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아이들을 존중하고 있나요?

[378호 어린이를 둘러싼 세계]

2022-04-29     임명연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유튜브 영상 갈무리

‘당신의 안 좋은 습관을 고쳐드립니다’라는 간판이 걸린 천막을 거리에서 보신 적 있으신가요? 의사 가운을 입은 전문가가 지키는 그곳은 아동 인권을 옹호하는 한 단체에서 임시로 설치한 심리상담소입니다.

무료로 운영되는 이곳에 적잖은 사람들이 들러, 고치고 싶은 자신의 안 좋은 습관을 상담합니다. 자기 전 스마트폰 보는 습관, 주말에 잘 씻지도 않고 게으름 피우는 습관, 알람 몇 개를 맞춰놔도 일어나지 못하는 습관, 주변 정리정돈을 잘 안 하는 습관 등 다양한 내용의 고민이 쏟아집니다. 사람들에게 고치고 싶은 습관이 무엇인지 경청한 전문가는 처방을 내놓습니다.

“자, 그럼 두 손바닥을 한 번 펴서 내밀어 보시겠어요?”

전문가 말에 사람들은 두 손바닥을 펴서, 전문가 앞으로 팔을 뻗습니다. 그러자 전문가는, 상담 테이블 위에 무심하게 놓여있던 30cm의 투명한 플라스틱 자를 잡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자신의 처방을 이야기합니다.

“안 좋은 습관이 있으시잖아요? 그럴 땐 체벌로 고칠 수 있거든요. 몇 대 맞으시겠어요?”

손을 내밀고 처방을 기다리던 사람들 표정은 ‘나 참, 기가 막혀서…’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이 사람이 지금 장난하나? 나를 놀리나?’ 등 다양합니다. 그리고 말로 자기 생각과 감정을 표현합니다. “뭐야, 이거~?” “아니, 내가 지금 나이가 몇인데, 무슨 체벌을….” “제가 무슨…. 애도 아니고….” “제가 성인인데…”

각자의 반응을 지켜보던 전문가는 상담 결과지를 보여줍니다.

상담 결과: 당신의 안 좋은 습관은 ‘맞으면 안 되는 나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입니다. 맞아도 되는 나이는 없습니다. 그리고 맞아도 되는 아이도 없습니다.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을 줄여 부르는 말로, 이중 잣대를 비판적으로 일컫는 신조어입니다. 결코 좋은 의미로 쓰이지 않는 단어지요. 그런데 과연 앞의 상황이 내로남불과 다를까요? 2022년을 살아가는 지금 우리 사회 상황이, 우리 아이들이 처한 현실이, 이런 내로남불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나요?

‘노키즈존’이 함의하는 것

2022년 현재, 온라인 시사상식사전에는 노키즈존(No Kids Zone)이라는 단어가 “영유아와 어린이의 출입을 금지하는 업소를 가리키는 신조어다. 성인 손님에 대한 배려와 영유아 및 어린이의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출입을 제한한다”라는 의미로 당당하게 등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온라인 사이트에서는 노키즈존 알림판이 만 원도 안 되는 가격으로, 다양하게 제작되어 판매되고 있습니다. 이미 상용화되어 쉽게 구매할 수 있을 만큼 보편화되었지요.

우리는 일상에서 ‘흡연 금지’ ‘노상방뇨 금지’ ‘관계자 외 출입금지’ 등 다양한 금지 표시를 접합니다. 그렇다고 이것들이 문제시되고 이슈화되지 않습니다. 필요에 따라, 이해관계에 따라 일정한 ‘행위’를 금지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장애인 출입 금지’ ‘흑인 출입 금지’ ‘동남아인 출입 금지’라고 당당하게 걸어놓은 공간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혹시 이런 안내 문구가 당당하게 걸린 공간을 보신 적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가 될 사안입니다. 이는 공간에서의 ‘행위’ 금지가 아닌, 공간 내 ‘존재’ 금지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아이들은 ‘출입 금지’를 당해도 괜찮은 걸까요? 아이들에게도 공간에 존재할 수 있는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합니다. 오히려 아동이기에 그 공간에서 용납되는 행동과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학습할 권리까지 보장해야 합니다. 동일한 공간에서 용납할 수 없는 행위가 일어난다면, 그건 성인이라도 퇴장해야 마땅하죠. 저는 이렇게 사회적 공감이 이뤄져서, 공간 사용 금지가 단순하게 ‘영리 활동의 불편함을 줄이기 위함’이 아니라 ‘존재를 부정하는 차별’이라는 사회적 합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이 내로남불의 억울한 상황에 내몰리지 않을 테니까요.

