판정을 받고 휠체어 생활을 해온 김원영은 ‘오줌 누기’가 어린 시절 가장 큰 과제였다고까지 이야기한다. 휠체어 이용자에게 ‘장애인전용 화장실’의 존재는 무척이나 크다. 가고자 하는 장소에 전용 화장실이 없다면, 꼼짝없이 접근 가능한 화장실을 찾을 때까지 소변을 참아야만 한다. 이 때문에 강연장 같은 곳에 갔을 때 물도 전혀 안 마시고 몇 시간씩 보내는 장애인들 이야기를 나는 많은 곳에서 접했다.
강동석
본지 기자. 베커근이영양증을 진단받은 경증장애인이다. 학부에서 국어국문학과 문예창작학을 공부했으며, 기독교 독립 언론 〈뉴스앤조이〉에서 편집기자로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