‘아동 혐오 현상’을 인식조차 못하는 사회

내로남불 못지않은 이중 잣대도 일상에서 심심찮게 목도합니다. 아동이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등에 너무 일찍 노출되면 좋지 않다고들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어린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쥐여주는 부모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리 곱지 않습니다. 그런데 식당이나 대중교통 등을 이용할 때 아직 말소리를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면, 이에 대해 또다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냅니다. 아이도, 부모도 아이의 말소리를 상황에 따라 조절하는 훈련이 미흡한 상황인데도 말이죠. 당연히 아동의 나이가 어릴수록 다양한 상황에서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아이를, 아이의 부모를 충분하게 배려해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곱지 못한 시선을 견디지 못하는 부모는, 아이의 손안에 디지털 기기를 쥐여줍니다. 식당이나 지하철 등에서 주변을 둘러보세요. 어린 아동일수록 아이의 손에 스마트폰, 태블릿 등이 놓여있을 것입니다.

어린 아동을 키우는 어린 부모는, 어린 자녀 손에 디지털 기기를 쥐여주었다는 시선 혹은 아이를 조용히 시키지 못한다는 시선, 둘 중 하나의 곱지 않은 시선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런 우리 사회 모습이, 제 눈에만 이중적 잣대를 들이미는 것처럼 보이나요?

우리는 자신과 관계된 아동 ―자녀, 동생, 조카, 손주 등― 을 대할 때 천진난만한 모습을 기대합니다. 혹은 때때로 우리 사회는 아이가 아이답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아이가 아이답지 못하면, ‘애가 너무 영악하다’ ‘애어른이네’ ‘너무 일찍 철이 들었다’라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반면, 자신과 관계없는 아동일 때나 특정 상황에서 우리 사회는 아이가 성인처럼 행동하기를 요구합니다. 그것도 마치 품행이 단정한 성인처럼 말입니다. 식당·카페·대중교통·공공장소 등에서 점잖게, 그저 조용히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일상에서 보이는, 아동를 향한 이런 이중적 태도 때문일까요? 2019년 5월, UN아동권리위원회 소속 한 위원은 “전반적으로 한국은 아동을 혐오하는 국가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혐오. 사회적 소수자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한 개인/집단을 멸시하거나 이들을 향한 차별이나 폭력을 선동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사회 구성원 중 한 사람이 바라보는 한국 사회 아동에 대한 이중 잣대, 이중적 태도를 넘어 2019년 UN아동권리위원회 위원 눈에는 아동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가 ‘혐오’로 비쳤습니다. 2022년 현재, 우리 사회는 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달라지기 위해선, 질문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2022년 현재 우리 사회가 아동을 존중하고, 아동과 함께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말입니다.

‘아이 키우기 좋은 지자체’에서 배제된 것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아동친화도시로 인증받기 위해 지자체별로 다양한 정책과 관련 활동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때의 원칙 중 하나가 ‘아동 참여’입니다. 그런데 이런 표어를 종종 보셨을 겁니다. ‘아이 키우기 좋은 ○○○(지자체명)!’

당연히 아이를 키우기 좋은, 그래서 아이에게 더 좋은 양육환경이 펼쳐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 아이의 삶의 질도 올라가겠죠. 그러나 그보다 앞서 저는 ‘아이가 행복한, 아이가 살기 좋은, 아이가 즐거운’, 그렇게 아동에게 친화적인 우리 사회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아동 권리를 존중한다고 하면서도, 아직 아동을 권리의 주체가 아닌 수혜자로 생각하고 활동하며 기획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영유아 영역에서는 더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아직 말을 잘 못해서, 아직 글을 몰라서, 아직 너무 어려서….

정말 아동이 못 하는 걸까요? 아니면 아동의 생각과 의견을 묻고 함께하는 과정에 익숙하지 않아서, 혹은 그런 과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라서, 혹은 그런 과정을 밟아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려서, 또는 우리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아서는 아닐까요? 진중하게 묻고 싶습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아동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혹은 아동을 배려한다는 차원에서, 의도하지 않았든 의도성을 다분히 가졌든, 아동들을 배제해오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충분히 물어본 적이 없고, 물을 생각도 못 했고, 또 묻지도 않았던 것은 아닌지. 우리는 가족 단위에서부터 아이들 의견과 생각을 묻고 함께하는 훈련이 부족하죠. 내 아이니까, 내 아이의 사랑스러운 사진을 내가 찍어서 나의 SNS 계정에 올리는 일이 당연한가요? 그러나 온라인 공간에 공개되는 것은 아이의 얼굴입니다. 자녀라도, 자녀에게 동의를 구하는 일이 먼저입니다. 내 자녀 나이에 맞춰, 아이 상황과 눈높이에서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 부모는 생각하고 고민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아동이 주체가 되지 못하는 현실은, 정책이나 제도를 운영하는 과정에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2022년 아동·보육 예산을 편성하면서 정부가 밝힌 예산 운용 목표는 ‘양육부담 경감 및 보육의 질 재고, 돌봄 접근성 향상 등을 통한 출산·양육 친화적 환경 조성’입니다. 다른 영역은 어떨까요? 아시는 것처럼 기초생활보장, 취약계층 지원, 건강보험, 노인 복지 영역은 모두 그에 해당하는 당사자의 이로움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노인 복지 영역은 어르신들의 노후소득보장을 강화하고, 이를 통해 어르신들이 활발하게 사회 활동을 하면서 건강한 삶을 누리도록 목표를 정하고 있지요. 그런데 아동은 다릅니다. 정책·제도의 목표와 방향에서부터 보호자에 의해 양육되고, 돌보아지는 수동적이고 타자화된 존재로 기술됩니다. 아동 복지 예산 운용의 목표는 ‘양육부담 경감, 돌봄 접근성 향상, 출산과 양육 친화적 환경조성’입니다. 누구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나요? 양육자입니다. 철저하게 어른 중심입니다. 아동의 생존과 발달, 보호를 국가가 또한 우리 사회가 보장하는지 몰라도, 아동의 참여는 철저히 외면받고 있습니다.

주변에 복지기관·시설들을 둘러봐도 아동이 주체가 되지 못하는 현실이 드러납니다. ○○노인종합복지관, ○○장애인복지관, ○○종합사회복지관, ○○여성회관, ○○평생학습센터 등 아동기 이후의 다양한 복지·문화·여가 시설들이 존재하지요. 최근에는 50플러스센터, 청년센터 등 청장년층을 위한 시설도 속속 생겨납니다. 물론, 성인과 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되고, 자기 의견을 ‘성인처럼 표현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청소년들을 위한 청소년문화의집, 청소년독서실 등은 운영됩니다. 그러나 아동 전반을 아우르는 아동복지시설을 주변에서 보신 적 있으신가요? 돌봄을 기반으로 하는 어린이집, 지역아동센터, 돌봄센터 등을 제외하고, 순수한 아동 복지를 지향하는 기관·시설 말입니다. 찾기 쉽지 않을 겁니다.

예산 편성을 보면 아동 존중 사회인지 알 수 있다

2008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유아복지전문기관 ‘시소와그네’가 설립되었습니다. 영유아 시기의 적절성을 놓치지 않고, 영유아가 건강하고 균형 잡힌 성장을 이룰 수 있도록 영유아-가족-지역사회를 연결하면서 지속가능한 변화를 꾀해왔습니다. 영유아·아동 관련 활동을 기획하거나 진행해 평가할 때도, 부모의 만족도와 평가만 받지 않고, 영유아·아동의 만족 여부와 평가를 받고 있지요.

시소와그네는 2008년 1호점인 마포센터를 시작으로 전국 11개 지역까지 개소되었으나, 더 이상 확장되지 못하였습니다. 왜냐고요? 예산 확보가 이뤄지지 못해서입니다. 시소와그네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5년여간 기금 지원으로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모금회가 기금을 지원하는 동안, 지역사회가 영유아 복지를 위한 자치구 예산을 마련하여 모금회 지원 종료 후에도 자체적으로 운영하도록 설계되었지요. 그러나 지금의 결과에 이르렀습니다. 아마 각 지역사회는 영유아 복지가 중요하지 않아서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우선순위’에 들지 못했다고 하겠죠. 이는 그만큼 지역사회가, 우리 사회가 영유아 복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을 방증합니다. 영유아 복지를 중요하게 여긴다면, 지원 기관·시설이 확장되는 것도 아니고, 무려 사라지는 데 이리 조용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아동복지기관들은 지역에서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그러니 주변에서 찾기 어렵지요. 노인 관련 시설이었다면, 장애인 관련 시설이었다면, 청년/장년층 관련 시설이었다면 달랐을까요? 혹은 같은 아동복지시설이었어도 양육자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돌봄 영역의 시설이었다면 또 달랐을까요?

예수님의 ‘용납하는 마음’

어린아이들이 등장하는 성경 구절을 떠올려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축복받고자 하는 어린아이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금하지 말고, 용납하라고 말씀하셨지요. 천국은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용납하다’라는 말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남의 말이나 행동을 받아들이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아동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천 년 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성경에서 어린아이들을 위해 말씀하시고 당부하신 것을 보면, 아동을 한 인격체로 동등하게 존중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일은 결코 쉬운 길은 아니구나 싶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의지를 품고 우리 사회가 아동을 용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삶의 모든 터전과 상황에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아동의 말과 행동을 받아들이는, ‘용납하는 마음’이 아닐까요?

임명연
서울 마포에서 아동의 권리를 존중하며 복지를 실천하는 사회복지사이자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세밧사(세상을 바꾸는 사회복지사) 회원이다. 참된 영성, 훌륭한 인격, 최고의 실력을 갖추려 노력하면서, 순간순간 감사한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다.